어느 흑인 회교도들의 장례의식에 나오는 특이한 장면이 있다. 시신 입관 시 친지, 가족들이 관을 빙 둘러 서서 죽은 자를 바라본다. 눈물을 흘리는 것도 아니고 꽃을 드리거나 노래를 부르는 일도 하지 않은 채 회교 수녀가 둥글납작한 박하사탕이 담긴 작은 쟁반을 돌린다. 모두가 박하사탕 하나씩을 집는다. 신호에 따라 관 주변에 서 있는 사람들은 그 사탕을 입속에 넣는다. 천천히 사탕은 녹아간다. 사람들은 그 달콤함을 느끼면서 망자와의 지나간 날 사랑스런 경험들을 회상한다. 이 의식이 말하는 것은 생명에 끝이 있다는 것, 녹아 없어져 버리고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는 것이다(Philip Yancey, Where Is God When It Hurts? 제 14장에 나오는 이야기).
이와는 대조적으로 고대 이집트의 무덤 벽화에는 사람의 얼굴을 가진 작은 새가 시체의 머리 위를 떠도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이집트인들은 죽음의 순간에 영혼이라는 새가 육체를 떠나지만 언젠가는 다시 주검과 결합하게 된다고 믿었다. 이러한 믿음은 수천 년 동안 여러 문화에 퍼져 나갔다. 오늘날 육체와 별개의 것으로 여겨진 영체(astral body)가 육체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체험하는 유체(幽體)이탈경험(OBE·out-of-body experience) 현상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유체이탈경험이란 사람의 의식이 일시적으로 육체에서 빠져나가는 순간을 느끼는 체험이다. 고대 이집트의 무덤벽화나 현대 유체이탈경험들은 모두가 영혼 불멸론에 그 토대를 두고 있다.
I. 영혼불멸론 교리의 역사적 발전
A. 사단은 영혼불멸론의 창시자이다.
뱀은 에덴동산에서 하와에게 죽지 않는다는 거짓말을 하였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 3:4). 그의 이 거짓말에는 영혼불멸론의 씨앗이 담겨 있다.
B. 그리스 철학은 영혼불멸론의 학문적 기초를 제공하였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영혼불멸론의 근거가 성경에 나와 있을 것으로 신봉하고 있지만 이는 잘못된 상상에 불과하다. 영혼불멸론은 그리스도교 이전 그리스 철학의 소산물이다. Plato(c. 427-c. 347 BC) 철학 이후의 철학은 그의 철학의 반복에 불과하다고 할 만큼의 명성을 얻었다. 플라톤은 서구 문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상가 중 하나가 된다. 그는 대화록인 Phaidon에서 인간 영혼이 Idea의 세계로부터 현상계로 왔으며 인간 사후에는 육체 없이 순수한 형태로 존재하고 다른 육체에 환생으로 이어지다가 실재계로 돌아간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육체는 죽어도 영혼은 육체를 떠나 영원히 존재하여 미래의 삶을 갖는다는 사상을 설파하였다.
플라톤은 영혼의 초자연성을 통하여 자연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유한성을 극복케 하는 영혼불멸론 사상을 공화국(The Republic)에서도 “인간의 영혼은 불멸하며(imortal), 영속적이다(imperishable)"라고 펼치고 있다.
이러한 영혼불멸사상은 동양의 조상숭배 사상이나 윤회 전생론과 맥을 같이 한다. 그러나 그리스 철학의 영혼불멸론은 육체를 영혼의 감옥으로 보는 점에서 그 차별성이 있다. 죽음이라는 것을 유폐된 육체의 감옥에서 영혼이 해방되는 친구처럼 보았기 때문에 플라톤의 스승 소크라테스도 독배를 태연스럽게 마실 수 있었다. 유대인들이 이 그리스 사상을 전수 받아 히브리 종교사상의 일환으로 삼았던 것이다.
C. 바울은 이와 같은 그리스 철학의 영혼불멸 사상을 배척하였다. 그는 육체 감옥론 사상과는 반대되는 사상을 가르치고 있다. 즉, 그는 인간의 몸이 성령이 내주하는 성전이 되며, 몸을 거룩하게 하여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으며, 몸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하시는 보혈로 매입되었으며, 이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고전 3:16; 6:19-20). 그리고 바울은 죽음을 친구가 아닌 인간의 원수가 되며 이 죽음의 원수가 이김에 삼켜지는 때가 올 것을 확신하고 있다(고전 15:26, 54-55). 그리스도인은 마침내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는 길을 바라고 있다(고전 15:44).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쾌락주의자들처럼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고전 15:32; 사 22:13; 참고, 눅 12:19),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한다”(고전 6:13)는 모토에 따라 살지 않고, 몸은 주를 위하여 존재하고 몸 성전을 더럽히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고전 3:17-18).
D. 요한 칼뱅(John Calvin)
종교개혁자 요한 칼뱅은 육신과 구별되는 영혼불멸성을 확고하게 신봉하였다. 그는 영혼의 독자적 실체성을 주장하면서 영혼은 본질적으로 불멸하며 육체보다 우월하다고 보았다.
그는 창세기 주석에서 인간의 몸은 흙에서 지음을 받은 것으로 생기를 부여받아 생명력 있는 동작을 하며 하나님께서 이 영혼에 자신의 형상을 새겨 넣으시고 거기서 불멸성을 부여하였다고 보았다. 바로 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개념이 칼뱅의 영혼불멸론의 근거가 되는 셈이다. 그는 루터파에서 말하는 영혼의 유전론과는 달리 영혼 창조론을 주장한다. 칼뱅은 고전 15장 45절을 주석에서도 영혼은 본질적으로 불멸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칼뱅이 영혼의 불멸에 강조점을 두었지만 동시에 영혼의 피조성도 말했다. 영혼이 불멸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창조된 것이며 그 불멸성이 영혼의 영원함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영혼은 하나님 없이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직 불멸 할 수 있는 존재는 하나님뿐이시다. 우리가 영혼의 불멸을 말할 때 우리의 불멸이 하나님의 불멸과 동일시해서는 안된다. 칼뱅이 영혼 창조론을 선호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영혼창조론이라고 해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원한 존재의 일부를 인간의 영혼 속에 심어주셨다는 의미가 아니다. 인간의 영혼이 불멸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 영혼이 하나님의 권능을 떠나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이 신적 능력을 제거해 가신다면 인간의 영혼의 불멸성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인간의 영혼에 이러한 불멸성을 부여하셨는가? 이 질문에 대하여 칼뱅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들은 본질적으로 보다 가치 있고 보다 고상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불멸의 존재가 될 수 있게 독특한 특권을 주시기를 기뻐한다는 사실에 의해서만 우리들은 그렇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참다운 불멸성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에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그렇기에 칼뱅은 인간의 불순종으로 인한 영혼의 죽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 영혼의 죽음은 육체의 죽음과는 다르다. 영혼의 죽음은 하나님의 심판이며 하나님 없이 사는 것, 하나님께 버림받는 것, 자기 자신이 하는 대로 멋대로 내맡겨진 이것이 바로 영혼의 죽음이다. 신자들이 경험하는 영혼의 죽음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와 소외를 통해 모든 사람이 육체의 죽음 아래 살고 있다는 죽음의 자각이다. 이 영적인 죽음을 신자들은 그리스도와의 교통을 통해 그의 몸에 편입됨으로 성령의 능력을 받고 죄의 죽음에서 깨어나 영원한 생명을 부여받는 것이다. 칼뱅은 이같은 영혼불멸설에 관한 믿음은 철저하고 타협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 그는 영혼불멸에 대해 반대하는 어떤 주장도 거부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인간의 영혼이 본질적으로 불멸하다는 데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인간의 불멸은 의존적인 불멸이며 수여된 불멸이다. 인간 영혼의 불멸은 결코 하나님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E. 벌코프(Louis Berkhof)
칼뱅의 영혼불멸론 사상을 이어 받은 벌코프 역시 영혼불멸이 기독교의 핵심진리가 되는 것으로 주장한다. 칼뱅의 불멸 개념의 다의성을 분석하고 있다. 첫째, 절대적인 의미에 있어 불멸성은 오직 하나님께만 해당이 된다(딤전 6:15-16). 오직 하나님만이 본래적이고, 영원하며, 필연적인 속성으로서의 불멸성을 소유하고 계신다. 그가 어떤 인간에게 불멸성을 수여한 것이므로 그것은 그의 신적 의지에 종속된다. 둘째, 계속적 혹은 무궁한 생존으로서의 불멸성은 인간의 영혼을 포함하는 모든 영들에게 돌려지고 있다. 자연 철학이나 자연 종교는 “육체가 해체될 때 영혼은 그 해체에 참여하지 않고 개별적 실체로서의 그 동일성을 보존한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벌코프에게 있어 영혼불멸에 대한 점에서는 자연 종교나 기독교가 동일하지만 그 존재양삭에 있어 성경은 순전히 양적이며 무색적인 불멸, 즉 영혼의 계속적 존재를 추구하는 자연 종교와는 그 뿌리를 달리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불멸은 단지 끝없는 존재의 유지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질적이며 관계론적인 불멸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셋째, 불멸이란 부패와 죽음의 씨를 전혀 지니지 않은 사람의 상태를 나타낸다. 인간은 이런 의미의 불멸성을 지니지 않았다. 인간은 불멸적인 성격을 가지기는 했어도 완전한 의미에서 불멸은 인간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면 타락 이전의 아담도 여전히 죽음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불멸은 현존재에 있어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불멸이다. 오직 이런 상태의 불멸은 구속의 완성이 있는 종말에 완성될 수 있다.
벌콮은 성경에서 블멸을 사람의 속성이라고 단언하거나 아니면 영혼의 불멸에 관한 명백한 언급이 나오지 않는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런 구체적인 불멸의 제시 구절이 없다고 해서 성경이 영혼의 불멸을 반대하고 있다는 주장에는 찬동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은 여러 구절들을 통해 사후의 인간의 의식 존재를 계속한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으며 특히 하나님의 불멸성에 관한 진리를 통해 그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 영혼의 불멸을 추론하고 있다. 그 구체적인 실례들로 죽은 자에 대한 스올의 교리, 혼을 불러온다는 초혼자들에 대한 경고, 그리고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한 교훈 등을 들고 있다.
F. 기타 학자들
영혼 불멸을 성경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학자들에는 Charles Hodge, Archibald Alexsander, William Shedd 등이 있다. 핫지는 Outline of Theology에서 영혼불멸의 교리를 옹호하고 있다. 쉐드 역시 Dogmatic Theology에서 “영혼불멸과 죽음 후에 영혼이 육체에서 분리된다고 믿는 것은 신약과 아울러 구약의 핵심 사상 중의 특성이라 할 수 있다”고 한다.
반면에 영혼불멸이 명백한 기독교의 교리라는 것을 반대하는 학자들은 헤르만 바빙크와 벌카우어 그리고 안토니 후크마 등이 있다.
헤르만 바빙크는 영혼불멸의 교리를 계시보다는 이성에 의해 논증되어질 성질의 것으로 보았다. 그는 “성경은 영혼불멸에 대해 많이 말하고 있지 않는다. 성경은 이 개념을 신의 계시로서 선언하고 있지 않으며 또한 성경 어디에도 이 교리는 전면에 부각되어 있지 않다” 라고 말하고 있다. 벌카우어 역시 영혼불멸이 성경적인 교리라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성경은 불멸에 광해 독립적인 관심을 전혀 보이고 있지 않다.----살아계신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관계를 떠나서 우리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그런류의 불멸성에 관해 성경은 별로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라고 말하고 있다.
후크마는 영혼불멸의 개념이 고대 헬라의 신비종교들 가운데 발전되었으며 플라톤의 저서들을 통해 철학의 옷을 입었다고 보았다. 그는 성경에서는 어디에서도 영혼불멸이라는 표현이 사용된 적이 없음을 주장한다. 그는 athanasia와 aphtharsia의 용법의 고찰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첫째, 성경은 영혼불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불멸이란 단어는 하나님에 대해, 부활시의 인간의 완전한 존재에 대해 사용하지 결코 인간의 영혼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둘째, 성경은 영혼의 본래적 불파괴성은 철학적인 견해로 성경은 영혼이 본래적으로 파괴될 수 없는 본체이기 때문에 영혼의 계속적 존재를 가르치고 있지 않다. 셋째, 성경은 죽음 후에 단순히 계속되는 존재가 바람직한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으며 오히려 하나님과의 교제의 삶이 인간에게 있어서 최대의 선이라고 가르친다. 마지막으로 인간의 미래에 대해 선포하는 중심적인 메시지는 육체의 부활이라는 것이다.
G.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인간 사후상태
모든 사람의 육신은 다 같이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 썩게 된다. 그 때에 모든 사람의 영혼은 중간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의인과 악인의 중간상태는 다르다. 성도들이 죽으면 몸은 땅으로 가고, 영혼은 즉시로 죄 없이 완전케 되어 천국으로 가서 하나님과 직접 함께 거하는 즐거움에 참여한다.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죽은 의인들은 전과 같은 몸으로 부활할 것이다. 이 부활체는 질적으로는 전과 다를 것이나, 영혼은 이 육체와 하나가 되어 영원토록 계속될 것이다. 이것은 결국, 천당으로 갔던 영혼들이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이 땅으로 내려와 부활한 육체와 결합되어 다시 하늘로 간다는 뜻이다.
반면에 악인들은 그 몸과 영혼이 이 세상에서 죽어 있는 상태에서 소망 없이 지낸다. 세상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일반적인 축복들을 얼마동안 누릴 수 있다. 그러다가 육신이 사망하면 모든 소망이 끊어져 버리고 영혼은 지옥으로 내려간다. 불의한 자들의 육체는 그리스도의 힘으로 굴욕 당하기 위하여 부활한다. 그렇다면 이 때도 역시 지옥에서 불타던 영혼들이 육체로 와서 결합되어야 한다.
H. 사단의 종말론적인 마법 교리
“사단은 두 큰 오류, 영혼 불멸설과 일요일 신성설을 통하여 사람들을 그의 기만 아래 들어오게 할 것이다. 영혼 불멸설은 강신술의 기초가 되고, 일요일 신성설은 로마교회에 대한 동조 결착을 창출한다. 미국의 개신교도들은 솔선하여 강신술과 손을 잡기 위하여 심연(深淵)을 넘어 그들의 손을 내밀고, 또 그들은 큰 구렁텅이를 넘어서 로마교회의 세력과 악수하기 위하여 손을 뻗칠 것이다. 그와 같은 삼중 연합의 세력 아래 이 나라는 양심의 권리를 유린하는 일에 로마의 발차취를 따르게 될 것이다”(GC 588).
Ⅱ. Oscar Cullmann의 영혼 불멸론 비판
영혼 불멸론 교리는 1950년대 이후 계속하여 주요한 신학적 이슈로 부각되어 왔다. 그러나 이에 대한 비판도 수반되어 나타났다. 특히 1950년대에 Oscar Cullmann의 영혼불멸인가 죽은 자의 부활인가? 는 이런 논의들을 가열화 시키는 촉매가 되었다.
프랑스 칼뱅주의 신학자 Oscar Cullmann 당대 유럽의 주요 두 대학교, 즉 스위스 바젤대학교 및 프랑스파리대학교(Sorbonne)에서 신학부장으로 동시에 가르치는 학자였다. 무신론자 Ingersoll이 하버드대학교에서 1954-55년에 걸쳐 영혼불멸론 문제를 비평적으로 다루는 강좌를 하고 있었던 때, 동 대학교는 오스카 쿨만을 청빙하여 영혼불멸문제 에 관한 특별강의를 하도록 위촉하였다.
1955년 4월 26일에 쿨만은 Andover Chapel에서 “영혼불멸인가 몸의 부활인가? 신약성경의 증거(Immortality of Soul, or Resurrection of the Body? The Witness of the New Testament)"의 제목으로 강의하였다. 동 강좌의 세 가지 요점은 다음과 같다.
① 사도 바울은 몸의 부활을 가르쳤다(고전 15장)
② 플라톤은 영혼의 자연적 불멸을 가르쳤다.
③ 위 두 이론은 상반되는 것으로 그 조화가 불가능하다. 어느 하나를 수용하면 다른 하나 를 배척하여야 한다.
쿨만은 강좌의 결론에서 바울이 아테네에서 전한 몸의 부활(행 17;18)과 아레오바고에서의 철학자들과의 변론 과정을 소개하였다. 바울이 몸의 부활을 전할 때 까지는 비웃거나 기롱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바울이 몸의 부활 신학을 전할 때 아테네 철학자들은 몸의 부활과 영혼불멸은 상호간 조화되지 않는다고 보아 더 이상 바울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바울의 아테네 설교는 미완성 교향곡처럼 끝나고 말았던 것이다.
1958년 영국 런던에서 감리교 출판사 Epworth Press는 쿨만의 강의 내용을 Immortality of the Soul or Resurrection of the Dead? 책자로 출판하였다(60 쪽). 1965년에 미국에서도 출판되었다. 책이 출판된 3년 후에 그의 강의 내용이 신학계의 화두로 등장하였다. 쿨만의 몸의 부활 문제에 대하여서는 수강자들과 독자들의 일반적인 환호를 받았다. 쿨만의 책 서문은 당대의 비평적 반응 양상을 소개하고 있다. 학문의 세계에서 반대 논리가 예의를 갖춘 비평의 형태를 취하는 통상적인 관행과는 달리, 동시에 영혼불멸론자들은 쿨만을 통렬한 적대적 비평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반대자들은 아무도 신약성경으로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고, 철학적, 심리적, 감정적 적개심의 표출로 대응하여, 쿨만의 몸의 부활론을 생선을 달라하는 아이에게 뱀을 주는 행태 내지 독액을 품는 짓으로 몰아세운 것이다. 이는 남은교회가 몸의 부활을 주장하는 일 등 하나님 말씀의 진리를 선포하여 갈 때 가까운 미래에 당할 하나의 전조 현상 같은 것으로 보인다. 영혼불멸론 배척은 영적 바벨론의 연합 세력이 미래 하나님 백성을 배척할 여건이 될 것이다(GC 444-445, 588).
쿨만은 책 서두에서 죽음을 무서워하신 그리스도의 모습과 죽음을 담대히 받아들였던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대조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 그는 원시 기독교의 중심적인 사상을 그리스 사상과 구별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전자는 인간을 정신-신체의 통전적 단일체로 보아 사후의 삶이란 인간 전체의 부활로 말미암는다고 믿었고, 후자는 인간의 영혼이 본질적으로 불멸이고 사후에도 계속 존재한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에게 있어서 죽음은 감옥에 갇혀 사는 영혼의 해방의 순간이며 그의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게 하는 순간이기에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이 하나님의 대적이며 그렇게 죽는다고 하는 것은 전적인 버림을 의미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다. 예수는 죽음의 손아귀에 들어간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대적의 손아귀에 있는 것이며 죽음은 우리를 참 삶이며 모든 삶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떼어놓는 것을 알았기에 그렇게 죽음을 두려워하셨다는 것이다.
쿨만은 영혼불멸 사상이 성서적일 수 없는 것은 영혼불멸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약화시키고 그 가치를 떨어뜨린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예수는 실제로 죽으심으로, 무의 영역에 곧 하나님의 버리심을 맛봄으로 죽음을 정복할 수 있었다” 만약 영혼불멸의 사상이 강조된다면 예수의 죽음은 완전한 죽음의 단계로 올라갈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는 단순히 죽지 않는 영혼으로 사심으로, 곧 본질적으로 죽지 않음으로 이 승리를 얻으신 것이 아니라 완전히 죽으셨다가 다시 사심으로 완전한 승리를 얻으셨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영혼불멸론은 신약성경상의 부활 신앙과 정면으로 맞선다. 쿨만은 그리스의 영혼불멸사상과 유대-기독교적인 창조과 인간 구조에 상반되는 것으로 보았다. 하나님은 영의 창조주이신 동시에 역시 몸의 창조주이다. 몸은 영혼의 감옥이 아니라 성전, 곧 성령의 전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영혼불멸론은 기독교 복음이 그리스 세계에 뿌리내리면서 성장하는 가운데 그리스 사상에 빨려 들어가 만들어진 교리라고 주장한다.
쿨만의 이같은 견해는 현대에 들어 매우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많은 학자들과 작가들이 불멸보다는 부활이 사후의 삶의 본질에 대한 더 적절한 기독교적 표현이라고 받아들인다. 그러사케 그리고 후크마 등 역시 쿨만의 시각을 따르고 있다. 특히 후크마는 영혼의 불멸은 죄의 심각성과 하나님의 심판의 심각성을 애매하게 만드는 것으로 보았다. 죽음의 참된 극복은 영혼의 죽음을 부인하며 그 불멸성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죽음을 뛰어 넘어 우리에게 부여되는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쿨만이나 그라사케나 후크마처럼 육체의 부활을 강조하는 학자들도 역시 인간 영혼의 불멸을 말하는 경우는 인간의 영혼이 지금 이렇게 오염되어지고 타락한 모습 그대로 불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범죄로 인해 죽음을 경험하고 난 후 하나님의 다시 살리시는 은혜를 받아 영원히 불멸하는 것이다.
Ⅲ. 영혼 불멸 논의들
A. 1970년대
1. Dianne Kennedy-Pike 사건 관련 책 (1970-1971)
1970년 2월 감독교회 감독 James Pike는 예수에 관한 책 출판을 위하여 이스라엘 광야에서 고고학적 발굴을 하다가 행방불명이 된 일이 있었다. 이스라엘 군 부대는 그 부인의 요청으로 광야 수색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Mrs. Pike는 예루살렘 호텔 방에서 남편이 어느 동굴 입구에 죽어 있는 모습이 환상 중에 나타났고, 남편이 죽는 순간 그의 영이 하늘로 올라가 다른 종교지도자들과 신학자들의 영들로부터 환호 받는 모습을 보았다. 수일 후 이스라엘 군은 그의 남편의 시신을 동굴 입구에서 찾았다. 그 부인의 환상과 일치되는 놀라운 이 사건 전모가 1970년 11월호 여성 잡지 Ladies Home Journal에 소개 되어 사후 영의 세계의 존재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 사건은 1971년 1월 Search라는 문고판 책의 형태로 출판되어 널리 읽혀졌다.
2. 뉴스위크(The Newsweek)지의 폭발적 인기 기사
Kenneth L. Woodward는 뉴스위크지의 이 부활절 특집판에서 당대 저명한 세 신학자들의 영혼불멸교리 배척 이론을 소개하였다. 즉, 하바드대학교 신학대학원 원장 Krister Stendahl의 신구약 성경이 영혼불멸교리에 무관하다는 견해, 남감리교대학교 신학자 Albert Outler의 영원한 영혼 사상은 성경의 몸과 영혼이 무로부터 창조되었다는 사상과 모순 된다는 입장, 및 오스카 쿨만의 사상을 소개한 것이다.
Woodward는 두 가지 갤럽 조사 결과를 수록 보고하였다. 즉, 1968년 미국인 73%가 어떤 형태의 사후 생명을 신봉하고 있으며, 1971년에는 사후 영혼의 존재를 로마가톨릭 신부들 98%가, 개신교 목사 86%가, 유대인 랍비 68%가 신봉하고 있다는 것이다.
뉴스위크지의 기사에 대한 반응 현상이 이어졌다. 트리니티복음주의 신학대학원 John Warwick Montgomery는 Stendahl을 공격하였으며, 재림교회의 Herbert Douglass는 영혼 불멸론을 비평하였다.
3. 뉴욕 영화 제작자의 증언 (1974)
1974년 Reader's Digest 지는 당시 Solo Production 회사를 운영하고 있던 Victor D. Solow (당시 56세)의 개인적인 증언 “나는 오전 10시 52분에 죽었노라(I Died at 10:52 A.M.)"(pp. 178-182)을 수록하였다. Solow는 1974년 3월 23일 아내와 함께 차 운전 중 심장이 멎었다. 경찰관이 즉시 심폐소생술과 가슴 맛사지를 시행하고 응급차로 뉴욕주 Port Chester 병원으로 이송, 검사하여 보니 생명의 징후가 없었다. 그는 응급실에서 전기 충격을 두 차례 받아 심장이 멎은지 23분 만에 심장 박동이 불규칙적으로 뛰다가 소생한 사람이 되었다.
이 사건에 대한 개인적 증언에서 Solow는 자기의 몸을 떠난 영혼의 체험, 즉 고통도, 기쁨도 없는 모든 것이 달라진 세계를 시공을 넘어 고속으로 진입하여 들어갔다가 나온 경험을 자세하게 묘사하였다.
4. 과학도들 세계의 심령학 열풍
Elisabeth Kubler-Ross 의사(1926년 생)는 Zurich대학교 의힉박사 학위 취득(31세) 후 도미하여 16년간 임사 체험에 관한 On death and Dying, Questions Answers on Death and Dying 등 8권의 책을 1988년까지 저술하였다. 명예학위도 많이 받았다. 그의 책 내용들이 여러 신문 잡지들에 광범하게 소개되어 사후 세계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켰다.
철학자 겸 의학박사 Raymond A. Moody는1975년 Life After Life를 저술 출판하여 대중의 관심을 끌었다. Reader's Digest 1977년 1월호는 그의 책을 축약하여 출판하였다. 그는 동 서의 속편으로 Reflections on Life After Life(Bantam, 1977)을 저술 출판하였다. 무디는 임사체험의 주된 구성요소로서 다음 11가지 요소를 들고 있다.
(1)체험 내용의 표현 불가능성 (2)사망의 선고를 청취 (3)마음의 평안과 정적 (4)이상한 소음 (5)어두운 터널 (6)체외이탈 (7)다른 사람과 만남 (8)빛을 봄 (9)인생회고 (10)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이름 (11)생환
5. 대중잡지의 사후 세계 글 게재 열풍
Kenneth L. Woodward는 Newsweek지에“Life After Life" (July 12, 1977)를, McCalls지에 ”There Is Life After Death" (Aug., 1977)를 기고하여 파장을 일으켰다.
위와 같은 임사 체험 및 사후 영혼의 세계에 관한 증언이나 기타 글들에 대한 비평도 나타났다. 정신분석학자 C. Markham Berry 의학박사는 Kubler-Ross 이론을 반박하였으며 Leo Van Dolson은 What About Life After Life?(RH, 1976)에서 재림교회의 성서적 입장을 천명하였다.
B. 1980년대 임사체험 논의들
UCLA 심리학 연구교수 Ronald K. Siegel은 임사체험을 논박하였다(“Accounting for 'Afterlife' Experiences," Psychology Today, Jan., 1981, pp. 65-75)
경제 잡지 U.S .News & World Report 지는 격에 맞지 않는 종교문제를 다루는 기사를 게재하였다. "A New Understanding About Death," July 11, 1983, pp. 62-65에서 죽음의 문제, 임사 문제가 전국적 관심사로 부각된 점을 지적하고, 대학교에서 ‘죽음학(Thanatology)’ 강좌가 개설되리만큼 확산되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1984년 복음주의자 Mary Stewart Relfe는 남미 정글 속에서 50년간 선교사로 일한 의사Percy Collett(82세) 과의 인터뷰 기사를 출판하였다. 동 기사 제목은“I Walked in Heaven 5 1/2 Days" 으로 성경 진리에 어긋난 내용은 축약되어 재판되는 등 세인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1982년 갤럽조사에 따르면 미국의 성인 800만명, 즉 20명에 한명 꼴로 적어도 한번의 임사체험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많은 사람이 비웃음을 살까 두려워 할 필요없이 임사체험을 털어놓음에 따라 사후의 삶에 대한 증거가 보강되는 듯했지만, 당시 과학자들은 죽어가는 사람의 뇌에 산소가 결핍되어 발생하는 환각일 따름이라고 일소에 부쳤다.
C. 1990년대 논의들
이 기간 동안 사후 세계와 임사 체험은 각종 잡지 및 방송망의 단골 메뉴로 확산되어갔다. 이 기간 동안에 천사론이 부각되기도 하였다.
Ⅳ. 영혼수면설/조건적 멸절론
영혼의 불멸론 논거에는 인간 구조에 관한 영과 육의 이원론적 시각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래서 인간의 영혼은 위로 하나님에서부터 온 것으로 보지만 인간의 몸은 땅에서 온 것으로 폐기되어도 좋을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을 띄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이 몸도 하나님께서 직접 창조하신 것이며 이 영혼과 같이 육체도 성령이 거하시는 전임을 강조하고 있다. 성경에 의하면 육체도 영혼만큼이나 중요하다. 하나님은 인간을 영혼과 육체가 합성된 통일된 존재로 창조하셨지 영혼을 보다 우월한 것으로 창조하시지는 않으셨다. 만약 우리의 육체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육체가 부활할 필요도 없다. 성경에는 몸의 부활 소망을 기대하고 있는 본문들이 줄기차게 이어지고 있다.
죽음이후 중간기 상태에 인간은 어떤 상태에 처하여 있게 되느냐를 두고 영혼 수면설과 멸절설, 조건적 영생설, 제2 기회설, 연옥설이 등장하여 왔다. 그 중에도 특히 영혼수면설/조건부 멸절설을 보도록 한다.
영혼수멸설이란 육신이 죽은 후에 영혼이 계속 존재하기는 하지만 혼수상태, 무의식적인 잠자는 상태에 있다는 설이다. 이 영혼 수면설은 초대교회 이래로 여러 세기를 걸쳐 내려 왔는데 특히 중세기에 걸쳐 재침례파가 이를 추종하였다.
죽음은 잠자는 것이다. 죽음은 완전한 절멸(絶滅)이 아니고, 그 사람이 부활을 기다리는 동안의 일시적인 무의식 상태에 불과하다. 성경은 이 상태를 거듭거듭 잠이라는 은유로 묘사한다.
구약 성경은, 다윗과 솔로몬과 이스라엘과 유다의 다른 왕들의 죽음에 관하여 말하면서 그들이 조상들과 함께 자는 것으로 묘사한다(왕상 2:10, 11:43, 14:20, 31, 15:8; 대하 21:1, 26:23). 욥은, 다윗(시 13:3)과 예레미야(렘 51:39, 57)와 다니엘(단 12:2)과 똑같이 죽음을 잠이라고 불렀다(욥 14:17-12).
신약 성경도 동일한 비유적 표현을 사용한다. 죽은 야이로의 딸의 상태를 묘사하면서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잔다고 말씀하셨다(마 9:24; 막 5:39). 그분은 죽은 나사로도 같은 표현으로 말씀하셨다(요 11:11-14). 마태는, 그리스도의 부활 후에 "자던 성도들의 몸이 많이 일어"(마 27:52)났다고 기록했고, 스데반의 순교를 기록하면서 누가는, 그가 "자니라"(행 7:60)고 했다. 바울과 베드로 역시 죽음을 잠이라고 불렀다(고전 15:51, 52; 살전 4:13-17; 벧후 3:4).
죽음을 잠이라고 한 성경의 표현은 다음의 증거들과 비교해 볼 때, 그 상태와 분명히 일치된다. 1. 죽은 자는 의식이 없다.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며"(전 9:5). 2. 잘 때는 의식적 사고(意識的思考)가 중단된다. "그 호흡이 끊어지면...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시 146:4). 3. 잠은 일상의 모든 활동을 그치게 한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전 9:10). 4. 잠자는 자들은 깨어 있는 자들과, 그들의 활동에서 완전히 분리된다.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에 저희가 다시는 영영히 분복이 없느니라"(전 9:6). 5. 정상적인 잠은 정서적 활동을 그치게 한다. "그 사랑함과 미워함과 시기함이 없어진지 오래니"(전 9:6). 6. 잘 때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는다. "죽은 자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니"(시 115:17). 7. 잠은 깨어날 것을 전제로 한다.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나오리라"(요 5:28, 29).*
불멸성은 하나님만의 속성이다.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ἀθανασἰα)이 있고....”(딤전 6:15,16). 이 불멸성 곧 아다나시아(ἀθανασἰα = ἀ+θάνατος)는 재림시에 회복하게 된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ἄφθαρτοι)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ἀφθαρςία)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ἀθανασἰα)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ἀφθαρςία)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ἀθανασἰα)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고전 15:51-54 ). 또한 우리는 재림 시에 썩지 아니함을 입는다.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ἀφθαρςία = ἀ+φθειρω)”(딤전 1:17). 성경은 육체와 영혼을 하나로 보기 때문에 육체가 없이 영혼 혼자만의 실존을 말하지 않는다. 따라 인간의 영혼이 죽는 그 순간 인간의 영혼도 그와 비슷한 상태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죽음은 참으로 수면 상태와 동일하다는 것이다. 이 잠은 깊고 무의식적이며 부활 때까지 계속된다. 이 시간동안 인간의 육체뿐 아니라 영혼까지 영혼 상태에 동참하며 주님의 재림 시에 깨어난다. 성경 어디에도 인간의 육체만 잠자고 영혼은 깨어 있다는 암시가 없다.
영혼수면설의 성경적 증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성경은 종종 죽음을 잠이라고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성경의 어떤 구절들은 죽은 자가 무의식적이어서 아무 것도 모른다는 점이다. 셋째, 만약 영혼이 사후 즉시 천국과 지옥에 들어간다면 마지막 심판의 의미가 감소될 것이며 성경은 분명 인가의 운명이 마지막 심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넷째, 의식은 감각에 의존하므로 감각 없는 죽음의 상태는 무의식적 수면 상태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성경의 어디에도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사람이 천국에서 보거나 들었다고 말한 곳이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의식이 없거나 아니면 잠자는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그러나 유일한 불멸의 존재이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구속받은 자들에게 영생을 주실 것이다. 그 날이 되기까지는 죽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무의식 상태가 된다. 우리의 생명되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부활한 의인들과 살아 있는 의인들은 영광스럽게 변화되어 공중으로 끌어올려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둘째 부활, 즉 불의한 자들의 부활은 1,000년 후에 있게 될 것이다.
성경은 영원하신 하나님이 불멸이라고 알려준다(딤전 1:17). 사실상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딤전 6:16)다. 그분은 창조 받지 않으시고, 스스로 계시고,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시다(본서 2장 참조).
"성경은 어느 곳에도 사람이-혹은 그의 "영혼"(soul, 네페쉬)이나 "영"(spirit, 루아흐)이-천성적으로 불멸의 특성이나 상태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영혼'(네페쉬)과 '영'(루아흐)이라는 말이... 성경에 1,600회 이상 사용되고 있지만, "불사" 혹은 "불멸"이라는 낱말과는 결코 관련되어 있지 않다"(본서 7장 참조).*
하나님과 인간은 분명하게 구별된다.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인간은 유한하다. 하나님은 불멸하시고 인간은 죽는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인간은 무상하다. 인간의 불멸성은 조건적이다. 창조할 때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 2:7). 이 창조 기사는 인간이 하나님께로부터 생명을 받았다고 말한다(행 17:25, 28; 골 1:16, 17 참조). 따라서 불멸은 인간이 타고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을 때, 그들에게 자유 의지, 곧 선택의 능력을 주셨다. 그들은 순종할 수도 불순종할 수도 있었고, 그들의 계속적인 존재는 하나님의 능력을 통한 계속적인 순종에 의존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불멸성의 선물을 소유하는 것은 조건적이었다.
하나님은, 그들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이 선물이 박탈될 것이라는 조건을 자세하게 설명하셨다. 하나님은,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고 그들에게 경고하셨다.*
사단은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 3:4)고 첫 조상을 기만하였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후에 그들은 죄의 삯이 정말로 사망(롬 6:23)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의 죄는, 너희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너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는 선고를 받게 했다. 이 말은 생명의 계속을 가리키지 않고 생명의 단절을 가리킨다.
이 선고를 하신 후 하나님은 범죄한 부부가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차단시켜 "생명나무 실과(를) 따먹고 영생하"(창 3:22)지 못하게 하셨다. 그분의 행동은, 순종을 조건으로 약속된 불멸성이 죄악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바 된 사실을 분명히 밝혔다. 그들은 이제 죽을 수 밖에 없이 되었고, 죽음에 굴복하였다. 아담은 그가 더 이상 소유하지 못한 것을 물려줄 수 없었고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롬 5:12)다.
오직 하나님의 자비가 아담과 하와에게 즉각적인 죽음을 면하게 해주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당신의 생명을 내어주심으로 그들은 다른 기회, 곧 두 번째의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의 아들은, "창세 때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양"(계 13:8, 영어 성경 참조)이셨다.
인간의 소망. 비록 사람들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태로 태어났을지라도 성경은 불멸성을 찾도록 그들에게 격려한다(롬 2:7 참조). 예수 그리스도는 이 불멸성의 근원이시다.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요일 5:11 참조). 그분은,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딤후 1:10).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음성이 무덤을 열고 죽은 자를 부활시키실 것이라고 친히 말씀하셨다(요 5:28, 29).
그리스도께서 오시지 않으셨으면 인간의 상태는 절망적이었을 것이며 죽은 모든 사람은 영원히 멸망될 것이다. 그러나 그분으로 말미암아, 아무도 멸망할 필요가 없다. 요한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고 말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죄의 형벌을 도말해 줄뿐만 아니라 믿는 자들에게 무한한 불멸의 선물을 보증해 준다.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딤후 1:10) 드러내셨다. 바울은, 성경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딤후 3:15)한다고 우리에게 보증한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은 불멸성을 받지 못할 것이다.
바울은 불멸성의 선물이 주어지는 순간을 이렇게 묘사한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고전 15:51-54). 이 말씀은, 하나님이 신자에게 죽을 때에 불멸을 주시지 않으시고 부활 때, 곧 "마지막 나팔"이 울릴 때에 주신다는 것을 분명히 알려준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일 때에 영생의 선물을 받는 것으로 요한이 지적하고 있는 반면(요일 5:11-13), 이 선물의 실제적 실현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이루어질 것이다. 오직 그 때에 가서야 우리는 죽음의 상태에서 불멸의 상태로, 썩을 몸에서 썩지 않을 몸으로 변화하게 될 것이다.
사람이 흙으로 돌아감. 죽을 때에 사람에게 어떤 일이 생기는지 이해하려면 사람의 본질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알아야 한다. 성경은 사람이 하나의 유기체(有機體)라고 한다. 때로는 성경이 전인적(全人的)인 사람을 나타내기 위하여 "영혼"(네페쉬)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애정과 정서를 나타내기 위하여 그 말을 쓰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이 분리된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몸과 영혼(네페쉬)은 오직 함께 존재한다. 그것들은 하나와 보이지 않는 연합을 이룬다.
인간을 창조할 때, 흙(땅의 요소)과 생기와의 연합이 산 사람, 혹은 영혼(네페쉬)을 만들었다. 아담은 하나의 분리된 단위로서의 영혼(네페쉬)을 받지 않고 생령이 되었다(창 2:7; 본서 7장 참조). 그리고 죽을 때에는 반대 현상이 생긴다. 곧 땅의 흙으로 이루어진 사람에게서 생기가 제거되면, 의식이 전혀 없는 죽은 사람 혹은 죽은 영혼(네페쉬)이 된다(시 146:4). 몸을 이루었던 요소는 본래 그대로 흙으로 돌아간다(창 3:19). 영혼(네페쉬)은 육체를 떠나서 의식적 존재로 남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죽을 때 영혼(네페쉬)이 하나의 의식적 존재로 생존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진실로 "범죄하는 그 영혼(네페쉬)은 죽"(겔 18:20)는다.
신(영, spirit)은 하나님께로 돌아감. 몸은 혼으로 돌아가지만, 신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솔로몬은 죽을 때에,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전 12:7)간다고 말했다. 이것은 의인과 악인을 막론하고 모두가 똑같다.
많은 사람들은 이 성경절이 죽은 후에도 사람의 본질은 계속 살아 있다는 증거를 제공해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성경은, 신(영)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루아흐(ruach)와 헬라어 프뉴마(pneuma) 그 어느 것도 육체를 떠나서 의식적 존재가 될 수 있는 하나의 지성적 실체라고 언급하지 않는다. 대신에 이 용어들은 "호흡", 곧 개인의 생존에 필수적인 생명의 기운, 동물들과 인간을 갈리는 생명의 소인(素因)을 의미한다(본서 7장 참조).
솔로몬은 이렇게 기록했다.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이 둘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난외주에는 '영', 루아흐)이 있어서 이의 죽음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다 혼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곳으로 가거니와 인생의 혼(루아흐)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루아흐)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전 3:19-21). 그러므로 솔로몬에 의하면, 사람의 혼(루아흐)과 짐승의 혼(루아흐)과는 구분이 없다. 성경에는"spirit"(루아흐)과 "soul"(네페쉬)이 일관성 있게 번역되어 있지 않다. 일반적으로 "spirit"은 "영"으로, "soul"은 "혼"으로 번역된다. 성경에는 "soul"이 "영혼"으로 많이 번역되었고 "spirit"은 때때로 "혼"으로도 번역되었다. 독자들의 편의를 위하여 필요시에는 번역된 용어 옆에 원어를 표기해 놓았다.
혼(루아흐)이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솔로몬의 말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나누어주신 생명의 소인을 가리킨다. 혼(루아흐) 혹은 호흡이 육체를 떠난 하나의 의식적 실체라는 뜻은 없다. 이 루아흐는, 하나님이 생명 없는 육체를 살리기 위하여 최초의 인간에게 불어넣으신 "생기"와 같다고 할 수 있다(창 2:7 참조).
영혼 멸절은 악인은 죽은 후에 어떤 존재를 가지지 못하며 설령 가진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의식하지 못함으로 실질적인 비존재의 상태로 있게 된다는 것이다. 조건적 멸절설은 인간이 순종하는 조건 아래 불사(不死)하지만, 죄를 짓는 자들에게는 불사가 취소되어 나중에는 멸절되어 버린다는 교리이다. 최후의 심판 때 이후에는 멸절되게 마련이다. 불멸성은 영혼의 원래 상태가 아니며 단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이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는 영혼불멸성이 주어지고 그렇지 못한 악인들에게는 궁극적으로 존재를 잃어버리게 되거나 의식을 상실한다. 이 멸절이론의 역사적인 유래를 살펴보면 아르미너스, 초기 소시너스파가 가르쳤으며 철학자 록크와 홉스가 지지했다. 그러나 이 개념은 초기에 그렇게 큰 찬동을 얻지는 못했다. 따라서 이 교리는 조건적 불멸성으로 수정보완 되었고 영국의 화이트, 허드콘스테블과 로우, 독일에서 로테, 프랑스에서 사바티어, 스위스에서 페타벨, 세크레탄, 미국에서 허드슨, 헌팅톤, 베이커 등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이 영혼불멸이 본래적인 실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특별한 행동 때문에 불멸적이 된다는 근본 입장에는 동의하지만 그 설명 형태는 각각의 사람마다 다르게 전개되어 왔다. 이런 것들로 보아 이 주장은 영원한 형벌 교리의 문제성을 해결 또는 극복한다는 의도도 깔려 있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영원한 지옥의 형벌은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과 맞지 않는 것으로 생각되었기에 이들은 영혼의 멸절을 주장하므로 하나님의 공의를 드러내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려 했던 것이다. 이 멸절론은 첫째, 성경은 하나님만이 고유적으로 불멸적이라고 가르치고 있다는 점(딤전6:16). 둘째, 성경은 영혼의 일반적 불멸성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수여되는 하나님의 선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 셋째, 죄인들에게 경고할 때 사망과 멸망이라는 단어들을 사용해 그들의 비존재를 명시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자기의 창조물을 영원한 형벌에 던지시는 것은 그의 사랑의 성품에 어긋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성품에 위배된다는 논증은 어떻게 보면 4가지 논증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갖게 하는 논증이다. 이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지옥의 영원한 형벌 장소를 인정하시는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역에 하나님의 패배를 나타내는 하나의 기념물이 되는 것이며 그의 영광을 영원히 손상시키는 불필요한 존재라는 것이다. “꺼지지 않는 불(사66:24;마3:12;눈3:17) ”죽지 않는 벌레(사66:24;막9:44,46,48)“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9요3:38)“의 구절들은 영원 형벌 교리의 근거로 볼 수 없는 한정성을 지닌 표현들이다. 더욱이 둘째부활 즉 사망의 부활 교리에 의하면 악인들의 부활은 영원한 멸망으로 끝나게 되어 있다.
II. 몸-영혼의 신약성서적 개념
신약 성경에 나타난 영혼의 문제에 대하여 여러 가지 주장들이 논란이 되고 있다. 영혼 불멸 문제에 관하여는 구약 성경을 참고하면서 신약 성경 중심, 특별히 복음서, 요한의 글, 및바울 서신에 나타난 본문을 중심으로 해서 연구하도록 한다.
플라톤은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논의되고 있는 영혼과 육체 이원론 및 영혼불멸론 교리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M.J. Harris, "Immortality," New Dictionary of Theology, 1988, 333). 그러나 히브리적 인간관에는 이 영혼불멸론 교리를 찾아 볼 수 없다. basar(육체)는 연약성과 덧없음이라는 한계성을 지닌 어휘이다[래드(George. E. Ladd), 신약신학(A Theology of New Testament), 이창우 역(서울:성광문화사, 1983), 641]. nephesh(영혼, soul)는 육체보다 우월한 고차원적인 인간의 어느 한 부분이 아니라 인간 생명, 살아 있는 존재, 생명의 원칙을 가리키고 있다. 창세기 2:7에 나오는 nephesh hayyah(생령, living soul)는 생명을 지닌 모든 살아 있는 동물을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창 1:21, 28, 30). ruach(영, spirit)는 바람, 움직이는 공기, 생기를 뜻한다. 하나님은 최고의 영이시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루아흐(생기)를 받아 존재한 것이다. 래드는 네페쉬와 루아흐가 전적으로 다른 관점에서 살펴 본 인간을 가리키고 있기에 바사르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을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고 못박는 것(신약신학, 641)은 성서적 고찰이다.
1. 공관복음서의 영혼 개념
우리는 먼저 예수께서 친히 하신 말씀에 나타난 영혼의 개념은 무엇인가? 우리는 주님께서 당시 희랍의 영혼불멸 사상을 그대로 수용하였는지 여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우리 주님께서는 아람어로 가르치셨다. 물론 그가 비교적 개방적이고 자유스러운 갈릴리 지역에서 사셨기 때문에 헬라어를 사용하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약 성경이 헬라어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그 단어의 표현들이 당시 헬라의 사상을 담고 있다고 보는 것은 성급한 판단이다. 우리는 신약성경이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지만 그 의미를 히브리적 배경 속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이러한 전제를 중심으로 하여 영혼에 관한 고찰을 하여야 한다. 히브리적 사상에 따르면 영혼이라고 하는 말은 일반적으로 인격적 대명사적 기능을 가지고 있어서 한 인간 자신을 통전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몸과 영혼을 헬라적 이원론적 관점에서 이해하여 인간을 화육된 영혼이라고 하는 시각에서 볼 것이 아니라 히브리적 사고에 따라서 영혼을 살아있는 몸으로 보아야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 28)을 이해하여야 한다. 사람들은 이 성경절을 영혼 불멸론의 기초가 되는 근거로 활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컨대, E F 는 “영혼 불멸론 교리는 하나님의 전능성에 예속하는 영혼 불멸의 교리가 단순하게 지적되어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 ( )그러나, 이같은 시각은 헬라적 사고의 틀 안에서 이 성경절을 이해하는 것에 불과하다. 예수께서 성장하신 곳은 팔레스틴이고 그의 사상은 유대주의의 영향권 범주 안에 있었지 헬라적 범주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이 성경절을 히브리적 배경으로 이해한다면 그 의미는 이렇게 볼 수 있다. “ 네 현존재를 끝장 지을 수 있는 인간을 두려워하지 말고 네 본질적 자아를 멸할 수 없는 분을 두려워하라. 전인을 영원히 파멸시킬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혼 개념을 참된 내적 자아라는 시각에서 이해한 것은 사도 바울에게서도 이어진다(고전 14:14 참고).
공관복음서에는 헬라적 영향아래서 지상적인 것, 신체적인 것을 폄하하면서 동시에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고양하므로 인하여 혹자는 이를 몸과 영혼의 이원론이 함축된 본문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마 6:19-20).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마 6:25).
위 성경절들을 통하여 볼 때 우리는 몸의 중요성과 그 신체적 필요성을 배격할 수 없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몸과 그 몸의 필요한 것을 폄하하기 위해서 말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음식과 몸에 입는 의복보다 생명이 더 중요하다는 기별에서 보듯이 인간의 신체적 존재는 음식과 의복의 문제 그 이상임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은 보다 더 차원높은 의미와 중요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또 더 나아가서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너희가 이 모든 것을 필요로 하신다는 것을 알고 계신다는 점과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시리라 하는 이 말씀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예수께서는 신체적인 요구 사항들을 무시하거나 배격하곤 하는 억압을 말씀하고자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그러한 것들이 제 위치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며 먼저 할 것을 먼저 하도록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먼저 할 것이 아니라고 하는 점이 곧 부인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고 말씀하셨다.
성경본문의 배후에 들어있는 의미는 하나님의 나라와 인간의 진실된 삶의 목적은 하늘에 있는 보화를 추구하는데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인간의 이 궁극적인 목적이 먼저 주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땅에 있는 음식, 의복, 보화들은 자기 위치에서 가치를 가지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최고의 가치에 관계될 때만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 궁극적 목적은 하늘나라의 건설에 있는 것이다.
2. 요한의 글에 나타난 영과 몸
이제 우리는 사도 요한의 복음서와 편지서를 통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요한의 글가운데는 더러 이 세계와 육신에 대하여 적대성을 띈 기별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 몇 개의 예를 다음에 들어보도록 한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 3: 6).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요 12:25).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요 16:33).
“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5-17).
위 성경절들을 보면 일견 헬라적 및 동양 종교적 인간관 같은 것이 느껴질지 모른다. 그리고 헬라의 영혼불멸론 사상 같은 것을 의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내 안에 거하고 나를 믿으면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요 11:26;6:50-58참조)하는 말씀에서는 이런 느낌이 일어날 것이다.
요한은 세계와 육신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가지고 있는가? 이 세계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찬탄까지 하는 대상이다. 시인들도 그런 찬탄을 하고 있다. 또 요한은 한편으로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3:16-17)에서처럼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 말하고 있으며, 다른 한 편으로는 이 타락한 세계는 하나님께 반역하고 있어 재창조와 구원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으로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육신은 좋은 것이다. 육이 나쁘고 악하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로 고스)가 육신이 되었다고 하는 말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물론 육은 타락하여 나빠졌다. 그렇다고 하여 그 육을 하나님께서 멸하고자 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우리의 육신을 구속하고 재창조하시고자 한 것이다. 이리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이 육과 세상을 떠나 다른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육신과 세계에 머물러서 일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 17:15).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 남아 있어야 한다. 이 세상이 그들의 거처가 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 속해서는 안 된다(요 17:16)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의 타락한 상태에 따르지 않기 때문에 세상적이 아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지만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인간은 창조와 타락이라는 영역에 동시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세상에 속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세속적이고 육신적인 것에 속해서는 안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또는 영원히 살리라하는 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육신의 죽음이 다가오기 때문에 영육 이원론이 상정되는 것은 당연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생이라는 표현 aionios의 명사형 aion의 문자적인 의미는 오는 시대를 뜻하기 때문에 중간 없는 계속적인 영생의 의미가 아니라 오는 시대와 관련된 의미로 봐야하는 것이다. 즉, 영생은 오는 시대에 속하는 생명이라고 하는 뜻에서 영어 표현 ( everlasting)은 적합한 번역어가 아닌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요 11:26과 요일 2:17을 읽는다면 여기서 영생의 의미는 죽지 아니하리라 오는 시대에 살리라의 의미로 봐야할 것이다. 이점은 다음 두 성경절에서도 엿보여 진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6:40).“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요 6:54).
신자들은 내가 마지막 때에 저를 일으키리라 하는 의미에서 aionios 삶을 지니는 것이다. 그리고, 요 11:26의 문맥은 나사로를 죽은 자에서 살리신 문맥에서 (요11:25)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환언하면, 아이오니오스 삶은 영혼 불멸과 연관된 것이 아니라 마지막 때 몸의 부활과 관련된 메시지인 것이다. 그것은 히브리적 신앙 전승에 뿌리를 두고 있는 종말론적 개년이지 헬라철학에서 차용한 형이상학적 개념이 아닌 것이다.
요한의 글에 나오는 영생의 개념은 “오는 시대” 부활의 날에 있을 종말론적 개념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 여기서 종말론적이라고 함은 현재 지속되고 있는 역사적 미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요한이 오히려 더 많은 경우에 영생의 개념을 현재적인 소유로 부각시키고 있는 것은 종말론적 개념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신자들은 오는 시대에 완벽하게 실현될 영생을 현재 여기 지상에 살아 있는 동안에 투입시켜 신자들이 오는 시대의 축복을 미리 맛보도록 하였다. 종말론적 영생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최종적 완성의 보증과 담보의 형태로 현재적 소유로 다가오는 것이다.
영생이 전적으로 종말론적인 사건으로 오는 것이어서 영혼 불멸과 무관하다면 한 개인이 육체적인 삶이 끝 난 죽음과 마지막 날의 일반적인 부활 사이에는 어떻게 되는가 하는 의문이 있지만 이에 관하여는 이미 논급하였다.
3. 바울 서한
바울 사한은 복음서의 의문을 해결하는 기별을 담고 있다. 혹자는 바울이 헬라주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논리를 전개하고 있지만 이는 하나의 가설일 뿐이다. 헬라어로 서한을 보내고 당대의 헬레니즘 문화에 친숙하다고 하여 그 사상적 틀에 메었을 것으로 보는 시각은 그의 히브리적 사상의 배경을 간과하고 있다.
인간 구성에 관하여 흔히 영혼과 육체로 구성되었다고 보는 이분법(dichotomy)과 영혼 몸으로 구성되었다고 보는 삼분법(trichotomy)의 뿌리를 바울 서신에서 추구하는 사람들은 바울 심리학의 기조가 되고 있는 영, 혼, 몸을 서로 다른 기능을 지닌 것으로 보고 있으나 근래의 연구에 있어서는 서로 다른 관점에서 본 전체적 인간 존재를 두고 한 표현으로 이해하고 잇다.
J.A.T. Robinson은 바울 문학을 심도 있게 연구한 후 바울의 인간관은 헬라적 인간관에서 차용한 것이 안니고 히브리적인 사상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단언하였다. (The Body, 11) 헬라 철학에 따르면 인간은 신체적 조직 안에 감금되어 있는 영혼이다. 그래서 인간은 신체적 감금에서 탈출 해방하는 것을 지향한다. 그러나 J.A.T. Robinson은 바울이 이같은 헬라 철학적 인간관이란 구약성경의 히브리 사상과 대립되는 것으로 보아 배격하고 인간을 몸과 영혼의 심리적 통일체로 보는 통전설적 입장을 견지하여 “인간이 몸을 가진 것이 아니라 인간이 몸이다”는 격언조의 단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The Body 11). Wheeler Robinson은 히브리적 사상에서 몸이 곧 인간이고 영혼이 곧 “살아 있는 몸(an animated body)"으로 보았다. Pederson의 표현을 빌리면 ”몸이란 영혼의 외적 형태“인 것이다. (Israel 1-11, The Body 14에서 재인용). 바울의 soma(body) 용례 분석을 하여 보면 이 soma가 곧 인격체임을 단번에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이들의 영육일원적 통전론은 돋보인다. 바울의 인간관을 영육 이원론과 영혼불멸론의 시각에서 보는 사상은 바울의 메시지에 토대를 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일견하여 영육이원론으로 보이는 바울의 기별을 어떻게 볼 것인가? 영육이원론, 反신체적 금욕주의, 영적 타계주의 근거로 자주 인용되고 있는 두 개의 성경절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롬 8:5-10).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갈 5:16-18).
특이한 것은 바울이 위의 두 성경절에서 “몸(soma)"과 ”영혼(psyche)"이라는 용어 대신 “육신(sarx)"과 ”영(pneuma)"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어 번역에 있어서 “육신”은 “육체,” “영”은 “성령”으로도 번역되고 있다). 이 점은 바울이 몸-영혼(body-soul) 이원론을 상정하고 있지 않다는 중요한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더구나 바울이 “육체의 일”로 나열하고 있는 17가지 중에서 6가지만 잘못된 육체적 욕망과 관련된 것들(음행, 더러운 것, 호색, 술 취함, 및 방탕)이고 나머지 11가지(우상 숭배, 술수, 원수를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당짓는 것, 분리함, 이단, 및 투기)와는 육체적 충동과 욕망과는 직접적 관계가 없는 잘못된 신앙에 관한 것들과 잘못된 사회적 관계에 관한 것들이다(갈 5:19-21).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서한에서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고전 3:3)라고 하여 “육신에 속한”의 의미가 유적 마음이나 육체에 따라 사는 마음 곧 세상(속)적 마음을 함축하고 있어 육(flesh)과 영이 인간 안에서 각기 독립된 그리고 상반된 실체들을 뜻하는 것이 아닌 인간의 각기 다른 모습들을 지층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바울서신에는 sarx(flesh)이 인간의 어느 한 부분이 아닌 타락하여 거듭나지 못한 전인(全人)을 의미하는 용례가 많이 나온다.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자연인"은 죄성을 지닌 인간을 지칭한다. 죄성을 지닌 인간은 창조주의 피조물적인 존재라는 점, 즉 하나님과는 무한대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점을 배격하고 자기의 절대적 자율성과 자기 만족이나 충분성을 주장한다.
이 점에서 J.A.T. Robinson은 바울 신학상의 인간론을 다음과 같이 파악한다.
“육을 따라” 사는 것은 육이 악하거나 불순결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거역하는 인간상황을 부인하는 일... 즉, 인간이 하나님께 대하여 근본적으로 피조물 관계에 처하여 있다는 것을 왜곡하기 때문에 죄된 것이다. sarx를 중립으로 본 경우에는 세계 안에 살고 있는 인간을, sarx를 죄된 것으로 보는 경우에는 세상을 위하여 살아가는 인간 존재를 각기 묘사하고 있다. 인간은 세상 안에 살고 있기에 하나님이 주신대로 자기의 전 삶과 행위의 통치자인 세상의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불트만이 바로 강조한 것처럼 결과적으로 육신의 마음은 하나님에 향한 인간의 의존성을 부인하는 것이 되었다.( )
이러한 점은 “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3)라는 말씀에 잘 나타난다. 바울은 “육체의 지혜”(고후 1:12)를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도 인간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신뢰하는 것을 두고 한 표현이 된다. 이는 구약성경의 메시지 “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렘 17:16)를 반복한 셈이다. 여기서 “혈육”은 자만으로 부패한 인간 전 존재를 두고 한 말이다.
바울서신에서 “육신”이나 “세상”의 의미는 하나님과 유리되어 그 피조성과 의존성이 상실된 경우에 사악한 것이 된다. 이 경우 세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은 동의어가 된다. 그렇다고 “육신”과 “성령”은 몸-영혼 이원론에서 영혼의 나쁜 상대어인 “몸”의 동의어가 아니다. “육신”은 자기 중심성과 자족성의 포로가 되어 있는 전인간적 존재를 두고 사용된 용어가 된다. 마찬가지로 “영혼”은 인간의 어느 한 부분을 지층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갈 5:22-23)로 가득한 사람 즉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된 영적 인간을 말하고 있다.
영적 마음의 표본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인간은 아무리 출중한 인품을 지닌 자라 할지라도 영적 마음과 육적 마음의 갈등 가운데서 한 평생을 살아간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19-25). 여기 나오는 본문은 나쁜 몸과 순결한 마음 사이의 투쟁이 아니다. 이 투쟁은 인간 자신 안에서 옛 사람 , 자기 중심적인 육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전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바울신학에서 soma는 sarx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지닌 어떤 것이 아니다. 히브리어 nephesh가 인칭 대명사적 역할을 하고 있는 바 바울은 이 nephesh의 상응어로 psyche를 사용하고 있다. 바울의 프시케 사용법은 신구약 중간시대의 사후적 존재로 부각된 용법보다도 구약성경의 용법에 따라 생명을 뜻한다(롬 11:3의 ‘목숨’; 빌 2:30의 ‘목숨’ 참고)(래드, 신약신학, 643). 로마서 13:1의 푸시케가 ‘사람’으로 번역된 것은 푸시케가 인간 전 존재를 나타내는 전형적인 예가 된다. 로마서 2:9의“악을 행하는 사람의 영(psyche)"이 RSV에서 ”악을 행하는 모든 사람“으로 번역된 것은 그동안의 푸시케 개념에 대한 설왕설래를 정리한 좋은 번역이 라고 볼 수 있다. 바울의 soma-psyche는 sarx-pneuma에서처럼 각기 다른 시각에서의 전인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하고 있다. soma는 “육의 몸”(고전 2:11)에서 처럼 연약성과 죄성을 지닌 전인간을 나타내기도 하고 또는 전 개성(personality)과 같은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이 경우 soma는 그 타락성 때문에 sarx와 동의어적이지만 그러나 전면적으로 멸망할 존재인 sarx와 꼭같은 용어가 아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창조된 soma는 부활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육의(psychikon) 몸"은 “신령한(pneumatikon) 몸"으로 변화된다(고전 15:44). 즉, 옛 사람이 썩지 아니 할(고전15:52) 새 사람, 새 피조물(kaine ktisis) (고후 5:17)로 바뀐 것이다. sarx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지만(고전15:50), soma로서의 인간은 그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수 있다.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며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고전 6:13).
인간은 불가분리의 전인적 존재이다. 신구약 성경 어디에서도 몸-영혼의 이원론적 접근방식을 찾을 길이 없다. 영혼 뜬 혼(soul)으로 번역되는 nephesh-psyche와 영(spirit)로 번역되는 psyche--pneuma는 독자적 존재가 아니다. 바울서신에 나오는 soma(몸), psyche(혼), sarx(육신), pneuma(영)--이 어느 것도 인간이 지닌 어느 한 부분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이 모두가 특정 시각에서의 전인을 나타내고 있다. 인간은 분리될 수 없는 통일체이다. 이 점에서 신약성경은 신체에서 분리된 영혼불멸의 교리를 가르치고 있지 않는 것이다. 그 대신 부활의 교리를 가르치고 있다. 더구나 인간의 몸을 성령의 전으로 보고 있다는 점은 순수 영을 고양하고 몸에 대하여 적대감을 갖는 일은 반성서적인 시각에 불과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으로 예기되는 첫째 부활의 소망은 영혼-육체의 이원론이라는 희랍철학 사상과 조화 될 수 없는 결정타를 주는 교리가 된다.
III. 스올(sheol)의 의미
스올의 의미는 문맥에 따라 다르게 나온다. 65개의 스올의 용례를 자세히 살펴보면 구약의 이스라엘인들은 반드시 땅 밑 죽은 자들이 거하는 곳만을 스올로 보지 않고, 서로 비슷하지만 약간씩 다른 의미도 나온다.
1. 죽음
창37:35에 “그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바디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슬퍼하며 음부에 내려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 아비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에서보면 스올로 내려간다는 표현이 나온다. 베스터만(Westermann)은 “스올로 내려한다”는 표현은 족장시대부터 죽음을 나타내는 표준적인 표현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폰 라트는 이 표현은 죽음을 나타내는 시적인 표현이라고 말하고 있다.
창 42:38, 44:29, 31에 나오는 스올은 죽음을 나타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삼상 2:6에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도다.”라는 구절은 “한나의 기도” 중에서 나오는 말씀이다. I.C.C는 스올을 죽은 자들의 거주지로, AB는 심판의 장소요 마지막 거주지로서 정의하고 있다. 이 구절을 살펴 볼 때, “죽이기도 하시고”는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와 대응하는 말로, “살리기도 하시며”는 “(음부에서)올리기도 하시는 도다”와 대응하는 말로 볼 수 있으며, 이 말들은 스올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말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권세의 크심을 나타내 주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도 스올은 “죽음”을 나타내는 말로 해석된다.
삼하 22:6의 “음부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라는 구절은 여호와의 구원에 대해 다윗이 찬양하는 내용이다. “음부의 줄”과 “사망의 올무”는 같은 내용의 반복으로 다윗이 처한 상황의 긴박함을 더하여 준다. 여기서 스올은 죽음을 나타낸다.
왕상 2:6에서 “네 지혜대로 행하여 그 백발로 평안히 음부에 내려가지 못하게 하라.”는 구절은 다윗이 솔로몬에게 한 유언 중 요압을 죽이라는 내용이다. 요압이 이스라엘 군대의 두 장관 아브넬과 아마샤를 죽였기 때문이다. 이것도 창세기에 나오는 용법과 같이 “죽게 하라”는 말과 다를 바 없다.
욘 2:3(개역 성경에는 2:2) “에서도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라고 하는 기도는 요나가 이미 물고기의 뱃속에 들어와서 드리는 기도이다. 개역 성경에서 유일하게 음부로 번역하지 않고 스올로 번역하고 있다. 물고기 뱃속은 캄캄하고 죽을 것 같아 요나는 스올이라는 말을 사용했지 그가 실제로 죽어 지하세계에 갔다는 것은 아니다. ‘스올의 뱃속에서’라는 말은 ‘죽음의 문턱에서’라는 표현과 유사할 것이다.
시 89:49의 “누가 살아서 죽음을 부지 아니하고 그 영혼을 음부의 권세에서 건지리이까”에서 ‘음부의 권세에서’라는 표현으로 역시 음부를 의인화 시켜 죽음의 권세를 의미한다.
2. 무덤/죽은 자의 거처
죽은 자의 거처. 구약 성경은 사람들이 죽을 때에 가는 곳을 스올(sheol, 히브리어)이라 하고, 신약 성경은 하데스(hades, 헬라어)라 한다. 성경에서는 스올이 가장 빈번히 무덤을 의미한다.* 하데스의 의미는 스올의 의미와 유사하다.*
죽은 자는 의인이나 악인을 막론하고 모두 이곳으로 간다. 야곱은, "내가... 음부(스올)에 내려...가리라"(창 37:35)고 말했다. 땅이 고라와 그의 일당들을 삼키고자 "입을" 열었을 때, 그들은 "산채로 음부(스올)에" (민 16:30) 내려갔다.
죽을 때 전체로서의 사단이 스올에 들어간다.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을 때 그분은 무덤(하데스)으로 내려가셨지만 부활 때에 그분의 혼은 무덤(하데스, 행 2:27, 31, 혹은 스올, 시 16:10)을 떠났다. 다윗이 치료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할 때, 그는 그의 혼이 "음부(스올)"(시 30' 3)에서 구원받았다고 증언했다.
무덤은 의식이 있는 장소가 아니다.* 죽음이 하나의 잠이기 때문에 죽은 자는, 무덤(하데스)이 그 죽은 자를 내어주는(계 20:13) 부활 때까지 무의식 상태로 무덤 속에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
시49:15의 “양같이 저희를 음부에 두기로 작정되었으니 사망의 저희 목자일 것이라 정직한 자가 아침에 저희를 다스리리니 저희 아름다움이 음부에서 소멸하여 그 거처조차 없어지리이다.”에서 이곳에 나오는 음부는 무덤을 뜻한다. 에스겔34장 3절에 나오는 목자처럼 스올은 양떼를 먹이는 것이 아니라 양떼를 먹어치운다. 어둡고 암울한 무덤 속에서 시신이 부패해 가는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시 141:7의 “사람이 밭 갈아 흙을 부서뜨림같이 우리의 해골이 음부 문에 흩어졌도다”에서 무덤 안의 음침하고 살벌한 모습을 보게된다. 스올을 죽음, 지옥, 지하세계, 절망상태로 생각할 때와는 달리 무덤으로 생각할 때에는 시체가 누워 있는 구체적인 장소가 연상된다.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 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는 전9:10의 구절은 죽은 자가 무덤 안에서 아무 활동도 하지 못하고 아무 계획도 없이 누워 있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스올은 무덤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사 28:18의 “너희의 사망으로 더불어 세운 언약이 폐하며 음부로 더불어 맺은 맹약이 서지 못하며 넘치는 재앙이 유행할 때에 너희가 그것에게 밟힘을 당할 것이라”는 구절은 사28:15에서 마음껏 교만해 있던 유다의 통치자들에 대한 심판의 말씀이다. 그들이 말한 것이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고 그와 반대로 된다는 것을 경고하신다.
시 16:19에서 “이는 재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의 구절은 시인이 에녹이나 엘리야처럼 전혀 죽음을 맛보지 않겠다는 소망을 나타낸 다기보다는 비록 죽음이 그를 삼킨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일으키시리라는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이시고 그와 교제하는 삶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스올은 죽은 자의 거처, 즉 무덤을 뜻한다.
4. 파멸
“만일 여호와께서 새 일을 행하사 땅으로 입을 열어 이 사람들과 그들의 모든 소속을 삼켜 산채로 음부에 빠지게 하시면 이 사람들이 과연 여호와를 멸시한 것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민 16:30). “그들과 그 모든 소속이 산채로 음부에 빠지며 땅이 그 위에 합하니 그들이 총회중에서 망하니라”(민 16:33).
이 두 구절은 같은 일련의 사건의 시작과 그 결과를 다룬 것으로 하나님께서 부여한 모세의 권위에 도전하는 고라 일당의 반역 사건을 다룬 내용이다. 이 곳에는 다른 곳과는 달리 산채로 스올로 빠지는 것이 묘사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스올에 빠진다는 것은 형벌 적이다. 여호와를 멸시한 죄는 음부(sheol) 즉 무덤으로 갈 수밖에 없다.
신 32:22 “네 분노의 불이 일어나서 음부 깊은 곳까지 사르며 땅의 그 소산을 삼키며 산들의 터도 붙게 하는도다.” 이 구절은 우상 숭배를 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야훼의 분노를 표현하고 있다. 이 곳에서 스올은 불길에 싸여 다 타버리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이 곳의 스올의 모습은 신약에 나타난 전형적인 지옥의 모습과 유사하다. 여기에서도 스올의 의미는 “파멸”에 대한 은유로 보아야 한다.
사14:11 “네 영화가 음부에 떨어졌음이여 너의 비파 소리까지로다. 구더기가 네 아래에 깔림이여 지렁이가 너를 덮었도다.” 이 말씀은 바벨론 멸망에 대한 예언중의 한 구절이다. 바벨론 왕의 몰락의 묘사한 구절로 여기서 음부 곧 스올은 형벌 개념인 멸망을 뜻한다. 구더기, 지렁이가 득실거리는 스올의 묘사는 시체가 썩어 들어가면서 구더기가 꼬이는 참혹한 모습을 보여 주기도 한다. 사 14:15의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치우리로다”는 말씀도 사 14:11에 연속되는 내용 곧 바벨론 왕에 대한 하나님의 질책의 내용이다.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 이라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14:13,14에 내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라는 바벨론 왕의 교만스러운 마음에 대해 하나님께서 그를 구덩이의 맨 밑 즉 멸망을 당한다는 내용이다. 바벨탑을 쌓고 하나님께 도전한 인간들의 교만을, 바벨탑을 무너뜨리셨던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새로운 바벨탑을 쌓으려는 바벨론 왕을 무너뜨리신다는 내용이다. 사 14:15d에 나오는 스올은”파멸“으로 의미를 결정한다.
겔31:15의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가 음부에 내려가던 날에 내가 그를 위하여 애곡하게 하며...”에 이어서 31:16에 “내가 그로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음부에 떨어뜨리던 때에 열방으로 그 떨어지는 소리를 인하여 진동하게 하였고....”와 또 31:17에 “그러나 그와 함께 음부에 내려 칼에 살육을 당한 자에게 이르렀나니 그들은 옛적에 그의 팔이 된 자요 열국 중에서 그 그들 아래 거하던 자니라”에서 보면 이 세 개의 연속 구절은 모두 에스겔이 여호와의 말씀을 받아 앗수르의 멸망을 예고하는 구절로 여기서 스올 곧 음부는 하나님의 파멸의 의미가 강하다.
겔 32:27도 에스겔이 애굽의 멸망에 대해 예언한 내용으로 할례 받지 못한 자가 가야할 지옥의 모습을 스올로 나타내고 있다.
시 18:6의 “음부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라는 구절에서도 죽음의 동정심 없는 가혹함과 그를 덮치는 죽을 것 같은 생명의 위협으로 인해 어떠한 구원도 불가능하다고 생각될 때 예배 자는 절대적으로 그를 구원한 그의 하나님의 구원 행동에 모든 것을 맡기게 됨을 시 18편 전체 문맥에서 파악 할 수 있다.
5. 절망상태
죽음은 여러 가지 형태로 인간의 삶 속을 파고든다. 질병, 고독, 실패, 늙음, 이별 등 이 모든 것이 죽음의 예고일 뿐만 아니라 삶 자체 내에 실재하는 죽음의 형태이다. 이러한 실재로 말미암아 성취된 삶을 점차적으로 조각조각 내주어야 한다. 이렇게 하여 인간은 위에 나열한 죽음의 여러 현상을 통하여 참된 죽음을 체험하게 된다. 죽음은 삶 속에서 계속 현존하고 있다. 삶은 항상 죽음을 뜻하기도 한다. 이렇듯 우리는 삶 속에서 죽음을 체험한다. 구약 성경에서도 이와 같은 체험을 한 사람들이 그들의 고난을 호소한다.
시 86:13 “이는 내게 향하신 주의 인자가 크사 내 영혼을 깊은 음부에서 건지셨음이니이다"에서 시편 기자가 고백하는 것은 그가 실제로 몸이 죽었다가 살아났다기 보다는 극한 슬픔, 절망, 고난에서 야훼께서 그를 위로하시고 그 마음을 소생케 하셨다는 신앙고백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스올은 죽은 자만이 갈 수 있고 경험되는 것이 아닌 산 자가 살면서 경험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시88:4에서 “대저 나의 영혼에 고난이 가득하며 나의 생명은 음부에 가까웠사오니”도 시86:13처럼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기도자의 절망상태를 볼 수 있다.
시116:3의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음부의 고통이 내게 미치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에서 보면 사망의 줄, 음부의 고통은 곧 환난과 슬픔을 말한다. 곧 극한 절망상태를 스올로 표시하고 있다.
욥17:13-15 “내 소망이 음부로 내 집을 삼음에 있어서 침상을 베풀고 무덤더러 너는 내 아비라 구더기더러 너는 내 어미, 내 자매라 할 찐대 나의 소망이 어디 있으며 나의 소망을 누가 보겠느냐”에서 욥의 극한 절망 상태를 보게 되며 이 표현을 스올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나타내고 있다.
참고서:
래드(George E. Ladd). 신약신학 (A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이창우 역. 서 울: 성광문화사, 1983.
D.R.G. Owen. "'Body' and 'Soul' in the New Testament." Man's Need and God's Gift: Reading in Theology. Edited by Millard J. Erickson.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76. 85-98.
기본교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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