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안에서 자라가라
은혜 안에서 자라가라
“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벧후 3:18).
근래 봄이 매우 짧게 느껴지고 곧 여름으로 들어가는 느낌 같은 날씨가 이어지고 있다. 여름은 성장의 계절이다. 성장은 기적처럼 보인다. 기적이 무엇인가? 기적은 있을 수 없는 일을 두고 표현한 말이다. 또한 너무 경이롭고 신비한 일을 두고도 “기적 같다”는 말이 사용되고 있다.
생명의 3대 신비(기적 같은 일들)
출생의 신비- 아이가 탄생하면 누굴 닮았는지에 관심이 많다. 아이의 눈 코 귀를 살피고 손가락 발가락 개수 등을 세어보기도 한다.
성장의 신비
결실의 신비
여름은 성장의 신비를 느끼는 계절이다. 여름은 천연계의 성장기간이다. 봄엔 생명의 싹이 트고 재탄생이 일어난다. 여름이 없다면 움튼 생명이 살아나겠는가? 이런 무더운 날씨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먹이시고자 가동시키시는 과정이다. 하나님의 창조 계획 아래에서 밭작물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집초는 더 무성하게 자란다. 이 여름철에 기적 같은 성장을 보면서 우리도 무성하게 영적으로 자라고 있는지 생각해야 한다.
막 4:26, 29 자라나는 씨의 비유
성장 없는 생명이란 없다( no life without growth).
영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에 반드시 필요한 계단이다. 참된 신앙은 자라남을 수반한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주님 안에서 영적으로 자라나는 과정을 농부가 뿌린 좋은 종자가 싹이 나는 것으로 비유하였다. 회개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난 자들은 마치 밭에 심은 좋은 종자가 자라서 열매를 맺는 것처럼, “범사에 그에게까지) 점점 자라”(엡 4:15),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장성한 남녀가 된다. 인간의 온갖 지혜나 재주를 가지고라도 천연계 가운데 있는 어떤 작은 물체에도 생명을 넣어 줄 수는 없고 자라게 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생명으로만 식물이나 동물이 살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의 마음에 영적 생명이 생기는 것도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생명으로 되는 것이다. 사람이 “위로부터 나지 아니하면”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시려는 생명을 누릴 수 없다. 주신 생명을 자라게 하는 것 역시 기적같은 것이다.
생명이 그러한 것처럼 자라남에도 그러하다. 하나님께서 꽃봉오리를 피게하고 자라서 그 꽃이 열매 맺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막 4:28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 되게 하시는 능력을 베푸신다. “씨가 발아하는 것은 영적 생활의 시작을 나타내고 곡식이 자라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성장에 대한 아름다운 표상이다. 천연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영적 세계에 있어서도 자라남이 없이는 생명이 있을 수 없다. 식물은 자라나지 않으면 죽는다. 식물이 자라는 소리도 없고 눈에 띄지도 않으나 끊임없이 계속하여 자라는 것처럼 그리스도인 생애의 발전도 그와 같다. 매 발전의 단계마다 우리의 생애가 완전하게 될 수 있다.”(실물, 65). “The germination of the seed represents the beginning of spiritual life, and the development of the plant is a beautiful figure of Christian growth. As in nature, so in grace; there can be no life without growth. The plant must either grow or die.”(COL, 65)
성장이 멈춘 자녀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짠하고 아프다.. 자녀가 자라지 않고 있는 모습을 보는 부모의 심정은 얼마나 비통할까. 그런대 성장을 멈춘 아이가 씩씩하게 인사하는 것을 볼 땐 비록 몸은 잘 자라지 않고 있지만 마음과 신앙은 자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 아버지도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지 않고 있으면 얼마나 마음 아파하시겠는가? 어른들은 신체적 성장이 멈추었지만 영성은 자라야 한다.
기어 다니던 손지가 어느 날 두발로 서서 걷는 것을 보는 부모는 환호성을 발한다. 기어 다니는 것은 네발 동물 수준이다. 일어나서 걷는 것은 인간 수준으로 격상되는 것이다. 어린 아이가는 자라기 위하여 끊임없이 헝그리를 외친다. 그리고 하루에 두 번씩 똥을 쌀 때도 많다. 이것은 자람의 증거가 된다.
수현이 엄마와 아내 모두가 뉴스타트 프로그램에 갔을 때 의정부에서 삼육대학교부속 유치원까지 아침에 대려다 주고 오후 2시에 데려오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침에 시리얼을 두유에 넣어주는 경우가 많았다. 그 땐 군소리가 없었다. 엄마가 돌아 온 후 엄마에게 다음 메뉴가 무엇이냐고 묻는다. 다른 메뉴를 내 놓으라고 한다. 성장하자면 여러 가지 메뉴가 필요하다. 말씀의 메뉴도 마찬가지이다.
영적인 세계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늘 어린아이 수준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언제까지나 초신자들의 언어로만 표현하며 살아갈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경험이 깊어 가는 가운데 우리의 기도와 믿음도 향상해야 한다. 나이가 20세 청년이 여섯 살 아이처럼 말하는 것을 보고 기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물며 이미 성인이 되어야 할 사람들에게서 어린아이 지식 수준의 말을 듣는다면 얼마나 고통스럽겠는가. …
다년간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온 청년이 영적 아기에 불과한 사람처럼 말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성숙하지 못한 남녀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 그런 방식으로 밖에는 이야기하지 못할 것이다. …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주장하지만 정작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영적으로 미성숙한 사람이 많다. 진실하고, 깊고, 재치 있는 언어를 찾아볼 수가 없다. …
자람의 길 –성장의 기적을 위한 복음적 협동론
하나님의 개입-은혜와 말씀
A. 오직-중요성, 우선순위를 암시한다. 이것 하나뿐이라는 의미가 잠재되어 있다.
B. 은혜
(1) “은혜는 그리스도인이 자라가야 하는 영역 중 하나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자신의 은혜로운 돌보심을 개인적으로 경험하면서 훨씬 더 굳건히 안정되어야 한다.”(성경주석, 벧후 3:18). 식물들이 태양을 향하는 해바라기이듯이 우리도 의로운 해이신 예수께로 향할 때에 하늘의 광선이 우리에게 비치게 되어 우리의 품성은 계발되어 그리스도와 같이 되어간다. 이를 두고 “너희는 내 안에 거하라”(요 15:3-5)고 하신다. 성장에서는 자기를 바치는 체험이 있어야 한다. 아침마다 그리스도께 자신을 바치고 그와 더불어 교통하는 것이 그의 안에 거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구를 은혜의 공기로 둘러싸셨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니면 인간은 생존이 불가능하다. 그가 베푸신 축복으로 인간은 살아간다.
(2) 주신 은혜 안에서 인간의 땀(몸부림) 1%의 영감과 99%의 땀-인간이 한손에 손가락 5개를 지닌 것처럼 듣고, 읽고, 연구하고 암송하고 명상하는 일을 하여야 한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고 그분에게 자기를 바치라. Jean Paul Satre 20세기 세계 최고의 석학, 실존철학자,1980년 3월 한 세기를 떠들썩하게 했던 실존주의 철학자 장폴 사르트르가 페 수종으로 인하여 파리의 한 병원에 입원하였다. 문자 그대로 발악을 하고 찾아 온 사람들에게 고함을 치며 절규하였다. 그는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그토록 발악한 것이다. 옆에 있던 아내도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남편의 병명도 말을 못하고 위로도 못하였다.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외쳤던 그가 이렇게 발악한 것을 두고 한달만인 4월 그가 임종한 다음에 신문들이 분석하였다. 한 평론가는 그가 돌아갈 고향이 없었기 때문에 비참한 종말을 맞이하였다고 분석했다. 노벨상 수상자로 확정되자 수상을 거부하였던 그였다. 그가 아버지를 의지하고 그에게 자신을 바쳤더라면 그러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 세기동안 최고의 지성인으로 지낸 그였지만 그는 예수께서 우리의 죄악의 사슬을 끊어버렸다는 점을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그는 예수께서 죄악의 사슬을 깨트리시고 아버지께 돌아갈 하늘을 연결시킨 은혜의 다리를 놓으셨지만 불신하였다.
인간이 어느 날 거룩한 은혜의 역사에 따라 자기가 죄인됨을 깨닫고 구주를 영접하면 영적 탄생이 일어난다. 그 탄생은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
.탄생한 다음에 자라야 한다. 말씀 사모 없이는 영적인 자라남이 없다. 더 나아가서는 영적인 “젖”이라는 식단만으로는 근본적으로 살아갈 수 없으며, “단단한 식물”을 섭취하기를 배워야만 하는 때가 다가온다(참조 히 5:11~14; 6:1, 2).
자라자면 말씀을 사모하라.
인터넷 중독되면 뇌의 인지 기능이 파괴된다는 보고가 있지만 이런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있다. 인터넷에 중독되어가는 아이의 미래는 위험하다. 영적 성장에는 거룩한 독서가 있어야 하고 말씀에 대한 체계적 연구가 있어야 한다. 말씀을 스치고 지나가면 유익이 별로 없다. 나에게 감동적인 말씀을 암송하고 묵상하여야 한다.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렘 15:16). 말씀을 먹고 영혼이 순화되는 깊은 체험, 말씀에 매료당하는 체험이 있어야 자라난다.
D. L. Moody는 아침에 성경 읽지 않고는 아침 식사 없다( “No Bible, no breakfast”)고 하라고 하였다. 어느 분은 설교할 때 이 말을 빌려 남편이 말씀을 먼저 먹지 않고 있으면 아내는 밥을 주지 말아야 한다고 하는 강론을 하였다.
성장의 기적은 말씀연구와 묵상으로 일어난다. S. Kierkegaard - 진리는 덫과 같다. 자기가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자기를 포로로 사로잡혀야 한다는 의미가 내재되어 있는 명언이다. 성경은 진리의 덫이 된다. 게르하르트 하젤은 최근구약신학의 동향이라는 책에서 구약성경의 주제가 하나님이라고 갈파하였다. 최근신약신학의 경향이란 책에서도 마찬가지 주장을 펼치고 있다. 성경의 주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그분의 뜻, 사랑, 공의를 들어내고 있다. 성경을 연구하면서 어떤 인간이나 그의 사건이 주제인 것처럼 보는 것은, 더 나가서는 자기가 주인공인 것처럼 여기고 ‘내게 주신 하나님읨 말씀이 무엇인가’하고 성경을 읽는 자세가 반드시 틀리 것은 아니지만, 또한 좋은 고민도 되지만, 이는 정곡에서 벗어난 시각이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성경읽기의 목적은 예배에 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 분께 영광 돌리는 것에 있다. 내가 싫어도 주어진 말씀을 하나님의 음성과 뜻으로 받아들이면서 그 말씀에 사로잡히는 것이 성경을 읽는 기본자세가 된다.
수많은 종교가 내면적 직관을 통하여 자기 안에서 들리믄 소리를 들으라고 가르친다. 초월적 명상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스도교 진리는 내면의 소리 모두가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라고 한다. 그리스도교 진리는 인간 밖에서 들려오는 객관적인 말씀이다. 밖에서 들려오는 말씀에 귀를 기우리고 따르면 변화가 일어난다.
B.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여야 한다.
요일 2:14
“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4-17).
청년은 강하다. 세상을 이길 수 있다. 그 비결은 말씀 안에 거하는 일에 있다.
세상을 이길 수 있는가? 있다. 말씀이 그의 안에 거할 때 가능하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길은 무엇인가? 요한복음 15장의 서두에서 말한 내가 너희 안에 거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 것은 15:7은 말씀 안에 거하는 일이라고 한다. “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를 받아들인다. 그들이 그 말씀을 먹을 때, 그것은 마음을 계몽시킨다. 그리고 그들이 그 말씀을 따르려는 지성적인 선택을 하고 가능케 하시는 하늘의 능력을 통하여 전적으로 순종할 때, 영광의 소망인 그리스도가 마음속에 거하게 된”(성경주석, 요 15:7).
요한은 말씀 안에 거한다는 구체적인 방법을 15:10에서 제시하고 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 15:10).
거룩한 계명을 안고 그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길이고, 내 안에 하늘의 사랑을 채우는 길이 된다.
“ 그러므로 모든 악독(malice, 악행, 비열함)과 모든 궤휼(deceit 기만, 배반 교횔)과 외식(무대연극)과 시기와 모든 비방(evil speaking)하는 말을 버리고”(벧전 2:1) - 여기 나열 된 것은 형제들을 향한 죄목들이다. 말이 은혜로워야 한다. 교회는 은혜의 공동체이다. 죄는 자기를 덮으려고 하고, 자기를 정당화시키고 책임을 전가하려고 하며 자기 죄에 무감각하여지게 하는 속성을 지녔다.
죄는 질병이다. 암과 같다. 병약해 지면 자라지 않는다. 잘 성장하기 원한다면 죄악의 질병을 이겨야 한다.
수많은 종교가 내면적 직관을 강조하고 있다. 자기 안에 떠오르는 어떤 소리를 들으라는 것이다. 그들은 초월적 명상을 강조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내면의 소리 모두가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라고 본다. 그리스도교 진리는 인간 밖에서 들려오는 말씀에 있다. 그것은 객관적인 것이지 주관적인 것이 아니다. 밖에서 들려 오는 소리에 따를 때 내적 변화가 일어난다.
마귀의 3대 미끼는 육신의 정욕(식욕), 안목의 정욕(참람), 이생의 자랑(세상 사랑)이다.
3대 시험 설명 – 시험의 경우가 달라도 시험의 성질과 지반은 같다.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모든 일(in all points)"은 세 가지로 압축된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 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 상으로 좇아온 것이라”(요일 2:16).
시험의 지반이 같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자율(autonomy)과 독립(independence)을 벗어나 천부께 의존(dependence)과 굴복(surrender)을 하는 일에 있어서는 같다는 뜻 이다.
우리는 예수께서 하신 꼭 같은 순종을 요구받는다. 이 마귀의 시험 미끼를 이길 수 있는 비결은 말씀의 능력뿐이다. 말씀을 듣고, 읽고, 연구하고, 암송하고 명상하여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넘어질 수 있다. 자라자면 아픔이 있다. 성장통이다. 아이들은 아픈 다음에 쑥쑥 자란다. 넘어질 때 말씀을 다시 붙들고자 몸부림쳐야 한다. 말씀을 따르고자 몸부림쳐야 한다.
예수께서는 마귀의 시험을 “기록되었으되”라는 말씀으로 승리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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