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와의 연합

구원 : 2015. 7. 23. 05:07

그리스와의 연합

(Union in Christ/Union with Christ/Being in Christ)

고후 5:17; 4:7; 3:14

오늘날은 장기이식시대이다. 죽어가는 한 생명이 다른 죽어가는 사람에게 장기를 기증하여 그 생명을 살려 내는 일은 눈물 겨운 구속적 사건들로비쳐졌다. 장기 이식 의술이 발전하여 심지어 얼굴을 통째로 이식하는 사례도 보도되고 있다. 그러나 그 부작용과 생명윤리에 관련된 문제점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신장이식, 간 이식 등에서 면역 거부반응 때문에 장기간 약물 복용을 하여야 한다. 장기 이식은 각기 다른 개체가 내 몸에 완전히 하나가 되는 연합이 되는 사건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이 장기 이식과도 같은 연합일까? 다른 사람의 장기가 자기 안에 들어 왔을 때 흔히 일어나는 면역거부 같은 것이 있는 연합일까?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구원의 전 영역을 포괄적으로 표현하는 개념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예배 의식은 모두 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추구하고 있다. 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객관적 구원의 시작이 된다. 그러기에 신자들은 끊임 없이 이 연합을 추구해야 한다.

 

종교개혁자들 이래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야 말로 신약성경에서 바울의 사상의 핵심이라고 보아 왔다. 이에 대하여 Union in Christ야 말로 바울의 핵심 사상이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수와 함께, 예수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이 사상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까지도 포괄한다고 볼 수 있다.

바울의 서신서 중에 가장 즐겨 사용한 단어 중에 한 종류가 그리스도 안에라는 헬라어 엔 크리스토(en Christō), 엔 크리스토스(en Christos), 에이스 크리스톤(eis Christon, into Christ/, 또는 엔 퀴리오(en Kyriō, in the Lord) 일 것이다. 이 어휘들은 바울의 편지서에 164회 이상이나 나온다. 그래서 바울 신학을 두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말은 그의 삶과 생활의 핵심되는 신앙고백이다. (참고로 엘렌 화잇은 unity라는 단어를 1666, union이란 단어를 2269회 사용하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en Christō) ’표현이 특히 빌립보서나 에베소서 같은 옥중서신에 많이 나온다. 각기 어떤 문제에 사로 잡혀 있던 그들에게 엔 크리스토스라는 단어를 자주 반복하는 특별한 이유는 무엇인가? 바울은 자기가 비록 감옥에 같혀 있지만 감옥 안에 있다는 것에 역점을 두지 않고 역설적으로 엔 크리스토스를 강조하고 있다. 그에게는 이 엔 크리스토야 말로 모든 문제를 푸는 열쇠가 된 것이다. 내가 세상 여러 문제들에 봉착하여 그 안에 쌓여 살고 있지만, 내가 지금 주님 안에서 살고 있다는 믿음이 관건이 된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언제 어떤 환경에 놓여 있다 할지라도 기뻐하며 승리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비결이 바로 이 엔 크리스토 신앙이다.

 

I. 성경적 근거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 본문들은 신약성경에 수다하게 많이 나온다.

이 연합의 가르침의 시발점은 다락방 강화에서 부터이다.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Ye in me (en emoi), and I in you”) (14:20).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있고 또 살고 있어야 하는 것이 신자들의 새론운 자리매김이 된다. 예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일체 됨의 연합을 이어서 포도나무 비유(15:1-6)로 당신 자신과의 연합을 설명하고 있다(15).

 

예수께서는 자신을 포도나무에, 그의 제자들을 가지에 비유했다(15:1~6).

11:17, 24 돌 감람나무 같은 우리는 참 감람나무 예수에 접목되어야 한다. 여기서 접붙임은 세상 농법의 접목법과는 다르다. 초자연적인 하늘 접붙임을 받아야 한다.

돌감람나무 가지”(11:17)는 유대인의 종교적 특권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던 이방인의 상태를 적절히 나타낸다. “꺾인 가지는 그리스도를 거절함으로써 그들 자신의 운명뿐만 아니라 민족의 운명도 결정해 버린 믿지 않는 유대인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들에게서 거두어져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에게 주어졌다(참조 마 21:43 주석).

참감람나무 줄기에 돌감람나무 가지를 접붙이는 것은 보통 하지 않는 방법이다. 일반적인 방법은, 예컨대 캘리포니아에서 흔히 그러는 것처럼 페르시아 또는 영국 호두나무를 야생 호두나무 줄기에 접붙이는 것과 같이 야생 줄기에 개량된 가지를 접붙이는 것이다. 바울은 24절에서 이방인을 이스라엘의 줄기에 접붙이는 것은 본성을 거스리는 것이라고 명백하게 말하고 있다. 이방인을 초청하는 것과 이방인의 개심은 유대인의 기대와 상반되었다.”(성경주석, 11: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1:3-4).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1:6-7).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2:10).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 이는 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고전 1:4-5).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20).

 

II.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본질

A. 부정적 본질

1. 형이상학적-성육신적 연합(metaphysical or incarnational union)이 아니다. 동방교회에서처럼 인간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신적 본질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 된다는 범신론적 연합 개념이 아니다. 동방교화가 추구하는 성육신적 연합 모델은 인간을 신격화시키는 사상적인 특징을 저변에 깔고 있다.

2. 신비적 연합(mystical union)이 아니다. 경건주의자들에서 처럼 그리스도와 연합의 결과 그리스도인이 사실상 자기의 개성을 상실하여 자아 망각, 최면상태에 들어간다는 것이 아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20).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수동적 존재가 되어 자아가 망각 내지 흡수되거나 모두 제거되는 것이 아니다. 다음 성경절들은 제자들이 완전히 수동적이 되는 것이 아니고 능동적 존재로 활동함을 보여 준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14:12).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1:8).

연합은 개성이 상실되는 획일적인 것이 아니다. 다양한 가지들이 한 몸체에 연결된 unity in diversity이다.

3. 공감적 연합이나 심리적 연합이 아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같은 수준의 친구끼리 연합하여 같은 취향과 관심을 같는다거나 같은 목표를 추구한다는 것이 아니다. 거룩하신 분과의 연합이 그 중심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4. 성례전적 연합(sacramental union)이 아니다. 로마가톨릭교회의 화체설이나 루터교회의 공재설에서처럼 성례에 참여하므로 그리스도와 신비하게 연합된다는 것이 아니다. 성찬물에 대한 문자적 이해를 토대로 한 로마 가톨릭의 화체설이나 루터교의 공재설은 포도주와 떡을 먹음으로 예수를 자신 안으로 영접한다는 발상에 입각하여 있는 것이다.

5. 체험적 연합이 아니다. 오순절주의자들처럼 방언이나 신유 체험이 있고 불 체험이 있어야 연합된다는 것이 아니다.

 

B. 긍정적 본질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성질이나 의미를 다 포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이 연합을 비밀의 범주에 속하는 일로 말하고 있다(5:32). 하나님의 계시적 안내 없이는 그 의미를 다 알 수 없다.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1:26-27).

 

1.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본질은 언약적 연합(covenantal union)이다. 언약 개념의 본질은 결속(bond), 즉 연합에 있다.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관계는 더 좋은 약속에 토대를 둔 언약관계이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신랑신부의 관계로 비유한 것은 이 언약적 연합을 말하고 있다. 언약적 연합은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과 신자의 충성의 관계로서의 연합이다.

성경은 하나님과 그 분의 백성 사이의 관계를 신랑되시는 하나님과 신부되는 이스라엘(교회)의 결혼 관계로 자주 묘사하고 있다. 한 몸으로의 연합이라는 결혼관계는 헌신과 상호간 사랑, 존경, 신뢰와 충성이 바탕이 되어있는 언약관계의 표상이 된다.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5:23). “교회는 신부요, 어린 양의 아내이다. 참된 모든 신자는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이다”(화잇주석, 19:7-9).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하는 것처럼 몸이 되는 교회는 신랑되신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다. 이 결혼관계 예증에는 몸인 교회와 그 머리가 되는 그리스도와의 유기적 연합관계가 잘 나타나 있다.

 

2. 연합은 본질상 사법적이다. 하나님께서 거룩한 율법 앞에서 우리를 판단, 심판하실 때 우리만을 보시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존재로 보시는 연합이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존재로 보신다는 사법적 성질은 칭의의 원리와 같은 것이다. 예수께서는 의롭지만, 우리는 불의하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보실 때 그리스도와 법적으로 하나된 존재로 보신다.

 

3. 영적인 연합이다. 그리스도아의 연합은 성령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사건이다.

15:4-6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라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비록 예수께서 그들에게서는 떠나시려고 하셨지만 당신과의 영적 연합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분은 가지가 포도나무에 연결된 것은 너희가 나에게서 지지를 받는 그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소망, 675).

 

(1) 성령께서 이 연합의 매체가 되신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성령으로 받는 침례로서 일어난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6:5).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의 죽으심, 장사 및 새 생명으로의 연합을 하는 침례로 시작된다. 즉 성령의 역사가 수반되는 침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사건이 된다. 성령 침례는 매일 같이 하나님 백성의 체험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13).

바람 그 자체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보고 느낄 수 있는 결과를 드러낸다. 그와 같이 영혼에게 역사하시는 성령의 활동도 그 구원하는 능력을 체험한 사람의 모든 행위 가운데서 나타나 보일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때 생애가 변화된다. 죄악적인 생각은 사라지고 악한 행위와는 인연을 끊게 된다. 사랑과 겸손과 화평이 분노와 시기와 분쟁을 대신한다. 기쁨이 슬픔을 대신하고 용모는 하늘의 빛을 반사한다. 아무도 짐을 덜어 주는 손을 보지 못하며 빛이 하늘 조정에서 내려오는 것도 보지 못한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는 때에 축복이 임한다. 그 때에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능력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새로운 피조물을 창조하는 것이다”(소망, 172-173).

니고데모처럼 우리는 죄인의 괴수로서 동일한 방법으로 즐겨 생명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리스도밖에는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4:12).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 그러나 믿음이 우리의 구주는 아니다. 그것은 아무런 공로도 주지 못한다. 믿음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붙잡고, 죄의 치료제인 그의 공로를 힘입는 손이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회개조차 할 수가 없다. 성경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이스라엘로 회개하게 하사 죄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5:31). 용서가 분명히 그리스도에게서 오는 것처럼 회개도 그리스도에게서 온다.”(소망, 175)

 

(2) 영적 의존관계의 연합이다.

연합은 물론 분리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함산 믿음으로 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지속적인 것이므로 그 외에 다른 것과의 연합은 사라져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먼저 우리를 택하셨고, 우리의 구속을 위하여 무한한 값을 치루셨다. 그러므로 참된 신자는 모든 것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처음이요, 나중이며, 최선으로 삼아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연합을 하려면 우리는 약간의 값을 치르게 된다. 이것은 한 교만한 존재가 들어가야 하는 철저한 의존 관계인 것이다”(화잇주석, 15:4).

 

(3) 믿음으로 일어나는 연합니다.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믿음으로 연합은 이루어진다. 죄인이 그의 결점을 그리스도의 장점에, 그의 텅 빈 것을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에, 그의 연약함을 그리스도의 항구적인 능력에 연합시킨다. 그 때에 그는 그리스도의 정신을 가진다. 그리스도의 인성이 우리의 인성에 감응되며 우리의 인성이 신성에 감응된다. 이와 같이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인간은 거룩한 품격을 나누어 가지는 자가된다. 인간은 사랑받으신 분이신 예수 안에서 받으시는 바 된다”(소망, 675).

그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대의 마음 가운데 거하신다. 그대는 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그대의 마음을 항상 그에게 바침으로 말미암아 유지해야 할 것이다”(정로, 62).

 

이 연합은 두 금속을 하나로 용접 접속하듯이 두 존재가 하나로 되는 연합이 아니다. 한 인격 안으로 두 본질이 연합하는 것이 아니다. 각각의 영적 본질을 독립적으로 유지한 채 하나가 되는 관계로의 연합이다.

 

(4)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모방하며 그에게 완전한 依支를 할 때 오는 연합이다.

광희(狂喜)적 기분은 없을지라도 계속적 안정한 의뢰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대들의 소망은 그대들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고 그리스도께 있다. 그대들의 연약함을 그의 힘과 연합하고 그대들의 어리석음을 그의 지혜와 연합하고 그대들의 의지의 박약함을 그의 견인불발과 연합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들은 자신을 생각지 말고 그리스도를 쳐다보라.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의 품성의 아름다움과 완전하심에 대하여 생각하라. 극기의 그리스도, 굴욕을 받으신 그리스도, 순결하고 거룩하신 그리스도, 무한히 사랑하시는 그리스도, 이것이 심령의 명상할 제목이다. 그대들이 그의 형상으로 변화하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를 사랑함으로 그를 모방함으로, 그를 온전히 의지함으로 되는 것이다”(정로, 70).

 

4. 생명적 연합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신자들 안으로 유입되는 또는 불어넣어주는 체험적 연합이다. 영적 능력을 공급 받는 연합이다. 그래서 우리의 내적 본성을 새롭게 하시고 계속하여 강화시켜 주시며 열매를 맺게 하여 주신다.

요한복음 15:4-5에 나오는 비유는 이 생명적 연합을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내가 참 포도나무라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과 연결되었다고 해서 너희들이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자가 되고 그분의 약속의 상속자들이 될 수 있다고 생각지 말라. 나를 통하여서만 영적 생명을 받을 수 있다.”(소망, 675).

그분은 가지가 포도나무에 연결된 것은 너희가 나에게서 지지를 받는 그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어린 가지가 산 포도나무에 접 붙여져 섬유질(纖維質)과 섬유질이, 엽맥(葉脈)과 엽맥이 연결되어 이것이 포도나무 줄기로 자란다. 포도나무의 생명은 그 가지의 생명이 된다. 그와 같이 허물과 죄로 죽은 영혼이 그리스도와의 연결을 통하여 생명을 얻는다.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믿음으로 연합은 이루어진다. 죄인이 그의 결점을 그리스도의 장점에, 그의 텅 빈 것을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에, 그의 연약함을 그리스도의 항구적인 능력에 연합시킨다. 그 때에 그는 그리스도의 정신을 가진다. 그리스도의 인성이 우리의 인성에 감응되며 우리의 인성이 신성에 감응된다. 이와 같이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인간은 거룩한 품격을 나누어 가지는 자가된다. 인간은 사랑받으신 분이신 예수 안에서 받으시는 바 된다”(소망, 675).

가지가 산 포도나무의 한 부분이 된다. 뿌리에서 가지로 생명과 힘과 과실의 풍성함을 전달하는 일은 끊임없이 계속된다. 포도나무에 붙지 않은 가지는 살 수 없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살 수 없으리라고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에게서 받은 생명은 계속적인 교통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 내가 없이는 너희는 단 하나의 죄도 이길 수 없고 조그마한 유혹이라도 물리칠 수 없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은 그분의 성령을 계속적으로 받아들여 그분에게 봉사하는 일에 전적으로 복종하는 생애를 의미한다. 교통의 통로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계속적으로 열려 있어야 한다. 포도나무 가지가 산 포도나무에서 수액(樹液)을 계속적으로 빨아올리는 것처럼 우리도 예수께 매달려서 믿음으로 능력과 그분의 품성의 완전하심을 그분에게서 받아야 한다.

뿌리는 가지를 통하여 가장 먼 가지에 이르기까지 영양분을 공급한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신자들에게 영적 능력의 흐름을 전달하신다. 영혼이 그리스도께 연결되어 있는 한, 시들어 버리거나 부패할 위험은 없다”(소망, 676).

그리스도인 통일체는 같은 어미 둥치에 붙어있는 가지들 속에 있다. 그 어미 둥치는 포도나무에 접이 되어 있는 접목들을 지탱하는 중심이며, 생명을 주는 능력이다. 그리스도의 영적 생명에 계속 참여함으로써 사랑과 욕망 그리고 말과 행동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야 한다. 믿음은 활용함으로써 자라나게 되어 있다. 하나님과 가까운 생애를 하는 사람은 모두 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어떤 분이시며, 그들은 또 예수님께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깨달음을 갖고 있을 것이다. 하나님과의 사귐이 영혼에 깊은 감명을 끼치고, 조명하는 빛과 같이 얼굴에서 빛을 비추고 있을 때 그리스도의 거룩한 품성의 확고한 원칙들이 사람들을 통하여 반사될 것이다(리뷰 1897. 11. 9).”(화잇주석, 15:1-5).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바울처럼 이런 고백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후 4:16).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12:2)

 

III.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결과

1. 사법적 연합의 결과 신자는 의롭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정죄가 제거된다(8:1).

2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생명과 권능으로 살아간다(4:13; 2:20). “뿌리에서 가지로 생명과 힘과 과실의 풍성함을 전달하는 일은 끊임없이 계속된다”(소망, 676). “그리스도는 우리의 힘의 근원이시다. 그분은 포도나무이며, 우리는 그 가지이다. 우리는 산 포도나무에서 영양분을 받아야 한다 ”(1증언, 300-301).

그리하여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한다(7:16-20). “이 연합을 통하여 우리는 도덕적 영적 힘을 얻는다. 우리가 만일 그리스도의 정신을 소유하게 되면 의의 열매, 사람들에게 영광과 축복이 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5증언, 230).

이 연합은 더 나가서 신적 능력에 접착되어 큰일을 하게 한다.

그것은 인간을 신성과 연합시켜 그가 하나님의 사업을 할 수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간다. 인성은 인성과 접촉한다. 하나님의 능력과 인간의 힘이 결합될 때 완전한 성공이 주어질 것이다. 그리스도의 의가 모든 것을 이루기 때문이다”(믿음, 26).

 

3.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케 한다(3: 8-10).

과거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핍박을 견딘 사람들의 힘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하나님과 성령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이었다. 사단은 질책과 박해로 많은 사람들을 세상 친구로부터 분리시키긴 했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에서는 결코 끊을 수 없었다. 무서운 시련을 당한 영혼이 진리를 위하여 질책을 참는 것보다 더 크게 구주의 극진한 사랑을 받는 때는 결코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14:21)고 말씀하셨다. 진리로 인하여 신자가 세상 법정에 설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그 신자 곁에 서신다. 그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나타내시어 당신의 사랑으로 그의 마음을 기쁘게 하신다. 그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게 될 때에 구주께서는 그에게 저희가 몸은 죽일 수 있으나 영혼은 해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행적, 85).

 

4.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하는 일을 전망한다(22:30; 딤후 2:12).

 

스토리:

엘렌 화잇은 “Press together(서로 밀착하라, 누르라)”라는 어휘를 145, “press forward”130회나 사용하고 있다.

나폴레옹이 한 때 자기 군대 진영에서 불만이 고조되어 공개적인 반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정보를 휘하 장수들로부터 듣고, 휘하 전군을 연병장에 소집, 원형 대오로 밀집하여 서도록 명령, 자기는 원 가운데 서다. 그리고 명령을 내려 앞으로 전진(march)”을 여러 번 반복, 마침내 더 이상 좁힐 수 없는 작은 원형 밀집 대오 unison을 이루게 한다. 군인들은 사령관을 중심으로 빽빽하게 둘러 싸 더 이상 좁힐 수 없는 원을 만든 것이다. 총사령관 지도자를 중심으로 어께에 어께를 맞댄 상황에서 사령관은 병사들의 얼굴을 찬찬히 둘러보고 난후 돌연히 병사들을 빠져 나와 휘하 장수들을 불러 오늘밤 프랑스에는 반역이 안 일어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밀착 연합된다면 가정도, 교회도 문제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Posted by KAHN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