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언약(The Creation Covenant)
III. 창조언약(The Creation Covenant)
혹자는 하나님께서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와 맺은 첫 언약을 두고 행위언약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러나 이 언약을 창조언약으로 보는 것이 좋다. 이 언약에는 창조주 하나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 창조주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및 언약의 표징이 나온다.
A. 성경적 근거
창세기 1-2장에는 언약이라는 용어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언약적 당사자, 언약관계에 나오는 약속과 책임이 나오고 있어서 언약성을 함축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더구나 “저희는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서 내게 패역을 행하였느니라”(호 6:7)의 말씀에 비추어 첫 인간(아담)이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있었음을 확인하고 있다.
창 1:26-27
창 2:15-22
B. 언약 당사자
1. 창조주 하나님(창 1장)
삼위 하나님은 세계와 천체의 창조주가 되신다. 창세기 1:1은 하나님의 창조를 선포하고 있다. 창세기 1:1은 하나님의 존재를 자명한 공리처럼 전제하고 있으며, 그 하나님이 창조주가 되신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다. 창세기 1장은 우주론(cosmology)적인 선포와 우주발생론(cosmogony)적인 진술을 하고 있다. 피조물 안에 신성이 있는 것으로 보는 범신론은 초월적인 창조주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인격성을 배척한다. 창조론자는 이런 범신론을 배척한다. 창조주는 영원하신 하나님이며 여호와 되시는 인격신이시다. 인격성은 언약관계의 기저가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인용하시므로 창조 기사의 신뢰성을 인정하여 하셨다(마 19:4-5, 8; 막 10:6-8).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사 40:28).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1-3).
“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 1:2).
“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히 1:10).
창조는 삼위 하나님의 공역이다.
“만물의 창조주와 만물의 통치자이신 살아 계신 하나님께 충성 함으로써만 인류는 안식과 평화를 찾을 수 있다.”(선지, 97).
2.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창 1:26)--이 본문에서 보듯이 삼위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 언약 파트너는 아담이지만 또한 전 인류가 여기 포함된다.
(1)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개념
하나님의 형상 개념의 핵심은 관계 개념에 있다. 남자와 여자가 모두 “하나님의 형상”(창 1:27)으로 창조되었다. 하나님의 형상은 인격의 구체적인 특질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과 맺고 있는 독특한 관계를 함축하는 신학적 용어이다. 하나님의 언약의 중심에는 자기 백성과 나누는 하나님의 인격적 관계가 주축이 된다. 모세는 후에 부자(父子)관계를 나타내기 위해 같은 형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아담이 일백삼십 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대로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고”(창 5:3). 셋이 그의 아버지 아담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것처럼 아담은 그의 하늘 아버지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 그는 한 사람으로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하나님과 사랑의 교통을 하며, 하나님을 그의 품성과 영감과 지혜의 모본으로 따라가도록 창조되었다.
그 외에도, 하나님의 형상은 개념에는 외적인 모습, 내적 품성, 정신적, 영적, 도덕적 능력도 포함되어 있다. 이런 인격적 바탕 위에서 언약관계가 가능한 것이다. 인간의 피조성은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인간은 피조적 존재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이 창조주와의 언약적 관계를 맺은 것이다.
(2) 인간의 특권과 책무
하나님은 자기 피조물들과의 은혜로운 조화관계를 위한 대책을 밝히셨다. 이 관계에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신실하심과 헌신이 그 바탕에 놓여 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파트너가 되는 인간에게 약속과 책무를 말씀하셨다(창 1:28-30; 2:15-17). 이는 창조언약이 조건성을 함축하고 있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마치 좋은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정답게 말하듯이 언약의 파트너가 되는 인간에게 약속(특권)과 책무(과업)를 말씀하시므로 언약관계에 들어가신 것이다(창 1:28-30; 2:15-17). 인간은 창조주의 사역, 그의 지고하신 능력, 권위, 그리고 지혜를 인정함으로써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언약의 파트너가 되는 특권적 지위를 부여받았다. 창조주만이 인류를 위한 도덕적 의지와 선악의 기준을 정하실 자격이 있으시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들의 조물주의 성품과 도덕적 의지에 일치하여 살도록 창조된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자신들의 순종과 불순종에 스스로 책임을 지고 있다. 요컨대, 창조언약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인간의 순종이라는 양면성을 지녔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
a.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b. “땅을 정복하라.” 청지기로 땅을 잘 관리하고 정복하라. 인간은 땅를 경작하고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을 다스리면서 하나님을 대표하는 자가 되도록 부름을 받았다.
c. 동물계에 대한 통치권을 행사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 그들은 도덕적인 “하나님의 형상”을 유지해야 하는 과업을 부여받았다. 한 히브리 시는 이 책임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위대한 명예라고 찬사를 표했다.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시 8:5).
d. 인간 음식물 범위를 지정하다(창 1:29)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는 데 불가피한 조건으로서 그를 율법 아래 두셨다. 사람은 하나님의 정부의 백성이었으며 율법 없는 정부는 있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당신의 율법을 범할 능력이 없도록 창조하실 수 있으셨으며, 금단의 열매를 만지지 못하도록 아담의 손을 제어하실 수도 있으셨다. 그러나 그렇게 되었을 경우 사람은 자유로운 도덕적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자동 인형에 불과하게 되었을 것이다. 선택의 자유가 없었다면, 그의 순종은 자원하는 순종이 아닌, 강요된 굴종이 되었을 것이다. 품성의 계발은 전혀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방침은 다른 세계의 주민들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 하나님께서 가지신 계획과 배치될 것이었다. 이것은 지성적 존재로서의 사람에게는 합당하지 않은 것이 되었을 것이며 하나님은 독단적 군주라는 사단의 비난을 뒷받침해 주었을 것이다. ”(부조, 49)
“하나님의 율법은 그분 자신만큼 신성하다. 이것은 그분의 뜻의 계시요, 그분의 품성의 사본이며,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의 표현이다. 생물이나 무생물을 막론하고 모든 것 곧 천지 만물의 조화는 창조주의 율법에 완전히 순응하는 데 달려있다. 하나님께서는 생물뿐 아니라 모든 자연계의 작용을 다스리시기 위하여 법칙들을 제정하셨다. 만물은 무시할 수 없는 철칙들 아래 있다. 그러나 자연계에 존재하는 만물은 자연 법칙의 지배를 받으나 지상에 사는 만물 중에 사람만은 도덕적 율법에 복종할 의무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극치인 사람에게 당신의 요구를 이해하며 그분의 율법의 공의와 자비, 그리고 그에 대한 율법의 신성한 요구를 이해할 능력을 주셨다. 그리고 사람에게는 성실한 순종이 요구되었다. ”(부조, 52)
시인은 하나님의 모든 창조 사역에 대하여 감사를 표한다. “나의 평생에 야훼께 노래하며 나의 생존한 동안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시 104:33). 인간으로 하여금 이 땅을 다스릴 그의 명예스러운 대리자로 높여주신 창조주의 권한을 위한 이스라엘의 감사는 다함이 없다. 특별히 인간들을 매 안식일에 하나님과의 새로운 교제 안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초청은 창조주의 언약의 파트너가 누리는 최고의 경험이다(창 2:2-3). 하나님의 질서 있고 완전한 창조 사역 기사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강력한 동기부여를 한다(시 19:1-6; 104장 참조).
창세기 1장은 이스라엘이 천지의 창조주로서 경배하고 찬양하는 하나님을 향한 송영의 역할을 한다. 이스라엘만이 이 인자하시고 도덕적인 창조주를 그들의 역사적 경험을 통해 안다. 창세기 1장은 지구상의 모든 남녀들에게 인간의 기원에 대한 그와 같이 영광스럽고 고상한 관점으로 새로운 자기 이해와 삶의 목적을 갖게 되도록 부르고 있다. 창세기 1장은 모든 사람들을 향한 보편적 호소이다.
C. 창조언약의 특성
아담은 삼위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의 언약 안에서 완전하게 창조되었으며 그의 마음의 육비에는 하나님의 법이 입력되어 있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실이 이를 시사하고 있다(창 1:26-27, 31).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율법에의 순종을 요구할 수 있었다. 인간창조는 구속언약의 전제 아래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창조언약은 은혜언약적인 특성이 깔려 있다고 보는 논리가 성립된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이점은 그 외에 고전 1:23-24; 2:2, 7; 벧전 1:18-20; 계 13:8; 히 13:20에서도 시사되고 있다.
D. 안식일: 창조 언약의 성례전적 표징
하나님의 창조 언약을 그의 구속 언약과 연결하는 고리는 하나님의 안식일 쉼이다(창 2장).
인간은 창조의 “면류관”이 된다. 그러나 인간창조는 창조 기사의 결론이 아니다. “제칠일”이 창조 기사의 결론으로서 세 번씩이나 강조되었다(창 2:2-3). 창조의 목적은 창조주와 동행하는 것이다. 즉 찬양과 경배의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새롭게 하시는 쉼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엿새 동안의 일은 제칠일의 새롭게 함과 “재창조”를 통해 심원한 의미를 부여받는다.
하나님 없는 인간은 자기 자신을 모든 것의 척도로 삼는다. 이는 인간을 저열한 동물의 수준으로 격하시키기 십상이다. 창조주와의 관계가 없는 인간은 위험스러운 존재로 변한다. 하나님 없는 인간은 신률(神律, theonomy) 대신 자율(自律)을 내세우기도 하고 타율(他律)의 칼을 휘두르기도 한다. 이렇게 되는 경우 인간은 거룩한 창조주에 향한 영적 의식, 곧, 자신들의 소속감과 책임감을 상실하고 만다. 안식일은 하나님과의 언약에의 충성과 순종의 시금석이 된다.
이런 근본적인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창조 제도와 규범으로 정하시고 친히 그 모본을 보이셨다.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창 2:2-3).
위 본문은 안식일이 완전하고 죄 없는 상태에 있는 인간을 위하여 마련된 창조의 제도 일부로서 제정되었음을 밝혀주고 있다. 혹자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하지” 않으셨으므로 모세 시대까지 안식일 준수 명령에 대한 성서적 증거가 없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주경가들은 하나님의 모본 그 자체가 그의 명령으로서의 권위를 지닌다고 정곡을 찌르는 응답을 한다.
하나님께서는 여섯째 날 창조하신 아담과 하와와 함께 첫 안식일을 지키셨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죄 없는 완전한 상태로 지음을 받은 인간은 창조주의 모본을 닮아가라는 초청을 받았다(참조 엡 5:1). 하나님께서 자기 계획을 아브라함에게 감추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창 18:7), 아담에게 축복된 안식일 쉼의 진리와 인류의 유익을 위한 그 거룩성을 감추지 않으셨다.
칼 바르트(Karl Barth)는 창조의 안식일신학에 관하여 의미심장한 진술을 하였다.
“언약의 역사는 사실상 제칠일의 사건 속에 세워졌다. 분명히 의미하는 바는 피조물들, 특별히 인간은 제칠일에 하나님과 함께 쉬었으며 하나님의 자유, 안식 그리고 기쁨을 나누었다는 것이다. 그 때는 심지어 뒤로 미루고 멈추어야 할 어떤 일도 아직 없던 때였다. 그러므로 그 안식일의 자유와 쉼과 기쁨은 피조물 자신의 일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하신 일을 되돌아보는 것이었다.”.
이러한 창조 안식일 신학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창조된 인간이 하나님 닮아가기(imitatio Dei), 즉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모본을 따라가는 신성한 의미로 초청받는다는 것을 뜻한다는 유대 전통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서의 인간의 실체는 하나님 닮아가기(imitation Dei)로의 부르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칼뱅은 이러한 상관관계를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표현하였다.
“하나님 자신의 모본으로 어떤 사소한 자극도 주어지지 않는다.…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자기의 모본을 따르도록 청하고 권하는 것 외에는 순종에 이르게 하기 위해 우리를 부드럽게 꼬이지도 않으시고 더 효과적으로 우리를 유혹하지도 않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안식일에 교제하기 위하여 자가자신을 주신다.
사카에 쿠보가 그것을 잘 표현하였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먼저 안식일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우정의 기념이요, 인간과 함께 하는 하나님의 임재의 기념비(물)가 된다.”
하나님이 제칠일에 쉬시고 그 날을 복주시고 거룩하게 하신 것은 단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인간을 축복하고자하는 그의 사랑이 안식일에 담겨 있다. 그 날 하나님의 새롭게 하시는 쉼으로 들어갈 때 모든 피조물들은 창조주와의 바른 언약관계에 서게 된다. 안식일의 쉼이 없는 경우 인간은 창조주와 분리되어 스스로 의미와 목적을 잃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의 축복 속에서 순진무구한 인간과 생명의 관계를 맺도록 설정하셨다. 이 생명의 관계에 진입하는 것은 성별과 헌신의 체험으로의 진입이 된다. 인간은 엿새 동안 일한 후에 하나님의 쉼에 참여함으로써 매주 다가오는 유익을 경험한다.
이 하나님의 제칠일의 축복은 안식일의 성찬 축복의 기능을 한다. 왜냐하면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신 8:3)기 때문이다. 무구한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그 축복을 필요로 했다면 죄인들은 얼마나 더 하겠는가! 결국, 인간 존재의 거룩한 의미는 단지 그들이 매일 하는 노동에으로부터 해방되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날에 삶의 의미를 새롭게 하고 하나님을 찬양하여 자신이 피조물임을 표현하는 거룩한 언약적 쇄신행사에서 찾아지는 것이라는 것이다. 버카우워(G. C. Berkouwer)는 하나님의 쉼의 날은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바대로(막 2:27) 은혜로 세상에게, 즉 사람을 위하여 주어진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스도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즉 모든 인류를 위하여 있는 것”(막 2:27)이라고 하심으로 안식일이 창조의 법도로 인정하셨다. 폰 라트(Gerhard von Rad)는 심지어 창조 안식일은 “인간을 위하여 필요”하였고, “언젠가는 그를 영원히 종말론적으로 맞이할 것이라”고 하였다. 안식일은 완전한 인간성을 위한 성례전으로 마련되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 자신의 새롭게 하는 기쁨과 유지시키는 쉼으로 들어갈 수 있다. 하나님은 그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을 위한 그분의 사랑과 헌신의 거룩한 서약으로 그의 거룩한 안식일을 기념하셨다.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쉼”의 의미는 신약의 히브리서에 선포되어 있다. 하나님의 모본을 따라 안식하는 축복이 남아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히 4:10-11).
히브리서 4장은 하나님의 원 안식일의 쉼을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주시는 구속하시는 은혜의 “쉼”과 연결시킨다. 저자는 유대 그리스도인 독자들에게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기를 반복해서 거절했던 이스라엘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들이 그렇게 한 것은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며 “항상 미혹되어” 하나님의 길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히 3:7-11; 시 95:7-11에서 인용). 그는 그들의 과거의 역사로부터 “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히 3:19; 4:6과 비교)고 결론을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의 제안은 지속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히 4:1-2).
더 나아가 사도의 편지는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었느니라”(히 4:3; 창 2:2-3에서 인용)고 하면서 현재의 “복음적‘ 은혜를 창조 사역이 완성된 후의 하나님 자신의 쉼과 연결시킨다. 저자는 모든 독자들에게 그가 창조의 안식일에 대해 말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안식에 들어가라고 권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4:9-11). 그는 은혜의 언약이란 곧 지금 예수께서 하나님 앞에서 하늘의 대제사장으로서 주시는 메시아적 안식이라고 확인해 준다(4:14-15).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4:16).
이러한 메시아적 적용은 창세기 2장에 기록된 하나님의 안식일 안식에 대한 신약의 해석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쉼”을 하나님의 거룩하게 하시는 임재로 확인한다. 즉 하나님 자신의 “쉼”으로 들어가는 것이 이제 그리스도의 임재를 통하여 가능하게 된 것이다(출 33:14과 마 11:28을 비교해 보라). 하나님의 쉼에 들어가는 약속은 마침내 신자들이 “장차 올”(히 13:14) 도성에서 “평화의 하나님”의 영원한 쉼에 들어갈 때까지 지속될 것이다.
인간이 홀로 있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창조의 뜻과 계획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목적은 그가 시간 속의 영적 성전, 즉 하나님의 공적 예배를 위한 거룩한 시간으로서 제칠일 안식일의 쉼을 창조하셨을 때 완성되었다. 하나님의 안식일은 인간 존재에 거룩의 차원을 더 해 주었다. 하나님은 세상을 오직 인간의 물리적 복지와 번영을 위해서만 마련한 것이 아니라 언약의 동반자로서의 사람을 위해 그리고 그가 그의 형상을 따라 창조한 모든 이들과 나누는 영원한 교제를 위해 준비하셨다(사 41:8; 약 2:23 참조).
하나님께서 제칠일에 쉬셨다고 진술하는 창세기의 역사 기록은 사도들의 복음과 그 미래의 희망을 암시한다. 히브리서는 하나님의 “쉼”을 구원의 복음으로 확대한다. 히브리서 4장은 타락한 이후에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 창조의 안식일이 계속된 복음적 의미를 제시한다. 버카우워(G. C. Berkouwer)는 이러한 계속성의 의미에 대해 바르게 설명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 이후 하나님의 쉼으로부터 신자들이 들어가게 될 쉼, 즉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아직도 남아 있는 안식에 이르기까지 역사를 통해 계속된다(히 4:3, 9). 하나님은 자신을 위하여 취하신 것을 사람과 나누신다.”
구속의 역사 안에서 창조의 안식일이 “계속된다는 것”은 아담과 이스라엘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 그리고 미래의 안식일, 즉 아직 “남아 있으면서” 영광의 왕국에서의 성취를 기다리고 있는 “안식일의 쉼”(히 4:9)을 약속하면서 사도 교회와 맺은 하나님의 언약이 근본적인 통일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려준다.
헤셀 (Abraham J. Heschel)은 옛적의 유대 전통이 어떻게 안식일이 미래의 모본을 보여주는지를 설명하였다. “안식일은 다가 올 세계처럼 거룩함을 소유하고 있다.” 탈무드에 따르면 안식일은 메엔 올람 하바(me‘en ‘olam ha-ba)인데, 이것은 낙원에 대한 미리 맛보기, 즉 “거기로부터 하늘이나 다가 올 세상의 생명들이 그 근원을 취하는 우물”로서 경험하게 될 우리 삶의 일곱 번째 부분을 의미한다. 헤셀은 설명한다. ”안식일 율법은 몸과 마음을 거룩함의 차원으로 인도하고자 한다. 그것은 사람은 자연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자연의 창조주와의 관계도 서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자 한다.“
안식일은 에덴에서 모든 것의 공동 창조주이신 그리스도에 의하여 그의 언약적 “은혜”로서 인류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칼 바르트는 신약 학자로서 창조 안식일에서 그리스도 중심의 의미를 추적하였다. 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창조에서 언약이 더 이상 보이지 않거나, 언약에서 창조가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창조가 은혜라는 주장은 유지될 수 없다.” 소위 구약의 하나님이 열등한 “유대”의 신이라는 마르시온의 주장은 구약을 바르게 읽은 것이 아니다. 그런 신관으로부터는 인간 구원의 메시지를 읽어낼 수 없다.
E. 언약관계의 시금석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7)
하나님께서는 창조언약에 자발적으로 충성하고 순종하는 시금석으로 동산에 선악과나무를 두셨다. “동산 중앙의 생명나무 곁에 있었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우리의 첫 조상의 순종과 믿음과 사랑을 시험하게 될 것이었다.”(부조, 48-49). 이는 조건성이 내포된 것을 뜻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는 데 불가피한 조건으로서 그를 율법 아래 두셨다. 사람은 하나님의 정부의 백성이었으며 율법 없는 정부는 있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당신의 율법을 범할 능력이 없도록 창조하실 수 있으셨으며, 금단의 열매를 만지지 못하도록 아담의 손을 제어하실 수도 있으셨다. 그러나 그렇게 되었을 경우 사람은 자유로운 도덕적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자동 인형에 불과하게 되었을 것이다. 선택의 자유가 없었다면, 그의 순종은 자원하는 순종이 아닌, 강요된 굴종이 되었을 것이다. 품성의 계발은 전혀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부조, 49).
“완전하고 영구적인 순종이 영원한 행복의 조건이었다. ”(부조, 49).
“천사들처럼 에덴의 거주자들도 시험 아래 있었으며 그들의 행복스러운 지위는 창조주의 율법에 충성하는 조건하에서만 지속될 수 있었다. 그들은 순종하고 살든지, 불순종하여 죽을 수도 있었다”(부조, 52-53).
선악과 시금석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1) 하나님과의 인간의 관계는 선악시비를 분별할 수 있는 자유선택의 관계이다.
“의지는 사람의 성질에 있어서 지배하는 힘이요, 결정하고 선택하는 능력이다. 이성을 가진 사람은 옳은 것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모든 경험에서 “너희 섬길자를 오늘날 택하라”(수 24:15)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사람은 하나님 의지의 편에 자기의 의지를 순종 시킬 수가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 자신을 하나님의 힘에 결합시켜, 어떤 경우에라도 악을 행하지 않게 되는 경지에 이를 수 있다. ”(교육, 289).
(2)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인간은 하나님을 완전히 신뢰를 하면서 맡겨진 과업을 다해야 하는 관계에 있다.
(3) 하나님께 향한 인간의 관계는 이어지는 선택의 자유를 행사하여 처음의 관계를 지속할 때 언약의 효력이 지속되는 관계이다.
F. 깨어진 관계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창 3:6-7).
하와는 사단의 매개물로 사용된 뱀 (고후 11:3, 14)의 유혹에 넘어갔다. 남자는 아내의 제안에 따랐다. 모두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른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불순종하므로 하나님과의 언약관계가 깨트려졌다. 그 결과 관계의 변화가 일어났다.
(1) 남자와 여자의 관계가 손상되었다.
(2) 인간과 세계의 관계가 공포, 고독, 죽음의 관계로 바뀌었다(롬 8: 19-23; 벧후 3:13).
(3)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깨졌다. 친교와 교제의 관계가 소외와 분리 관계로 변화되었다.
(4) 하나님의 형상이 훼손되었다.
G. 창조언약의 중요성
인간은 창조의 원 계획과 언약으로 회복되어야 한다. 거기에서 그리스도는 거룩한 언약의 선물로 인간에게 주어진 좋은 창조를 이루시는 능동적인 창조주이시다. 사실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가 존재하는 모든 것의 공동 창조주라고 확언한다(요 1:1-3; 히 1:2).
바울은 심지어 그리스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골 1:16-18).
창조는 선물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사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 언약은 복음 선포의 궁극적 목적을 이해하는 데 절대적으로 본질적인 것이다. 이 언약을 등한시한 것이 성령의 전인 사람의 몸의 존엄성을 무시하고 또 하나님의 손으로 창조된 책임 있는 피조물로서 지구를 질서 있고 아름다운 상태로 유지할 책임을 허물면서도 인간의 “영혼”은 강조하는 축소된 복음으로 귀결되었다.
그러나 성서적인 창조 신학은 구원과 인간 도덕성 신학을 위한 대신할 수 없는 기초를 이루고 있다. 하나님의 구속적 언약은 인간과 맺은 원래의 창조 언약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다. 창조주를 향한 우리의 순종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피조성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것을 인해 영원토록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이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계 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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