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 언약 (The Abrahamic Covenant)
VI. 아브라함 언약 (The Abrahamic Covenant)
I. 성경 근거(창 12:1-3; 15:1-21; 17:1-14)
여호와께서는 노아의 자손 셈의 계열(창 11:10-31)에서 아브라함 한 사람을 축복의 통로로 부르셨다. 아브라함 언약은 창세기 12장, 15장 그리고 17장에 나온다. 하나님께서는 24년 동안 세 번에 걸쳐 아브라함과 맺으셨던 것이다. 아브라함이 갈데아 우르를 떠나 북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있는 하란 땅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 할 땅으로 가라”(창 12:1)는 부름을 받았다. 여호와께서는 그의 “씨”(창 12:1-3; 22:18)를 통하여 그와 지상의 모든 사람들을 “복주겠다”고 약속하셨다. 신적인 이 축복 약속은 창세기 3-11장에서 인간이 삼중 저주 아래 놓인 (3:17; 4:11; 6:17) 땅의 상황과 대조적이다. 이는 여호와께서 인간에 향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신 신실성을 말해주고 있다.
II. 언약의 당사자
1. 언약의 하나님--야훼, 전능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나는...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야훼(I am the LORD)"로 소개하셨다(창 15:7). “야훼(LORD)”는 창조주 하나님의 개인적인 이름이다(창 2:4; 4:26). 출애굽기 3:14의 “나는 나다(I AM WHO I AM)가 야훼 이름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야훼는 그 어떤 것도 제어할 수 없는 자존적(自存的) 존재이시며 과거, 현재 및 미래에 대한 주권을 지니신 분이다. 그는 창조와 구원을 창발하시고 과거, 현재 및 미래를 궁극적으로 통어하시는 분이시다.
또한 야훼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이루시기에 모두 능하시다는 의미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EL Shaddai)”(창 17:1)고 자기를 나타내셨다. 이 하나님의 이름은 주로 창세기와 욥기에 나온다. 구약성경에서 EL은 야훼와 동의어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민 23:8, 19, 22, 23; 24:4, 8, 16, 23; 시 16:1; 17:6; 85:8; 사 40:18; 42:5 등). “솨다이”의 의미는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지만, “전능한”(사 13:6; 욜 1:15), 인간의 연약함에 대한 보증으로 하나님의 “힘,” “강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아브라함이나 욥의 체험에 적합한 하나님의 상(像)이다.
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되었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창 17:7)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에 참여하며 또 너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오늘날 네게 향하여 하시는 맹세에 참여하여 13 여호와께서 이왕에 네게 말씀하신 대로 또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대로 오늘날 너를 세워 자기 백성을 삼으시고 자기는 친히 네 하나님이 되시려 함이니라”(신 29:12-13).
2. 언약의 상대자--아브라함과 그의 후손
아브라함은 우상 숭배가 만연한 우르지방에서 확고하게 하나님을 경배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자기의 뜻을 전달하시고, 거룩한 율법의 요구와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될 구원에 관한 명확한 지식을 주셨다.
“아브라함은 미신과 이교 신앙 가운데서 자랐다. 심지어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보존하여 왔던 그의 아버지의 가족들까지도 그들을 둘러싼 유혹적인 감화에 굴복하여 여호와보다도 “다른 신들을 섬겼”(수 24:2)다. 그러나 참 신앙은 중단되지 말아야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당신을 섬기는 남은 무리를 보존하셨다. 아담, 셋, 에녹, 므두셀라, 노아, 셈은 계통을 이어가며 각 시대를 통하여 그분의 뜻을 담은 귀중한 계시들을 보존하였다. 데라의 아들 아브라함은 이 거룩한 신탁(信託)의 후계자가 되었다. 우상숭배는 사방에서 그를 유혹하였으나 허사였다. 신실치 못한 자들 가운데서도 신실하며, 만연하고 있는 배교에도 부패되지 않은 채 그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을 끝까지 고수하였다.”(부조, 125).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충성한 것이 그의 공로가 되어 하나님께서 그를 선택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항상 그 분의 사랑과 은혜와 자비에 기초되어 있다(참조, 신 7:6-11). 아브라함의 생애에는 부끄러운 점들이 나타난다(창 12:10-20; 16:1-6; 20:1-18). 그러나 아브라함은 큰 희생을 치르면서 순종의 발걸음으로 갈데아 우르를 떠났고 끊임없이 성장 발전하여 인간 사회에서 높은 희생의 경지까지 도달한 것을 보여준다(창 12:1-4; 18:22, 23; 22:1-14).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히 11:8). 아브라함의 의심없는 순종은 온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가장 현저한 믿음의 증거들 가운데 하나이다. ”(부조, 126).
““하나님의 벗” 아브라함은 우리에게 훌륭한 모본을 보여 주었다. 그의 생애는 기도의 생애였다. 그는 장막을 치는 곳마다 그 근처에 제단을 세우고, 장막에 유하던 모든 사람들을 불러 조석으로 희생 제물을 드렸다. 그의 장막이 옮겨갔을 때에도 제단은 남았다. ”(부조, 128).
3. 안약 체결 단계
1차 -- 창세기 12:1-3
하나님의 은혜의 선택을 받은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란을 떠났다. 전 인류 구원의 준비가 되는 단계이다.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3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4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시방 거하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행7:2-4 ).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우상숭배가 만연한 환경을 떠나 당신에 관한 지식을 보존하게 하시려고 그를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셨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창 11:31)에 살 때에 처음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이 그에게 임하였고, 그것에 순종하여 하란으로 옮겨갔다. 그의 아버지의 가족은 이곳까지 그와 동행하였는데, 이는 그들이 우상을 숭배하는 동시에 참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도 연합하였기 때문이었다. 이곳에서 아브라함은 데라가 죽기까지 머물렀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은 그에게 그의 아버지의 무덤으로부터 앞으로 나아가라고 명령하였다. 그의 형제 나홀과 그의 가족은 그들의 고향과 우상을 버리지 않았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 외에, 오래 전에 죽은 하란의 아들 롯만이 부조(父祖)의 순례 생활에 동참하기로 선택하였다”(부조와 선지자, 127).
2차 -- 창세기 15:1-21
이 단계에서는 제안(7절), 지시(9절), 하나님의 주도권과 사랑의 순종(13-15절), 언약의 비준 의식((17절)이 나온다.
아브라함은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창 15:1-5 참고)라고 하여 자기 질문에 대한 답까지 내놓았다.. 그는 신임하는 종 엘리에셀을 양자로 삼아 그의 소유를 상속시키자고 하나님께 제의한 것이다.
아브라함은 아직도 부조는 자신의 믿음을 확증해 주며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목적이 성취되리라는 사실을 후세대들에게 증거해 줄 눈에 보이는 어떤 표징을 간구하였다. 주께서는 자신을 낮추시어 당신의 종과 언약을 맺기로 하시고 엄숙한 계약의 비준(批准)을 위하여 사람들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행하여지던 형식을 채택하셨다. 하나님의 지시대로, 아브라함은 각각 3년 된 암소와 암염소와 숫양을 희생으로 드리고, 그것들을 쪼개어 그 조각들을 조금씩 떼어 놓았다.
아브라함은 자기의 아들이 후사가 되리라는 보증을 받았다. 그 때 그는 장막 밖으로 인도되어 하늘에서 반짝이는 무수한 별들을 쳐다보라는 지시를 받았다.
3차 -- 창세기 17:1-14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유한 지 거의 25년 되었을 때에 주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1-16 참고)고 말씀하셨다.
아브람은 언약의 마지막 단계에서 새 이름 아브라함을 받았다(창 17:1-14). 이는 하나님 앞에서 아브라함의 품성의 변화와 관계의 변화 신분을 보여준다.
III. 언약의 약속
아브라함의 언약에 나오는 약속들은 보존, 보호, 후손, 소유, 번영 등 지상적, 물질적인 면과 메시야, 복음 등 영적인 면이 담겨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들 중에 메시아적 약속은 그 절정을 이루고 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야훼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야훼를 위하여 그 곳에 단을 쌓고(창 12:2-3, 7).
1. 방패의 약속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 15:1)고 하였다. 신자들에게 하나님은 믿음의 방패, 보호의 방패가 된다. 이 방패의 약속은 씨-자손의 언약적 약속을 이루시는 일의 전제가 된다. 이 약속에는 늘 함께 하여 주신다(I will be with you)는 보호의 임재 약속이 함축되어 있다. 이 함께하시는 약속은 아브라함의 자손에게도 계속되었다(창 26:3, 4; 28:15; 31:3; 출 3:12; 신 31:23; 수 1:9; 3:7; 7:12; 사 41:10; 렘 1:8; 학 1:13 등). 임마누엘 되신 그리스도께서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고 하여 아브라함 언약의 약속의 계속성을 확인하셨다.
2. 큰 민족에 관한 약속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창 12:2).
아브라함이 한명의 아들도 없었을 때 언약의 하나님께서는 그가 크고 강한 민족을 이루리라고 반복하여 약속하셨다(18:18; 46:3). 출애굽 때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언약관계에 들어갔을 때 민족이 되었다(출 19:5-6; 신 26:5).
3. 창대한 이름 약속(창 12:2)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창 12:2).
이름은 품성과 명성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아브라함은 섭리의 인도를 설명할 수 없었으며 장래의 유업을 실감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는 약속을 굳게 붙잡았다. 그는 열심히 기도하며 어떻게 그의 백성과 양떼의 생명을 보존할는지를 생각하였으나, 환경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의 믿음을 뒤흔들도록 허용하지 않았다. 그는 기근을 피하여 애굽으로 내려갔다. 그는 가나안을 저버리거나 궁지에 몰린 나머지 그가 떠나온 갈대아 땅으로 되돌아가지 않았다. 갈대아 땅은 양식이 결핍되는 일은 없었지만 그는 될 수 있는 대로 약속의 땅에서 가까운 곳에 임시로 피난하였다가 하나님께서 그를 두셨던 곳으로 곧 돌아가고자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을 그들이 알지 못하는 길로 인도하시나 당신을 신뢰하는 자들을 잊어버리거나 내버리시지 않으신다.”(부조, 128).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들어가는 자들의 이름을 창대케 하신다.
4. 전 인류적 축복 약속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 12:3).
창조주께서는 전 인류의 복의 근원으로 택하신 아브라함을 통하여 모든 인간에게 선포하신 “복”의 핵심은 구속의 목적을 갱신하신 점에 있다. 그는 낙원에서 아담과 하와를 ”축복하셨고“(창 1:28; 5:2), 홍수 이후에 ”노아와 그의 아들들을 축복하셨다(9:1).“ 하나님은 인간을 속량하고 악을 멸하고 낙원을 회복하실 구주에 대한 이전의 약속을 이러한 방식으로 분명히 하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모든 민족”을 축복하시겠다는 약속을 우주적 차원으로 확장하셨다.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 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창 28:14).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전 세계 인간들에게 복음 선교적 사명을 주어 증거케 하였다. Ellet Waggoner는 아브라함이 세운 제단들은 자기 권속들만 위한 것이 아니고 주변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리는 복음전도의 역할을 하였다고 보았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노아처럼 의의 설교자였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가난안 땅 여러 족속과 거민들을 정복하기 전에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을 통하여 “선교사적 복음 증인들도 활동케 한 사랑을 나타내신 것이다. Meredith Kline은 이 점을 강조하여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주변 이바인들에게 이런 선교사적 복음 전도의 활동을 하여 창조주와 구속주 되시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도록 호소하신 것으로 보았다.
5. 땅의 약속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는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창 12:7; 13:16; 15:18; 17:8에 반복)고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손”에 대한 약속을 가나안 “땅”을 위한 약속과 연결시키셨다. 이 약속은 회복될 낙원에 대한 상징적 서약과 예언적 표상의 기능을 한다. 예수와 바울은 모두 원형적 성취에 있어서는 이 약속의 지리적 한계를 제거하고 그 “땅”을 확대하여 전 세계를 포함시켰다(마 5:5; 롬 4:13 참조). 맥코미스키(T. McComisky)는 “마치 아브라함의 첫 후손들이 땅의 약속을 받은 것처럼, 그의 미래의 후손들은 언젠가 평화의 왕이 정복한 세상을 아브라함의 유업으로 받게 될 것이다”고 적절하게 결론을 내렸다.
“사람들과 더불어 세우신 하나님의 이같은 언약의 보증으로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연기나는 풀무와 타는 횃불이 쪼개진 희생 제물 사이로 지나가며 그것을 모두 태웠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의 음성이 아브라함에게 들리며 “애굽 강에서부터 큰 강 유브라데까지” 가나안 땅을 그의 후손들에게 주실 것을 확증하셨다. ”(부조, 137)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에게 주신 선물은 다만 가나안 땅뿐 아니라 온 지구가 포함되었다. 그래서 사도는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롬 4:13)고 한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된다는 것을 성경은 명백히 가르친다.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 곧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갈 3:29; 벧전 1:4)을 이을 자들이며 그 유업은 죄의 저주에서 해방된 이 지구이다. 왜냐하면 “나라와 권세와 온 천하 열국의 위세가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민에게 붙인 바 되리니”,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단 7:7; 시 37:11)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부조, 169)
6. 씨-자손의 약속
씨-자손은 히브리어 원문에서 단수명사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개인과 집단 모두에게 사용되었다.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 12:3)에는 메시아적 축복이 내포되어있다. 신약의 기자들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에서 메시아적 약속을 이해하였다. 바울(갈 3:8과 16절에서)과 베드로(행 3:25-26에서)는 창세기 12:7; 22:18과 28:14에 나오는 “씨” 혹은 “자손”이란 단어를 부활한 메시아 한 분에게 적용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다른 곳에서 “그리스도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을 아브라함의 자손, 곧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갈 3:29)에 포함시켰다. 그리하여 그의 자손이 하늘의 별들처럼 많아진 것이다.
아브라함이 “야훼께서 그에게 나타나신”(창 12:7) 세겜에서 그에게 단을 쌓았다. 이 예배 행위의 의미는 심장하다. “단을 쌓고 희생을 드리는 것 둘 다 약속을 믿는 믿음의 표현이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필수적”이다. 그런 형태의 예배가 “야훼의 이름을 부르니라”(창 12:8; 4:26; 21:33; 26:25과 비교)는 본문에 묘사되어 있다. 후에 스바냐 선지자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 모든 백성이 “야훼의 이름을 부르리라”(습 3:9)고 하였다.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 데 아무런 기여도 할 수 없었다. 아브라함은 그의 아내 사라를 통하여 아들을 낳을 수 없었다. 엘리에셀을 입양하여 양자로 삼기도 하고, 여종 하갈을 통하여 이스마엘을 낳기도 한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거룩한 약속을 성취하는 데 무엇인가 공헌하려는 인간적인 노력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인간적 시도들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로 하여금 자기들의 아들을 얻을 수 있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창조 능력에 의한 것이었다. 아브라함 언약은 전적으로 하나님만이 구원하실 수 있음을 가리킨다.
이어지는 아브라함의 믿음 이야기(창 15장)는 성경에서 구원의 믿음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보증이 된다. 하나님의 행동의 순서가 의미심장하다. 하나님은 먼저 약속을 믿는 믿음을 인해 아브라함을 의롭게 여기셨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 주께서는 하늘의 셀 수 없는 별을 가리키며 그의 약속의 예증으로 삼으셨다. 그리고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15:5)고 하셨다. 이는 사도 바울의 복음 이해의 주축이 되었다. 바울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아브라함을 두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모델로 삼았다. 그는 하나님을 믿는 모든 자들을 위한 믿음의 의의 모델이 된 것이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롬 4:2-4).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롬 4:23-24).
하나님께서 “이 땅”에 대한 그의 약속을 반복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주 야훼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창 15:8)라고 물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공식적인 언약을 맺음으로써 답하셨다. 이제 하나님의 약속은 새 언약 즉 “아브라함 언약”에 통합되었다.
III. 아브라함 언약 체결 의식
아브라함 언약을 개시한 의식은 상징적 의미로 가득 차 있다. 주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의 언약 연대의 장엄한 비준을 위해 동물 희생을 준비하라고 명하셨다. 아브라함은 자기 문화에서 언약을 체결할 때의 습관을 따라 동물들을 두 조각으로 나누어 각각 반대편에 나열하였다(15:8-10).
아브라함이 이상적인 꿈을 꾸고 있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그의 약속이 실현되기 전 “사백년”의 기간 동안 일어날 일들을 그에게 선포하셨다(15:12-16). 창조주는 아모리 인들이 그들 자신의 시험 기간을 갖도록 허락해 주셨다(15:16). 아브라함은 그의 자손과 땅에 대한 약속이 성취되도록 그 계획적인 지연에 대해 끈기 있게 기다려야만 하였다.
의식적인 희생을 드리던 날, 아브라함은 한 놀라운 현상, 즉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을 비준(문자적으로 “자르는”)하는 의미로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는 것을 목도하였다(15:17-18). 이 의식에서는 하나님만이 행동하고 계시며, 아브라함은 수동적으로 있을 뿐이었다(15:12). 이제부터 심지어 희생 자체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아무런 설명을 듣지 못할 때에라도 희생은 언약의 중심이 되었다.
이 언약 의식의 의미는, 짐승의 희생적 죽음이 상징하는 바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그의 약속을 성취시키려는 그의 계획의 조건 없는 확실성을 스스로에게 서약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언약의 책임을 스스로 지신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런 개념에서 모타이어(J. A. Motyer)는 “창세기 15장에는 갈바리의 날이 암시되어 있다. 그 때에 그는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셨다”고 하였다.
아브라함이 99세가 되었을 때, 그는 아직도 사라로부터 아들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시어 “아브람의 구십구 세 때에 야훼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창 17:1-2)고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존귀한 아버지]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많은 무리의 아버지]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창 17:4-5)고 하셨다.
이렇게 이름을 바꾸는 것은 우리 안에 중생을 이루시는 이는 하나님이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자식 없는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만드셨다. 왜냐하면 그가 무수히 많은 무리의 조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삭은 분명히 하나님의 창조의 기적으로 얻은 아들이었다. 아브라함의 언약은 재창조의 약속에 기초하여 정의된다.
IV. 언약의 준수--언약의 조건성
A. 무조건적 언약 논리들
어떤 역자들은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 12:3)는 구절을 “스스로 축복하리라”로 번역한다. 그렇게 되면 이 구절에서 메시아적 축복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신약의 기자들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에서 메시아적 약속을 이해하였다.
아브라함의 언약이 조건적인지 무조건적인지에 대한 질문은 세대주의 신학과 언약 신학 사이의 논쟁의 요점이 되어 왔다. 세대주의자들은 아브라함의 언약을 무조건적이고 영원하며 변경할 수 없는 하나님의 계획으로 믿고 있다. 그것의 문자적인 성취는 개인이나 혹은 국가의 순종에 기초하지 않는다.
Walvoord는 아브라함 언약의 무조건적인 특성을 지지하는 열 한가지 이유를 제안한다. (1) 모세 언약을 제외한 모든 이스라엘의 언약은 영원하다. 그러한 영원한 언약들이기에 논리적으로 무조건적이다. (2) 이 약속에서 조건들이 진술되지 않았다. Walvoord는 아브라함의 언약에서 조건적인 요소 즉 순종의 첫 번째 행위를 인식한다(창 12:1). 그러나 그는 이것을 오히려 하나님의 예언적 선언이라고 말한다. “하나의 조건이 만났다. 더 이상의 조건은 아브라함에게 놓여지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님은 변개할 수 없는 무조건적 계획을 제정하셨다. Ryrie은 “너의 땅으로부터 나가라”는 이 명령을 하나님의 명령이기보다는 의도로서 해석한다. (3) 이 언약에서 되풀이되고 확대된 반복에서 인간의 충성에 의존된 조건적인 약속은 어디에도 없다. (4) 이 언약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의식을 통하여 확고해졌다. (5) 할례는 조건이 아니라 언약 관계의 표징이다. 약속의 땅은 그 의식이 소개되기 전에 주어졌다. (6) 동일한 약속과 관련해서 이삭과 야곱에게 조건들이 요구되지 않았다. (7) 그 언약은 부조들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확립되었다. (8) 국가적 배교까지도 그 언약을 파괴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을 영원히 계속될 국가로 보았기 때문이다(렘 31:36). (9) 신약은 아브라함의 언약을 불변한 것으로 선언했다(히 6:13-18 참고; 창 15:8-21). (10) 이스라엘과 그의 미래에 관한 성경적 계시는 그것을 확실하게 한다. (11) 아브라함에 대해 하나님의 약속이 가지는 이러한 무조건적인 특성은 기타 다른 무조건적인 언약들 속에서 반영된다.
세대주의자들은 땅에 대한 약속의 종말론적 중요성을 강조한다. 과거나 현재에 그 예언의 문자적 성취는 없었다. 그 성취는 미래 천년왕국 시대에 있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B. 아브라함언약의 조건성
1. 아브라함의 언약적 삶은 명령과 법도의 우산아래에 있어 조건성이 존재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의 메시지가 시사하듯이 아브라함은 하나님 안에 거하여 열매 맺는 삶을 살았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tamim]”(창 17:1)고 명령하신 것은 “율법” 개념을 언약의 중심에 도입하면서 아브라함을 그분의 계시하신 뜻대로 살아야 할 의무 아래 두셨음을 의미한다.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창 18:19). 이 본문에는 어떻게 은혜와 율법이 관련되어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아브라함과의 언약은 하나님의 율법의 권위도 보존하였다”(부조, 370).
아브라함 인격 안에는 하나님의 율법이 입력되어 있었다. 그는 이 여호와의 율법에 따라 전적으로 전능하신 분에게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했다. 후에 하나님은 이삭에게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니라”(창 26:5)가 이를 확인한다.
아브라함의 언약에 관해서는 두 국면, 즉 약속과 할례 명령이 내포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베풀도록 명령하셨다.
2.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에게 언약을 “지키라”고 명하셨다. “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창 17:9). 여기서 “지키라”는 명령은 무조건성을 내 세울 수 없는 반증이 된다. 신명기에 30회나 나오는 “지키라”는 용례에 비추어 보면 조건성을 함축하고 있다(신 29:9; 4:2; 등) 할례 “의식을 행함으로 그들은 그들 편에서 아브라함과 세우신 언약의 조건들을 성취할 것을 서약하였다”(부조, 138).
또한 아브라함 언약은 배반될 수 있었다는 점이 조건성을 시사하고 있다.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창 17:14). “배반(pārar, broken)"이란 단어는 언약 파기를 지칭한다. 이 단어 역시 그 용례에 비추어 조건성을 함축하고 있다(fp 26:15; 신 31:16, 20; 사 24:5).
3. 아브라함의 순종의 시험
아브라함의 믿음의 반응은 순종으로 입증되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좀 더 충만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또한 창세기 22장에 기록된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아브라함의 자발적인 순종을 고려하여야 한다. 진정한 예배의 중심에는 믿음과 순종이 결합되어 있다.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묘사되어 있다. 당시에 그 약속의 성취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아브람과 그의 아내는 자녀를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려 하셨는가?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시험이 그의 믿음과 하나님 경배에 대한 참된 성격을 드러내었다. 그의 믿음은 하나님이 나타내신 뜻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헌신이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그의 아들 이삭을 기꺼이 희생으로 드리고자 하였을 때, 하나님은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고 하시고,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다”는 거룩한 선언과 함께 이전의 약속들을 새롭게 하셨다(15-18절).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시험을 견디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본질은 신뢰하는 믿음에 따라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자발성에 있었다(히 11:17). 이런 활동적인 믿음이 야훼를 두려워 하는 일의 중심에 있었다. 그런 믿음이야말로 반역적인 마음을 자원하는 마음으로 변화시킨다. 그 결과 마음은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에 전적으로 굴복하게 된다.
“야훼를 두려워한다(‘yir’at Yahweh)”는 히브리어 구절은 하나님의 계명을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것, 즉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고, 그를 섬기는 등(신 10:10, 12; 전 12:14; 사 1:19-20 등)에 표현된 하나님께 향한 떨리는 존경을 묘사한다. 웬햄(Gordon Wenham)은 창세기 22장에 나타난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 “여기에 완전한 신뢰와 완전한 순종 속에 나타난 믿음의 예증이 있다”고 언급하였다.
아브라함은 그의 의롭게 하는 믿음은 위기의 때에 충성에 대한 시험을 견딜 수 있는 것임을 보여주었다. 그의 믿음은 교리적 믿음 이상의 것임이 입증되었다. 그것은 약속을 믿고, 하나님의 계명을 믿으며 순종하는 믿음이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믿는 믿음이 아브라함의 믿음의 본질이었다. 아브라함은 그저 몇몇 순종의 행위를 더한 추상적인 믿음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창 15:6) 이후에 역사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웬햄이 그것을 잘 설명하였다.
구약에서 믿음은 약속을 믿는 것과 계명을 순종하는 것 둘 다를 포함한다. 히브리서 11:8-19과 야고보서 2:18-24이 아브라함의 생애에 대한 설명에서 “믿음으로 아브라함이 순종했다”(히 11:8) 하고, “믿음이 행함으로 온전해졌다”(약 2:22)고 강조한 것은 두 번째 국면에 대한 것이었다. 히브리서는 신앙의 두 측면 즉 믿음과 순종은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V. 언약의 징표--할례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항구적인 기억 장치가 되는 표징은 할례이었다. 할례는 아브라함 자손이 이방인들과 구별된다는 표징이 된다.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창 17:9-10, 13-14).
심지어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창 17:13) 종들도 그들이 아브라함의 가족 중에 속한 것으로 간주되어 할례를 받아야만 하였다. 할례는 아브라함 언약의 표징으로서 몇 가지 기능을 하였다.
1. 이방인으로부터 아브라함 자손을 구별케 한다(엡 2:11).
2. 여호와의 언약을 영구히 기념케 한다(창 17:11).
3. 도덕 순결을 계발 시킨다(신 10:16).
4.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 표상한다(롬 4:11).
5. 마음의 할례를 상징한다(롬 2:29).
6. 그리스도인들의 침례 예식을 예표한다(골 2:11-12). 할례는 영적인 의미에서만 침례의 전영(前影)이 되지 제도로서 모형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아브라함 당시 고대 이집트 등 셈족 나라들에도 널리 할례의식이 거행되었다. 따라서 단순히 육적 표피를 잘라내는 일만으로는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구별하는 표징으로 삼을 수 없다. 아브라함 언약의 표징이 되는 할례는 이방 나라의 할례와는 다른 의미가 들어 있는 것이다. 언약 백성의 할례는 물질적, 영적 축복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하는데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육체적 징표는 마음의 영적 변화를 수반하는 것이어야 했다.
“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신 30:6).
초기교회 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런 깊은 의미를 망각하였다. 스데반이 이를 잘 들어내고 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행 7:51).
할례는 아브라함의 가계로부터 약속된 메시아가 탄생한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시켜 주는 역할을 했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탄생하고 십자가 달리신 이후에는 하나님께서는 육적 할례의식의 기능을 폐기하셨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 5:6; 고전 7:19 비교)고 하였다. 바울에 따르면, 육체의 할례는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영적인 마음의 할례의 상징이요 표상이었다. 그리스도의 피가 영원한 기업을 위하여 모든 사람을 “샀다”(고전 7:23).
그리스도교 신자는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이며, “침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골 2:11-12)다. 기독교 전통에서는 침례가 할례를 “대체하였다”고 말하는 것이 관례적이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 할례는 신자들이 그들의 심령에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손으로 받는 영적 할례로 성취되었다.
바울은 하나님의 할례 명령은 아브라함이 이미 믿음으로 의롭게 된 이후에 주어졌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아브람은 “무할례 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롬 4:11)으로 할례를 받았다. 바울은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롬 4:13)고 설명하였다. 그는 심지어 아브라함을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라고 부르며, 이렇게 한 것은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다(11절).
“십자가 후에 할례는 아무 가치가 없다(롬 2:24-29; 갈 5:6; 엡 2:14-16; 골 2:14-17; 딛 1:9-11)―(딛 1:9-11, 13,14 인용). 바울의 시대에는 계속 할례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할례를 받을 의무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성경에서 많은 증거를 댈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은 별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죽으셨고 따라서 육체의 할례는 더 이상 가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화잇주석, 행 15:1,5).
그리하여 외적 할례의식 보다 내적 심령의 변화 체험이 중요하게 되었다. 구원은 구약성경 시대의 할례에 토대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신약성경은 할례 대신 침례를 새언약의 표징으로 삼고 있다. “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12 너희가 침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 2:11-12).
바울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에 구원의 토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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