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허(空虛)에서 충만(充滿)으로
공허(空虛)에서 충만(充滿)으로
본문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19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에베소서 5:15-21.
I. 들어가는 말
1.창조 행위-채우는 일
태초에 텅 빔이 있었습니다. 공허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공허한 곳을 향하여 말씀의 명령으로 하나 하나를 창조하여 빈곳을 채워 나가셨습니다. 창조란 이렇게 텅 빔을 채워 넣는 행사였습니다. 이 텅 빈곳에 하나씩 채우신 하나님의 입에서는 경탄의 소리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마지막으로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찬탄하시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안식일은 이 창조의 채움을 기념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안식일은 충만의 징표가 되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무엇인가 빈자리가 있으면 참 안식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2. 텅 비어 있음--불안과 위협 요소
이빨이 하나 빠지면 옆에 있는 두 이빨은 위태롭습니다. 내 옆에, 내 가정에, 사업 터에, 내 성적표에 빈자리가 있고서는 불안하기 마련입니다. 텅 빔 그 자체는 위협이 되고 불안이 됩니다. 가을의 충만함이 없는 겨울의 도래는 위협 그 자체입니다. 대기에는 진공상태가 없습니다.
불교의 공(空) 사상은 우리 마음에서 모든 생각과 욕심을 다 추방하여 버린 것이지만 성경은 비움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성령으로 채우라고 합니다.
T.S. Eliot은 “황무지” 작품에서 삶의 의미를 상실한 현대인의 공허한 정신상태를 진단하고, 황폐한 현대문명의 상황을 구체적인 감각으로 포착하여 표현하였습니다. 이 황무지에서의 삶은 죽음의 삶(death in life)이라는 것과, 죽음은 삶을 가져온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바로 이것이 이 작품의 주제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는 개인적 무질서와 문화적 무질서라는 주제가 전개되고 있으며 재생에의 필요가 성서적, 종교적 주제와 결합되고 있습니다.
현실은 쓰레기와 부서진 영상들, 그늘을 드리우지 못하는 죽은 나무, 메마른 돌만이 널려 있는 황폐한 장소입니다. 모든 것이 단편적이며 파괴된 영상만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이곳에는 생명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황무지의 주민인 "인간의 아들"은 단지 불모만을 알 뿐입니다. 여기에서 강조되는 것은 이들이 고통받는 인간이고 이들이 있는 장소가 황무지라는 사실입니다. 현재 황무지의 주민들은 황폐한 현실만 알고 있을 뿐으로 그 현실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현실에서 아무 위안도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황무지의 주민들은 지금 황무지를 벗어나려는 의식조차 없이 무미한 삶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회전하는 세상은 현실세계를 일컫는 말로서 해체되는 현실, 즉 공허한 삶을 영위하는, 윤회의 수레바퀴에 매여 있는 인간들의 세계라고 보았습니다.
그의 작품에 “텅빈 인간(The Hollow Man)" 이 있습니다. <우리는 텅 빈 인간/우리는 박제 인간들/대가리는 볕 집으로 가득 차고/함께 기대고 있는, 아 슬프다>--이 시는 황무지처럼 정신적 비젼과 방향을 잃은 현대인의 窮境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3. 빈 인간-부족한 인간
속이 빈 인간이라고 할 때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하나는 무엇인가 부족한 인간, 아직 더 차야할 공간이 많이 남아 있는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다른 하나는 욕심이 없는 인간이란 의미입니다. 그러나 몰아낸 욕심이 빈 곳에 다시 몰려들어오는 것은 시간문제 입니다. 가득 차 있어야 들어올 곳이 없게 될 것입니다. 갖출 것으로 다 갖춘 충만일 때가 가장 안전한 때입니다.
누가 복음에 나오는 영적 진공상태의 위험성을 알리는 좋은 비유가 하나 나옵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눅 11:24-26).
4. 자기 안에 담긴 것에 지배받는 인간
인간은 자기 안에 담긴 것을 내 놓기 마련입니다. 또한 자기 안에 들어 있는 것에 지배를 받기 마련입니다. 자기 안에 담긴 무엇인가에 의하여 지배를 받고 싶어 합니다. 사람들이 술을 마시는 이유는 술의 마취에 지배받고 싶어서 입니다. 마약이나 아편으로 사는 사람도 그 지배를 희구하는 사람들 입니다.
II. 시간의 개념
성령으로 가득 찬 인간이 되는 길을 이야기 하는 도입부에 시간 개념이 나옵니다. 적절한 도입으로 생각합니다. 인간은 시간 앞에 무력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제한된 시간을 살아갑니다. 태어 날 때 죽을 때를 바라고 살아가는 길에 들어섭니다. 그러면서도 시간이 무엇인지 잘 알지도 못한 채 살아갑니다. 시간은 어제와 오늘, 과거와 미래의 사이, 현재와 합한 전부라고 말하는 분이 있지만 정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시간을 아끼라.” 이 권고에서 말하고 있는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흘러가는 연대기적, 칼렌다적인 크로노스(chronos)의 시간이 아니라, 어떤 은혜의 의미를 지닌, 즉 좋은 기회성을 지닌 카이로스(kairos)의 시간을 의미합니다. 카이로스는 결정적인 전환을 가져오는 시간입니다.
1. 시간은 기회입니다.
이 은혜의 기회를 붙잡지 못하면 인생은 헛되게 산 것이라는 것입니다. 기회를 붙잡지 못하면 공허한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월을 아끼라고 하였습니다. 짧은 시간대를 선용하라는 것입니다. 희랍의 기회의 신은 앞으로 올 때 쉽게 잡을 수 있도록 뿔이 달렸으나 지나가 버리면 잡을 수 없도록 대머리로 되어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죽은 다음에 제2의 기회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연옥론을 펼치고 있습니다. 장로교회에서는 죽은 다음 영혼이 불멸하다고 합니다. 재림교회는 죽음 이후 부활의 아침까지 제2의 기회가 없다고 가르칩니다. 산다는 시간대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절감하면서 살아가는 존재들이 재림교인들입니다. 시간을 카이로스로 살지 않으면, 또한 성령을 거슬리면 다른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시간을 은혜의 선물로 소중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2. 세월을 아끼라.
아끼라는 말은 값을 주고 사라는 뜻입니다. 왜 시간을 값을 주고 사라고 하였습니까? 세월 속에 은혜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은혜로 절여 있기 때문입니다. 지구가 은혜로 에워 쌓여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시간에다가 은혜로 충만하게 채워두셨습니다. 은혜의 선물로 주어진 시간에 가장 바람직하게 사는 길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 은혜의 시간대에 걸맞는 노력 없이 산다는 것은 세상을 허무하게 산다는 것입니다. 아까운 시간을 다른 것으로 채워 넣는 일은 큰 손실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시간을 내 것으로 만들고자 땀을 흘리고 진력하는 일이 있어야 성공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여, 오늘도 시간을 아껴 선용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며 살아야 합니다. 의미 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은 죄가 됩니다. 어리석은 자가 됩니다. 지혜 없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똑 같은 시간대에 살고 있던 분들 중에는 베드로와 유다처럼 각기 다른 모습을 보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시간을 아끼는 이유에는 주님의 뜻을 사는 것의 소중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을 분별하여야 합니다. 주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면 어리석은 사람이 됩니다. 결혼을 앞둔 처녀가 잘나가는 불신 청년과 별 볼일 없는 것처럼 보니는 신자 청년 주에서 어느 쪽을 선택하는 것이 주님의 뜻에 부합할까요? 예수를 잘 믿는다고 하여도 공통점이 약하여 양쪽에 차이가 많이 나면 늘 긴장하면서 살아야 하니 카이러스를 살리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뜻에서 카이러스의 가이드라인을 찾아야 세월을 진정으로 아끼는 것이 될 것입니다.
3. 이상스러운 대칭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 5:18).
성령 충만을 설명하는 방법으로 술 취하는 것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술을 마시면 마시는 만큼 취하게 마련입니다. 술에 담긴 알콜 강도에 따라 또한 술의 양에 따라서 취하여 갑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마시나 그 다음에는 술이 사람을 마셔 버립니다. 술에 인이 박혀 살아갑니다. 때로는 인사불성이 되어 자기가 무슨 행동, 무슨 말을 하였는지 모르게 됩니다.
이와는 달리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명령을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즉 안 믿는 사람들이 술의 지배를 받아 취하듯이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에 취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본문은 술 취함과 성령 충만을 대칭시키고 있습니다. 술에 취하면 술의 지배를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령 충만하면 성령의 지배를 받습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는 길은 바로 이런 성령의 지배를 받는 것에서 이루어 질 것입니다.
III. 그리스도인과 성령의 관계
카이로스 시간 개념은 성령 안에서 가능합니다.
1. 예수를 믿으면 누구에게나 성령이 임합니다.
고전 12:3 성령으로 하지 아니하고는 예수를 주로 시인할 수 없다고 합니다. 고전 12:13에 우리 모두는 한 성령으로 침례받았다고 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침례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재하였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성령 받은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시사하는 것은 성령이 임재하는 정도에 만족하는 삶이 아닙니다. 임재를 넘어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성령을 한량없이 받았습니다 (요 3:24).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10).
“잃어버린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을 비우신 예수님에게는 성령이 한량없이 주어졌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도 그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도록 온 마음을 바칠 때는 누구나 그것을 받을 것이다. 우리 주께서는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에베소서 5장 18절)고 친히 명령하셨다. 이것은 명령이면서도 이 명령 자체의 성취에 대한 약속이기도 하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충만으로 … 거하게”(골로새서 1장 19절) 되고, “그 안에서 충만하여”(골로새서 2장 10절)지는 것이 아버지의 큰 기쁨이었다.”(보훈, 20-21).
2. 예수님을 부르는 칭호
주님을 부르는 호칭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구주”입니다. 이는 죄에서 구원받을 때 일컫는 표현입니다. 그 다음에는 우리의 삶의 통치자로서 다스려 주기를 바랄 때 “주님”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주님이라고 말 할 때는 주의 뜻대로 살기를 바라는 순종하는 마음으로 불러야 하는 것입니다. 즉 주님의 지배를 받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주님” 칭호입니다. 이 주님의 지배를 누가 합니까? 성령께서 하십니다.
성령이 임하면 단순한 임재가 아니라 충만하게 우리 가운데 있기를 원하십니다. 성령 충만을 양적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충만은 가득찬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릇에 물을 가득 채우는 의미가 아니고 성령께서 나의 전 생활을 지배하는 것을 뜻합니다.
3. 하나님 뜻대로 구하는 기도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기도가 참 기도입니다. 주기도문 전반부는 이러한 기도를 하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뜻대로 살아야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십니다. 나라이 임하여 달라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의 다스림을 받겠다는 결단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삶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위하여 성령의 전적 지배가 내 안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주님의 도구가 되는 삶을 위하여 성령 충만을 구하는 것입니다.]
4. 성령충만은 신비체험인가요?
성령 충만을 받으면 받기 이전과 다릅니다. 감정이 순화되고 근심과 걱정 대신에 기쁨이 넘칩니다. 어떤 신자가 종각 앞 사진관에서 오랜만에 가족끼리 즉석 사진 촬영을 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사진관 청년이 교회 다니시지요?하고 물었다 그런다고 하며 “어떻게 알게 되었느냐”고 하니 “수많은 사람을 보다 보니 이제는 척 보면 압니다. 선생님은 충만하시군요.”
성령 충만을 받은 사람은 이상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충만은 성령 가운데 살고 있는 사람만 압니다. 그렇다고 오순절주의 교회처럼 방언을 하여야 성령충만하다는 것은 지나친 해석입니다. 방언은 은사입니다 은사이기 때문에 성령충만의 현상에 들 수는 있지만, 내가 방언을 못하여도, 병을 고치지 못하여도, 주님이 나를 전적으로 지배하시면 나는 성령 충만한 종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충만의 증거는 방언이 아니고 성령께서 내 인격 전부 즉 지 정 의를 지배하고 있느냐 그리고 그 지배 결과로 성령의 열매가 내 안에 있느냐 여부로 판결 내릴 것입니다.
5. 성령은 우리를 성화케 하십니다.
성령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흔히 성령 받으면 아주 마술적(magical)으로 기계적으로(mechanical)으로 변화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예수 믿자마자 싹 달라지는 것을 바래요. 그게 전기 스위치 올리면 불이 확 꺼지고 켜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인격적인 건 그렇지 않아요. 성령과 함께 나도 모르게 의식이전에 내 안에 역사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인격적으로 점차적으로 변화되고 있어요. 성령충만하면 주님을 닮아갑니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수직적으로 날마다 주님과 가까이 살며 그를 닮아 갑니다. 성령충만 하라는 명령법 다음에 이 닮아가는 삶의 특징이 나와 있습니다.
IV. 나가는 말
삶의 기회는 성령의 충만의 기회입니다. 세월을 아끼라는 것은 지금 성령의 임재와 충만의 시간대를 놓치면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모든 것을 놓치는 것이 됩니다. 주의 뜻은 이것입니다. 즉 성령의 충만한 삶입니다. 성령 충만은 성령의 완전한 지배를 받는 삶입니다. 성도 여러분, 날마다 성령의 인도와 감화 감동으로 이어진 삶,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찬양과 감사,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중에 피차 굴복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각기 성령의 전(殿)이 됩니다. 성령충만으로 성령의 전이되어야 합니다.
성령의 강력한 힘이 인간 대리자의 품성 속에 완전한 변화를 일으켜서 그 사람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신다. 어떤 사람이 성령이 충만해졌을 때 그가 심한 시련과 시험을 당하면 당할수록 그만큼 더욱 분명하게 그는 그리스도의 대리자임을 입증한다. 영혼 속에 있는 평화가 얼굴에 나타난다. 말과 행동은 구주의 사랑을 나타낸다.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고자 애쓰지 않는다. 자아를 포기하고 그가 말하고 행하는 모든 것 위에는 그리스도의 이름이 적힌다.
우리는 성령의 축복에 관하여 이야기할런지 모르지만, 성령을 받을 준비를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하는 일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는가? 우리는 그분의 충만하심을 구하고 있는가? 우리 앞에 있는 푯대, 곧 그의 품성의 완전을 위하여 언제나 달려 나아가고 있는가? 주의 백성들이 이 푯대에 다달았을 때에 그들의 이마에는 인을 받을 것이다. 그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할 것이며, 기록하는 천사는 다 이루었다고 선언할 것이다(리뷰 1902. 6. 10). (화잇주석, 엡 4:30)
우리는 원형적인 대속죄일에 살고 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 이것은 개인적인 과업이다. 우리는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야 한다. 그리고 이 시대를 위한 진리를 잘못 나타낼 수 있는 것은 어떤 것도 우리의 노력에 개입되게 해서는 안 된다. 각 사람은 형제의 죄가 아니고 자기 자신의 죄를 고백해야 한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겸비하게 하여 성령으로 충만해지므로 그가 거듭났다는 것을 생애로 보여 줄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요 1:12)다는 말씀을 읽는다.(9증언, 218)
하나님의 교회는 다양한 은사와 성령의 능력을 충만하게 받은 여러 성도들이 모인 궁정이다. 그들은 저희가 도와주고 축복하는 사람들의 행복에서 저희의 행복을 찾을 것이다. 주께서 당신의 이름이 영화롭게 될 수 있도록 교회를 통하여 성취하고자 하시는 일은 놀라운 사업이다. (선교, 14).
'성령'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령을 거스르는 죄 (0) | 2017.03.17 |
---|---|
성령 침례와 성령 충만의 관계 (0) | 2017.01.31 |
오순절(Pentecost) (0) | 2016.02.25 |
이른비와 늦은비 성령 (1) | 2015.05.01 |
생기가 너희를 살리리라--생기신학 서설 (0) | 2015.04.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