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원주의 사회에 살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종종 제기 되어 왔다. 다음 질문들을 받으면서 이방인 구원 문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예수님을 모르고 죽은 사람들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요? 예를 들면, 우리나라의 옛날 조상들이나 아니면 아직도 예수님을 모르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은 것은 예수님의 은혜이지만 그것을 모르고 구원받은 사람이 있는지요? 성서나 예언의 신의 근거를 들어 설명해 주시면 감사 하겠습니다. ]

 

답변을 시도키로 한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은 구원의 길에는 여러 길이 있다고 주장해 오고 있다. 전통적으로 구원의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 밖에 없다고 한다. 이 입장에 비추어 보면 구원의 길은 하나 밖에 없다.

 

I. 모더니즘의 등장과 더불어 인간이 진리의 결정자가 되어왔다.

Thomas Oden1798(프랑스 혁명)-1989(공산주의 몰락)까지를 이 모더니즘의 기간으로 보았다. 이 모더니즘의 특징은 이성주의, 계몽주의 관념론, 기술적 메시아니즘, 경험주의 등에 토대를 두고 있다. 이 모더니즘의 기본 원리는 회의(懷疑) 원리, 자율의 원리, 자연의 원리(물질 본질론과 우주는 질서 정연한 체계라는 시각), 조화의 원리(우주의 합리성과 질서), 그리고 진보의 원리가 될 것이다.

근대주의 아래에서는 이성으로 답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이 지배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 이 기간에는 인간이 진리의 결정자로 등극한 것이다. 인간이 역사 무대의 중심 위치에 서 있게 된 셈이다. 과학이 말해 줄 수 없는 영역까지라도 이성으로 알 수 있다고 보는 기류가 형성된 것이다.

 

인간에 대한 이 낙관론은 문명의 경이적 발전에 기여하는 측면도 있었다. 그러나 이 모더니즘은 세계 내의 거대한 구조적 변화를 초래케 하였으며, 지구 생태계의 가공스러운 파멸과 핵 재난 위협을 야기시켰다고 하는 반성이 일어난 지 오래 되었다. 이 파멸적 위협은 근대주의의 소산물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데카르트(Cartesian) 철학 이래 모더니즘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위축시키고 신학을 변질시켰다.

 

II.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포스트모더니즘-탈근대주의/근대주의 이후)의 등장

 

21세기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이다. 이 사조가 예술, 건축 영화, 음악 등 각 영역에 침투하고 있다. 그 특성을 정의 내리기는 것이 쉽지 않다. 구태여 정의를 내리게 되면 하나의 유형에 국한되어 포스트모더니즘에 맞지 않게 될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17세기부터 서양 문화를 지배하여 온 합리주의 즉, 인간의 이성이 진리로 인도할 수 있다는 믿음을 이제 더 이상 지지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과학적 방법도 이성도 보편적 객관성도 거부한다. 과학적 객관성을 신뢰할 수 없다고도 한다. 더나가서 객관적 지식이나 실재라는 것도 없다고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사물들과 사건들이 본질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는다. 오직 해석이 있을 뿐이다. 세계에 관한 연구는 상황에 관한 연구일 뿐이다. 인간은 그 상황의 일부에 불과 하다.

 

해석은 기록된 책이나 저자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고 해석하는 사람, 또는 독자의 관점과 가치관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다. 해체주의의 등장으로 고정된 해석체계나 구조를 배격하기도 한다. 진리란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것에 불과 한 셈이다. 진리는 합리적이지도 않고 객관적이지도 않다. 절대적 진리란 없다고 하여 메타이론이 상실된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한 사람의 의견은 다른 사람의 의견과 똑같이 유효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윤리에도 개인적 또는 문화적 타당성을 가진 기준이 모호하여져 제한선이 무너지고 있다. 문학에 있어서도 해석학적 다원주의로 나가 고정된 해석이 없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 이런 기류를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절대성상대성

일의성다의성

동질성이질성

단일성다원성/복수성

합리성비합리성

 

포스트모더니즘에 베어 있는 기본적 주장은 체계(system)를 반대하고, 중심(center)을 배척하며 어떤 특정의 세계관을 인정하지 않는다는데 있다. 결국은 상대주의적 세계관에 서게 된다. 그리고 근대주의에서처럼 형이상학적, 초월적 세계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계속 거부해 나간다. 그러니까 신앙적 세계에서도 기본적인 초월적 존재를 부인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런 점을 앨런 소칼(뉴욕대 물리학 교수)1997지적 사기(Fashionable Nonsense) (민음사, 2000)에서 프랑스 현대 철학은 모조리 사기라고 비판한 점에서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는 프랑스 현대철학은 언어의 유희라고 비판하고. 현대과학철학의 상대성에 집착하여 과학이 객관적이고 절대적이라는 것을 흉물스럽게 본다.

 

III. 다원주의(Pluralism)

 

사회적 다양성과 다원화 현상과 다원화 현상을 종교적 다원주의와 구별하여야 할 것이다.

 

1. 사회적 다양성 및 다원화 현상

오늘 우리는 다원주의적 사회에서 살고 있다. 가기 다른 문화, 언어 세계관, 도덕규범, 과학 체계, 종교들이 교차하는 세계에서 살고 있다.

 

하나님께서 세계를 다양하게 창조하셨다. 숲 속에 있는 한 그루의 나무에는 같은 잎사귀가 없다. 오늘 우리 사회는 복제 인간이나 동물이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으며 그 길이 인간 질병 퇴치의 길로 보고 있지만 나를 그대로 빼어 닮았다하여 복제 인간이 나와 꼭 같은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는 존재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주어진 환경과 시간의 흐름이 달라진 가운데서 달라진 개성이 형성되기 마련일 것이기 때문이다. 나와 같은 복제인간이 나와도 그는 현재의 나와 같은 나이가 되자면 몇 십 년을 지나야 할 것이다.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은 각기 인류 역사 이래 유일한 존재이며 독특한 삶을 각기 살아가고 있다. 나라고 하는 존재는 인류 역사이래 유일무이한 최초이자 최후적 존재이다.

 

각양각색의 다양한 사회에서 사회적, 정치적 다원주의는 단일한 제도나 집합체의 지배를 배격한다. 이 시대에는 국가지상주의적 전통이론에 반기를 들고 있다. 국가보다 작으나 더 전문화된 여러 결사체들의 지배가 공룡화 되어가는 것을 반대하고 있다. 오늘 사회는 상충적인 이익집단의 경쟁과 타협을 통하여 이끌어져 가고 있다. 다원주의는 elitism을 반대한다. 세계화라고 하는 것 까지도 다양성을 저해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우리는 다양성을 용납하고 관용하고 이해하며 더 나아가서는 축하하는 삶의 방식을 펴 나가야 할 것이다. 획일주의나 산술적 평균주의는 다양한 인간의 삶을 말살해 가는 비극적 현상이다. 각 사람은 자기의 양심에 따라 자유를 구가하며 소수자의 문화와 종교를 존중하여야 한다. 다양성 속에 연합하면서 창조적 삶을 살아가는, 자기 나름대로 가치를 창출하여 가는 삶을 존중하여야 할 것이다.

2. 종교적 다원주의

주의(ism)라는 것은 적극적으로 어떤 가치를 옹호하고 극대화시키려는 움직임이다. 종교적 다원주의는 종교의 다원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다원화 강조하고 있다. 한신대 석좌교수 김경제 씨는 그리스도교가 이 종교다원주의라는 불의 강을 지나가야 할 도전을 받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종교다원화현상과 종교 다원주의를 구별하여야 한다. 전자는 세계의 종교적 다양성을 가리키는 서술적 용어로 이는 인류역사의 보편적 현상이다. 그러나 후자는 모든 종교가 하나의 오케스트라를 구성하고 있다고 보아 구원의 길이 다원적임을 강조한다.

 

종교 다원주의와 관련하여 다음 몇 가지를 구별하여야 합니다.

(1) 배타주의 (exclusivism)--오로지 하나의 종교에 구원의 길이 있다고 본다. 한 종교를 아는 사람은 모든 종교를 안다고 보고 있다. 그 대표적 예는 기독교일 것이다. 이 입장에서는 그리스도 중심으로 구원을 설파하고 성경상의 그리스도 신앙을 하는 사람만이 구원받는다고 보고 있다.

(2) 포괄주의 (inclusivism)--Karl Rahner익명의 크리스챤은 그 대표적인 입장을 예증하고 있다. 그리스도 중심. 구원받는 모든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때문에 구원받는다고 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의식적 신앙이 절대적 필수 요건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 이름 듣지 못한 사람도 그 받은 바의 빛에 충실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3) 다원주의 (pluralism)--John Hick, Paul Knitter 신중심주의가 그 대표자들이다. 하르낙은 한 종교만 아는 사람은 아무 종교도 모른다고 하였다. 흔히 에베르트산 봉우리를 올라가는 길은 여러 가지라고 하는 비유로 그 정당성을 주장하지요. 주장자에 따라 그 내용이 다르지만 어떤 이는 앞서 지적한 것처럼 모든 종교는 하나님의 오케스트라 연주를 각기 파트에서 맡아 하고 있다고 본다. 모든 종교에 구원의 길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흔히 하나님은 많은 이름을 가졌다고 하는 것으로 이런 주장을 펼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다원주의에는 여러 문제점들이 내포되어 있다. , (1) 하나님 개념을 추상화시킨다던지, (2) 그리스도를 상대화시키며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을 강조하여 인간화시키고, (3) 신약성경의 비신화적 해석을 지지하고, (4) 성경의 권위를 상대화시키며 독자반응이론이나 독자가 공저자가 되는 길을 열어 놓는다.

 

모든 종교가 각기,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구원의 길을 제공하고 있다고 보는 종교다원주의는 그리스도교 신학의 시각에서 파괴적이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그리스도교의 벽 속에만 폐쇄되어 있다고 보지 않는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여호와 되심을 깎아 내려야 자기들의 설자리를 마련할 수 있다고 보는 듯하다. 그들은 그리스도론의 배타적 절대성에서 탈출시키고자 안간힘을 경주하여 왔다. 또한 각 나라, 각 민족, 대부분의 종교에는 그 나름대로 신 개념이 존재하고, 그리스도교의 여호와도 그 중의 하나라는 시각으로 보면서, 신 중심의 선교 개념을 창출하면서 구원의 유일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구원의 유일한 통로가 되심을 배제시킨다. 따라서 종교다원주의자들은 구원의 유일한 길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타종교의 거침돌이 된다고 보아 어느 몇 성경절(예컨대 예수의 말 '아버지는 나보다 크시다‘)을 의도적으로 강조 극대화시킨다. 다원주의자들이 그리스도 중심주의를 배격하면서 신중심주의의 전도사가 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전술한 것처럼 다원주의자들은 상대주의자로 자처하고 있다. 그들은 어느 종교이든지 다 구원의 체계가 있다고 인정하는 종교적 다원주의 내지 신학적 다원주의를 지향한다. 힉은 타종교에는 구원이 없다고 한 배타주의(exclusivism)를 부도덕한(immoral) 주장으로까지 매도성 발언을 하였다.

 

그러나 세계와 사회를 보는 다원주의와 신학적 다원주의와는 구별하여야 한다. 전자는 정치적 사회적 다양성이 그 추구하는바 목표가 된다. 그러나 후자는 그리스도교 구원론을 파괴하는 일노을 창출하고 있다. 모든 종교가 구원의 원리를 지녔고 궁극적으로는 같은 것을 가르친다는 주장은 사리의 표피적 이해에 불과하다. 그러렇다고 신학적 다원주의를 배격한다고 하여 어느 다른 종교에 대하여 무례를 범하라는 것은 아니다.

또한 정치적/법률적/사회적 관용을 신앙적/사상적/지적 관용과 혼동하여서도 안 된다. 그래서 이같은 입장에서 일반적으로 복음주의자들은 신학적 다원주의를 배척한다. 다원주의자들은 이러한 배타주의 입장을 무지몽매한 옹고집으로 본다. 따라서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바벨론에서 나오라는 메시지는 폐기처분되어야 할 고물에 불과하다고 것이다.

 

그러나 각 교단은 독특한 메시지가 있다. 장로교에는 이중 예정론이 있고 천주교에는 마리아론이 있듯이 재림교회에는 성소교리, 세천사의 기별 및 예언의 선물의 독특한 교리가 있습니다. SDA의 교리를 세 그룹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복음주의 그리스도교회가 전반적으로 신봉하는 교리군(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 삼위일체, 성경, , 구원 등 약 52%)과 일부 타 교단들과 함께 신봉하는 교리군(침례, 십계명, 안식일, 인간의 자유의지, 조건부멸절론 등 약 39%)이 있으며 이들 교리들이 기본교리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91% 정도가 된다. 나머지 약 9%의 독특한 교리들만을 집중 성토하여 포기하라는 것은 재림교회의 간판을 내리라고 하는 것과도 같다.

 

IV. 질문에 대한 응답

 

그러면 처음에 인용한 질문에 대한 응답을 하기로 한다.

 

The Manila Declaration on the Unique Christ in Our Pluralistic World 1992. 6. 16-20에 보면 28개국가 85명 복음주의 신학자 회동하여 신학적 다원주의의 주장을 일축하여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원의 길 됨을 강조하고 있다.

 

일반계시는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을 계시하고 있다(19). “창세전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1:20). 이 능력과 신성에 접하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범죄로 말미암아 이 아는 체계가 무너진 까닭에 거룩한 선행은총에 따라 감동과 지시에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희망의 길이 있다. 인간 안에 입력된 도덕률이 양심을 통하여 지켜질 때(2:14, 15)에 소망이 있을 것이다(13:5 참고).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이라도 그리스도의 은혜의 엄호 아래 구원의 길이 열려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판단 사항이 아닌 하나님의 판단 사항에 속한다.

SDA는 자기들만 구원받는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또한 자기들만 모든 성경진리를 알고 가르치는 유일한 교회라고도 주장하지 않는다. SDA의 이 입장은 일종의 유연한 배타주의나 변형된 포용주의(inclusivism)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속죄의 공로로 구원받는다는 점에서는 배타주의에 속한다. 다른 이로는 구원 얻을 이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종교나 타 교단에 속한 분들 중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엄호 아래 성령의 역사로 감동받아 순응하는 분들은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다. 성령의 역사는 모든 시대 모든 사람에게 이르고 있기 때문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양심에 기록된 도덕률에 따라 정직하게 살아간 이방인들의 구원에 관한 다음 메시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광활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복을 받게 될 것이다.

 

"이방인 가운데서 하나님을 모르고 섬긴 자들 즉 인간의 도움을 통하여 한 번도 빛을 받지 못한 자들일지라도 멸망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기록된 하나님의 율법은 알지 못하였으나 자연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율법이 요구하는 일들을 행하였다. 그들의 행위는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을 감화시킨 증거이며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을 받는다"(DA 638).

 

첫째부활에 참여하게 될 또 다른 그룹들에는 구원의 진리를 알지 못하는 외톨이 같은 어린이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대는 그대의 어린 자식의 구원에 관하여 질문하였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곧 그대가 받을 응답이다.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18:16).

다음의 예언의 말씀을 기억하라.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받기를 거절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네 소리를 금하여 울지 말며 네 눈을 금하여 눈물을 흘리지 말라 네 일에 갚음을 받을 것인즉 그들이 그 대적의 땅에서 돌아오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의 최후의 소망이 있을 것이라 너의 자녀가 자기들의 경내로 돌아오리라”(31:15-17).

이 허락의 말씀은 곧 그대의 것이다. 그대는 주님 안에서 위로를 받고 신뢰하여야 한다. 주님께서는 환란의 때 이전에 많은 어린이들을 미리 잠재우신다는 말씀을 나에게 가끔 지시해 주신 적이 있다. 우리들은 죽은 자식들을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우리들은 죽은 자식들을 만날 것이며 하늘나라에서 저들을 알아보게 될 것이다. 그대의 신뢰심을 주님께 두고 두려워하지 말라(서신 196, 1899).”(2기별, 259).

갓난 아이들이 불멸의 모습으로 땅속에서 나오게 될 때에 저들은 즉시로 나아와 어머니의 팔에 안기게 될 것이요, 저들은 다시 이별이 없는 재회의 기쁨을 맛볼 것이다. 그러나 많은 어린이들이 그 곳에서 어머니를 찾지 못할 것이다. 우리들은 어머니의 열광적인 승리의 노래를 듣지 못할 것이다. 천사들은 어머니가 없는 갓난 아기들을 받아서 저들을 생명 나무가 있는 곳으로 데려간다.”(2기별, 260).

 

"유대 백성 외에도 하늘의 교사가 나타나실 것을 예언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 사람들은 진리를 찾고 있었으므로 영감의 영이 그들에게 주어졌다. 어두운 하늘에 하나 둘 떠오르는 별과 같이 이런 교사들이 일어났다. 그들의 예언의 말은 많은 이방 사람들의 마음속에 소망의 불을 붙여 놓았다"(DA 33).

 

GC Working Policy 0-75에서는 그리스도를 높이는 타 교단들도 세계선교와 복음화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가 된다고 하고 있다.

 

V. 절대적 가치와 절대적 존재의 필요성

 

인간의 삶과 생존의 현장에는 어떤 질서와 프로그램이 있게 마련이다. 혼돈과 공허 배후에는 어떤 조직과 체계가 있다. 절대적인 것을 배격하는 다원주의 , 탈근대주의의 주장도 그 자체가 중심원리가 되어야 한다고 하여 인간 사회에서 중심적인 것을 배제할 수 없음을 시사하고 있다. 탈 근대주의 사회의 문명의 총아인 컴퓨터를 점치는데 활용하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비록 탈근대 다원주의 조류 속에 살고 있다할지라도 어떤 중심 원리, 어떤 절대적 원리와 세력의 존재를 거부할 수 없는 것이다. 해체주의이론의 좌장격인 데리다가 모든 해석은 잘못된 해석이라는 주장을 하였지만 그 자신의 해석 역시 잘못된 해석이라는 역 비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도덕적 다원주의에서는 개인이 도덕적 판단의 주체가 되는 일로 인하여 극단화될 여지가 항상 있어 왔다. 한 사회가 공동으로 지켜야 될 가치 즉 덕이 실종된 시대의 배후에는 종교적 다원주의 내지 신학적 다원주의가 시대를 압도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우리 사회의 혼란상 기저에 놓인 그림자는 이런 이념적 다원주의 일 것이다.

오늘 우리 시대는 첨단 문명의 지배하에 있지만 그 절반 이상이 이혼하고, 그 삼분의 일은 유산/낙태 당할 운명을 간신히 면하고 태어났다. 동성혼과 마장드라마가 판치고 있는 세상으로 둔갑하였다. 오랜 기간 동안 구축되어 온 사회를 떠받들어 온 축대가 허물어져 버렸고 이 축대를 거론하면 몰매를 던지는 일에 광분하는 세상이 되었다. 인간은 허탈감의 포로가 되어 윤리의 황무지를 살아가는 존재들이 되었다. 인간은 풍요한 소비 속에서 외로움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인간은 오늘날 삼포, 오포라는 절망적인 포기의 늪지대에서 살고 있다. 이런 현상이야 말로 절대적인 영원한 분이 필요한 것을 오히려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 인간은 절대 윤리의 북극성을 상실하고 있다. 그 절대윤리의 북극성이 비추일 때 인간 세계의 도덕적 혼돈과 공허의 구름은 사라질 것이다. 성경은 이 절대 윤리 그리고 초월자의 섭리와 사랑 그리고 은총을 찾는 답을 주고 있다. 역사를 구원하는 영원한 추진력을 가진 진정한 엔진은 바로 여기에 있다.

Posted by KAHN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