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 完全에 관한 신학적 의미(수정)
그리스도인 完全에 관한 신학적 의미
소망스런 그리스도인의 매일의 삶의 길은 성화의 길을 걸어가는데 있다. 그리스도인 성화의 목표는 완전에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자기 내면을 보면서 늘 실망의 늪에 빠지기 일쑤다. 그렇지만 늘 완전을 지향하여 나가야 하는 명령법 아래 있는 존재이다. 성경은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은혜 안에서 자라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까지 자라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끊임없이 완전에 목말라하고 배고파한다. 그러나 완전 하라는 명령법적 권고에 절망도 한다.
그리스도인으로 완전을 지향하는 것은 북극성을 방향의 지표로 삼고 항해하는 배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목표가 분명하여야 그 목표가 있는 방향으로 갈 수 있다. 목표가 분명하지 않으면 방황하거나 신앙생활의 정체(停滯)를 면할 수 없다.
여기 이글에서는 강의에서 제시한 범주 내에서 신약성서의 완전에 관한 용어가 지닌 의미를 살펴보고 엘렌 화잇의 빛을 중심으로 이해하면서 은혜의 시기가 끝난 후의 성도의 내면적 모습을 간추려 보는데 있다.
I. 구원의 길
1. 인간 존재의 실상
1) 인간 - 창조주와 분리된 존재
인간은 피조된 인격체(창 1:26-28)로 창조주와 분리되어 살 수 없는 존재이다. 인간은 존재의 근원인 하나님과의 의존적 생명관계의 존재이다. 인간이 창조주와 분리되거나 중립적인 존재로 살아가는 것은 생명의 시원자와의 단절을 초래하여 죽음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간은 죽음이 존재가 되었다(롬 5:12). 인간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정죄 받은 상태로 서 있는 존재가 되었다. 하나님과 분리되어 자기중심적 존재로 전락된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존재로 전락하여 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19-20).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인간은 마음과 행위에 있어서 반역자이며 하나님으로부터 疎外되어 있으며 인간 상호간에 있어서도 疎遠하여 살아가는 존재이다.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 가나이다”(사 64:6). 인간의 선한 동기에라도 이기적인 것이나 선한 일을 하는 교만과 자기자랑이 섞여 있다. 마음속으로 늘 타인과 비교하면서 자기를 더 돋보이게 하는 것이 인간 존재의 현주소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기를 보시듯이 자기가 자기를 보면 자아라는 존재는 선과 악이 뒤섞인 존재이며, 불순한 욕망, 감정, 및 야망의 격류가 흐르는 집합 덩어리에 불과한 존재이다. 인간의 내면은 부패하여 있다. 이사야가 지적한대로 인간은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사 1:5-6)인 존재이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이러한 존재론적인 처참한 신분을 변개시킬 수 있는 힘이 없다. 어떠한 희생제물도, 어떠한 헌신 활동도 이 깨어진 관계를 회복할 수 없다. 첫 조상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창 1:27). 그러나 죄로 인하여 그 형상이 망가졌다. “더럽혀진 생애로 자신의 영혼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지워 버린 사람은, 단순한 인간의 노력으로 자신 안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없다. 그는 복음의 은총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는 그분의 율법에 대한 순종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목해야만 한다”(4T 294). 첫 조상은 죄를 범하고 하나님 면전에서 도망하여 숨었다.
2) 인간-참된 자기 자신에 소외된 존재
인간은 의심과 투쟁으로 찢겨진 존재이다. 우리는 남이 짓는 무서운 죄의 깊이를 보고 깜짝깜짝 놀란다. 그러나 실상은 그러한 같은 죄악이 우리 안에 파도치고 꿈틀거리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인간은 죄책을 짊어지고 살고 있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 존재이다.
오늘 인간은 자유가 극대화된 시대에 살고 있다. 인간은 까뮈처럼 자유를 열망하지만 실상은 속박의 멍에 곧 “종의 멍에”(갈 5:1)를 메고 살아간다. “저희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기는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니라”(벧후 2:19).
3) 인간-상호간에 疏遠한 존재
인간은 자기의 부와 명예를 추구에 광분하고 있다. 자기 이득을 챙기기 위하여 타인을 희생시키거나 깎아 내려야 한다. 특히 오늘 이 시대는 남을 희생시켜야 자기가 살 수 있는 피나는 경쟁시대이다. 입시세계가 그렇고 사업세계도 그 표본이 되고 있다. 더 나아가서 인간 사회의 전 영역에서도 피 튀기는 경쟁의 소용돌이 속에 처하여 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렘 17:9)을 지닌 인간은 남에게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며 그를 시기 질투하고 교활하고도 무정하고 잔혹한 일을 저지른다. 창조시의 아름답고 조화로운 인간관계 網은 누더기 옷으로 입혀져 버렸다(참조 롬 1:28-32). 일그러진 인간관계를 개선하기 위하여 윤리적인 시스템으로 또한 교육이라는 이름의 헝겊 조각들을 덧 부쳤지만 여기 저기 기운 자국투성이의 볼품없는 양상에 불과하다. 우리는 사회의 기본적 역할을 하는 가정이 와해되어가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오늘은 가장 가까운 부부가 갈라서는 일이 보편화되어 자연스러워진 시대이다. 인간은 헝클어진 관계, 물고 먹히는 적대 내지 원수관계, 덫을 놓고 사는 경쟁관계, 또는 출신 성분과 지역에 따른 배척관계라는 그물을 치고 걸려 사는 존재들이다.
4) 인간-창조세계로부터 소원된 존재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창 1:26)는 청지기, 관리자의 사명을 위촉하셨다. 그러나 인간은 이 선한 관리자로서의 책임을 저버리고 이기적인 목적으로 이 창조세계를 파괴하면서 더럽혀가고 있다. 개발이라는 미명 하에 창조세계가 허물어져 가고 있다. 국가 권력의 비호를 받은 사업자들이 천연자원을 무한정 캐내어 그것을 인간의 욕구 충족을 위하여 마구 사용하는 결과가 부메랑으로 인간에게 오염과 공해의 저주를 가져오고 있고 재난으로 되갚아주고 있다. 이 세계는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계 11:18)이 편만하다.
인간의 상황은 절망적일 뿐이다. 인간은 창조 시에 부여 받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잃어버린 존재이며 만신창이가 되어 근심과 고독에 찬 존재로 살아간다. 인간의 계획도, 희망도, 노력도 모두 죄성으로 감염 부패되어 있다.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롬 5:18)이다. 개인들도 집단들도 다 하나님의 정죄 아래 놓인 것은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에 대한 반역의 정신이 인간 존재의 바탕이 되었으며 집단 구조의 특색이 되어 있다. 인간과 사회는 온통 소외와 죄로 에워 쌓여 있는 모습이다.
2. 구원의 길
구원의 길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의에 있다. 인간이 그리스도의 용서하시는 은혜 안에서 회개, 자복하고 침례를 받으므로 죄 사함을 받고 죄책에서 정결함을 받을 수 있다(행 2:38; 벧후 3:9; 요일 1:9). 이 칭의의 체험이 구원으로 향하는 방향 전환이 된다.
죄가 마음과 의지의 악한 성향일 경우, 죄인은 새 마음과 올바른 정신을 받을 필요가 있다(시 51:10). 이는 중생의 문제가 된다. 죄가 노예로 만드는 세력, 죽음의 세력인 경우, 자기 생명의 주를 바꾸는 일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죄가 관계 파탄인 경우, 칭의와 화목을 통하여 관계 회복을 가져야 한다.
1) 찾고 불러내시는 하나님
성경의 좋은 소식은 하나님께서 인간 구원을 주도하고 계신다는 점을 보여 주고 있다. 하나님께서 잃어버려진 인간에게 오시어 구원의 풍요로움을 제공하신다. 복음의 목적은 인간의 절망적인 상황을 역전시켜 본래의 상태로 되돌려 놓는데 있다.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이것이 좋은 소식이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이야 말로 우리가 상상하는 것을 넘어 엄청나게 관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 구원을 주도하여 오셨다는 점을 성경 전체가 보여 주고 있다. 첫 인간이 죄를 범하고 숨어 있을 때 하나님이 찾아 나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고 불렀다. 이 찾고 부르신 음성의 메아리는 이어지는 시대에 계속되어 왔다. 그는 아브라함을 부르시어 믿음의 조상을 삼으셨다(창 12:1-3; 15:6-21; 히 11:8-11).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히브리 백성을 불러내시고(출 3:6-10) 바벨론의 포로에서 고토로 귀환케 하셨다(대하 36:22-23).
2) 하나님의 의(tsedeq, tsedaqah, tsidqot)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율법에의 일치 될 때 가능하다. 인간은 그 일치를 추구할 능력이 없다. 하나님의 의는 이중적으로 현현한다. 곧 하나님의 의는 이스라엘을 속박에서 자유 해방시켜 구원하시는 행위(삿 5:10-11; 삼상 12:7; 미 6:5)와 이스라엘의 박해자와 원수를 징벌하는 파멸시키시는 행위로 나타난다(시 9:8; 35:24). 전자는 구속적이고 후자는 報讎的이다.
하나님의 의는 구원하시는 행위(tsidqot, tsedeq)로 정적인 것이 아닌 동적인 것이다. 시인의 기도와 탄원에 이 점이 잘 나타나 있다.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을 인하여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시 5:8).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시 31:1; 71:2). 이사야도 하나님의 이 구원하는 하나님의 의를 소개한다. “내가 나의 의를 가깝게 할 것인즉 상거가 멀지 아니하니 나의 구원이 지체치 아니할 것이라 내가 나의 영광인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원을 시온에 베풀리라”(사 46:13; 참조 51:5; 56:1; 등). 요컨대 하나님의 의가 구원을 가져온다. 그러므로 “여호와 우리의 의”(렘23:6)가 생명의 길이 된다.
3) 예수 그리스도-하나님의 구원 주도의 유일한 길
하나님의 인간 구원의 주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독특한 절정을 이루고 있다. 창세기 3:15절에 약속된 여자의 후손 약속 이래 하나님께서는 계속하여 인간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하여 왔다. 그러나 B.C. 와 A.D.의 분기점에서 성자 하나님이 친히 자신을 주시는 최고의 행위 곧 성육신하신 사건이 일어났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그는 인간이 되셔서 고난을 당하시고 악마의 시험을 받으시며 투쟁하셨다(히 2:14, 17; 5:7-9). 그는 “모든 일에 우리와 한 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신인(God-Man)되시는 예수께서는 말씀과 삶으로 그리고 십자가의 대속적 죽으심과 부활에 의하여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좋은 소식과 구원의 소식을 주셨다.
인간 구원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의 은혜로만(sola gratia) 가능하다. 이것이 그리스도교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의 기본적인 가르침이다. 여호와의 품성의 화현인 율법에의 일치된 인간의 모습을 재현시켜 가는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은 실낙원에서 사는 인간의 소망이 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키는 성화의 목표는 완전이다. 이 완전 역시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의 결실이 된다.
Ⅱ. 신약성경 상의 완전에 관한 용어와 그 의미
그리스도인 완전에 관하여 성경 기자들이 어떤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지 어휘를 고찰하는 것이 선결적인 필요 요건이 된다. 창조 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창조하신 것은 인간의 존재론적 지위를 말하기 보다는 인간과 창조주 하나님과의 특별한 사랑의 관계 기능을 말하는데 그 강조점이 있다. “Imago Dei”는 언약의 하나님을 닮아가는 “imitatio Dei”를 요청한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창조질서에 이미 나와 있다. 안식일 제도는 최초의 인간이 자기 자신을 위하여 창조된 존재가 아닌 하나님을 배우고 찬양하며 경배케 하도록 창조되었다는 점을 참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며 배우고 각성시키도록 함에 있었다. 에덴동산에 충성과 순종의 시금석으로 선악과가 존재하였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완전한 인간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범죄하여 죄인으로 전락한 다음에야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성소와 제사제도는 여호와의 구원하시는 의의 선물에 대하여 마음으로 회개하면서 계속적으로 보여 주는 사랑의 반응이며 순종의 서원이다.
구약성경에서 노아(창 6:9), 아브라함(창 17:1), 욥(욥 1:1,8)이 완전(tamim)하였다고 묘사하고 있다. 놀라운 것은 그들의 삶에는 결함들이 명백하게 나타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하다”고 일컬고 있는 점이다.
“온전한,” ‘순전한“으로 번역된 단어들은 일반적으로 성숙하고, 건전하고(whole), 완전한(complete) 뜻을 지녔다. 구약의 완전한 성도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행할” 때 하나님을 향하여 “온전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tamim)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더니”(창 6:9).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 . 이르시되 . .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1).
완전한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복하는 사람(total submission), 그리고 그분을 섬기는 일에 완전히 헌신하고 있는 사람(complete devotion to his service), 하나님과 방해 받지 않은(unobstructed)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라론델은 성경상 완전에 대한 개념을 요약하면서 “성경상 완전은 추상적인 인간의 본성에 초점을 둔 것이 아닌 하나님과 이웃과의 완전한(성숙한) 관계“라고 말할 수 있다고 보았다(H. K. LaRondelle, Perfection and Perfecionism, 327). 완전은 윤리적인 행동을 포함하나 단순한 행동 이상으로 그것은 창세기의 타락의 반역으로 깨어진 관계가 복원되어 성숙해 가는 것에 그 초점이 있다.
‘너희 마음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와 화합하여 완전케 하여 . . .그 법도를 행하며 그 계명을 지킬지어다“(왕상 8:61). 구약에서 완전의 표준은 하나님의 계명들에 나타나 있는 의와 사랑의 원칙들에서 찾을 수 있다(마 19:16~21; 눅 10:25~28; 신 5:2~22, 29~33; 6:3~5). “너희 마음이 여호와와 화합하여”.‘ 이 구절은 여호와와 마음을 함께하는 친밀한 교제의 경험을 함축하고 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온전(또는 순전)에 대한 히브리어 tamim이 인간에게 사용된 경우 그 기본적 의미는 신약성경의 텔레이오스 (τελειος )와 같다.
1. 텔레이오스 (τελειος )
완전에 관한 가장 중요한 신약성서의 표현이 τελειος(teleios) 이다. 이 말은 τελος (telos) 어족에 속한다. τελος 는 목표(goal), 목적(purpose), 끝(end)을 뜻한다. 신약성서는 이 텔레이오스(teleios)를 영적 성숙(maturity)에의 도달(성취)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또한 이 용어는 성숙한 신앙의 길에서 옛 삶의 방식으로 다시 돌아서지 않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安定性 뜻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이 용어는 살아계신 하나님께 요동함이 없는 忠誠을 함축하고 있다. 이 용어가 나오는 성경 본문의 例를 보면 영적으로 어린 아이 상태에서 성숙한 인간이 되도록 권고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원수 사랑하는 자, 시련 중에 참고, 신실한 자가 완전한 자라는 교훈을 하였다. 마태복음 5장의 결론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역에서 완전하신 것처럼 인간은 인간의 영역에서 완전하기를 촉구하고 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3-48).
산상보훈의 윤리는 은혜 언약 가운데 구속을 체험하며 기도하는 하늘 백성들과 제자들에게 주신 사랑의 명령법 교훈이다. 이 완전하라는 명령법은 완전한 赦罪의 구속적 직설법 체험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들은 imitatio Dei(imitatio Christi)의 길을 걷고 있는 자들이다. 마태복음 5:48의 직전 문맥에 비추어 보면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원형(Urbild)적인 큰 사랑의 완전한 견본자(the Exemplar)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은혜언약 체험자에게 사랑의 명령법을 주고 있다.
이런 구도에서 마태복음 19:21을 이해하여야 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teleios)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마 19:21).
젊은 법관에 향한 이 말씀에 나오는 완전(온전)은 그 청년의 이상이었다. 그러나 바울이 지적한 것처럼 온전함이란 행함으로(참조 갈 2:21; 히 7:11)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만약 그 청년이 온전함을 성취하기를 원한다면 어떤 공로를 행함으로 그렇게 되기를 기대하지 말아야만 한다. 그는 대 견본자로부터 imitatio Dei하는 마음과 삶이 완전히 변화되는 경험을 해야만 한다. 그에게는 그동안 여호와에 향한 이런 사랑의 반응이 결여되어 있었다. 지금 청년 관원에게는 그런 정신이 완전히 변하고 목적이 바뀌어야만 했다. 관원에 향한 메시야의 ‘teleios“에의 부르심은 구속하는 하나님에 향한 최고의 사랑과 이웃에 향한 완전한 사랑으로 자아를 굴복시키는 급진적인 신앙적 결단과 특성을 띄고 있다.
바울은 히브리서는 텔레이오스를 성숙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 이니라”(히 5:11-14).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침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 (maturity, perfection, teleios]한 데 나아갈지니라”(히 6:1-2).
바울은 히브리서에서 그리스도인 생활의 시작이 있으며 그리스도인은 그 시작점에서 출발하여 계속하여 성숙하여 가도록 권고하고 있다. 갓 태어난 어린 아이는 그에 걸맞은 음식을 먹는다. 어린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면 단단한 식물을 먹어야 하는데 젖을 못 버리고 있는 점을 지적하는 책망에서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the mature, teleion)의 것이라고 하고 있다. 히브리서는 當代 신자들이 아직도 자라지 못한 채 정신적 및 영적인 면에서 신앙의 초보 수준인 어린 아이의 옷을 걸치고 있는 점을 심각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신자들에게 유사한 권면을 하고 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고전 3:1-3).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τελειοι, grown up-NEB) 사람이 되라”(고전 14:20).
바울은 完全한 자들(τελειοι) 중에서 지혜를 말한다하면서 이렇게 지적한다.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고전 2:6).
바울의 관점은 분명하다. 교회 내에서 영적인 어린 아이와 성숙한 자를 구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그 증거로 고린도 교회에서 성숙치 못한 자들은 파당을 조성하고 있다고 하며 하나님의 깊은 것을 이해치 못하고 있는 점을 들고 있다. 바울은 자기 시대뿐만 아니라 오늘날 이 시대 목양자들에게 까지도 양 무리를 완전에 이르도록 양육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러한 일이 가능하도록 하나님께서는 은사까지 약속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하고 있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καταριξω)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mature‑teleios)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11-13).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인 삶의 목적과 목표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영적 성숙, 견실, 요동함이 없는 忠誠으로 제시하고 있다. 즉, 바울은 이 목적으로 완전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다.
바울은 편지서 어느 곳에서도 “텔레이오스”를 무죄한 완전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지 않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teleioi, mature)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빌 3:13-15).
바울은 자기의 사도적 봉사의 목적을 골로새서에서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完全하게 세우려 함이다 라고 하고 있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1:28). 그는 또 에바브로에게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권고하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너희에게서 온 에바브라가 너희에게 문안하니 저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여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구하나니”(골 4:12).
그리스 고전(古典) 작품에도 τελειος 란 말이 장성한 사람이나 동물이 다 자란 것, 과일이 다 익은 것을 두고 사용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장성의 목표는 그리스도 예수이다.
신약성서는 τελειος를 그 어느 곳에서도 無罪한 완전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지 않다. 이른바 완전주의자들은 신자가 지상에서 죄를 짓지 않는 상태에 이르는 것이 가능하다고 본다. 대부분의 Arminians, 나사렛교단, 오순절교단 등이 이 완전주의적 입장에 서 있다. 그들은 죄된 본성이 제거되는 완전을 추구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완전주의자들은 죄를 지을 수 없게 되는 경지를 강조하기보다는 죄를 짓지 않고 있다는 것만을 뜻하는 완전주의를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가장 거룩한 성도라 할지라도 계속하여 그리스도에게로 자라날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완전하고 성숙해 가는 과정은 생명이 지속되는 한 계속된다. 이는 역동적(力動的) 완전인 것이다. 완전주의를 반대하는 입장을 견지하는 자들(nonperfectionists)은 죄로부터 해방되었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성경절(요일 1:9-10, 롬 3:23 등)과 신자들에게 계속하여 죄의 고백을 요구하며 사죄 기도를 하라는 성경절(요일 1:7-8, 마 6:12) 및 신자들 마음속에서 일고 있는 옛 사람과의 투쟁에 관한 성결절들(롬 7:7, 18-19; 갈 5:16-17; 골 3:5; 약 1:14; 벧전 2:11; 요일 3:9과 5:18의 현재 동작이 계속되는 시제; 살전 5:23 등)을 그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그리스도인 삶을 무죄한 완전과 같은 것으로 주장하면 영적 장님이 되거나 또는 자신에 대하여 정직하지 못한 태도에 불과하다 이런 사상은 지양(止揚) 되어야 한다. 이 땅에서는 무죄한 완전은 불가능하다. 그리스도인 내면적 본성, 약점, 죄스러움, 한계성을 살펴보면 텔레이오스 용례를 무죄한 완전으로 보는 것은 허구에 불과하다. 엘렌 화잇 역시 “우리는 이 사특한 몸이 ...영광스러운 몸으로 ... 변화되기까지 ‘나는 무죄하다’고 말할 수 없다” (ST, March 23, 1888)고 하였다.
야고보는 혀를 잘 제어 시키는 자가 완전한(성숙한) 자로 보고 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 3:2). 또한 인내하는 자가 온전한 사람이다고 한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4).
요컨대, 완전한 자란 무죄한 완전자의 의미가 아닌 구속의 직설법을 체험하면서 어떠한 환경 아래에서도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영적으로 성숙한 삶을 살아가는 신자를 두고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성숙하여 가는 일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까지 지속된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 1:6).
2. 카타리조 (καταριξω)
“카타리조”는 "충분히 잘 갖추어진(fully equipped)"것을 뜻한다. 즉, 교회를 위한 사업과 하나님 사업에 있어서 봉사를 위하여 “잘 갖추어진” 상태를 두고 사용되는 어휘이다. 신약 성경은 봉사를 위하여 온전히 준비된 상태를 두고 “카타리조”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런 표현들이 나오는 본문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케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고후 13:11).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fully equipped)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히 13:21).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벧전 5:10).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perfecting, full equipping)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11,12).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perfect, equipped)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 16, 17).
III. 완전의 신학적 의미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인 완전은 하나님의 율법(계명)과 예수의 믿음의 완전한 조화를 지향한다.
1. 신분적 완전
신분적 완전이란 그리스도의 공로를 신뢰하고 회개하는 순간 완전한 자로 간주되는 완전(reckoned perfection)이다. 과거의 허물과 죄과가 있지만 신자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회개하면 그리스도의 완전이 신자의 완전으로 여겨진다. 엘렌 화잇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그대의 결함이 있는 품성을 보지 아니하시고 나의 온전함으로 옷 입은 것을 보신다. ”(소망, 357)는 메시지는 이런 신분적 완전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비록 기도가 유창하게 표현되지 않았을지라도 그것이 마음에서 우러나왔다면 이것은 예수께서 봉사하시는 지성소에 올라갈 것이며 예수께서는 귀찮게 여기시거나 더듬으시는 말씀은 한마디도 없이 완전하신 자신의 아름답고 향기로운 향과 함께 이것을 하나님 앞에 바치실 것이다”(소망, 667).
2. 역동적 성장(성숙) 완전
그리스도인은 상대적 완전 단계에서의 역동적인 성장(dynamic growth)을 하여 간다. 이 역동적 완전은 성화의 열매가 된다. 믿음으로 그리스도 은혜 안에서 자라며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매 단계 마다 완전하다. 물론 신자들은 품성의 결함과 내적 미성숙이 불가피하지만 자라나는 신자는 완전하다. 이 완전은 행동과 태도에 있어서 역동적인 성장을 하여가는 완전을 의미한다. 신자는 계속적인 영적 성장을 하여 가는 완전의 도정에 있으며 이 일은 장차 오는 세상에서도 영원히 계속된다.
사도 요한이 편지서에서 가르치고 있는 다음 메시지를 이 역동적 완전 시각에서 읽어내야 한다.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요일 3:6,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일 5:18).
이들 메시지는 죄 짓는 일을 합리화시키는 것이나 변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요일 3:6)는 “범죄하기를 계속하지 아니하나니” 또는 “상습적으로 범죄하지 아니하나니”의 뜻이다. 사도는 이곳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이 범하기 쉬운 이따금씩의 실수가 아니라, 상습적으로 죄를 행하기를 계속하는 자의 범죄에 대해 말하고 있다. 요한은 또한 그러한 실수나 실패로부터 구제책도 제시하고 있다(1:9; 2:1). 그는 구주의 보호하시는 임재 안에 끊임없이 거하는 자가 도달할 수 있는 이상적인 상태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들 메시지를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죄 없는 완전을 요구하는 것으로 읽어내면 다음 메시지와도 상충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10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9-10).
“그는 이렇게 호소하였다.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얼마나 귀중한 보증인가! 그리스도인의 완전의 최고봉을 향하여 믿음으로 전진할 때에 신자의 앞에 있는 소망은 얼마나 영광스러운가!”(행적, 533).
“천연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영적 세계에 있어서도 자라남이 없이는 생명이 있을 수 없다. 식물은 자라나지 않으면 죽는다. 식물이 자라는 소리도 없고 눈에 띄지도 않으나 끊임없이 계속하여 자라는 것처럼 그리스도인 생애의 발전도 그와 같다. 매 발전의 단계마다 우리의 생애가 완전하게 될 수 있다. 또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되면 계속적인 발전이 있게 될 것이다. 성화는 일생을 통해 이루어야 할 사업이다”(실물, 65).
“그분은 우리가 매 단계마다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보고 인식하면서 완전의 경지를 향하여 더욱 더 높이 일어서도록 계획하신다”(4증언, 416).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의 손을 인도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을 굳게 붙잡게 함으로 우리로 완전한 품성을 얻게 하시려고 하신다”(소망, 123).
“사람은 비록 그가 세상에 나올 때는 하나님의 가장 무력한 피조물이며 본성이 가장 왜곡된 존재이지만, 계속 향상할 수 있다. 그는 학문에 의해 깨우쳐지고, 덕을 쌓아 고상해지고, 정신적 도덕적 위엄에 있어서 발전하여 천사들의 완전과 순결에 조금 못 미치는, 지성의 완전함과 품성의 순결함에 이를 수 있다”(4증언, 93).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과오가 없으셨다. 만일 우리가 그분의 오른편에 앉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완전성을 목표로 해야 하며, 그분께서 이기신 것처럼 이겨야 한다.”(3증언, 336)
3. 사랑과 순종의 완전
이는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그의 뜻에 굴복하고, 그의 율법에 순종하여 고의적으로 죄를 범하지 않는 완전이다.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순종 가능성을 부인하는 주장들은 빗나간 주장일 뿐이다. 식욕과 정욕의 시험을 이기고 자제하는 신앙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의 뜻에 자원하여 순종한다. 그리스도인은 절대적 완전을 얻은 것으로 자만하지 않고 본성적으로 죄스러운 존재이지만 하나님의 뜻이면 그에게 가능한 모든 힘을 다하여 순종하고, 악과 반역적 태도를 품지 않고 승리의 삶을 살아간다. 이러한 순종과 굴복을 하여도 인간의 죄된 본성이 제거되는 것이 아니다.
“구원을 얻는 일은 일종의 협력이요, 연합 활동이다. 하나님과 회개한 죄인 사이에 협력이 있어야 한다. 이 일은 품성에 바른 원칙을 형성하기 위하여 필요하다. 인간은 그로 하여금 완전을 얻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을 이기기 위하여 열렬히 노력하여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성공을 얻기 위하여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인간의 노력 그 자체로는 충분하지 않다”(행적, 482).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과의 인간의 적극적 노력(협력)은 복음적 神人(God-man)협동으로 그리스도의 은혜의 권능의 지원과 엄호 안에서 가능한 협력이기에 완전주의자들이 내거는 믿음에 인간의 행위를 더하는 단순 구도와는 다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자의 실수를 덮으시고, 그들의 부족한 것을 채워주시며 능력을 주시어서 인간 편의 적극적인 노력을 이루어주실 것이다.
완전의 본질(essence)은 어떤 것들과 행동들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관계 가운데서 사랑의 행위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과 하나님을 향하여 그리스도와 같은 사랑을 날마다 살고 드러내는 것(demonstrate)이다.
4. 무죄한 상태 완전
엘렌 화잇은 무죄한 상태의 완전을 두고 다음 메시지를 남겼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중 아무도 죄가 없다고 주장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산 사람들, 알면서 잘못된 행위를 범하기 보다는 차라리 목숨 자체도 희생하려고 한 사람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빛과 능력으로 존중한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성질의 죄됨을 자복하였다”(COL 160).
이런 진술의 저변에는 죄에 대한 더 넓은 정의가 깔려 있다고 보아야 한다.
위의 진술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두 가지 점이 있다. 첫째로, 엘렌 화잇은 의식적인 죄를 넘어서 무의식적인 죄에 대한 성경의 개념을 재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알면서 잘못을 하지 않는 사람들도 죄가 없는 것이 아니다.
둘째로 중요한 점은 무의식적인 죄가 인간의 본성(nature - 성질)에 뿌리를 박고 있다는 것이다. 그 사망의 쏘는 뿌리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 까지 사람들과 함께 있을 것이다(고전 15:56; 빌 3:20,21 낮은 몸).
“우리가 예수께 더욱 가까이 가면 갈수록, 그분의 품성의 순결을 더욱 분명히 알면 알수록 우리는 더욱 더 죄의 극악함을 알게 되고 자신들을 높일 마음이 더욱 더 적어질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계속적인 영혼의 발돋음, 계속적이며 열렬한 죄에 대한 마음을 찢는 회개와 그분 앞에 마음을 겸비하게 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 우리의 그리스도인적 경험에 있어서 진보의 매 발걸음마다 우리의 회개는 깊어질 것이다.”(행적, 561).
무죄한 상태로의 절대적 완전은 하나님에게만 있다. 인간이 죄의 상태에서 탈출하는 완전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신자의 전존재가 홀연히 변화되어 영광스럽게 될 때 가능하다. 인간은 죄 있는 본성을 지니고 있는 동안 죄인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그리스도의 은혜가 계속하여 필요로 하는 죄인이다. 이를 부인하면 자기를 기만하고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든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일 1:8).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10). 그리스도에게 완전히 굴복할 때 인간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죄된 본성(sinfulness)이 제거된다고 믿는 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죄된 본성은 통제가 되어야 하는 것이지 부활의 날까지 제거되는 것이 아니다.
IV. 恩惠의 시기 끝과 恩惠로 因한 구원
1. 요한계시록 22:11의 의미
혹자는 은혜의 시기가 끝난 다음에는 그리스도의 贖罪 공로를 더 이상 활용할 수 없다고 한다. 천상에서 그리스도께서 中保를 완료하는 것은 곧 그의 구원하는 權能, 용서하시는 은총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도 않은 단계에 진입하였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요한계시록 22:11).
이 말씀은 은혜의 시기의 끝에 관한 사실상의 선언을 하고 있다.
영문성경 다른 번역들을 보도록 하자.
“악을 행하는 자는 더욱 나쁘게 되고, 비열한 자는 더욱 비열한 자가 되게 하고, 똑 바른 자는 더욱 똑 바르게 되고, 거룩한 자는 더욱 거룩되게 하라(Let the evil-doer do worse and worse, let the base grow baser and baser, it the upright man be more and more upright, and the man who is holy be more and more holy).”(AV).
"그 사이에 악행 자는 악을 행하도록 하고 더러운 마음을 지닌 자는 더러운데 뒹굴도록 하라. 그러나 선한 사람은 그 선에 견디게 하고 헌신한 자는 그 헌신에 진실되게 하라."(NEB).
"행악자는 더욱 나쁘게 하고 천한 자는 더욱 천하게 되게 하고 올바른 사람은 더욱 올바르게 되게 거룩한 자는 더욱 거룩하게 하라."(American Translation).
이 메시지는 인간이 하나님의 최후적인 메시지, 경고, 및 심판의 문맥에서 나오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최후의 장에 나오는 본문에서 인간을 크게 두 부류로 나누고, 이 두 무리가 취하고 있는 두 가지 대조적인 태도를 보여 주고 있다. 한 무리는 구원 받는 자들이고 다른 한 무리는 잃어버림을 당한 자들이다.
이 본문은 은혜의 시기가 끝나 이제는 인간의 영원한 운명이 영원히 고착 되었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 선언 이후에는 더 이상의 어떠한 변화도 불가능하다.
요한계시록 22:11에서 놓쳐서는 안 되는 중요한 단어는 희랍어 “ετι(eti)”이다. 성경은 이 단어를 “그대로(ετι, still)"로 번역하고 있다. 악행을 고집하고 있는 자는 그대로 더 계속하여 더 악해지고 그리스도의 義의 길을 선택하는 자는 그대로 더 계속하여 거룩하여질 것이다. ”그대로“ (에티, ετι)는 인간이 한 선택의 종국성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악에 빠진 자는 그 심연에 빠지는 상태에 있고, 의로운 자는 여전이 지고한 거룩함으로 고양되어 갈 것이다. 시간의 흐름에 있어서 은혜의 시기의 끝은 결정적인 순간이 된다. 각인의 영원한 운명이 영원히 결판나기 때문이다. 이 선언과 동시에 성령께서는 악인으로부터 철수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더 이상 반대 방향으로 바꾸어 질 수 없게 된다. 의인은 더 이상 잃어버림을 당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22:11 본문은 무죄함(sinlessness)에 관한 진술을 하고 있지 않다. 동 본문이 힘주어 말하고 있는 것은 운명의 종국성에 관련 된 엄숙한 판결 선언인 것이다.
엘렌 G. 화잇은 사람들의 은혜 시기는 매일 끝난다고도 하고 있다. “날마다 누군가의 은혜의 시기는 끝나고 있다”(PP 140: cf. ST 18). 또한 각 사람이 성령을 거스르는 경우 역시 은혜의 시기가 끝난다. 그러나 인간 역사에 있어서 보편적으로 끝나는 은혜 시기 끝에는 “각 인은 구원 또는 파멸 이 둘 중 어느 하나로 결정 된다”(EW 36). 악행자의 죄악은 그대로 계속되고, 증가하여 최대한도로 발전되어 갈 것이다. 은혜의 시기가 끝난 자는 이제 증가된 악에서 계속해 나갈 것이다. 더 이상 자비와 은총의 기회가 없다. 그리스도의 하늘 중보는 끝났다.
하나님 백성이 중보자 없이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義 없이 산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성령 없이 산다는 것을 뜻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그들이 우리 주님의 구원하는 은총 없이 산다는 것도 아니다. 사단은 더 이상 성도들을 비난할 수 없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그들을 위하여 모두 중보하였고 구원의 판결을 내렸기 때문이다. 이 판결은 더 이상 뒤집을 수 없다. 의로운 자가 무죄한 지경으로의 발전할 것이라는 것에 초점이 있지 않다.
엘렌 화잇은 환난의 때 동안 사람들이 구주 없이 살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한결같이 “성소에 중보자(intercessor)가 없이” 살 것이라고 즉 그리스도의 중보가 하늘 성소에서 끝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스도께서는 환난 기간 동안 그분의 백성을 잊어버리지 않으신다. 주님은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할 것이라’(마 28:20)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께서 더 이상 중보의 일을 계속할 필요가 없는 한 가지 이유는 조사 심판이 완성되었고, 은혜기간은 끝났기 때문이다. 환언하면, 환난의 때가 시작하기 까지는 모든 개인들의 경우가 영원히 결정되는 것이다. 마태복음(25:31-46)과 요한계시록(14장과 22:11)은 다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이 땅에는 단지 두 부류의 사람들만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
은혜기간이 끝났다는 것은 마지막 때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 아니면 사단을 그들의 주로서 선택한 것을 가리킨다.
사단과 그 부하들뿐만 아니라 전 우주가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성도들에게 향한 구원 판결에 동의한다. 이제 성도들의 미래에 관한 모든 의문과 질문은 풀리게 되었다. 이제는 삼위 하나님께서는 이제 과거에 악행 하는 자들을 구속하신 일 같은 것을 더 이상 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 하실 남은 일은 최후적인 환난 시기에 성도들을 보호하시는 일, 그리스도의 재림 사건과 천상에서 1,000년간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하는 일이다(계 20:4-6).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서 더 이상 뒤집혀 질 수 없는 신분 때문에 그리스도의 중보가 더 이상 필요 없게 된 것이다. 성도들은 새 땅의 법적 상속자로 확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보의 은혜는 성도들을 엄호하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성도들이 썩을 것이 썩지 않은 몸으로 홀연히 변화되는 날(고전 15:52-54) 무죄한 본성을 부여 받을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흠 없고 무한한 순결성을 더욱 명료하게 보게 될 때 다니엘이 여호와의 영광을 보고 “나의 아름다운 빛이 변하여 썩은 듯 하였고…”(단 10:8)라고 말할 때 느낀 것처럼 우리도 느낄 것이다. 우리는 이 사특한 몸이 그의 영광스러운 몸 같이 변화되어 꼴 지어지기까지는 ‘나는 무죄하다’고 말할 수 없다(Signs of the Times, March 23, 1888). 그러나 만일 우리가 계속하여 예수를 따라가면 하나님 보좌 앞에서 점도 흠도 없게 되고 그리스도의 의와 완전으로 옷 입어 그분 안에서 완전하게 되는 신분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2. 야곱의 환난에 관한 엘렌 화잇의 진술
(1) 야곱의 환난의 체험
엘렌 화잇은 은혜의 시간이 끝난 다음 성도들의 상황과 체험을 야곱의 경험을 빌려 설명하고 있다.
“악의 세력과의 마지막 투쟁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당할 경험도 이와 같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과 인내와 그들을 구원하시는 그분의 능력에 대한 그들의 확신을 시험하실 것이다. 사단은 그들에게는 아무런 희망도 없으며 그들의 죄는 너무 커서 용서받을 수 없다는 생각을 일으켜 그들을 공포에 질리게 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결점들을 뼈저리게 느낄 것이며 그들의 생애를 회고할 때에 그들의 희망은 꺼져갈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크신 하나님의 은혜와 자신들의 성실한 회개를 기억하고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회개한 죄인들에게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 주시도록 간청할 것이다. 기도가 즉시 응답을 받지 못한다고 하여 그들의 믿음이 약해지지 않을 것이다. 야곱이 천사를 붙잡은 것처럼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붙잡을 것이며 그들의 부르짖는 소리는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는 말이 될 것이다. ”(부조, 202).
“그러나 야곱의 이야기는, 죄에 빠졌다가 참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사람들을 그분께서 내어 쫓지 않으시리라는 보증이 된다. 야곱이 자기 자신의 힘으로 싸워서 얻으려고 하다가 놓쳤던 그것을 얻게 된 것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내맡기고 신뢰하는 신앙으로 말미암아서였다. 이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은혜와 능력만이 그가 갈망하던 축복을 그에게 가져다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당신의 종에게 가르치셨다. 말세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이와 같을 것이다. 위험이 그들을 둘러싸고 절망이 영혼을 억압할 때에 그들은 오직 속죄의 공로만을 의지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무력하고 무가치한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구주의 공로를 의지해야 한다. 그렇게 하고도 멸망당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우리의 흉악한 범죄의 긴 목록이 무한하신 하나님의 눈 앞에 놓여 있다. 그 기록은 완전하여 우리의 죄 중에 어느 하나라도 빠진 것이 없다. 그러나 옛날 당신의 종들의 부르짖음을 들어 주셨던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 그렇게 약속하셨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성취하실 것이다”(부조, 202-203).
“모든 죄를 버리고 열렬하게 하나님의 축복을 구하지 않는 자들은 그것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야곱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그가 했던 것처럼 열렬하고 참을성 있게 매달리는 사람들은 야곱이 성공한 것처럼 모두 성공할 것이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눅 18:7, 8).”(부조, 203).
“사단은 그들을 유혹하여 범죄케 한 죄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으므로 그 죄를 하나님 앞에 가장 크게 과장하여 제시하고, 그 자신이 하나님의 은총을 받지 못하도록 제거된 것처럼 그들도 똑같이 제거되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들의 죄는 용서해 주시면서 자기와 자기의 부하들을 멸망시키는 것이 불공평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주장한다. 사단은 그들이 자기에게 사로잡힌 자들이라고 주장하고 그들을 그의 손에 넘겨 주어 멸망시킬 수 있게 해 달라고 요구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범죄한 것에 대하여 사단이 비난함으로 주님께서는 그들을 끝까지 시험하도록 사단에게 허락하신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그들의 확신과 믿음과 견인 불발의 정신은 격렬하게 시험을 받을 것이다. 과거를 회고할 때 그들의 희망은 사라진다. 왜냐하면 그들의 온 생애에서 선을 거의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의 연약함과 무가치함을 완전히 깨닫는다. 사단은 그들의 상태가 절망적이며 그들의 오점은 영원히 씻어 버릴 수 없다는 생각을 갖게 함으로 그들을 위협하고자 노력한다. 그는 그들의 믿음을 파괴시킴으로 그들이 그의 유혹에 굴복하고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버리게 하고자 희망한다.”(쟁투, 618-619)
엘렌 화잇의 말에 대하여 주목할 또 다른 점은 성도들이 궁극적인 죄 없는 완전의 상태를 달성한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가장 큰 시련의 기간에 당신의 자녀들에게 베푸시는 사랑은 그들이 가장 순조롭고 번영하던 때의 주신 것과 똑같이 강하고 부드럽다. 그러나 그들을 풀무불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완전히 반사하기 위하여서는 그들에게 있는 세속적인 것들이 불타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쟁투, 621).
엘렌 화잇은 환난의 때의 진술들과 관련하여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성품을 반영할 필요가 있다는 표현을 하였다. 이 그리스도의 성품을 반영할 필요 언급 시 죄의 제거(sins of omission)나 무의식적인 죄들(mistakes)보다 “품고 있는 죄(cherished sins)” 문제를 의중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 앞에 있는 고난과 고통의 시기는 우리에게 피로와 지연(遲延)과 주림에 견딜 수 있는 믿음, 곧 격렬하게 시련을 받을지라도 쇠약해지지 아니할 믿음이 필요하다. 그때를 위하여 준비할 수 있는 은혜의 시기가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져 있다. 야곱은 끈기 있고 확고하였기 때문에 승리하였다. 그의 승리는 줄기찬 기도의 능력이 어떤 것임을 보여 주는 하나의 실증이다.”(쟁투, 621).
“우리의 대제사장께서 우리를 위하여 속죄하고 계시는 오늘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여지고자 노력해야 한다. 우리 구주께서는 비록 생각으로라도 유혹의 힘에 굴복당하지 않으셨다. 사단은 사람의 마음 가운데 그가 발을 붙일 어떤 곳이 있는지 찾는다. 그러던 중 어떤 죄된 욕망을 품게 되면 그것을 발판으로 삼아 유혹의 힘을 발휘한다. ”(쟁투, 623)
(2) 화잇의 진술에 나타난 사실들
위에 인용한 화잇의 진술로부터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추론할 수 있다.
a. 은혜의 시기가 끝난 다음에 성도들 중에는 자신의 믿음이 결여된 것을 깨닫는 자들도 들어 있다. 이들은 더욱 큰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며 투쟁할 것이다.
b. 은혜시기가 끝난 다음에 성도들은 은혜에 의한 구원과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로를 아직도 의지하게 될 것이다.
c. 하나님의 인을 맞은 성도들은 자기들의 연약성, 부족감, 내지 무가치성을 절감한다. 성도 안에 도사리고 있는 타락된 죄된 본성이 죄된 육신에 나타난다
“그대는 은혜의 기간의 끝에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을 흔들림에 대하여 묘사한 증언의 일부를 취하여 마치 그 가운데서 더 순결하고 더 거룩한 백성이 새로 일어날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들은 원수를 기쁘게 할 뿐입니다.”(1기별, 179).
그들은 행위상으로 의도적인 죄를 범하지 않아 완전하여 왔다할지라도 환난 시 그리스도의 형상을 완전히 반사하여 못하여 이제 환난을 통하여 본성적이고 지상적인 것에서 정화될 필요가 있게 된다.
V. 완전주의(Perfectionism)
완전주의자들은 구원은 믿음과 행함으로 얻을 수 있다고 보며, 그리스도의 재림 이전 현재 시점에도 무죄한 완전이 가능하다고 본다. 그리스도 모본을 따르면 이 완전이 기능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들의 죄관은 관계와 상태 개념을 배제한 외적 행위를 중심으로 구축되어 있으며, 그리스도의 인성이 죄의 성향이 있는 것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 그들의 무죄한 완전 사상은 비성경적일 뿐만 아니라 천박하다.
1. 그리스도교 역사상 완전주의 그룹들
역사적으로 그리스도교 역사에는 완전주의 그룹들이 명멸하여 왔다. 쿰란 신앙공동체(the Qumran Community)는 고대 유대인들의 금욕주의적, 의식주의적, 배타주의적 완전주의의 모습을 담고 있다. 그들의 의의 교사(Teacher of Righteousnesss)의 이러한 가르침은 모세오경의 율법과 하나님에 상당한 거리를 둔 성경 해석을 보여주고 있다.
하르낙의 History of Dogma I 에 따르면 그리스도교 역사상 최초의 완전주의 그룹은 2세기 시리아 수사학자 타티아노스가 이끈 그리스도교 금욕주의 '엔크라테이아'(the Encratites) 파이다. '엔크라테이아'라는 이름은 이 분파의 금욕(그리스어로 enkrateia)주의 교리에서 유래했다. 이 분파는 혼인, 음주, 및 재산 소유를 금지했고 채식주의를 표방하였다. 심지어 성찬식 때도 포도주를 물이나 우유로 대치했다. 이들은 바울 시대 이미 출현 징후를 보이고 있었다. AD 170년 일반교회로부터 배척 받은 이들은 몬타누스 추종자들이 되거나 노바티안 그룹으로 전향하여 나갔다.
AD 156년 소아시아에 등장한 Montanism 몬타니즘은 소아시아 중심부인 프리기야(Phrygia)에서 일어났다. 이들은 정신이 육체를 벗어난 상태인 황홀경(ecstasy)을 가져오는 소위 “영적인 것”을 강조한다. 이 체험을 위하여 금식, 고행, 춤, 환상, 그리고 예언을 하였다. 이교도 사제 출신인 몬타누스(Montanus)는 신자들의 거듭남을 신앙공동체 자격요건으로 하고 성령의 사역을 강조하였다. 그는 자기와 자기를 돕던 두 여인을 통해서 파라클레토스가 오셨다고 말했다. 새 예루살렘은 곧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페푸자(Pepuza)라고 불리는 도시 근교에 세워지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금식할 것이며, 자기들의 세상 직업을 버릴 것이고, 종말을 기다리기 위하여 페푸자에 가서 살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초기교회의 순수한 신앙처럼 삶의 거룩함을 추구해야 했다. 그래서 사람은 오직 한번만 결혼할 것이며, 영적인 이유로 인하여 결혼을 포기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모든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영적 은사들을 인지하고 있어야만 한다. 순교를 장려했으며, 순교하지 않으려 한다면 그것은 죄라고 하였다. 세 명의 지도적인 예언자들인 몬타누스와 두 여인은 죄들을 사해 줄 수 있고, 영적으로 높은 경지에 이른 사람도 그렇게 할 수 있다.
박해시대 배도자 취급 문제에 반기를 들었던 3세기 중엽 Novatians, Pelagius, Alexandria의 플라톤주의자들(Clement, Origen), 중세 수도원 운동, 18세기의 John Wesley 등도 그 나름대로의 특성을 지닌 완전주의 그룹을 형성하여 갔다. 쿰란공동체, Montanists, 플로리스의 Joachim 등은 묵시적 완전주의 그룹들이라고 볼 수 있으며, 엔크레테이아 분파나 펠라기우스 추종자들은 도덕적 금욕적 완전주의자들로 평가될 수 있다. 노바티안들은 교회론적 차원에서 완전주의라는 특성을 띄었고, 알렉산드리아 신학자들(Clement와 Origen)은 신플라톤적 금욕적 완전주의자들로 지목된다. 중세 수도원운동은 명상적 완전주의자들이고, 웨슬리 운동의 완전주의는 윤리적 특성을 각각 지녔다. 그러나 웨슬레 신학의 완전 윤리는 한계를 긋고 있음에 유의하여야 한다.
“온 마음을 다 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그러나 이런 영혼들도 망처진 몸 안에 거하고, 그로 인하여 매우 짓 눌려서, 항상 그들이 원하는 대로 올바르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지 못한다. 더 낳은 몸의 기관들이 없어서 그들은 때때로 잘못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행동한다.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지식이 부족해서. 처지는 이렇지만 그런 결함과 그 결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랑의 율법을 성취한다. 그러나 완전하게는 아니다. 무지와 연약함에 근거해서지만 그들의 행동에 사랑의 결함 때문에 그들은 아직도 ‘속죄의 피를 필요로 하고, 그들 자신을 위하여 우리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라고 말하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Wesley, A Plain Account of Christian Perfection, 84.).
2. 재림교회 내의 완전주의 그룹
재림교회 내에서 등장한 완전주의 그룹은 처음에 교단 내에서 활동하다가 독립목회로 나가거나 교회와 맞서다가 나간 무리들로 구성되어 왔다. 그러나 교회 내에 잔류하여 활동하는 무리들도 있어 왔다. 그들은 주로 종말론적인 마지막 세대론을 펼치며, 타락 후 인성을 지닌 그리스도께서 승리한 모본을 따라 율법에 대한 완전한 순종을 나타내야 하고, 은혜의 기간이 끝난 후 중보자 없이 서야 한다는 등을 가르치는 신학적 특징을 지녔다. 이런 사상은 M. L. Andreasen, H. Douglass, Dennis Priebe 등에서 엿볼 수 있다. A. T. Jones는 은혜의 시기가 마치기 전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리스도의 공로를 완전하고 철저하게 자기 것으로 발전시켜야 하고 또한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하는 주장을 개진하였다. 엘렌 화잇은 이런 주장에 대하여 즉각적으로 배척하였다(Letter 46, 1890).
완전주의자들은 흔히 “그가 내게 이르되 이천삼백 주야까지니 그 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함을 입으리라 하였느니라”(단 8:14)는 본문에서 ‘성소가 정결하게 함을 입으리라’를 인간 몸 과 마음의 성전에 적용하여 죄를 도말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다니엘 8:14은 인간 몸과 마음의 성정의 정결과 무관하다. “매일 드리는 제사와 망하게 하는 죄악에 대한 일과 성소와 백성이 내어준 바 되며 짓밟힐 일이 어느 때까지 이를꼬 ”(단 8:13)에 대한 답이다. 인간 성전의 정결 사상은 엘렌 화잇의 각 시대의 대쟁투 제 23장 ‘하나님의 성소’ (409-422)에 나오는 내용에는 작은 뿔로 인하여 더럽혀지는 천상성소 사상과도 상치된다.
다니엘 8:14을 중심으로 인간 성전의 죄 도말 사상을 펼치는 자들은 다음 인용문을 제시한다.
“하늘에서 조사 심판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회개한 신자들의 죄가 성소에서 도말되고 있는 동안,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는 정결케 하고 죄를 버리는 특별한 일이 이루어져야 한다”(쟁투, 425).
그러나 위 인용문은 하나님 백성의 죄 고백과 회개를 요청하는 일반적인 경고의 메시지이지 꼭 대속죄일 기간에만 국한된 메시지가 아니다. 예컨대, 침례요한의 메시지나 예수 그리스도의 공중 봉사 시작 시의 메시지도 이런 엄숙한 메시지가 선포되었다(마 3:7-11; 4:17; 5:8). 더구나 위 인용문은 인간 안에 도사리고 있는 죄의 성향, 죄의 본성을 제거하라는 기별도 아니다. 대속죄일 경우에 하나님 백성은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여 그들의 마음의 성전을 깨끗하게 하는 일이 더욱 절박하여야 한다.
VI. 맺는 말
완전주의자들은 진공상태에서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가 그들이 등장할 빌미를 준다. 대체적으로 현실교회가 영적, 도덕적으로 무기력하고 타협적으로 비칠 때 그에 대한 반동적 현상으로 등장한다. 그들은 교회의 현재적 영적 삶을 이끌어 올리는 견인차가 될 수 있는 교회 내의 작은 교회로서 활력을 불어 넣을 수 있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들은 처음에는 기성교단 조직에 속하여 소위 개혁을 주장하기도 한다. 이런 과정에 특이한 주장이나 이설을 끼어 넣거나, 어느 가르침의 표준을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전체적으로 조화감과 균형성이 없어 보이는 주장을 펼치어 일반 신자들로부터 경원시 된다. 이리하여 이들은 점차적으로 독자적 길을 걷다가 분리된 신앙공동체를 만든다. 분리 운동을 하는 완전주의자들은 그들이 속하였던 교회가 배도의 길을 걷고 있다고 강도 높게 매도하면서 거기에 몸담고 있는 신도들을 이끌어내는 내부 지향적 선교에 열을 올리고 비판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다. 그들의 관심은 세상을 향한 선교보다는 개혁자의 이미지 강화에 열을 오리면서 그들 나름대로의 높은 수준의 신앙생활의 표준이나 지침을 강조 내지 창출한다. 그들 가르침에는 인본적인 완전 무구한 그리스도인 이상을 이슈가 담겨 있다.
교회는 완전주의자들이 발호하지 못하도록 교회의 영적 수준을 진작시켜 나갈 필요가 있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는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부터 시선을 돌려 계속하여 그리고 배타적으로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그 다음에 모본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양육하는 목회의 비전과 그 구현이 교회를 살려가는 길이 될 뿐만 아니라 완전주의의 출현을 막는 길이 된다.
참된 구원이란 우리를 유일한 구속주와 주님되시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에 연계되는 것에서 시작하고 완성된다. 그런 후에 완전 삶을 사신 그리스도에게 향하도록 하여야 한다. 인간이 죄에 대한 승리는 전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사역이며, 날마다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는 성령께서 계속적으로 우리 삶을 관장할 때 일어난다. 구원하는 그리스도의 의는 신앙생활의 처음 단계에서 뿐만 아니라 계속하여 은혜 안에서 성장하여가는 역동적 권능이 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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