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보증
도전해 오는 질문
“당신은 구원 받았습니까?” 라는 질문을 공개적으로 던지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질문에는 구원이 무엇이냐는 대전제가 생략된 함정이 들어 있다. 사람들은 그 함정에 빠져 당혹스러워한다. 더구나 사단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거짓 구원의 보증에 안주케 하기도 하고, 그들로부터 끊임없이 영원한 참 구원의 보증을 빼앗는데 광분하고 있다. 그런 질문이나 광분이 아니더라도 현재 내가 구원을 확신할 수 있느냐 하는 이슈는 신자들의 실존적 고뇌 중 하나가 된다. 자기 생명이 오늘 끝나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 또는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구원 받을 확신이 서 있느냐 하는 질문 앞에 멈칫거리기만 할 것인가?
연옥 교리에 사로잡힌 로마가톨릭은 아예 이 구원의 확증교리를 배척하여 왔다. 반면에 웨슬리는 이 구원의 확신을 고양하였다. 구원의 보증 주제와 관련하여 개신교회 내에서 역사적으로 두 가지 견해들이 첨예하게 대립되어 왔다. 그 하나는 성도의 견인(堅忍, Perseverance) 교리이고, 다른 하나는 조건적인 구원 보증론이다.
성도 견인 교리
칼뱅주의 성도의 견인교리는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의 영원한 가족의 일원이 되어 잃어버림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가르친다. 이 교리는 이중예정론의 틀 속에서 “한번 구원 받으면 영원히 구원 받는다(Once saved, always saved)"라는 구호로 대중화 되어 있다. 견인 교리는 구원이 성도의 의지 및 행위에 무관하게 객관적으로 보장된다고 가르친다. 오늘날 소위 구원파는 이 교리의 기수로 자처하고 있다. 이 교리는 내 양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며(요 10:27-29),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고(롬 11:29), 착한 일을 시작하신이가 끝까지 이루실 것이며(빌 1:6),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살릴 것(요 6:38-40) 등을 그 근거로 삼고 있다. 그러나 이 교리는 성경에 수다하게 나와 있는 신자의 배도 가능성(마 7:21-23; 히 6:4-6; 고전 9:27; 10:12)과 믿음과 인내 같은 구원의 조건 (요 15:6; 고후 13:5)을 무시하고 있다. 인간의 참여가 전혀 개입되지 않고 인간이 의식할 수 없는 구원을 인간더러 믿으라는 것은 불합리하다. 그래서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이 칼빈의 견인론을 성화교리로 대체하였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한다.
구원의 참된 보증 약속
오늘날은 성도의 견인이라는 표현보다는 구원의 보증(assurance)이라는 용어를 선호한다. 구원의 보증이란 죽을 수밖에 없는 죄 된 상태에 있는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의 후사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이다. 성경에는 구원의 참 보증의 약속이 나온다. 이 확신은 그리스도인 삶을 활기 있게 해 준다. 신자들의 배도의 가능성이 있지만, 이 확신은 인간의 참여를 함축한 성경절들도 함께 아우른다.
요한복음에는 구원의 보증에 관한 약속들이 많이 나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요 6:37). (요 6:34, 47; 10:28-30;12:47 등 참고). 바울 역시 구원의 보증을 강조하고 있다(롬 8:15-17, 29-30; 갈 4:6; 빌 1:6;살전 5:23).
구원의 보증론은 두 가지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 먼저 그리스도께서 구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죄 된 존재인 인간을 위하여 속죄와 중보의 은혜를 제공하여 구원의 보증의 객관적인 기초를 마련하셨다. 그 분 안에서 우리의 모든 요구가 채워지고, 심령의 주림이 충족된다. 우리 심령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는 성경은 이 예수 그리스도가 거룩한 구주가 되신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믿는다. 이것이 구원의 보증의 기초가 된다. 구원의 보증에 대한 주관적인 기초는 신자가 성령의 감동으로 구원하는 복음 진리를 믿고, 용서 받은 하나님의 가족에 입양된 사실을 확신한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롬 8:16). 구원의 주관적 기초는 어디까지나 객관적 기초를 전제로 한다.
구원 보증의 조건
요한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믿음의 관계가 현재적 구원 체험으로 입증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분이다(요일 1:1-3). 이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 것이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 5:10-13).
하나님께서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모든 인간들에게 베푸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모든 인간을 위한 객관적인 속죄의 길을 마련하여 두셨다. 그러나 구원의 보증은 주관적인 기초, 즉, 조건성으로 이어진다. 구원에는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신뢰(믿음) 관계가 지속되어야 한다.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골 1:23; 참고, 벧전 1:5; 고후 13:5).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으로 이어진다(마 7:21-23; 요일 2:28; 약 2:26). 참된 순종 없는 믿음은 거짓 믿음에 불과하며, 그리스도의 은혜를 싸구려로 전락시킨다. 이런 불순종과 은혜를 경홀히 여기면서 구원의 보증을 주장하는 것은 거짓 구원의 확신에 불과하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믿음의 관계를 끝까지 지켜 가는 인내가 필요하다.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10:22).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히 3:14).
한번 얻은 구원의 확증은 자동적으로 영속되는 것이 아니고 사라질 수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의 참된 사랑의 순종을 무너뜨리는 죄악의 거미줄에 걸려 허우적거릴 때, 하나님의 말씀 탐구를 등한 할 때, 그리스도의 능력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살아가고자 할 때, 기도생활이 쇠잔하여갈 때, 성령의 역사를 소멸시켜 버릴 때, 신체적, 정신적 고갈 상태에 빠질 때 약화되거나 증발되어 버린다.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의 연구와 그분께서 함께 계심을 믿는 믿음으로 가장 약한 사람도 살아 계신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살 수 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그들을 붙드셔서 그들이 결코 떠나가지 못하게 하실 것이다”(치료 182).
자기를 바라보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므로 절망에 빠져 구원의 확신을 잃고 만다. 이 때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자기의 무가치함을 그대로 가지고 긍휼하신 구주의 자비에 전적으로 자신을 맡기도록 하여야 한다. “자기를 보지 말고 그리스도를 쳐다보라. 사람들 가운데 거니시면서 병든 자를 고치시고 사귀를 내쫓으신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날에도 역시 능력 있으신 구속주이시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온다. 그렇다면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요 6:37)는 그의 약속을 굳게 붙잡으라. 그의 발 아래 몸을 던지고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당신께서 도와주소서”라고 부르짖으라. 그대가 이렇게 하는 동안에는 결코 멸망할 수 없다. 결코 그럴 수 없다.”(소망, 429)
“나는 구원 받았다” 경계 이유
“한번 구원 받으면 영원히 구원 받는다”는 인식은 현재의 영적 상태에 만족케 하여 영적 성장에 방해가 되기 쉽다. 그들은 거짓 보증의 울타리 안에서 자기 자신을 의지할 위험이 있다. 그들은 자신의 연약함을 볼 줄 모르며 항상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잊어버리기 십상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한 시라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엘렌 화잇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구주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아무리 진실하게 회개했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들에게 그들이 구원을 받았다는 말을 해 주거나 그러한 생각을 갖도록 가르쳐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들을 그릇 인도하는 것이 된다...최초의 확신을 가지고 “나는 구원을 얻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의지할 위험이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의 연약함을 볼 줄 모르며 항상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잊어버린다. 그들은 사단의 음모에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므로 시험이 올 때에 베드로처럼 매우 깊은 죄의 구덩이에 빠져 버린다(COL 155)
이와같이 자아를 포기하는 일은 그리스도인 생애를 처음 시작할 때에만 할 것이 아니라 천국을 향해 걸어가는 매 발걸음마다 거듭되어야 한다...항상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찾는 일과 끊임없이 간절한 마음으로 죄를 통회하고 자복하는 일과 하나님 앞에서 심령을 낮추는 일이 있어야 한다. 끊임없이 자신을 부인하는 동시에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의지할 때에만 우리는 안전하게 걸어갈 수 있다(Ibid., 159).
“나는 구원 받았다”를 경계한 배경에는 칼빈주의 영원 안전교리인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의 비성서적 구원론이 기승을 부리고 있기 때문이다. 화잇은 처음에 자만하여 신앙의 결심을 자랑하였던 베드로가 곧 가야바 법정에서 주님을 부인한 사실을 상기시킨 후 구주를 받아들이고 회심한 자는 시험에 안전하다는 자아 확신을 경계하여야 하며, 자기가 구원받은 것을 말하거나 느낀다고 결코 말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영적인 진보가 없이 현재 상태에 안주하는 거짓 구원의 보증, 히브리서 10:38과 마태복음 24:13의 문맥을 도외시한 거짓 구원의 보증, 및 하나님의 율법 폐기론을 강조하면서 구원의 보증을 주장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그러나 성서적 구원의 보증의 약속을 의심하라는 것이 아니다(참고, 1SM 382, 392, 394).
그리스도인은 거짓 구원 보증을 경계하면서 그리스도와의 살아있는 신뢰관계 속에서 현재적, 미래적 참 구원의 보증의 약속을 향유하며 순종의 삶을 인내성있게 살아간다. 여기에 구원의 보증은 더욱 확실하여 간다.
(2008년 8월호 교회지남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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