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인성신학의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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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역사적 고찰

I. 기독론 2대 유형론

기독교 2000년 역사를 통하여 <래로부터의 기독론(christology from below)><위로부터의 기독론(christology from above)>이 부침하여 왔다. 고대 니케아, 갈게돈 등 여러 에큐메니칼 회합은 이런 이슈들에 대한 대응적 특성을 지녔다.

A. 래로부터의 기독론(Christology from Below)-에비온파적 기독론(The Ebionitic Christology)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역점을 둔 기독론을 전개한다. 주로 안디옥 학파의 기독론이 이 추세를 띄었다. 이 입장에서는 예수를 수퍼스타와도 같은 역사적인 인격으로 보고 있다. 이 방식에 있어서 예수는 이상적인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완전한 사람, 인간이 지향해야할 인간의 原象(Urbild), 즉 이상적인 모델 인간으로 인식된다. 이 조류의 기본적 입장은 예수의 완전한 신성과 성부와의 동등성을 부인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현대에는 자연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귀납법적인 이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이 강조되고 있다. 현대신학에 있어서 이 방식의 대표자는 실존의 조건 속에서 하나님과의 일치성을 잃지 않은 예수를 추구한 Paul Tillich, 부활을 중심으로 역사적 예수로부터 출발한 W. Pannenberg 등이다.

이상적 인간 모델에 역점을 둔 이 방식은 예수의 신성을 약화시키거나 제한시키는 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이해에서 구원론적 동기보다는 모델이나 모범적 인간의 죽음으로 보기 쉬운 점 등이 문제점으로 부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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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의 주요 유형들은 다음과 같다.

1. The Ebionites (AD 1 세기 후반- )

2. 역동적 단일신론 (Dynamic Monarchianism), Theodotus (AD 2세기)

Ritschl에게도 이 역동적 단일신론 성향이 나타난다.

3. Arius (c. 250-c.336)

4. Nestorius(d. 451)

5. Liberalism the Old Quest

6. Pannenberg Now Qu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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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위로부터의 기독론(Christology from Above)- The Gnostic Christology

위로부터의 기독론은 예수의 신성에 그 초점을 둔 방식을 취한다. 이 입장의 성서적 근거는 빌립보서 2:6-8에 두고 있다. 이 방식은 일종의 우주론적 지평 관점에서 허무하고 유한 사물을 넘어 영원하고 무한한 존재를 추구하는 연역적 방식이다. 이 접근 방식은 초기교회 이래 가장 오래된 고전적 방법이다. 주로 알렉산드리아 학파가 이 추세를 띄었다. 흔히 가현론적 기독론(Docetic Christology)이라고도 한다. 이 입장에서는 예수의 완전한 인성을 부인 내지 약화시킨다. 인성이란 보이는 듯하지만 가현적일 뿐이다.

현대신학에 있어서는 Karl Barth가 이 입장의 견지자로 지목 받고 있지만, 그리스도의 인성에 있어서는 다른 시각을 지녔다. E. Brunner 역시 이 위로부터의 기독론 방법을 선호한다.

그러나 이 방식은 예수의 신성 논증의 사변성, 로고스에 역점을 둔 결과 역사적 예수에 대하여 등한시한 점, 영원 무한하신 하나님이 유한 가멸적 인간 안에 임재한다는 난제 등에 직면하는 문제점들을 지녔다.

위로부터의 기독론의 주요 유형들은 다음과 같다.

1. 가현론적 기독론(Docetic Christology)

2. Paul of Samosata, Sabellianism, 양태론적 단일신론 (Modalistic Monarchianism)(3세기)

3. Apollinarianism (4세기)

4. Eutyches (c. 378-454)

5. Monophysites(단성론)

6. Monothelites(단의론)

7. Neoorthodoxy No Quest

8. 실존주의 및 New Qu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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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림교회는 아리안주의라는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을 극복하는 역사적 과정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른바 역사적 예수 문제를 중심으로 부침한 그리스도 교계에서의 양상과는 달리 재림교회 안에서의 죄 있는 인성론 중심으로 변형된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위로부터의 기독론적 인성론>과 첨예하게 대립하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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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견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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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림교회 초기의 개척자들의 반() 아리안주의적 그리스도의 신성관이 교계 내에 큰 줄기로 계속되어 오다가 1888년 이래 극복된 바 있었다. 그리하여 재림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을 신봉하여 왔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에 죄 있는 성향 유무에 관한 논의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특히 지난 50여 년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하여 많은 논쟁과 발표가 있어 왔다. 교단 내에서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하여 제기되어 온 주요 견해들은 正反合的 발전을 하여 왔다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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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아담 타락 후 인성론

재림교회 역사상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오래된 견해는 예수께서 아담의 타락 이후의 인성(postlapsarianism), 즉 타락한 인성으로 오셨다는 주장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모든 인간이 지닌 인성과 같다는 것이다. 최소한도로 그의 인성은 육욕적인 육신은 아니지만, 유전법칙에 영향을 받은 육신은 죄에 대한 유전적 경향, 예수께서 결코 굴복하지 않은 그런 유전적 경향을 지녔다는 것이다 (영원한 본체를 붙잡다, 348).

그리스도의 인성이 죄로 기울어지는 경향성을 포함하여 모든 다른 아담의 후손들과 같다고 보는 타락 후 인성론의 사상적 계보는 19세기 A.T. Jones, E. J. Waggoner, W.W. Prescott으로 까지 거슬려 올라간다. 이들 선구자들 시대에는 이 견해가 신학적 쟁점이 되지 않았다. 이는 이미 반 아리안주의가 풍미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급박한 재림 기별을 펼쳐 나가는 열정적 선교 일선에서 그리스도의 재림, 율법, 안식일, 조사심판 등 교회의 정체성 메시지를 옹호하는 일에 총력을 경주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다른 중요한 신학적 이슈들에 대한 정교한 체계를 마련하는 일에 몰두할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더구나 19세기의 재림교회는 종말론적 율법에의 순종 모델에 함몰된 그리스도의 인성론 구축이 팽배한 시절이었다. 위에 열거한 선구자들은 1890년대 중반 이후 타락 후 인성론 견해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의 메시지의 중심으로 삼았다.(George R. Knight, From 1888 to Apostasy: The Case of A.T. Jones, 136). Jones1894년 베틀크릭의 태버내컬교회에서 그리스도의 인성을 죄 있는 육신(sinful flesh), 죄가 가득한 육신(full of sin)"으로 강조하는 설교를 한 것은 (General Conference Bulletin 1895, 302; Bible Echo, Nov. 30, 1896, 370-371; Sermon by ATJ at the Tabernacle, unpub. MS, July 14, 1894) 그 전형적인 사례가 된다.

Milian Lauritz Andreasen1950년대에 재림교회 내에서 그리스도 죄 있는 인성론을 극대화시켜 교회에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그리스도의 인성이 모든 점에서 우리와 정확하게 같다고 하면서 전통적 인성론에서 탈피한 대총회를 향하여 비판의 포문을 열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죄 있는본성의 교리는 재림사상의 기초가 되는 기둥 같은 진리들 중 하나라고 보았다. 그는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 견해를 바꾸는 것은 역사적인 재림 사상을 포기 하는 것이라고까지 극언을 하면서 다음과 같이 단언하였다. “만일 그리스도가 정욕들로부터 면제되었다면 인간을 이해할 수도, 도울 수도 없었었을 것이다....정욕들과 투쟁을 하여 본 일이 없는 사람은 그 정욕의 힘을 이해할 수도 없고 그 정욕들에 대한 승리의 기쁨도 가지 못한 자이다.” “예수는 이 정욕 없이는 승리하지 못하였다”(Letter to the Churches. Series A. No. 1).

그는 히브리서 1:3의 십자가에서의 일반적인 속죄와 재림 시 최종적 정결 개념이 함축된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를 그리스도 자신의 죄성을 정결케 한 뜻으로 풀이하고 있다(The Book of Hebrews, 53). 그는 속죄를 세 국면, 즉 먼저 자기 자신의 죄를 완전히 근절하여 승리한 국면, 겟세마네에서 시작하여 십자가에서 세상 죄를 위하여 희생을 완성하여 페날티를 지불한 국면, 하늘성소에서의 그리스도께서 지상 성도(144,000)의 죄에 대한 완전한 승리 구현을 위한 속죄 국면으로 보았다(The Book of Hebrews, 58-59).

오늘 날 Andreasen의 후예들은 Colin Standish, Russel Standish, Ralph Larson, Robert J. Wieland, Donald K Short, Herbert E. Douglass 그리고 완전주의 그룹들과 그들의 잡지(예컨대, Our Firm Foundation) 등으로 타락 후 인성론을 집요하게 주장하여 오고 있다. J. R. ZurcherTouched with Our Feelings은 대표적 저술이 된다.

B. 아담 타락 전 인성론

1950년대 중반 이후부터 역사적, 전통적 그리스도 인성론을 넘어서 그리스도의 인성을 아담타락 전 인성으로 이해하는 입장이 재림교회 내에 대두되었다. 이는 주로 교리에 관한 질문들(Questions on Doctrine - QOD) 책 기고자들의 입장이 된다. 그리스도께서 아담이 타락하기 전의 인성을 지녔다는 것이다. , 그리스도는 타락 전 아담의 본성을 지녔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는 아담의 자손들이 공통적으로 물려받은 선천적으로 유전 받은 죄의 성향이나, 후천적으로 죄로 계발된 것 어느 것을 막론하고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특히 이들의 강조점은 그리스도께서는 사실상 죄가 없으셨다는 것이다(R. Allan Anderson, in Ministry, Sep. 1956). 이들은 예수께서 취하신 것(짊어지신 것)은 어떤 것이 되었던지 간에 본유적(本有的)이거나 선천적인 것이 아니고, 인간의 죄 있는 본성, 연약성, 또는 형벌적인 것을 대리적으로 짊어지신 것으로 보았다(QOD, 61, 62).

타락 후 인성론에 대한 반론적 견해의 대두 배경은 이른바 복음주의자들, , Walter R. Martin, George E. Cannon, Donald G. Barnhouse와의 일련의 회동에서 비롯되었다. 1955년부터 이 회동에 참여한 재림교회 학자들은 LeRoy Edwin Froom, W. E. Read, T. E. Unruh, 및 당시 Ministry지의 편집자였던 Roy Allan Anderson이었다. 이 회동 결과 Barnhouse는 그리스도의 인성문제에 관한 재림교회의 입장을 논평하면서 재림교회가 무죄하고 거룩하며 완전한 그리스도의 본성을 신봉하고 있다고 공표 하였다(D. G. Barnhouse, “Are Seventh-day Adventists Christians?” Eternity, vol. 7. 1956, p. 6).

교리에 관한 질문들(QOD)은 마틴 그룹이 제출한 재림교회의 교리들에 대한 질문들에 대한 재림교회 학자들의 응답 내용을 게재한 책이다. Andreasen의 분노를 야기시킨 것은 QOD의 다음과 같은 진술 때문이었다.

그분은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심’(7:26)으로써, ‘그 백성으로부터올바르게 선택되어질 수가 있었다. 그분은 자연적인 출생에 의해서가 아니라 기적으로서 태어나 인성으로 오셨다. 그분의 출생은 초자연적이었다... 비록 육체 가운데서 태어나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하나님이셨으며, 그리고 아담의 후손들을 타락시킨 유전된 성정들(passions)과 오염들이 없으셨다. 그분은 외적 행위 가운데서 뿐만 아니라, 그분의 실제 본성 가운데에서도 죄가 없으셨다’...그분 안에는 악한 것에 대하여 응답하는 어떤 것도 없었다. 우리는 그런 제사장만이 필요하다. 만일 그분이 죄의 오점으로 더럽힘을 당하셨다면, 그분은 우리를 위한 제물이나 우리의 대제사장의 자격을 갖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그분의 생애와 그분의 본성 가운데는 죄가 없으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셨다(4:15)”(p. 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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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3의 견해 - 대안적 그리스도 인성론

대안적 인성론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아담의 타락 전 인성과 타락 후 인성론을 통합 조절한 제3의 견해라고 볼 수 있다. 이 견해는 그리스도의 인성이 100% 타락 전 인성도 아니고, 100% 타락 후 인성도 아닌 중도적 입장을 취한다. Edward Heppenstall을 위시하여 앤드루즈대학교 신학대학원의 그의 후계자들이 이 견해를 가르쳐 왔다. Raoul Dederen 박사는 이런 시각에서 기독론 강의를 하여 왔다. 오늘날 재림교회 기본교리서도 이 견해를 따르고 있다.

이 대안적 접근론자는 예수께서 아담이 타락한 이후의 인성을 취하셨다고 주장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초림 시 종의 형상과 4000년 동안 약해진 본성을 취하셨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인성이 악의 경향(evil tendencies)을 유전 받은 것은 아니다. 비록 그리스도의 몸이 신체적 저하(低下)와 인간 신체구조의 연약성을 이어받았다 할지라도 타락한 인성에 연계된 악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을 유전으로 받은 것이 아니다.

특히 이 견해의 뒤 바침이 된 것은 엘렌 화잇이 타락 후 인성론에 입각하여 설교한 베이커에게 보낸 1895년의 편지였다. 또한 영국교회 목사인 Henry Melvill의 그리스도 인성론 구도에서 차용한 엘렌 화잇의 자료를 밝혀낸 Tim Poirier의 연구 자료가 이 견해를 뒤 바침하고 있다. , 예수께서는 아담으로부터 무흠한 연약성(innocent infirmities)과 배고픔, 고통, 연약함, 슬픔 같은 특성을 물려받았다고 한다. 이런 것들은 죄의 결과이지만, 그것들 자체는 죄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아담 타락 이전의 인성과도 꼭 같지 아니하고, 타락 이후의 인성과도 꼭 같지 않다(Seventh-day Adventists Believe, 47). Woodrow W. Whidden엘렌 화잇과 그리스도의 인성(Ellen White on the Humanity of Christ)에서 이런 대안적 그리스도인성론을 심도있게 체계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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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요약한 세 가지 견해들은 正反合的인 발전이라는 특성을 지녔다. 역사적 재림교회 교리였다는 점을 강하게 부각시키는 복고주의적 타락 후 인성론 입장은 진리 이해의 신학적 발전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를 뒤집는 타락 전 인성론은 아직 소박하여 더욱 정교하게 다듬어져야 했다. 건실한 신학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신앙과 소망의 초점인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종말론 구축이 바른 이해의 길이 된다. 먼저 예수께서 구주와 주되심을 고백하고, 그 다음에 순종의 모본 되신 분을 따라야 한다. 종말론 구도에 걸 맞는 그리스도의 인성론 구축은 신학적 역주행이 된다.

그리스도의 인성론 문제의 핵심은 죄가 얼마만큼 그리스도의 인성에 감염이나 영향을 주었느냐하는 죄에 대한 이해가 선결요건이 된다. 특히 그리스도 인성론 논쟁의 주요 초점은 성경과 엘렌 화잇의 저술에 나오는 죄 있는 육신의 모양(en homoiomati sarkos hamartias, in the likeness of sinful flesh)”(8:3), “죄 되고 타락한 본성(sinful and fallen nature),” 죄로 향한 "성향(propensities),” 또는 죄의 성벽(inclinations)” 또는 경향(tendencies)”의 의미가 무엇이냐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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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완전주의자들의 지향 목표

재림교회 내에 일어 온 아담 타락 후 그리스도의 인성론의 지향은 완전주의의 구현에 있다. 완전주의가 추구하는 그리스도의 인성관은 다음과 같은 점들이 담겨 있다.

1. 그리스도의 인성은 우리의 인성과 100 퍼센트 동일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와 주가 되신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지만, 역점을 그리스도의 모본론에 둔다.

2. 그리스도께서 타락한 본성(fallen human nature)으로 죄 없는(sinless) 삶을 사셨으므로, 우리 역시, 그분께서 하셨던 것처럼 동일한 능력에 의지하여 죄짓는 일 없이살 수 있으며 또한 살아야 한다.

3. 남은 교회가 최종적으로 이 기별을 받아들이고, 절대적인 죄 없는 완전의 상태에 이를 때에, 그리스도의 품성은 그분의 백성 가운데서 완전하게 재현되어질 것이며, 그 때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대리고 가시려고 오실 것이다.

4. 교회가 이와 같은 절대적인 죄 없는 완전의 상태에 도달하는데 실패한다면 늦은 비는 내리지 않을 것이며, 계시록 18장의 큰 외침도 성취되지 않게 될 것이며,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도 오시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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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주의자들의 이 같은 주장에는 엘렌 G. 화잇의 저서들로부터 다수의 인용문들로 채워져 있어 혼란을 가중시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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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 Ellet J. WaggonerA. T. Jones의 유산

아담 타락 후 그리스도 인성론의 뿌리는 1888년을 전후한 E. J. WaggonerA.T. Jones의 사상에 그 맥락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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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죄 있는 인성을 지닌 그리스도 인성론의 시발점

그리스도의 인성이 죄로 기울어지는 경향성을 포함하여 모든 다른 아담의 후손들과 같다고 보는 타락 후 인성론의 사상은 이미 언급한 대로 A.T. Jones, E. J. Waggoner, W.W. Prescott에서 이미 나타났다. 이들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와 완전에 관한 입장의 지반을 바로 이 인성의 동일성에 두었다. 이들 선구자들 시대에는 이 견해가 신학적 쟁점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1890년대 중반 이후 이 견해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의 메시지의 중심으로 삼았다[George R. Knight, From 1888 to Apostasy: The Case of A.T. Jones (Hagerstown, MD: Review and Herald Publishing Assn., 1987), 136].

현재 재림교회의 그리스도 인성에 관한 열띤 논의의 중심 이슈들은 모두 WaggonerJones까지 소급된다. Robert J. WielandWaggonerJones의 종국적인 배도를 1844년의 대 실망에 비교하면서 1844년과 1888년 사건들을 병행시킨다. “그것은 주님 그분 자신이 거의 압도적인 혼동과 비틀거리는 방해물 둘 다를 진리로 거절하는 것을 변명하기를 원하는 어떤 이에게 허락하셨다고 보인다”(The 1888 Message, 66).

WielandShortJones Waggoner를 두둔하여 형제들로부터 기독교 정신에 위배되는 박해를 견디도록 강요받았다”(ibid., p. 67)고 하고, 마르틴 루터와 존스/와그너를 비교하여 보면교황권과 가톨릭 사제단의 적의에 찬 반대에 직면하여 기별을 전한 루터의 과업이 오히려 더 쉬었을 것으로 본다(ibid., p. 68)고 하였다. 또한 WielandShortWaggonerJones가 전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관한 주장에는 극단적인 사상이 들어 있지 않다고 추론하면서 하나님께서 빛을 비추시려고 그들을 보내셨지만, 형제들의 반대로 내침을 받은 것으로 보았다(1888 Re-examined, 116). WaggonerJones는 마치 모세처럼 은혜를 모르는 백성에 의하여 넘어뜨려지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다가오는 세대들이 우상 숭배를 위한 모든 근거를 제거하시려고 기별 자들을(WaggonerJones) “비밀히” “감추셨다”(ibid., 123).

그러나 WielandShort의 이 같은 추론은 하나님의 품성을 오도하는 무서운 논리에 불과하다. WaggonerJones에 대한 이와 같은 과장된 접근은 그들의 1888년 기별의 중요성을 고조시키려고 의도된 것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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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888년 기별과 그리스도의 인성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이슈가 WaggonerJones1888년 총회에서 전한 기별에 포함되어 있는가?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이 1888년 총회에서 전한 기별이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다. WielandShort 역시 이 점을 시인하여 우리는 실제로 미네아폴리스에서 두 개혁자들이 전한 1888년 기별 그 자체를 얻지 못한다고 증거하고 있다(The 1888 Message, 9).

그리고 엘렌 화잇이 그들이 전한 모든 메시지를 모두 배서한 것도 아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엘렌 화잇은 WaggonerJones가 모든 것을 바르게 가르치고 있는 것으로 보지 도 않았다. 이는 18902월 목회자학교에서의 화잇의 다음과 같은 진술이 시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적시에 존스와 와그너 형제들에게 귀한 진리를 주셨다. 내가 그들이 무류하다고 보았는가? 그들이 과오를 범할 수 없다고 말하였는가? 그렇지 않다. 나는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MS 56, Feb. 7, 1890.). 헤스겔은 화잇에게 교단 지도자들이 WaggonerJones를 반대하였지만, 1888년 이후 여러 해 동안 그들의 기별을 인정한 결과 재림교회 내에서 비판이 더 이상 없는 침묵 상태라고 하면서 사람들이 존스를 두고 거의 영감 받은 것으로 보는 기류를 화잇에게 전하자 (Stephen N. Haskell to Ellen G. White, April 22, 1894), 화잇은 일반적 의미에서 동조한 것이지 그들의 과오까지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고 답하였다(Ellen G. White to Stephen N. Haskell, June 1, 1894).

그러나 WaggonerJones의 기별들을 재구성하려는 완전주의자들은 그들의 1888년 이후의 강조점들 중 일부를 교묘하게 끌어와서 1888년의 메시지로 부각시켜 왔다. Waggoner1889-91년 대 사상은 전환기적 특성을 지녔으며, 그 이후는 범신론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David P. McMahon, Ellet Joseph Waggoner: The Myth and the Man, 1979). 그 중에서도 특히, 우리의 인성과 그리스도의 인성의 동일성에 관한 그들의 주장은 20세기 중엽 이래 재림교회를 혼돈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역할을 하였다.

존스는 1895년 대총회 대표자들에 대한 그의 강론 중에서 그리스도의 본성은 바로 우리의 본성이다. 그분의 인성 속에서 그분과 그대 사이에는 티끌만한 차이점도 없다고 힘주어 말하였다(1895 GCB, 233, 436; From 1888 to Apostasy, p. 136).

하나님께서는 죄 있는 육신(sinful flesh)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가 죄 있는 육신을 취하시고도 죄 그 자체를 드러내시는 대신에, 우주 앞에 그의 임재, 권세 및 영광을 나타내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그리고 이것을 인간 속에서 이루시기 위하여 아들이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주 예수께서 하신 것처럼 인간이 주 예수를 모시는 것이 전부이다(ibid., 137, 138).

이와 같이 Jones는 죄 있는 육신 가운데서 죄를 극복함으로써, 예수께서는 우리 각자를 위하여 동일한 일을 하도록 하는 길을 열어 놓으셨다고 결론을 맺었다(From 1888 to Apostasy, 138). 그리하여 WaggonerJones의 추종자들은 마치 WaggonerJones를 신적 권위를 지닌 것으로 격상시키면서, 만일 100% 우리와 같은 본성을 지닌 그리스도께서 그런 인적 본성으로 승리하셨다면, 재림신도들 역시 같은 승리를 얻을 수 잇으며 죄 없이 살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여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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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완전주의자들의 WaggonerJones에 관한 기본적인 문제점들

(1) 전술한 바와 같이 1888년 미네아폴리스 대총회 회기 때 WaggonerJones가 전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의 기별에 대한 정확한 기별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일부 재림교인들은 이것을 두고 하나님의 섭리로 본다. WaggonerJones가 사실상 선포한 메시지를 액면 그대로 알 도리가 없다면,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WaggonerJones의 주장을 1888년 총회 메시지에 포함되어 있다고 단정할 수 없게 된다.

(2) 설령 WaggonerJones1888년 총회에서 전한 기별의 필사본들을 가지고 있고, 그 기록에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언급이 포함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 엘렌 화잇이 그들이 전한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기별을 과연 배서하였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이는 엘렌 화잇이 O. R. L. Crosier의 지계표적인 성소에 관한 기사를 배서하였을 때, 같은 기사 안에 포함된 오는 세대(the age to come)”에 관한 그의 잘못된 견해들까지 배서하였다고 분명히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3) WaggonerJones의 모든 기별들에 대하여 엘렌 화잇이 배서하지 않았다는 분명한 기록이 남아 있다. 엘렌 화잇은 1888111일에 모였던 대표자들에게 와그너 의사가 한 성경에 관한 어떤 해석들을 옳은 것으로서 간주하지는 않는다고 언급하였다(From 1888 to Apostasy, p. 72). 화잇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중심 메시지, 곧 그의 사랑하시는 품성과 용서하시고 권능을 입혀주시는 은혜에 관심을 표명하였다(E. G. White MS 15, Nov. 1, 1888).

엘렌 화잇은 그 후에도 목회자들에게 존스와 와그너에 대하여 유사한 취지의 발언을 한 바 있다. “나는 의심 없이 하나님께서 존스 형제와 와그너 형제에게 마침 적절한 때에 귀중한 진리를 주셨음을 믿는다. 내가 그들을 절대 무류의 자리에 둘 것인가? 내가 그들이 의문시되어질 수 없는 진술을 발표하거나 그와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가? 또는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라 할 수 없는가? 내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가?아니다. 나는 조금도 그런 투로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께서 빛을 보내주셨다고 말한다”(MS 56, 1890, quoted in From 1888 to Apostasy,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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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렌 화잇이 WaggonerJones의 기별에 관하여 단지 일반적인 승인을 부여하였다는 점을 기화로, 동 배서의 범주를 살펴보지 않은 채 정론에서 일탈한 어떤 가르침들까지도 엘렌 화잇이 인정한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들 존스와 와그너 두 개혁자들이 전파한 기독론 전부에 대하여 교리적으로 무류한 권위를 부여하는 일은 금물이다. 예컨대, 1889년에 와그너는 그리스도께서 죄짓는 것은 불가능했으며(Sign of the Times, Jan. 21, 1881, 39), (1890년에 출판된 책 가운데서), 그분의 존재의 시작 시점이 있다는 아리안적 입장을 취하였다(E. J. Waggoner, Christ and His Righteousness, 20-22; cf. Knight, Angry Saints, 44, 45)는 점은 이미 용도 폐기된 가르침들이다. 이는 엘렌 화잇이 시대의 소망(The Desire of Ages)에서 그리스도 안에서는 최초부터 있고, 빌려오지 않고, 파생되지 않은 생명이 있다”(p. 530)고 분명히 명시하고, 또한 예수께서는 죄 짓은 일이 가능하였다고 분명히 지적한 점에서 이미 드러났다.

(4) 1888년 총회에서 그리스도의 인성문제는 토론되지 않았다는 것이 정론이다. George Knight1888년 대총회회기 의사일정, 광범위한 서한집, 잘 알려진 회의에 관한 두 가지 새로운 자료들을 수록한 R. DeWitt Hottel의 일기장 및 동 총회 기간 동안의 일들을 취급한 W. C. White 기록 소책자 두 권을 검토한 후에, “이들 기록들 중 그 어느 것도, 그리스도의 신성, 그리스도의 인성, 또는 죄 없는 삶1888년 총회에서 강조되거나 토론된 주제들이었다고 논증하지 않고 있다고 단정하였다(From 1888 to Apostasy, 37). W. C. White 기록 소책자는 당시 성경연구집회에서 다룬 성경절들을 기록하여 둔 노트여서 그 역사적 가치가 높은 것이다.

이와 같은 결론은 엘렌 G. 화잇의 1891년 일기에서도 확인된다. Knight가 지적한 것처럼 1888년 기별의 본질에서 추출되는 점은 엘렌 화잇이 율법과 복음의 조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다. 일기에 나온 사항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점은 하나님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죄 용서,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인한 죄에 대한 승리의 메시지와 호의와 실천적인 경건에 관한 것이었다(TM 91-93에 믿음의 의의 기별의 핵심이 압축적 진술 참고). 1888년 기간 동안의 엘렌 화잇의 최대 관심사는 실천적인 그리스도인 신앙, 실질적인 경건을 지니는 것이었다. 그는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얼어 붙듯한 냉정함으로 그들은 다른 이들의 마음에 감동을 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의 마음들이 그리스도의 마음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축복된 사랑으로 충분히 충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E. G. White Diary, Feb. 27, 1891, cited in Knight, From 1888 to Apostasy, pp. 68,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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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대총회 회기 때 Jones가 일부 대표자들로부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같이 연약하신 형제이시다. 그러나 같은 성정들(정욕들)(passions)을 갖지는 않으셨다”(2증언, 201-202)는 엘렌 G. 화잇의 진술을 인용하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즉답을 피하였다. 다음 날 그는 설교에서 그리스도는 죄 있는 육신과 같은 점을 지녔지만, 죄 있는 마음을 지니지 않았다고 답하므로 육신과 마음 사이를 구별하는 답을 하였다. 요컨대, 존스는 그리스도가 우리와 같은 죄 있는 육신은 지녔으나, 그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마음이었다는 대답을 한 것이다(From 1888 to Apostasy, 138). 그의 설명을 더 보자.

그리스도는 우리와 같은 성정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에 관하여: 성경 가운데서 시종일관 그분은 우리와 같으시며, 육체를 따라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말한다. 지나치게 멀리 가지 말라. 그는 죄된 마음의 모양 가운데서가 아닌, 죄 있는 육신의 모양 가운데서 지음을 받았다. 그분의 마음을 그것으로 이끌고 가지 말라. 그의 육신은 우리의 육신이셨다. 그러나 그 마음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었다. 만일 그분이 우리의 마음을 취하셨다면,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지금까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권고할 수 있었는가? 그것은 이미 지금까지 그와 같이 하여왔던 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어떠한가? , 그것은 역시 죄로 더럽혀진 것이다”(General Conference Bulletin, 1895, pp. 312, 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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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결정적인 점에 있어서 우리와 같지 않으셨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리스도가 우리와 동일하다고 볼 여지도 사라지게 된다. 존스는 예수께서 단지 그분의 육신에 있어서만 정확히 우리의 본성을 취하셨다는 점을 수용하도록 강조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결국 우리의 성정들(passions)을 취하지 않으신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아담과 하와의 타락한 마음을 취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이는 Jones가 그리스도와 보통 인간들 사이에는 '티끌만한 차이점' 이상의 것이 있었다는 것을 스스로 논증한 셈이 되어 버리는 자가당착에 빠진 것이 된다(From 1888 to Apostasy, p. 139).

이 모든 것에 관계없이, 많은 현대의 WaggonerJones의 추종자들은 예수의 본성과 우리의 것 사이에는 극히 작은 차이점도 없었다라는 Jones의 처음 선포에만 매달리기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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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재림교회 신학자들-복음주의 신학자들 사이의 회동

1. 대화의 단초

동 펜실베니아 합회장 T. E. UnruhEternity 지 편집장이며 필라델피아에 있는 대중적인 라디오 설교자, 같은 도시의 대형 장로교회의 목사인 Donald Grey Barnhouse 의 믿음으로 말미암은 라디오 설교를 듣고 감사의 편지를 보낸바 있었다. Barnhouse는 소년시절부터 재림교회를 친숙하게 알고 지내왔다. 평소에 행함으로 말미암은 의를 믿고 있다고 생각한 재림교회에서 뜻하지 않은 반응을 보내오자 그는 깜짝 놀랐다. 그는 재림교회의 그리스도 본성과 사역에 대한 가르침을 사단적이며 위험한 것으로 여기고 있던 터라, 낯선 재림교회 목사와 식사를 같이 들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오찬 약속을 하였다. 그러나 이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BarnhouseEternity 지에 정로의 계단에 대하여 조소적인 서평을 게재하였다. Unruh 목사는 연구 자료들을 그에게 보냈다.

1954년 반하우스는 당시 Eternity 직원이며 이단 문제 저술들을 출판하였고 New York 대학교에서 미국 안에 있는 기독교 이단종파들 원고를 준비 중인 남침례교 목사 Walter R. Martin에게 재림교회에 대한 책도 저술할 것을 위탁하였다.

이리하여 19553월에 지명도 있는 네 명의 재림교회 지도자들은 어떤 복음주의 지도자들과의 연속된 공식적인 대화들을 시작하였다. 이는 교회가 향후 심대한 논쟁으로 돌입하게 될 가교 역할을 할 것이었다. 연구논객이었던 Martin이단들의 발흥(The Rise of the Cults)”에 관한 책에서 재림교회에 반대하는 원고를 완성하여 가는 중이었다. 그는 가능한 한 정확하게, 우리가 실제로 믿고 가르쳤던 것을 확인하기를 원하였다.

재림교회 측에서는 대총회 목회부장 LeRoy Edwin Froom, 대총회 Field Secretary W. E. Read, T. E. Unruh, 그리고 후에 Ministry지의 편집자였던 로이 Roy Allan Anderson이 참여하였다.

그 대화들의 목적은 복음주의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재림교회의 독특한 신조들의 정확한 설명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 그룹은 적어도 1여 년의 기간을 통하여 대총회의 타코마 파크(Takoma Park) 사무실에서 회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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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4대 토의 주제들

Barnhouse는 회동 벽두에 잔뜩 경계하는 태세를 취하였다. Martin은 이미 방대한 분량의 재림교회 측 문헌을 읽은 바 있어 40여 가지의 신학적 질문들을 제시하였다.

토의 항목들은 다음 4가지였다.

(1) 그리스도의 속죄가 십자가에서 완성되었는지 여부

(2) 구원이 은혜에 율법의 행위가 더하여진 결과인지 여부

(3)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하지 않는 피조적 존재인지 여부

(4) 그리스도가 성육신 시 인간의 죄 있는 타락한 본성을 취하셨는지 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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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표들은 이러한 항목들에 대한 신봉 여부가 재림교회를 그리스도의 교회로 볼 것인지 여부를 가늠하는 시금석들이 된다고 보았다. 재림교회 지도층은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 받는 다는 점, 삼위일체 교리를 신봉한다는 점에 대하여 피력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물론 1844년 재림운동에 참여한 분들의 구성이 에큐메니안적인 특색을 지닌 탓에 초기 선구자들이 오해 받을 소지의 책자들을 발행한 것도 사실이다. 재림교회 선구자들 중에는 아리안적 기류, 안식일 준수를 구원의 기초로 보는 율법주의적 시각을 지닌 분들이 있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런 자료들은 극복되어 신학적 발전 흐름에서 크게 힘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의 속죄가 십자가에서 완성되었느냐의 문제와 그리스도의 인성이 죄 있는 본성인지 여부에 대하여는 논란의 여지가 많았다. Froom과 그 동류들은 속죄가 십자가에서 완성되었으며, 그 완성된 것이 현재 하늘성소에서 적용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속죄 문제에 관하여는 협의 및 광의적 이해 방식을 피력하는 방식으로 동 주제 역시 크게 문제될 소지가 없었다. 재림교회 대표자들은 복음주의자들 또한 하늘 성소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관심을 집중하여야 한다는 각성을 일깨웠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인성 문제는 1888년 이래 재림교회 내에서 죄 있는 인성이라는 시각이 너무 많이 강조되어 이를 극복하기는 쉽지 않았다. 대총회 지도층을 역임한 인사들까지도 그리스도의 인성을 죄 있는 인성으로 보는 시각을 견지한 바 있었다. 예컨대, 전 대총회장 W. H. Branson은 후에 바로잡았지만 Drama of Ages1950년판에서 그리스도는 친히 인간의 죄 있는 본성을 취하셨다,” “인간의 죄 있는 본성을 받아 들이셔야 했다고 기술하였다.

이 회동에서 재림교회의 대표자들은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입장을 과거의 선구자들이 아담 타락후 인성론 입장에서 선회하여 아담 타락전 인성론으로 보는 시각을 제시하였다. BarnhouseMartin, 일부 반대자들이 있긴 하지만, 재림교 교단의 대다수가 무죄하고, 거룩하며, 완전한그리스도의 인성을 신봉하고 있다고 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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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 Andreasen의 대() 교회 지도부를 향한 포문

1. Miliam Lauritz Andreasen 신원

Miliam Lauritz Andreasen1876년에 덴마크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1894년에 가나다를 거쳐 미국으로 이주한 후에 오래지 않아, 10대 소년으로서 재림교회에 신자가 되었다. 1888년 미네아폴리스에서 개최된 대총회 때, 그는 단지 12살에 불과하였으며, 아직까지 비재림교인으로 유럽에 살고 있었다. 그는 초등학교 교사로서 잠시 근무한 이후에, 목회자가 되었으며, 1900년 초에 목사로 임명되었다. 여러 해를 거쳐서 줄 곳 그들 가운데서, 다양한 교회 직책을 위임 받았다. 유니온 대학(Union College) 학장(1931-1838), 워싱턴 D.C.에 소재한 SDA 신학대학원(SDA Theological Seminary)의 신학 교수(1938-1949), 그리고, 대총회의 Field Secretary(비정규적 임무 담당 부장)(1941-1950) 등을 역임하였다.

교단 내 지도적인 성서학자와 신학자로서 알려진 Andreasen은 안식일학교 교과들, 또는 교과 지도서 준비를 세 번씩이나 위촉 받은 바 있었다. 그는 그 외에도 몇 권의 책들을 저술하였으며, 속죄와 성소의 교리들에 대하여 필생의 관심을 기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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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파루시아 지연과 이에 대한 Andreasen의 돌파책

1888년에 이어진 10년 동안, 미국의 재림교인들은 예수의 임박한 돌아오심의 기대 가운데서 학수고대하며 서 있었다. 그 나라를 둘러싼 모든 지역과 세계 가운데서 대체적으로, 그들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오심의 가까움의 징조들을 보았다고 생각했었다. 특히 그들은 미국 헌법에 대한 블레어(Blair) 수정안과 관련하여 일요일 법령 개정안 문제로 인하여 종말론적인 의식이 강하여 졌다. 다수의 신자들이 요한계시록 18:1, 2큰 외침이 이미 시작되었으며, 환난의 때가 단지 앞서 이를 수 있다는 깊은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19세기는 지나갔으며, 주님은 오시지 않았다. 20세기의 첫 10년 동안, 재림교회 지도자들의 관심은 교회 재조직과 재편성 같은 행정적 문제에 큰 관심을 쏟았다. 그들은 또한 범신론과 거룩한 육체운동과 같은 신학적인 이슈들로 인하여 분열되었다.

그러나 세기가 바뀌어 진 얼마 후 이전에 볼 수 없는 정치 군사적 사태가 세계정세를 위태롭게 하여 갔다. 1914년의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한 것이다. 이로 인하여 그리스도 재림의 급박성 물결이 고조되어 갔고 다른 주제들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낮아졌다. 세계대전 기간 동안 성서 예언 상의 이슈들, 예컨대, “북방 왕의 신원과 아마겟돈 전쟁의 본질에 관한 토론들이 열을 띄었다. 상당수의 신자들이 제 1차 세계 대전을 요한계시록 16:16의 성취로서 보았다. 이 전쟁이 아마겟돈 전쟁이라면, 물론 그리스도의 오심은 이제 곧 바로 문어귀에 임박한 셈이 되었다. 1918년의 터키의 몰락은 북방왕 예언 열기를 더하였다. 이와 같은 국제정세의 긴박한 흐름으로 인하여 교회 지도자들과 신도들은 미네아폴리스에서 1888년 대총회 회기 때에 증거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로 복귀하면서 신앙적 각성을 촉구하는 방향으로 나갔다.

재림교회 지도자로서 활동하고 있었던 Andreasen은 세계 제 2차 대전이라는 큰 징조를 강조하는 당대 기류에 편승하지 않고 남은 백성들이 144.000명으로서 변화되는 일에 초점을 맞춘 메시지를 내 보냈다. 1942년에 대총회 임원들에게 제출한 보고서에서 그는 144,000에 관한 지극히 중요한 교리를 제쳐두고 세계 대전, 히틀러, 그리고 미래에 관한 기상천외한 것들을 전파하는 일을 중지하여야 한다고 촉구하였다. 또한 그는 아마겟돈의 주제에 편중하여 토론과 논의 일변도를 두고 못마땅해 하였다(Andreasen to J. L. McElhany and W. H. Branson, Dec. 25, 1942, p. 5).

Andreasen은 이런 교단 내에 흐르고 있는 시대 징조 같은 기류에 편중하는 것을 경계하면서 완전주의적 입장을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전개시켜 나갔다. 후에 실패로 이어진 파루시아에 관한 기상천외한 이론들을 반대하였다는 점에서 그는 교단신학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그의 파루시아 지연 이유로 남은 백성이 144,000명의 완전한 모습에 미흡한 것을 예리하게 지적한 기별은 설득력을 더하여 갔다. 그리하여 파루시아의 지연의 이유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와 절대적 무죄한 완전의 결여에서 찾는 일이 부각되어 갔다.

그의 그리스도 인성론 신학의 근본 동인은 종말론에서 출발한 것이다. , 그는 종말론적인 그리스도의 인성론을 전개하였다.

3. 복음주의자들과의 회동에 비판적 시각

Andreasen은 재림교회 지도층의 복음주의학자들과의 대화들을 회의적으로 보았다. 이는 그에게 재림교회를 배역하는 길로 비쳐졌다. 그는 19572월부터 12월까지 교단 내 고위급의 지도자들과의 사이에서 일련의 편지들을 차기 대총회장인 Reuben R. Figuhr와 교환하였다.

196146일에 대총회 임원들과 연합회장 회의에서는 집요한 논쟁과 교단행정을 어렵게 한 그로부터 성직 신임장을 잠시 회수하였다. 이에 대하여 Andreasen비합법적이며 무효라고 선언하면서 대총회의 행정조치에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자기 같은 전문가가 복음주의자들과의 회동에서 소외되었다는 점이 이런 반동으로 이어진 주된 이유로 보인다. 또한 그는 복음주의자들과 회동시 이미 은퇴한 신분이었을 뿐만 아니라 (1950년에 은퇴), 거의 80세 고령이었다는 점이 그를 배제하게 된 것이다. Andreasen의 전기 작가인 버지니아 Virginia Steinweg에 따르면, 대총회 안식일학교부에서 몇 해 전에 그에게 위촉한 1957년도 제1기 및 제2기용 안식일학교 교과서 Isaiah, the Gospel Prophet 가 정책 변경으로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취소당한 것으로 그는 심대한 상처를 받았다. 이 사건은 그가 교단과 각을 세운 또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그는 교단을 걸어 거금 3,000달러 손해 배상을 청구한 것이다(Virginia Steinweg, Without Fear or favor: The Life of M. L. Andreasen, pp. 171, 173).

그러나 Andreasen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그리스도의 인성과 속죄의 교리들에 대하여 타협하는 방향으로 빗나가는 것을 최대 이슈로 내 걸었다. 그에게는 이 두 가지, 즉 그리스도의 인성과 속죄의 교리가 상호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 그는 그리스도의 성육신 인성에 죄 있는 인성을 취하셨다. 아담의 후손들을 더럽힌 유전된 성정과 오염들로부터 제외되지 않으셨다.

1960년경에는 MartinThe Truth about Seventh-day AdventismZondervan 출판소에서 나왔다. 여기서 Barnhouse는 재림교회가 적그리스도적 이단이 아닌 진실한 그리스도교 신앙공동체라는 점을 부각시켰다. 이에 대하여 Norman F. Douty1962년에 출판한 Another Look at Seventh-day Adventism에서 MartinBarnhouse가 재림교회에 너무 관대하였다고 비평하였다.

4. 속죄 사상

Andreasen은 속죄를 세 가지 국면으로 나누어 이해하였다.

첫 번째 국면은 그리스도의 죄 없으신 완전한 삶의 국면이다. Andreasen은 히브리서 1:3 본문해석을 독특하게 하였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1:3)

Andreasen“‘죄를 정결케라는 구절이 헬라어에서 중간 태로 나와 있는 점에 착안하여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죄들을 정결케 하셨다고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을 그 기본적인 의미로 보았다. 그래서 그리스도 자신의 생애 가운데서 시험을 극복하셨다는 것이다(M. L. Andreasen, The Book of Hebrew, p. 53).

죄를 정결케’--이는 먼저 그리스도의 삶에서 죄를 뿌리째 뽑는 것이다(ibid., p., 54). “그것은 모든 악의 근절, 즉 성화를 의미한다.” Andreasen에 따르면, 명심할 것은 이 모든 것이 그분의 지상 생애 동안 그리스도의 자신의 인격 가운데서 성취되어졌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이전의 지상 생애를 통하여 죄를 전적으로 저항하여, 전적인 승리를 하실 수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셨다(Roy Adams, The Sanctuary Doctrine, p. 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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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국면은 겟세마네에서 시작되어 십자가상의 죽으심에서 완성된 국면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세상의 죄들을 위한 것으로서 이해한다. 여기에서 십자가상에서 그는 저주를 짊어지셨으며, 범죄자의 자리를 취하셨으며, 그리고 그 형벌을 받으셨다(Roy Adams, The Sanctuary Doctrine, p. 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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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국면은 Andreasen 신학의 가장 중요한 핵심으로 하늘 성소 가운데서의 그리스도의 하늘성소에서의 봉사와 중보와 지상 교회에서 진행되고 있는 성도들 안에서의 죄를 도말, 제거하시는 국면이다. 이것은 참성소에서의 죄의 정결 사역이다. 특히 이 일은 마지막 세대들 안에서 이루신다. 죄에 대한 그리스도의 전적인 승리는 유일한 현상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의 마지막 때의 성도들 가운데서 재현될 수 있는 것이다. 그 구현이 144,000의 경험 가운데서 성취되어진 그 다음에 그리스도는 그들을 자기 백성으로 데리러 오실 것이다(Hebrews, pp. 58, 59). 이 점이 바로 그의 종말론적인 그리스도 인성론의 클라이맥스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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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I. Questions on Doctrine (QOD)출판

복음주의자들과의 회동의 결과 QOD가 출간되었다. Barnhouse19569월호 Eternity 지에 재림신도들은 크리스천인가?”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재림교회의 신학적인 방향 선회를 환영하면서 몰몬교, 여호와 증인, 크리스천 사이언즈 같은 이단과는 다른 그리스도의 구속 받은 형제들과 신자들이라고 평가하였다. 이 결과 Eternity 지는 독자 1/4을 잃었고, Martin의 책 판매고는 수직으로 떨어졌다. 195612월호 Time 지는 복음주의자들과 재림교회 사이의 회동 소식과 QOD의 출간 예정 계획을 알렸다.

재림교회-복음주의와의 대화들 가운데서 참여자였던 Barnhouse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비교하여 재림교인의 입장에 관하여 논평하면서, 재림교회 측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무죄하고, 거룩하며, 그리고 완전하다는 확언을 하였다고 공표 하였다. 그러나 어떤 다른 이들의 입장은 전적으로 조화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였다(D. G. Barnhouse, “Are Seventh-day Adventists Christians?” Eternity, vol. 7. 1956, p. 6). 19569월호 Eternity 지는 그리스도의 죄 있는 인성을 견지하는 재림신도들을 정신이상적인 과격파로 지탄하였다. 이에 Andreasen은 충격을 받았다. 그리스도의 본성의 무죄성, 거룩성, 완전성이 Questions on Doctrine 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책 출판과 함께 Andreasen의 분노는 고조되었고 재림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그의 경멸은 불붙었다. 그는 QOD모든 이단의 절정으로 몰아붙이고 그 출판으로 재림교회가 역사적인 입장을 포기한 것으로 단죄하면서 청문회를 요청하였다. 더구나 그는 19572월호 Ministry 지에서 프룸이 십자가에서의 희생이 죄를 위한 완전한 희생이 되었다고 한 기사에 대하여 십자가의 완전 속죄로 오독하고 모욕을 느꼈다.

19574월 호 Ministry 지는 QOD의 출판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동년 6월호에서는 이 책 보다 더 조심스럽게 정밀하게 검토되어 출판된 책이 교단 역사상 없어 왔다고 자부하는 홍보가 있었다. 195710월 하순- 11월 초에 5,000권을 출판하였다. 동 년 12월 까지 Andreasen은 책 출판을 철회할 것을 대총회장 피규어 목사에게 강력하게 촉구하였다. 그러나 대총회장은 동년 11월에 합회장들에게 10만권 내지 20만권 씩 주문, 보급하도록 권고하였다. 동 서적은 재림교회와 타 교단 목회자들 및 신학교, 도서관에 보급되었다. 재림교회와 복음주의 대표자들 사의의 대화들의 결과물 Questions on Doctrine은 월터 Martin과 그의 그룹에 의하여 제출된 근본적인 질문들에 관한 재림신도들 독자층과 교단 밖 독자층 모두에게 널리 보급되도록 행정적 지원을 받은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Andreasen의 분노를 휘저었던 한 가지 진술은 Questions on Doctrine383페이지에 나타난다. “그는 그가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심’(7:26)으로써, ‘그 백성으로부터적절히 선택되어질 수가 있었다. 그분은 자연적인 출생에 의해서가 아니라 기적으로서 태어나셨다. 그분의 출생은 초자연적인 현상이었다; 하나님이 그분의 아버지이셨다. 비록 육체 가운데서 태어나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하나님이셨으며, 그리고 아담의 타고난 후손들을 타락시켰던 유전된 성정들(passions)과 오염들로부터 제외되어졌다. 그분은 그분의 표면에 나타난 행위 가운데서 뿐만 아니라, 그분의 실제의 본성 가운데서 죄가 없으셨다.’ 그분은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응답을 발견할 수 없으니] 없으니’(14:30)라고 진실로 말할 수 있었다. 그분 안에는 악한 것에 대하여 감응되는 것은 결코 없었다. 그리고 단지 그와 같은 제사장만이 우리에게 필요시 된다. 만일 그분은 심지어 죄의 오점에 의하여 더럽힘을 당하신 적이 있었다면, 그분은 우리의 제물이나 우리의 대제사장이라는 본질 둘 중 어느 쪽의 자격도 가지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그분의 생애와 그분의 본성 가운데는 죄가 없으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셨다(4:15). 이로 인하여 그분은 모든 슬픔 또는 고난 가운데서 우리를 위로하실 수 있으시다.”

이에 Andreasen은 분개하여 1959<속죄(The Atonement)>라는 제목의 100쪽 짜리 책을 출판하여 대응하였다. 여기에는 그가 대총회에 보낸 서한들도 포함되었다. 이 책의 초점은 그리스도의 인성과 속죄에 맞추어져 있다. 앞에서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1961년에도 내내 교단을 물고 늘어져 대총회는 46일에 목사신임장을 잠정적으로 중지시켰다. 그는 이에 대항하여 Shooting the Watchdog을 발행였다. 19622Andreasen은 글렌데일위생병원에 입원, 대총회장은 그를 병문안을 받고 교단에 끼친 혼란을 사과, 교단과 화해하였으며 교단 비평 책자에 대한 보급을 중단을 시켰다. 수일 후 219일 그는 잠들었다. KnightAndreasen이 속죄에 관한 신학적 이해를 바른 궤도에서 이행하고, 비평과 공격적인 언사의 사용을 자제하고 온화한 태도로 나갔더라면 재림교회의 역사가 달라졌을 것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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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II. 1980년대 이후

Andreasen이 끼친 영향은 향후 재림교회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그의 추종자들은 계속적으로 교단에 대한 악평과 모종의 흑막이 있는 것처럼 호도하는 무리가 활동하는가 하면, 신학적 차원에서 이를 발전시켜 나가는 무리들이 등장하여 왔다. 그리고 QOD 신학의 그리스도 인성관을 신신학으로 매도하면서 1888 Conference Movement를 주도해 나간 WielandShort 같은 인사들은 아담 타락 후 그리스도 인성신학 사상을 완전주의 사상과 결탁시켜 재림교회의 전통적인 것으로 자리 매김 시키려는 저술이나 기사들을 내 보냈다. 완전주의자들은 사조직을 확대하고 소위 Our Firm Foundation이라는 잡지를 발간하면서 교단신학을 계속적으로 비판하는 게릴라전이라는 불완전한 행동을 펼쳐 왔다. Herbert Douglass은 추수이론을 통하여 Andreasen의 타락후 인성론에 토대를 둔 완전론을 전개하였다.

1992년 가을에는 북미지회(NAD)Hope International(Eatonville, Washington ), Hartland Institute(Virginia 거점) Prophecy Countdown(중부 Florida)과의 조율에 선을 긋는 Issues: The Seventh-day Adventist Church and Certain Private Ministries를 출판하였다. 물론 이 책은 교단의 기본 행정질서를 교란하고 터무니없는 비난을 퍼부은 그들에 대한 유화적 제스처의 전말과 이에 불복한 그들의 주장의 허구성을 반증한 것이 주된 흐름이 되지만, 부록 VI에서 “Model or Substitute?" Norman Gulley의 시리즈 글을 전재하여 그리스도의 인성관의 기본 입장을 천명하고 있다. 그러나 교단 체제 내에서 활동하는 인사들은 아직도 그들의 위상을 바꾸지 않고 Waggoner/Jones Andreasen 의 신학을 붙잡고 있다.

반면에 이에 동조하지 않고 성경과 엘렌 화잇의 저술 모두를 아우르는 물줄기는 더욱 그 학문적 저변을 확장시켜 왔다.

교계의 혼란을 방치할 수 없다고 보아 Ministry지는 19856월호에서 대립각을 세운 양측의 신학적 이론을 개진케 하여 공개토의에 붙였다. Benjamin Rand라는 필명으로 Norman Gulley“What Human Nature Did Jesus Take?: Unfallen"의 제목으로, Kenneth Gage라는 필명으로, Herbert E. Douglass”What Human Nature Did Jesus Take?: Fallen" 의 제목으로 각각 기고를 하여 교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그리고 교계 통합에 장애요인으로 보아 그 동안 경원시되어온 QOD 주석 증보판이 2003년에 출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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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신학적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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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죄의 개념과 예수 그리스도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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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인성이 아담 타락 이전 인성이냐, 아니면 아담 타락 이후의 죄 있는 인성이냐는 문제의 저변에는 죄의 개념에 대한 이해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도대체 죄란 무엇이냐는 것이 전제되지 않은 그리스도의 인성론 논의는 문제의 핵심을 비켜가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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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첫 죄의 즉각적인 결과들

1. 인간 본성의 변화(타락성)와 영적 쇄잔

창조 시의 인간의 본성은 순결무구하였고 거룩하였으며 죄된 성향과 욕망이 없었다.

사람은 하나님의 모양으로 지음을 받았다. 그의 본성은 하나님의 뜻과 조화되었다. 그의 마음은 하나님의 일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애정은 순결하였고 그의 식욕과 감정은 이성(理性)의 지배 아래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그분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는 가운데 거룩하고 행복하였다. 사람이 그의 창조주의 손으로 지음을 받았을 때 신장이 컸으며 완전히 균형이 잡혀 있었다. 그의 용모(容貌)는 건강한 혈색을 띠어 불그스레 하였으며 생기와 기쁨의 빛으로 빛났다. 아담의 키는 지금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키보다 훨씬 컸다. 하와는 아담보다 조금 키가 작았으나 그의 자태는 고상하였으며 아름다움으로 충만하였다. 이 무구(無垢)한 부부는 아무런 인조 의복을 입지 않았으며 그들은 천사들처럼 빛과 영광의 옷을 입고 있었다. 그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이 빛의 두루마기가 계속 그들을 둘렀다” (부조,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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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첫 죄의 결과는 하나님과의 관계는 물론 인간 본성에 변화를 초래하였다. 죄로 인하여 인간의 지적, 도덕적, 신체적 능력에 영향을 끼쳐 본성이 타락, 부패하였다.

순진무구 상실--눈을 번쩍 뜨게 하는 경험은 아담과 하와에게 수치감만을 가져다주었을 뿐이다(3:7). 그들 수치심으로 자기들의 부끄러움을 덮었고 하나님으로부터 자기들을 숨기고자 하였다.

책임전가--하나님이 그들의 죄에 대하여 아담과 하와에게 질문하셨을 때 자신의 과오를 시인하는 대신에 그들은 잘못을 전가하려고 노력하였다. 아담은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3:7)라고 말했다. 그의 말은 하와, 그리고 간접적으로는 하나님이 자기의 죄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죄 때문에 자기 아내와 자기 창조주에 대해 그가 유지하고 있던 관계가 어떻게 파괴되었는지를 명백하게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하와도 뱀을 비난하였다(3:13). 죄는 excuse 될 수 없다. 용서 받아야 excuse 가 된다. 책임을 전가하고 회피하는 일은 변명하는(excuse) 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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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상실--인간이 죄에 빠졌을 때 자유를 포기하는 것이 된다.

두려움--인간은 하나님을 두려워 하여 숨었다(3:10).

기타 인간은 죄의 노예가 되고, 자기 기만적이 되었으며, 평화를 상실하였다. 인간의 삶은 불안이 지배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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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하나님과의 분리

첫 인간은 죄를 범하여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제의 길이 단절되었다. 사단이 약속한 것처럼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기는커녕 그들은 두려워하게 되었고 숨고자 도망갔다(3:8-10; 59:2). 하나님과의 분리는 하나님 면전에서 분리이며, 생명과 축복으로부터 분리였다(2:1, 5, 12; 4:18).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었다(12:8; 9:15).

인간은 죄책과 형벌을 져야하는 존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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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가 그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켰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의 파괴된 고리를 연결시키기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바치셨다. 첫째 아담과의 관계에서 인류가 그에게서 받은 것이란 죄책(guilt)과 사형 선고(the sentence of death)밖엔 없다”(자녀, 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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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타인과의 관계

죄로 인하여 인간은 책임을 전가하는 존재로 전락하였다. 또한 피차가 경쟁자가 되었고, 동정심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권위를 배격하고 사랑을 상실하였다.

4. 죽음

범죄한 삶의 여정은 죽음의 여행길이 되었다. 첫 범죄로 인간은 육체적, 영적 죽음에의 존재가 되었다.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2:17). 죽을 수 없는 상태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전락하였다. 건강하고 원기 왕성한 신체와 정신이 모두 약해 갔다. 그리고 영원한 죽음을 당하여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하나님의 율법은 불변적이다. 죄는 율법을 범한 불법이다. 죄 값은 사망이다. 어떠한 범죄도 사망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3:19), 그분은 범죄자들을 에덴의 본향으로부터 추방하시고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통을 단절하심으로써 당신의 판정을 실행하셨다(3:23, 24). 또한 그들에게 영생의 관원이 되는 생명나무에 나아가는 것을 금지하셨다. 이렇게 해서 아담과 하와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3:22)

5. 환경의 변화

하나님은 사단의 매개물인 뱀을 저주하여 배로 기어 다닐 것을 명하셨고, 이것은 타락을 지속적으로 상기시키는 것이 될 것이었다(3:14). 하나님은 여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3:16). 또한 아담은 하나님 대신에 자기 아내의 말을 들었기 때문에 땅이 저주를 받아 그는 고생하며 힘겹게 일해야 했다.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3:17-19).

3. 인간의 죄의 보편성

역사는 아담의 후손들이 그의 죄된 본성을 나누어 갖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다윗은 기도드릴 때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143:2, 14:3 참조)라고 말했다.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왕상 8:46). 또한 솔로몬은 "내가 내 마음을 정하게 하였다 내 죄를 깨끗하게 하였다 할 자가 누구뇨"(20:9),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7:27)고 말하였다. 신약 성경도 마찬가지로 분명하게 기술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3:23).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일 1:8).

바울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고전 15:22)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곳에서 그는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5:12)고 말한다.

인간 마음의 부패는 전인에게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빛 가운데서 욥은 외쳤다.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14:4). 다윗은 말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51:5). 또한 바울은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8:7, 8)고 기술하고 있다. 그는 회심 이전에는 신자들도 다른 나머지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본질상 진노의 자녀"(2:3)였다고 지적했다.

비록 어린아이로서 우리가 모방을 통하여 죄된 행실을 습득한다고 할지라도, 위의 구절들은 우리가 우리의 근본적인 죄성을 타고난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인간의 죄의 보편성은 우리의 본성이 선이 아닌 악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점에서 명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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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적 타락론(total depravity)의 교리는 이중 예정론 교리의 기초가 되어 있고, 인간의 선택의 자유가 상실된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문제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위에 인용한 죄가 그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켰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의 파괴된 고리를 연결시키기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바치셨다. 첫째 아담과의 관계에서 인류가 그에게서 받은 것이란 죄책(guilt)과 사형 선고(sentence of death)밖엔 없다”(자녀, 475)는 통찰에 비추어 이른바 마음의 자연적 타락성 (the natural depravity of the heart)"(In Heavenly Place 195, 196)에 기초한 보편적 타락성을 수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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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성경상의 죄 개념

그리스도의 인성론 문제의 핵심은 죄가 얼마만큼 그리스도의 인성에 감염이나 영향을 주었느냐하는 죄에 대한 이해가 선결요건이 된다. 특히 그리스도 인성론 논쟁의 주요 초점은 성경과 엘렌 화잇의 저술에 나오는 죄 있는 육신의 모양(en homoiomati sarkos hamartias, in the likeness of sinful flesh)”(8:3), “죄 있는 타락한 본성(sinful and fallen nature),” 죄로 향한 "성향(propensities),” 또는 죄의 성벽(inclinations)” 또는 경향(tendencies)”의 의미가 무엇이냐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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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인간 죄의 현상을 두고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1. “죄는 불법이다” (요일 3:4). 전통적으로 죄를 구체적 행위로 보아 왔지만, 이는 뿌리에서 열린 열매에 불과한 것이다.

2.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14:23). 죄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저버리고 독자적으로 나가는 태도, , 하나님과의 바람직한 관계의 파탄이나 결여이다. 이런 내적 상태는 죄의 뿌리에 해당한다. 죄는 인간의 내적 태도나 상태에서 나오는 것이다.

3. 죄는 증오, 음욕, 등 감정을 은폐하거나 변명하는 일을 계속하는 내적 상태이다(5:21-32; 1:14, 15). 예수께서는 산상보훈에서 외적 행위의 근원이 되는 내적 상태에 있는 미움을 살인으로, 음욕을 간음으로 보았다. 예수께서는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7:21-23)고 하셨다.

4. 죄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을 등진 불의한 상태 그 자체이다. “모든 불의가 죄”(요일 5:17)이다. 바울은 로마서 첫 장에서 인간의 불의(adikia)(1:18) 문제를 예리하게 파헤치고 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51:5)는 이런 유전적 뿌리에 대한 다윗의 고백이 된다. 바울은 로마서 5장의 아담-그리스도 동형론에서 아담의 죄가 인간 죄의 뿌리가 된다는 것을 선포하였다. ,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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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적 관계의 파탄과 유전적인 불의한 상태가 인간 죄의 뿌리가 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경 갈피갈피에서 인간에게 그리스도 구주-대속자의 필요성을 모본론 보다 먼저 일깨웠다. 그리고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8:10)고 내적 상태에 초점을 맞추는 새 언약을 체결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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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성경에서 죄를 두고 한 표현에는 율법을 범하는 행위(불법)(act), 깨진 관계(relationship)인 불신, 하나님을 등진 인간의 불의하고 불신한 내적 상태(corrupt nature)를 포괄하고 있다. 내적 불의한 상태와 깨진 관계는 원인이 되고 불법은 그 결과가 된다. Pelagius는 인간이 죄를 범하기 때문에 죄인이 된다는 시각은 행위 중심의 죄관에 서 있다. 초기의 재림신도들은 아담과 하와가 중간상태로서 지음을 받았다고 신봉하였다. 이 경우 원죄란 이 중간상태의 상실과 죽음의 체험을 지칭한다. 그러나 1888년 이래 믿음의 의가 강조된 결과 원죄의 개념을 인간론적 시각에서 죽음이라는 죄의 결과인 신체적 본성에 초점을 둔 시각은 물론이고, 구원론적 시각에서 타락한 영적인 본성까지 포괄하는 시각을 갖게 되었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다는 것에서 기인된다.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인간의 타락성을 아담의 죄의 결과로 본 것이다. 원죄란 잘못된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분리이며 이 분리로 인하여 인간 존재가 잘못된 존재(wrong being)이 되었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죄는 자기 삶을 모두 무()로 만들어 버리는 무의 원칙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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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엘렌 화잇의 죄에 관한 정의

흔히 엘렌 화잇이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죄에 대한 유일한 정의(定義)죄는 불법이라”(요일 3:4)는 말씀을 두고 죄에 관한 정의를 행위적인 불법 일변도로 보는 타락 후 인성론자들의 시각이 있다. 그러나 동 표현의 문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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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죄에 대한 유일한 정의(定義)죄는 불법이라”(요일 3:4)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3:23) “선을 행하는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3:12)라고 선언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저희 심령의 상태에 관하여 속고 있다. 저들은 육신에 속한 마음이 만물보다도 거짓되며 몹시 악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저들은 저희 자신의 의로 스스로 감싸고 있으며 저들 자신의 인간적인 품성의 표준에 도달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그러나 저들이 거룩한 표준에 이르지 못하고 저들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요구들을 감당하지 못하게 될 때에 저들의 절망이 얼마나 처절할 것인가!”(1기별, 320)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율법을 전부 범하였으며 율법을 범한 자들로서 인간은 절망적으로 파멸에 이르게 되었다. 인간은 하나님의 원수로 전락하였으며 단 한 가지 선도 행할 힘이 없는 존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아니라 할 수도 없’(8:7). 도덕적인 거울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바라볼 때에 인간은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되고 자기 자신의 악한 상태와 율법의 공의로운 형벌 밑에서 절망적인 파멸에 이르게 된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깊이 빠지게 된 죄의 절망적인 비탄 가운데 버려지지 않았으며 죄인을 파멸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과 동등하셨던 분께서 갈보리에서 당신의 생명을 바치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3:16).”(1기별, 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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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문맥에서 보듯이 엘렌 화잇은 죄를 그 뿌리가 되는 내적인 빗나간 관계적 상태를 포함시켜 불법이라고 정의를 내렸다. 그는 불법 행위는 내적 관계적 불신에 대한 외적 구체적 결과와 증거가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는 다음 메시지에서 이 점을 더 분명히 하여 내적, 관계적 불신을 첫 아담의 죄의 내용으로 지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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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실 그 자체에는 아무런 독소가 없었다. 죄는 식욕의 방종 때문만이 아니었다. 우리의 시조를 죄인으로 만들고 이 세상에 악에 관한 지식을 가져 온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의심, 그분의 말씀에 대한 불신, 그리고 그분의 권위에 대한 도전 때문이었다”(교육,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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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파산 상태에 들어간 내적 상태라고 하면, 곧장 아우구스투스 류의 전적 타락론(the total depravity)과 원죄론(the original sin)에 토대를 둔 이중 예정론 늪에 빠져 든 것처럼 의혹에 찬 시선을 보내는 타락 후 인성론자들이 있다. 그러나 이는 오해이다. 엘렌 화잇이 인간 본성의 내적 타락성과 그 전가성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쁜 습관은 좋은 습관보다 더 쉽게 형성되며,” “마음의 자연적 타락성(the natural depravity)은 이 잘 알려진 사실에 대하여 설명을 해 주고”(In Heavenly Place, 195, 196), “우리의 최초의 부모의 죄는 이 세상에 죄책(guilt)과 슬픔을 초래하였다”(PP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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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의 죄의 전가에 관한 엘렌 화잇의 표본적인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자녀들이 받은 유산은 죄의 유산이다. 죄가 그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켰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의 파괴된 고리를 연결시키기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바치셨다. 첫째 아담과의 관계에서 인류가 그에게서 받은 것이란 죄책(guilt)과 사형 선고밖에 없다”(CG 475).

"()배도의 비참한 결과 중 하나는 인간이 자기 마음을 다스릴 권능을 상실하였다는 것이다 ...그대는 도덕적 헌법을 범할 수밖에 없다”(MR, 8:208).

이런 메시지는 얼핏 아우구스투스나 칼뱅 류의 죄관과 같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엘렌 화잇은 선택의 자유를 부정하는 이중 예정론자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아담의 죄로부터 이어지는 어떤 유형의 죄책과 보편적 악성 부패로 나타난 타락성을 지적하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하나님을 찾을 수도 없으며 탄생할 때부터 감염된 죄의 본성적 권능에 굴복하기 마련이다. 인간이 희망의 서광을 볼 수 있는 길은 죄인을 일으켜 깨우쳐 주고, 회심시키며 의롭게 하고 거룩하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서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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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그리스도의 본성과 죄

앞에서 성경과 엘렌 화잇의 글을 통하여 드러난 첫 죄의 결과와 죄의 개념을 살펴보았거니와 그러한 생래적, 관계적 및 상태적 죄성이 그리스도의 인성에 들어 있다고 볼 수 있는가? 예수께서 죄의 감염을 받은 타락한 그리고 죄책이 있는 인성으로 오셨는가? 성경과 엘렌 화잇의 글은 이를 부정하고 있다.

많은 타락 후 인성론자들은 죄는 불법이라는 엘렌 화잇의 정의에 안주하여 그 문맥을 무시한 채 외적 행위적 죄관에 집착하고 있다.

1. 인간이 탄생 때부터 죄성을 지닌 존재라고 보는 것을 두고 이를 칼뱅주의 원죄론 범주에 넣는 것은 마치 솥뚜껑을 보고 자라라고 하는 단언과도 같은 잘못된 판단에 불과하다.

2.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받는 선택의 자유를 지닌 자유의지적 존재이기 때문에 아담으로부터 전해진 죄책을 두고 비난과 정죄를 받을 이유가 없다고 보는 것은 펠라기우스적 접근 방식에 불과하다. 탄생할 때부터 이어진 죄가 가공스러운 것이지만, 그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정죄 받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은 가공스러운 것을 아무렇지 않게 보아 넘기는 비성서적이고 안이한 주장이다. 인간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2:3)이다. 여기서 진노를 정죄가 아니라고 우길 수 있는가?

예수께서 우리와 마찬가지의 본성적인 죄와 타락성 및 죄책을 지닌 존재로 이 세상에 오셨다면, 그 역시 진노의 자녀에 속하여서 흠 없는 대속적 제물과 중보자로서의 자격을 갖기 이전에 자신이 먼저 속죄와 중보를 받아야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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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두 견해를 아우르는 성경과 엘렌 화잇

성경에도 엘렌 화잇의 저술에도 그리스도의 인성이 아담 타락 전 인성과 아담 타락 후 인성에 관한 진술들이 함께 나온다.

1. 성경

(1) 타락 전 인성의 근거 성경절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요일 3:5).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매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8:46).

이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14:30). 이 본문은 사단과 관계없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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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타락 후 인성론의 근거 성경절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in the likeness of sinful flesh)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8:3).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in the likeness of man)”(2:7).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likewise)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2:14).

저를 잠깐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 씌우시며”(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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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2:17).

이 성경절에 대한 완전주의자들의 집착은 끈질기다. 그러나 본문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죄성을 지녔다는 뜻이 아니다. 그 해석은 다음 인용문의 시각에서 하여야 한다. 그분은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의 모본이시다. 그분은 우리의 연약성(infirmities)에 있어서 형제가 되신다(우리와 같이 연약성을 지닌 형제이시다). 그러나 같은 성정(정욕)을 갖지는 않으셨다. 무죄하신 분으로서 그분의 본성은 악과 상관이 없었다” (2T 201-202).

범사(all things)”라는 표현은 성서 용례 상 100% 포함하거나 일치한다는 의미가 아니다(참고: 딤전 4:4; 벧전 2:13; 14:20; 고전 15:27에서는 예외를 전제로 하고 있다). 본문은 실제적으로 인간이 되셨다는 것, 즉 본질적인 방식으로 우리와 같이 되셨다는 점에 그 초점이 있다. , 그리스도께서 시험을 받을 때 하나님께 순복하였느냐에 있었느냐 여부가 문제이었지 인간의 죄성을 말하고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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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엘렌 화잇

엘렌 화잇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주제에 관하여 많은 진술을 남겼다. 그 진술들 중에는 타락 전 인성에 관련된 것들도 있고 얼핏 보아서 외양적으로 타락 후 인성을 지지하는 듯한 표현들도 들어 있다. QOD는 그리스도의 무죄한 본성에 속한 그룹의 진술들을 <부록 B>에 수록하였다. Ralph Larson은 아담 타락 후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련된 진술들을 The Word Was Made Flesh에 수록하였다. 두 가지 모순되어 보이는 진술들의 어느 한 뿔만 잡고 그것이 전부인양 고집하는 것은 사태의 진상을 불완전하게 파악한 것에 불과하다. 두 가지 상반되어 보이는 진술들을 아우르는 태세가 필요하다.

타락 전 인성론자들이나 타락 후 인성론자들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죄된 육신과 유사함(likeness of sinful flesh)”을 지녔지만 죄가 없으셨다는 점에서 일치된 견해를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헤펜스톨이 지적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인성의 경향,” “성향사상과 행위에 있어서 죄에 감염 받지 않은(not infected) 인성을 주장하면서도 죄의 영향을 받았다(affected)는 점을 인정한다(The Man Who Is God, 126, 133)는 통찰이 필요하다.

타락 후 인성론자들은 죄로 인한 영향을 받았지만, 오로지 그 본성에 있어서만 그렇고 품성과 행위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주장을 펼친다. 이들은 어느 점 그리스도의 인성이 죄 있는 경향, 성향, 성벽, 기질에 있어서 죄의 감염을 받았다는 주장을 하는 쪽으로 나간다. 그러나 품성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그들은 예수께서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본성적, 내적 성벽을 지녔으나 이 죄되고 타락한 이끌림에 넘어가지 않았다고 한다.

타락전 인성론자들은 예수께서 진짜로 시험을 당하셨으나 죄를 짓지 않으셨다고 본다. 그러나 예수께서 인간이 태어난 때부터 지닌 동일한 죄되고 타락한 경향이나 성향들을 취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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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Passion"과 죄의 성향

지난 1980년대 이래 재림교회 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이 아담의 타락 전의 인성인가, 아니면 타락 후의 인성인가의 논의가 치열하였다. 이 이어지는 논의는 그리스도의 인성이 죄의 감염을 받았느냐, 아니면 죄의 영향을 받았느냐 하는 이슈로 좁혀져 첨예하게 대립되어 왔다. 논의의 근저에는 그리스도께서 죄의 성향을 지녔느냐는 이슈가 관건이 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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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Passion' 등 용어들의 의미

특히 그리스도 인성론 논쟁의 주요 초점은 성경과 엘렌 화잇의 저술에 나오는 죄 되고 타락한 본성,” 죄로 향한 "성향,” 또는 죄의 성벽또는 경향의 의미가 무엇이냐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특히 엘렌 화잇 저술에 나오는 성향(propensities),’ ‘경향(tendencies),’ '성벽(inclinations),' ‘정욕(passions)' '기질(bent),' '부패(corruption),' ‘타락(depravity)' 등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것은 그리스도의 인성문제를 푸는 열쇠가 된다. 이에 관하여 우드로 휘든은 이에 관하여 2006“Ellen White and Current Issues” Symposium에서 그리스도의 인성 논쟁 - 엘렌 화잇은 무엇을 가르쳤는가?(The Humanity of Christ Debate - What Did Ellen White Teach?)"에서 잘 정리하였다. 그 요점을 살펴보기로 한다.

재림교회 성경주석 7907쪽에 나오는 무죄한 인성의 완전한 표본에는 다음과 같은 엘렌 화잇의 무죄한 인성론의 강력한 근거가 되는 메시지를 소개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을 완전히 대표하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죄 없는 인성의 완전한 표본이기도 하다. 이렇게 해서 그는 신성과 인성을 결합시키셨다(원고 44, 1898)”(화잇주석, 2:9).

그분은 강한 탄원자이셨다. 우리처럼 타락한 본성의 정욕을 갖지 않으셨지만 그와 같은 연약성을 이해하며, 우리와 같이 시험을 받으셨다. 예수께서는 그분의 아버지로부터 도움과 지지를 받아야 하는 그런 고뇌를 겪으셨다”(2T 508-509).

그분은 우리와 같이 연약하신 형제이시다. 그러나 정욕 같은 것을 갖지는 않으셨다. 무죄하신 분으로서 그분의 본성은 악과 상관이 없었다. 그분은 죄악 세상에서 영혼의 투쟁과 고통을 견뎌 내셨다. 그가 인간이셨으므로 기도가 필요하였고, 그 기도는 특권이 되었다 ”(2T 201-202).

엘렌 화잇의 이 양날의 칼과도 같은 메시지를 조화스럽게 포용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인성론은 수렁에 빠지기 십상이다. 먼저 엘렌 화잇이 “passions"을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점에 유의하여야 한다. 첫째로, 인간이 지닌 정상적인 성정 같은 것으로 인간과 같은 동일한 정체성을 전달하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그 예로, 18921121일 자 Signs of the Times 에 게재한 “Make All Things According to the Pattern"기사에서 그는 인성의 모든 성정(passion)의 힘을 지녔다”(p. 39)고 한 것을 들 수 있다. 여기서 “passions"은 정도(正道)에서 일탈한 부도덕적 그릇된 욕망이 아닌, 정상적 인간의 욕구, 식욕, 감정 내지 정서를 나타내는 도덕적 중립성을 띈 용어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 엘렌 화잇은 “passion"을 부도덕성이 내포된 의미로도 사용하고 있다. 위에서 이미 인용한 바와도 같이(2 T 201-202), 그리스도는 우리처럼 타락한 본성의 정욕을 갖지 않으셨다.” “그분은 우리와 같이 연약하신 형제이시다. 그러나 정욕 같은 것을 갖지는 않으셨다는 표현들에 나타난 "passion"이 전달하는 것은 이 부도덕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J.R. Zucher정욕(passion)은 시험과 같은 종류의 것으로 그 자체는 죄가 아니다고 하고 이 정욕을 타락성과는 다른 것으로 보면서 유전법칙에 적용시키는 일은 용어의 이해를 뭉뚱그려 버린 천박성을 보여주고 있다.(참고, 잃어버린 재림신앙을 찾아서 (n.p.: 생애의 빛, n.d.), 68-69).

특히 "정욕(passion)"성향(propensity)," 민감성( susceptibility)," ”경향(tendency)," "성벽(inclination)" 같은 단어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인성에 적용되어 있을 경우에는 특별한 경우 외에는 모두 동일한 의미로 보아야 한다. 이런 표현들은 좋은 의미이던지 나쁜 의미이던지 간에 실제적 행위가 아닌 어떤 것으로 기우는 내적 경향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정상적 성정이나 경향 내지 성향에 있어서 조차도 죄된 내적 경향이나 선호성을 지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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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저급한 본성과 고차원의 본성 이분법론

상당수의 타락 후 인성론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육신적 저급한 본성에 있어서 그런 죄 있는 정욕(passion), 경향 및 성향을 지녀 죄의 감염이 된 것으로 본다. 그러나 고차원적, 정신적 본성에서는 그런 것들을 지니지 않았다고 구별한다. 그리스도의 인성을 이런 이분법식으로 구분하는 것은 자의적(恣意的)이다. 저급한 신체적 영역에서 죄의 감염이 있었다는 논리는 인간 중심적인 발상에 불과하다. 엘렌 화잇 저술 그 어느 곳에도 이런 발상이 나와 있지도 않다. 흔히 타락 후 인성론자들은 시대의 소망 49쪽에 나와 있는 그는 아담의 모든 자녀들과 같이 유전 법칙이 끼쳐온 결과를 받으셨다는 기록을 근거로 저급한 육신적 영역에서 죄의 감염을 받은 것으로 설명을 하고 있지만, 이는 가설에 불과하다. 인간 부모로부터 유전법칙 영향을 받은 것을 예수께 그대로 단순 적용을 하는 경우, 왜 저급한 육신만 적용하고, 고차원의 정신적 영역의 영향을 배제하느냐는 문제가 제기 된다. 이는 결국 그리스도의 인성이 우리의 인성과 다르다는 차별성이나 독특성을 인정하고 들어가는 꼴이 되고 만다. 부모의 유전법칙 적용을 부분적으로만 배제하는 것은 논리적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다. 또한 이러한 단순 비교 적용은 성령의 잉태라는 초자연적 현상을 도외시하고 있다. 그리스도 인성이 성령의 초자연적인 잉태를 통한 결과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저급-고급 이분법적 접근방식은 허무맹랑한 것에 불과하다.

상당수의 타락 후 인성론자들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타락 후의 인성, , 다른 인간의 타락성처럼 마리아로부터 타락한 저급한 육신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고차원의 능력까지도 연약하여진 것을 물려받은 것으로 본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가 자연인으로 탄생한 것과는 달리 초자연적 탄생을 한 점을 감안하여, 그리스도께서 수태 시이었던지, 수태 기간 중이었던지, 아니면 탄생 시이었던지 어느 때인가 회심(born again)하였다고 하고, 이 때 성령침례와 새 마음,” “성화된 의지를 받았다고 하는 태아기 회심론 같은 것을 이론을 전개한다. 이 회심 시 성령의 내주가 있어, 마리아로부터 이어 받은 악한 품성을 생성하는 성향과 삶의 전 과정에서 죄된 행위를 생성하는 것으로부터 막아 준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심각한 문제를 소홀히 하고 있다. 만일에 예수께서 거룩한 성령의 초자연적, 신체적 아들이라면, 그리스도를 잉태할 때 성령께서 고차원적 본성을 아낀 것처럼 저차원의 본성도 죄의 얼룩으로부터 아끼실 수 있지 않겠는가? 엘렌 화잇의 어느 저서에 그리스도께서 저급한 본성이 되었던지 고차원의 본성이 되었던지 간에 악하고 죄되며 타락하고 부패한 본성을 지녔다고 언급한 곳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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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죄 있는 성향의 이해 논의

엘렌 화잇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주제에 관하여 많은 진술을 남겼다. 그 진술들 중에는 얼핏 보아서 타락 후 인성을 지지하는 듯 하는 표현들도 들어 있다. 타락 전 인성론자들이나 타락 후 인성론자들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죄 있는 육신과 유사함(likeness of sinful flesh)”을 지녔지만 죄가 없으셨다는 점에서 일치된 견해를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헤펜스톨은 그리스도의 인성의 경향,” “성향사상과 행위에 있어서 죄에 감염 받지 않은(not infected) 인성을 주장하면서도 죄의 영향을 받았다(affected)는 점을 인정한다(The Man Who Is God, 126, 133).

타락 후 인성론자들은 죄의 영향을 죄의 감염까지 포함시켜 이해한다. 그러나 그들은 오로지 그 본성에 있어서만 그렇고 품성과 행위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주장을 펼친다. 이들은 어느 점 그리스도의 인성이 죄된 경향, 성향, 성벽, 기질에 있어서 죄의 감염을 받았다는 주장을 하는 쪽으로 나간다. 그러나 품성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그들은 예수께서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본성적, 내적 성벽을 지녔으나 이 죄되고 타락한 이끌림에 넘어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접근 방식은 전 호에서 지적한 것처럼 죄의 개념을 행위로 국한시켜 나간다.

타락 전 인성론자들은 예수께서 진짜로 시험을 당하셨으나 죄를 짓지 않으셨다고 본다. 그러나 예수께서 인간이 태어난 때부터 지닌 동일한 죄되고 타락한 경향이나 성향들을 취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존스(A.T. Jones)1894년 태버나클교회에서 그리스도의 육신의 본성에 관한 설교에서 죄된 육신(sinful flesh)죄가 가득한 육신(full of sin)"으로 정의하였다. 와그너(Ellet J. Waggoner)도 그리스도의 인성은 죄에 대한 모든 경향(tendencies)과 모든 인간들이 지닌 죄된 정욕을 물려받았다고 가르쳤다(”God Manifest in the Flesh," ST, 21 Jan. 1889). 베이커는 이런 죄된 성향을 지닌 그리스도를 증거하다가 엘렌 화잇으로부터 질책을 받았다.

1888Study Committee의 지도적 저술가 중 한 사람인 윌랜드(Robert Wieland)성향성벽(inclination)’이 사전적으로 동의어로 간주되고 있는 것을 무시하고, 어원적 차이가 있다고 한다. , '성벽'은 자기에게 뻗혀오는 강한 압력을 감지하는 능력을 뜻하는 것이지 그에 대한 반응을 나타내는 어휘가 아니다(The 1888 Message: An Introduction, 1987년 수정증보판, 67)고 강변한다. 그러나 당대의 어휘 사용 용례에 따르면, 도덕적 특성을 풍기는 형용사나 부사를 수식하는 특별한 경우 외에는 성향, 경향, 성벽, 정욕을 그리스도의 인성에 적용하여 사용하는 경우 모두가 같은 의미를 전달한다는 것이 일반적 통념이다. 윌랜드가 죄된 성향을 두고 사실상의 죄에의 참여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1888 Message: An Introduction (Nashville: Southern Publishing, 1980), 62.] 베이커(W.L.H. Baker)에게 보낸 편지의 파문으로부터 나온 고육책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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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타락 후 인성론자들은 그리스도의 인성 중 저급한 차원의 육신에 죄의 감염을 받아 죄의 성향을 지녔다고 한다. 그들은 예수께서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본성적, 내적 성벽을 지녔으나 품성은 그 감염에 따라 죄되고 타락한 그 이끌림에 넘어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논리의 근저에는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이분법적 발상이 들어 있다. 이는 성경의 죄 개념이 인간의 내적 마음과 동기까지 포함시키고 있는 점과 성경적인 통전적 일원적 인간관에 반한다. 더구나 그들은 엘렌 화잇이 사용한 ‘passion'이나 ’inclination' 등 어휘의 사전적 의미와 문맥을 등진 자의적 해석이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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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두 개의 서한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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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베이커에게 보낸 서신

1950년대에 발견된, 엘렌 화잇이 호주 재림교회 안수 목사인 베이커에게 보낸 서한은 재림교회 기독론 신학에 있어서 하나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 서한은 존스, 와그너, 프레스캇의 그리스도 타락 후 인성론에 대한 견제와 간접적 책망도 되었다.

조심하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인성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관하여 극도로 조심하라. 그리스도를 죄의 성향을 지닌 사람으로서 사람들 앞에 제시하지 말라...죄 때문에 그(아담)의 후손들은 불순종의 선천적인 성향을 지닌 채로 탄생한다...한순간이라도 그의 안에는 악의 성향이 없었다....오해하기 쉬운 인성에 관한 모든 질문을 피하라...어떤 경우에도 사람들의 마음에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타락의 흔적(taint)이나 성벽(inclination)이 그리스도에게 있다거나, 어떤 경우에도 그가 타락에 굴복한 것이라는 인상을 주는 표현을 조금도 남기지 말라”(5BC 1128).

라손(R. Larson)은 위 베이커에게 보내는 편지를 양자론 배경에서 주어진 메시지로 설명하였지만 이는 근거가 박약하다. 죄 있는 성향의 실체가 무엇이냐에 대하여 세퀘이라(Jack Sequeira)나 윌랜드 등 다수 타락후 인성론자들은 내적, 심리적 성향을 넘어서 사실상 죄에 참여하는 것으로 풀이한다(Wieland, 1888 Message [1980], 62). 그들은 엘렌 화잇이 죄의 성향을 이런 의미로 사용하였다고 본 것이다. 그들은 죄에 대한 성향은 죄의 얼룩(the taint of sin)”이나 "죄의 습관과 같은 의미이며, 의도적이거나 무지하거나 간에 과오, 악한 습성, 내지 개인적으로 죄를 경험하는 것, 또는 악한 성품의 얼룩을 생산하여 내는 활동적인 성향으로 본 것이다. 따라서 베이커에게 보낸 편지에 나오는 타락의 흔적(taint),” “성벽(inclination)”은 그리스도께서 타락에 굴복한 것으로 제시하지 말라는 의미로 보았다.

그러나 엘렌 화잇의 메시지는 첫 아담의 후손들이 불순종의 선천적인 성향이나 성벽을 유업으로 물려받은 채로 탄생하여 오고 있지만, 둘째 아담은 그런 성향과 성벽을 유업으로 받아 탄생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문맥 중에 나온다. 그리고 성향과 성벽은 타락으로 굴복하였다는 죄악에의 참여적 의미보다 죄에의 자연적 성향 내지기울어진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성향과 성벽은 동의어적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또한 동 서한에서 사용된 죄된 성향(sinful propensities)에서 성향은 당대 웹스터 사전에 따르면 타고난 성벽,” 혹은 뒤틀린 경향을 뜻하는 말이었다. 엘렌 화잇은 1897MS 143에서 이런 의미로 사용하였다. 요컨대, 타락 후 인성론자들은 그리스도의 인성에는 죄의 성향이 들어 있다고 보고 있으나, 엘렌 화잇은 베이커에게 보낸 서한에서 이런 사상을 배척하였다. 이는 와그너, 존스를 비롯한 상당수의 재림교회 선구자들의 신학에 경종을 울린 것을 의미한다. Baker에게 보내는 서한의 특징은 그 내용이 명확하다는 특징을 지녔다. 이와는 대조적 인 켈록에게 쓴 서한은 명확성이 결여된 것으로 이슈화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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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켈록에게 쓴 서한

엘렌 화잇이 J.H. 켈록(Kellogg)에게 쓴 미발송의 서한이 199312월에 발견되었다(1994217일자 Adventist Review지에 알림). 동 서한 초본(Letter K-303-1903; DF 63)은 엘렌 화잇이 만년을 보내던 엘름쉐이븐에서 1903829일에 기록한 것으로 다른 서한처럼 서류철에 들어 있지 않은 것이었다. 타자된 것으로 엘렌 화잇이 수정을 위한 탈자 기호 표시가 나오고 행간에 수기 삽입된 부분이 이탤릭체로 나온다. 문제성 있는 부분은 동 서한 6쪽에 나온다. 동 부분은 5쪽 하단에서부터 시작되는바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서 자기의 사명과 사업을 천적 무리들에게 처음으로 알리셨을 때, 선언하시기를 존엄의 자리를 떠나서, 실제로 그분은 무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만, 사람의 모양(the likeness of a man)을 취하시므로 거룩한 사명을 감추셔야 한다고 하셨다. 그리하여 때가 되었을 때에 그 분께서는 최고 높은 지휘의 보좌를 내려오시어, 자기의 왕복과 왕관을 벗어 놓으시고, 자기의 신성에 인성으로 덮으시고, 인류가 원수를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않기 위해서 마땅히 해야 할들과, 되어야 할 모습에 본을 보여 주시고자 이 땅에 오시었다. 인간이 유업으로 받은 모든 악한 경향들(evil tendencies)을 마주치고, 또 그 지배를 받아야 하는 인간으로서 오심으로서 자기 자신을 하늘에서 추방된 반역자 사단에 의하여 충동질 받는 인간 대리자들에 의하여 고통당하도록 하시었다. 그 사단은 상상 가능한 모든 방법을 사용하여 그의 믿음을 무너뜨리고자 하였다.”

위 글에서 악한 경향들은 사단에게 충동받은 인간들이 반대하고, 때리고 압박하는 사람들의 악한 경향이나, 그리스도에게는 낯 선 것이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후에 탈자 표기와 행간의 < >안에 추가 삽입한 부분이 없었다면, 타락 후 인성론으로 판독이 가능하겠으나, 추가 삽입하므로 인하여 그런 판독은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주커가 켈록에게 쓴 서한 초본을 엘렌 화잇의 그리스도 인성에 대한 최후 진술로 내 건 것은 매우 취약한 논증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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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영원한 본체를 붙잡다>의 문제점들

주커(J. R. Zurcher)의 저서 영원한 본체를 붙잡다(Touched with Our Feelings)는 표제는 원문의 표제와는 동떨어진 번역이다. “영원한 본체란 히브리서 1:3에 나오는 본체의 형상에 비추어 오히려 그리스도의 신성을 함축한 어휘이다. 동 서의 문제점들 몇 가지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주커의 접근방식은 그리스도론에 있어서 타락후 인성론의 대변서적 성격을 지녔다. 그는 모든 인간이 죄된 성향을 지닌 죄인으로 탄생한다는 사상에 그리스도의 인성까지도 이에 함몰시키고 있다. 그는 예수의 인성이 생득적인 타락하고 부패한 악의 경향을 지녔다고 하고, 이점을 복음의 중심 진리로 치겨 올린다. 이는 성경과 엘렌 화잇의 건실한 인성관을 위험한 경계선으로 이끌고 가는 것이 된다. 특히 엘렌 화잇이 켈록에게 보낸 서한의 애매한 문장에 그 근거로 두고 있다. 이미 위에 보았듯이, 그리스도의 인성에는 악한 성향(evil propensities)은 없지만, 악한 성벽(evil inclination)은 들어 있다는 이상한 논리가 나온다. 주커는 엘렌 화잇의 “in sinful flesh”라는 표현에 집착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엘렌 화잇이 로마서 8:3을 인용한 표현으로 보기 때문에 화잇의 진술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성경본문에 대한 주석적 이해가 요청된다. 주커는 끝 부분에서 성육신의 필요성을 어떻게(How)에 역점을 두고 풀고 있다. 그러나 객관적 속죄인 대속, 만족, 법적인 요구, 속전, 하나님의 공의의 만족이라는 죄를 대신 진 왜(Why)의 강조를 등한하고 있다. 바로 이 객관적 속죄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죄있는 인간의 모양으로 오신 것이다. 엘렌 화잇의 그리스도 인성관에는 이점을 균형지게 제시하는데 주커는 놓치고 있다. 그리스도의 성육의 신비는 이 객관적인 속죄를 전제로 하고 있다,

주커는 재림교회 초기 선구자들이 당면한 주 관심사는 안식일, 율법과도 같은 주제들이어서 아직 그리스도 인성관에 관한 정교한 신학적 연구가 미진한 상황이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더구나 엘렌 화잇이 와그너나 존스가 가르친 모든 내용을 배서한 것도 아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하여 한 쪽으로 치우친 내용을 설파하였으나, 엘렌 화잇은 균형지고 조화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주커는 타락 후 인성론의 근거를 엘렌 화잇이 베이커에게 보낸 서한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경계한 재림교회 선구자들의 문제성 있는 그리스도 인성관에서 찾고 있다. 주커는예수는 그의 육신 가운데 유전적인 우리의 정욕을 지니고 있었으나라고 표현하고 있다(p. 86). 그리고 엘렌 화잇의 그리스도론이 와그너와 존스의 그리스도론과 완전히 조화를 이룬다고 결론을 맺는다. 그리고 존스의 명성과 강연 회수 같은 것에 자기의 그리스도 인성관 사상에 대한 권위의 근거를 찾고 있다(p. 89).

주커는 엘렌 화잇이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과 우리의 본성의 유사성(likeness)"에 역점을 두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도 이에 관한 깊은 통찰을 간과하고 있다. 그는 켈록에게 보낸 편지는 중요시하면서, 베이커에게 보낸 편지는 폄하하는 공정성이 결여된 논리를 전개하며 별 것 아닌 것처럼 다루고 있다. 이미 앞에서 제시한 것처럼 주커가 가장 최근에 발견된 자료라고 힘주어 말한 Letter 303, 1903 는 자료 해석에서 추가 삽입된 문구로 인하여악한 경향이 그리스도의 인성이 아닌 인간들의 것에 해당될 수 있어서 최후의 결정적 판독자료가 되지 못한다. (White EstateFagal은 모든 경향 앞에 “with"를 삭제하고 읽어야 본의가 들어 난다고 하였다. 또한 어법상 <믿음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일하는,>”heir“ 다음으로 와야 한다(Woodrow W. Whidden, Ellen White on the Humanity of Christ, p. 151). Zucher는 위 원문에 대한 두 가지 번역 가능성을 상정하였다(Touched with Our Feelings, 14장 끝 부분엘렌 화잇의 그리스도 인성에 대한 최후 진술’).

Zucher거룩한 육체운동의 주장으로 그리스도가 가 타락 전 인성을 지녔다는 점을 강조하는 일에 장황한 설명을 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가 가 타락 전 인성론을 주장하면 마치 거룩한 육체운동사상과 등식관계에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인상을 준다. 교단 내에 큰 파장을 일으킨 동 운동에 대한 엘렌 화잇의 강력한 제제 메시지에 비하여 와그너나 존스의 교리적 과오 지적이 없었던 점을 들어 마치 그들의 전 메시지에 대한 배서인양 논리를 전개하는 것은 적절한 비교라고 볼 수 없는 침묵의 논증과도 같다. 더구나 1888111일 엘렌 화잇은 총회 대표자들에게 와그너 의사가 풀이한 어떤 성경 해석은 맞다고 볼 수 없다고 논평한바 있다.

타락 전 인성 아니면 타락후 인성--이 둘 중 중에서 택일 관계 아니면 안 된다는 시각이 너무 강하다. 이 보다는 대안적으로 통합 내지 중도적 입장으로 정리되어 가는 입장을 발전시킬 수 있는 여지를 고려하여야 한다. 엘렌 화잇의 메시지에는 양측의 주장을 포괄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는데 마치 타락후 인성론 일변도적인 인용과 부연설명을 하는 것은 편향적 선택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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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죄 있는 육신의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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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대속적 죄가 되심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하나님께서 구약 성소봉사 표상에서 무흠한 제물을 요구하신 것처럼 그 원형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인간을 위한 흠 없는 제물이 되시었다. 하나님의 율법은 그리스도의 본성과 삶에 있어서 무죄한 희생제물과 세상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대속자가 되어 그 공의를 만족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광야에서 들린 놋 뱀으로 표상된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때문이다. 바울은 이를 두고 죄 있는 육신의 모양”(8:3)이라고 표현하였다.

사도 바울이 사용한 죄 있는 육신의 모양”(8:3)사람의 모양”(2:7)이라는 표현이 지닌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인성에 죄의 성향이 들어 있느냐 여부를 알게 하는 또 하나의 성경절로 부상하여 왔다. 엘렌 화잇이 켈록에게 쓴 서한에서 사용한 사람의 모양(the likeness of a man)”이나, 여러 저술들에 나오는 죄 있는 본성(sinful nature)”이라는 표현은 성경에 나오는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반복하거나 반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작은 광명인 엘렌 화잇의 저술들의 빛은 큰 광명인 성경의 빛을 반사하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죄 있는 육신의 모양에서 모양(homoiōma)”은 모든 점에서 정확한 일치를 뜻하지 않고 유사성(similarity)을 뜻한다. 빌립보서2:7사람의 모양에서도 마찬가지 뜻이다. 또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2:17)에서 같이 되심의 헬라어 기본형은 homoioō같이 만들어지다로 유사성의 뜻을 전달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의 영향을 받은 인간 의 몸으로 오셨지만, 그의 본유적 상태는 무죄이고 또한 하나님과 관계에서 분리가 없는 영적 관계를 유지하셨기 때문에 이런 유사성을 함축한 모양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죄 있는 본성"은 연약성, 즉 감경된 능력이나 상태를 함축하고 있다. , “죄 있는 본성은 죄의 감염을 받은 인성이 아닌 죄의 영향을 받은 고통당하신 인성이다. “죄 있는 본성을 취하신 것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고후 5:21)이다.

엘렌 화잇은 그리스도께서 타락한 상태에 있는 인성, 곧 죄 있는 본성을 취하신 것을 인간을 위한 연약성과 약함으로 설명하면서, 그분의 대속적 짊어짐으로 연계시키셨다.

타락한 상태에 있는 인성을 당신 스스로 취하셨으나 그리스도께서는 추호도 인간의 죄에 참여하시지 않으셨다. 주님께서 인간을 에워싼 연약함과 약점을 맛보실 수밖에 없었던 것은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 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8:17)고 하신 때문이었다”(1SM 256).

그의 아버지께서는 인간을 위한 대속물로서 오로지 그의 생명만을 받으실 수 있으시 다... 예수께서 인간의 타락한 본성취하심으로 연약하여 어려움에 처하게 될 때 ”(초 기 150-151).

여기서 엘렌 화잇은 십자가 수난 문맥에서대속물을 언급한 후에, “타락한 본성을 취하신 일을 기술하면서 연약성과 곤경을 들고 있는 설명적 해설을 하고 있다. 엘렌 화잇은 타락한 상태에 있는 인성을 당신 스스로 취하셨으나 그리스도께서는 추호도 인간의 죄에 참여하시지 않으셨다는 두 개의 모순되는 듯한 표현을 이런 대속론적 설명식 해설에서 하나로 통합시키는 절묘성을 보여주고 있다. 죄 있는 본성과 유사한 엘렌 화잇의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련된 다른 수식적 표현들(degraded, degenerated, deteriorated, defiled... )도 그리스도의 대속적 고통과 희생 신분 범주를 전제로 하면서 이해할 때 문제가 시원하게 풀릴 것이다.

성경과 엘렌 화잇은 타락 전 인성에 관한 수다한 메시지와 타락 후 인성에 관한 수다한 메시지를 모두 말하고 있다. 어느 한 쪽을 선택하여 그 것이 전부인 것으로 단정하는 일은 금물이다. 엘렌 화잇이 그리스도의 인성의 무죄성을 강조한 경우 타락 전의 독특한 인성 메시지를, 우리와 같은 인성을 강조한 경우 타락 이후의 인성과 동일성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본되심에 역점을 두어 우리의 인성과의 동일성(identity)을 강조하는 경우 그리스도의 구주Saviour)되심과 주(Lord) 되심은 약화된다. 이 두 메시지 사이에는 역설적, 변증적 관계가 있다. 따라서 휘든처럼 죄악의 감염은 없느나 그 영향을 받았다는 조화로운 이해를 추구하는 대안적 기독론(alternative Christology)이 바람직하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인성론 이해에 있어서 타락 전 인성 아니면 타락 후 인성--이 둘 중 중에서 택일 관계 아니면 안 된다는 시각이 너무 강하다. 이 보다는 대안적으로 통합 내지 중도적 입장으로 정리되어 가는 입장을 발전시킬 수 있는 여지를 고려하여야 한다. 엘렌 화잇의 메시지에는 양측의 주장을 포괄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타락 후 인성론자들이 엘렌 화잇 저술에 나오는 타락 후 인성론적 진술들을 정당한 해독(解讀)의 여과(濾過)를 시키지 않은 채 그 전부인 것처럼 설명하는 것은 편향적 선택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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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팀 포이리어의 기여

팀 포이리어(Tim Poirier)는 그리스도의 인성과 우리의 인성 사이의 일치성과 불일치성에 관한 이해에 기여를 하는 조사 연구를 하였다(“Sources Clarify Ellen White's Christology,” Ministry, December 1989, 7-9). 스코틀랜드 궁중 설교자 헨리 멜빌(Henry Melvill)은 특별한 경우 외에는 방문 등 목회활동을 하지 않고, 한 주일을 오로지 설교 한편에 올인 하였다. 그런 만큼 그의 성경적 설교는 핵심을 꿰뚫고 있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엘렌 화잇 역시 그의 설교문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포이리어는 엘렌 화잇이 읽기를 좋아한 멜빌의 설교문 자료(“The Humiliation of the Man Christ Jesus”)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인성과 엘렌 화잇의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자료를 비교 분석하면서 그 궤를 같이 하는 점에 주목하였다. 멜빌에 따르면, 타락 이후 인간은 (1) 굶주림, 고통, 약함, 연약함, 슬픔, 그리고 사망과 같은 특성인 무구(無垢)한 연약성들(innocent infirmities)” (2) “죄 있는 성향들(sinful propensities)” 을 지닌 존재로 탄생한다. 무구한 연약성은 죄의 결과들이지만, 그것 자체가 죄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죄는 고통을 불러오지만, 고통 그것 자체가 죄는 아닌 것이다. 그러나 죄의 성향은 죄 있는 것이 된다.

타락 전 아담은 무구한 연약성이나, 죄 있는 성향들 가운데 어느 쪽도 갖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인성에는 무구한 연약성들은 있었지만, 죄 있는 성향은 없으셨다. 엘렌 화잇의 죄 있는 성향들을 멜빌의 방식에 따라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본 포이리어의 접근 방식은 재림교회 내에서 공명을 얻었다. 그러므로 엘렌 화잇은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가 정확히 타락 이전의 아담과 같거나, 정확히 우리와 같지도 않은 것으로 보았다. 환언하면, 그리스도의 인성은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독특성을 지닌 것으로 본 것이다. 이같은 시각은 성서적 그리스도 인성관에 관한 정통적인 독법에 기여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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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구주와 주님 그리고 모본이 되심

성경과 엘렌 화잇은 타락 전 인성에 관한 수다한 메시지와 타락 후 인성에 관한 수다한 메시지를 모두 말하고 있다. 어느 한 쪽을 선택하여 그 것이 전부인 것으로 단정하는 일은 금물이다. 엘렌 화잇이 그리스도의 인성의 무죄성을 강조한 경우에는 아담 타락 전의 대속적 구주로서의 독특한 인성 메시지를, 우리와 같은 인성을 강조한 경우에는 아담 타락 이후의 인성과 동일성의 메시지를 각각 전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본되심에 역점을 두어 우리의 인성과의 동일성을 드러내는 인용문들을 그 전부인 것처럼 강조하는 경우, 그리스도의 구주되심과 주 되심은 약화된다. 예수께서는 먼저 우리의 구주와 주님이 되시고, 그 다음에 우리의 모본이 되신다. 이 순서가 뒤바뀌면 혼란이 일어난다. 타락 전 인성과 타락 후 인성에 관련된 두 메시지 사이에는 역설적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구주와 주님 되심과 모본되심을 위에서와 같이 적용시키면 엘렌 화잇의 메시지는 잘 조화된다. 그분 [그리스도]은 인성을 취하셨으나, 인간의 죄됨은 취하지 않음으로써(by taking the nature but not the sinfulness of men) 인간의 선두에 서도록 되어 있었다”(7BC 925). 죄악의 감염은 없으나, 그 영향을 받았다는 조화로운 이해를 추구하는 대안적 기독론도 이런 도식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리스도와 우리의 인성 사이에는 일치성과 불일치성(독특성)이 함께 존재한다. 엘렌 화잇이 그리스도의 인성을 그리스도는 그분의 무죄한 본성 위에 우리의 죄된 본성을 취하셨다”(MM 181)고 표현한 것은 이런 일치성과 불일치성을 전제로 하는 관점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요컨대, 1) 타락 전 아담은 죄된 성향도 연약성도 없었고, 2) 우리는 죄 있는 성향도 연약성도 다 지녔으며, 3) 그리스도께서는 죄 있는 성향을 지니지 않으셨지만 연약성은 지녔다는 점들을 선결적으로 구별하면서 이해하여 나가야 한다.

그분은 그의 제자들과 그분 자신을 위해 기도하셨으며, 이와 같이 그분 자신이 마찬가지로 공유하는 인성에 공통적인 바, 우리의 필요들과 ,우리의 연약 함들과, 그리고 우리의 실패를 공감하고자 하셨다. 그분은 우리 인간의 타락한 본성들의 정욕들을 갖지 않으셨지만(not possessing the passions of our human, fallen natures), 그와 같은 연약성을 이해하셨으며 우리와 같이 모든 점에 있어서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던, 능하신 탄원자이셨다”(2T 508, 509).

그분은 매사에 있어서 우리의 모본이시다. 그분은 우리의 연약성 가운데서 형제이시나, 정욕 같은 것을 지니지는 않으셨다(but not in possessing like passions). 죄 없으신 분으로서, 그분의 본성은 악과 상관이 없었다”(ibid., p. 202).

그리스도의 인성이 일치성과 비일치성의 양 날개를 지닌 독특성의 이유는 무엇인가? 성경은 이에 대하여 분명한 설명을 하고 있다. 온 세상은 죄 아래놓여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3:9, 10). 어느 누구도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3:19).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사망이 왕 노릇하였으며,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들이 되었다”(5:17, 19). 그리하여 사랑의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이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신 것이다(고후 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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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그리스도의 시험과 그 지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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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질문들

지금까지의 고찰에 비추어 도출된 결론은 그리스도의 인성에는 죄 있는 성향들이 없으셨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몇 가지 질문들이 제기된다.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시험들을 어떻게 이해하여야만 할 것인가? 그분에게 있어서 죄를 짓는 일이 가능하셨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그분의 시험들은 실제적인 것이 될 수 있겠는가? 그 분에게 죄 있는 성정들 또는 성향들이 없었다면, 그는 우리보다 시험의 권세에 굴복당하지 않을 수 있는 이점을 지니신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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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그리스도의 가범성(可犯性), 불가범성(不可犯性)?

가범성(peccability)론은 그리스도께서 죄를 범하실 수 있으셨다는 주장을 펼친다. 불가범성(impeccability)론은 그리스도께서 죄를 범할 가능성이 없으셨다고 한다. 두 입장 모두 시험의 실제성(4:15), 시험에 대한 고투성(26:36-46)을 인정하면서,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범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그러나 가범론자는 히브리서 4:15의 본문을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모든 일들에서 우리들처럼 시험을 당하셨다고 풀이한다. 반면에 불가범론자들은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처럼 모든 일들에 있어서 시험을 당하셨지만, 죄 있는 본성(상태로서의 죄)을 지니지 않으셨다고 해석한다(고후 5:21; 7:26; 5:6 벧전 2:2:22; 3:18). 가범론은 시험성 그 자체가 죄를 지을 가능성이라는 논리적 귀결로 이어진다고 본다. 불가범론은 시험성은 민감성 문제이지, 반드시 죄를 범하는 것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란 시각을 펼친다. 가범론은 만일 그리스도가 죄를 지을 수 없었던 것이라면 그가 당하신 시험은 별 것 아닐 수 있다고 보는 반면에, 불가범론은 그리스도께서 외부로부터 시험 받은 것이지, 자기 안으로부터 시험 받은 것이 아니라고 한다.

1888년의 믿음의 의의 기수 E. J. 와그너는 일종의 불가범론자였다. 개혁주의 조직 신학자 벌코프(Louis Berkhof)도 같은 궤도에 있다 (Systematic Theology, p. 338). 엘렌 G. 화잇은 가범론을 인정하면서도 죄 있는 성향이 없었다고 하여 가범론과 불가범론의 절묘한 조화를 보여주었다. 화잇은 그리스도의 시험이 실제적인 것이었으며, 시험에 굴복하는 것은 가능한 것이었다는 가범론 쪽에 서 있다.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시험은 무서운 실재이었다. 그분은...사단의 시험들에 굴복하여 하나님의 목적에 거슬리는 일을 할 자유를 지니시고 시험대 위에 놓여 있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분은 인간 가족들이 시험을 당하는 것처럼, 모든 점들에서 한 결 같이 시험 받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5BC 1082).

사단이 통치권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이 인간의 연약함을 조건으로 하는 무력한 아기로 오는 것을 허락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모든 인간 영혼이 공유하는 인생의 위험을 겪고 또한 모든 인간 어린이들로서 누구나가 그것과 싸워야만 하는 싸움을 실패와 영원한 손실의 위험을 무릅쓰고 싸우는 것을 허락하셨다”(DA 49).

C. 그리스도의 시험들의 본질과 목적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셨다(4:1). 그리스도는 홀로 자기의 사명과 봉사 사업을 어떻게 하실 것인지 묵고하면서, 금식과 기도로 걸어가야 할 피 묻은 길을 결단하며 자신을 무장코자 하셨다. 그는 유대인들이 기대하고 있는 승리의 해방자로 나가는 길을 거부하며 여호와의 고난 받는 종으로 나가는 일에 수반될 여러 가지 일들에 대처하고자 광야로 가셨다.

40일 동안 금식하신 그리스도께 마귀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고 하여 그리스도의 자의식과 사명을 의심케 하는 공격을 하였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도 이런 말로 공격 받았다(27:40). 그리스도께서 광야에서 당하신 시험은 돌이 떡이 되게 하라는 것, 성전 지붕에서 뛰어 내리라는 것, 그리고 사단을 경배하고 세상 왕국을 차지하라는 것이었다. , 육체적이거나 물질적 식욕의 영역, 인기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시험, 사단과의 타협에 관한 시험이었다. 이런 시험들의 근본적인 이슈는 하나님으로 부터의 독립성(independence), 자율성(autonomy)을 추구할 것인지, 하나님께 의존하고(dependence) 순복할 것인지(obedience)에 관한 것이다. 마귀는 식욕, 안목의 정욕(인기) 및 이생의 자랑을 미끼로 하나님을 등지고 독자적으로, 그리고 자율적으로 나가도록 부추기면서 시험한다. 이것이 모든 시험의 지반이 된다. 그리스도는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6:57)라고 하여 하나님에 향한 의존과 시랑의 신뢰관계를 고백하셨다. 그는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시고 그분의 능력에 의존하셨다.” “자신을 완전히 비우셨으므로 그분은 그분 자신을 위한 계획을 세우시지 않으셨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날마다 펼치셨던 것으로서 그분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받아들이셨다”(DA 208). 사단의 목적은 아버지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확신을 흔드는 것이었다...사단은 그분의 아버지의 사랑에 대하여 의혹을 불러일으키기를 희망하였다”(SM 1:275). 죄의 본질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율적으로 나가는 것에 있다. 이 이슈는 모든 악의 근저에 놓여 있다.

그리스도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신 분이셨다(4:15).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다는 것은 시험의 지반이 같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오늘 우리가 처한 환경에서처럼 TV, 인터넷 등 같은 구체적인 시험들을 당하지 않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2000년이란 시간, 성적(性的) 차이, 및 문화와 문명적 환경의 차이로 인하여 우리가 당하는 개별적 시험을 모두 당하지 않았지만, 모든 시험의 지반은 같은 것이므로 그리스도는 우리가 당한 시험을 모두 당하신 것이다.

요한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시험에 상응하는 시험들을 세 가지 범주로 요약하면서 경계하는 기별을 주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요일 2:15-16). 육신의 정욕 (epithumia)은 인간의 육욕적인 본성에 대한 죄악적 욕구, 충동, 열망과 같은 것들이다. 안목의 정욕은 시각을 통한 자극된 정신적인 쾌락을 추구한다. 오늘날 많은 죄 된 즐거움은 안목을 통하여 촉발되고 있다. 이생의 자랑은 덧없는 세속적 허영, 겉치장, 세상의 권력과 물질적인 소유를 추구하고 자랑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세 가지 범주들, , 식욕, 참람, 및 세상 사랑의 시험(CS 209) 가운데 하나 또는 그 이상의 범위 안에서 늘 시험을 받으면서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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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첫 아담과 둘째 아담의 시험

그리스도께서 죄 있는 성향을 지니지 않았다고 하면, 그가 당하신 시험은 우리가 당하는 시험보다 가벼울 수밖에 없어 그런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본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죄 있는 성정이나 성향 유무가 시험의 경중이나 난이도를 측정하는 기준으로 비쳐진다. 그러나 타락 전 아담은 순진무구하였지만, 죄를 범하였다. 죄 있는 성향이 없다하여도 죄를 범한 것이 첫 타락 이야기이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3:6)에서 나타나 있듯이, 또한 이미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아담, 그리스도 및 우리의 시험의 범주와 지반은 같다. 그리스도께서 받은 시험이나, 아담이 받은 시험 및 우리가 받은 시험의 범주와 지반이 같다면, 아담과 그리스도께서 죄 있는 성향이 없었다는 점이 결정적인 요인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예수께서는 인류가 4천 년간 죄로 말미암아 연약하여진 때에 인성을 취하셨다. 그는 아담의 모든 자녀들과 같이 유전 법칙이 끼쳐온 결과를 받으셨다”(소망, 48). 그리스도는 유전법칙에 따라 연약하여진 인성을 지니고 탄생하였으므로 아담보다 훨씬 더 불리한 입장이었다. 첫 아담은 순진무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죄를 범하였고, 둘째 아담은 죄의 영향을 받은 연약한 존재로 오셔서 시험으로부터 승리하셨다. 그리스도의 인성에 죄 있는 성향을 덧칠하지 않아도 그는 우리가 따라야 할 승리의 모본이 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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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 그리스도 인성의 신비한 지평을 향하여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경건의 비밀에 속한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딤전 3:16).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모든 신비 중의 신비에 속한다((6BC 1082). 인간이 이 신비한 일을 다 설명할 수 없다(5BC 1113). 하나님의 비밀에 속한 그리스도의 화육의 진상을 다 풀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자만에 불과하다. 여기에 우리의 한계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겸손히 그 신비의 지평을 바라보는 자세를 취하여야 한다.

재림교회에서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역사적 논의는 치열하였으며 아직도 그 상반된 주장들의 대립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1888년 총회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의 기수들이 아담 타락 후 인성론을 지지한 까닭에 그 파문은 클 수밖에 없었다. 타락후 인성론은 Andreasen에 이르러서는 종말론에 토대를 둔 것으로 재림준비를 위한 기별, , 무죄한 완전주의적 생명의 기별로 부각되었다. QOD의 등장은 이런 전통적 주장()에 대한 으로서 장차 통합적 이해를 지향케 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리스도의 인성이 아담의 타락 전 인성이냐, 아니면 타락 후 인성이냐는 2분법적인 질문은 사리의 핵심에서 벗어난 질문이다. 신약성경은 모든 인간이 죄 아래 있다고 말하고 있다(3:9).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전 인류는 죄의 감염을 받고 출생하여 왔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모태 속에서 그리고 갓난아이 때부터 죄인의 상태에 놓여 있는 존재가 되어 구주를 필요로 한다. 그리스도의 인성에서 이런 죄 있는 인성을 상정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의 육신과 그리스도의 마음이라는 Andreasen의 이분법적 사고는 저차원본성과 고차원적 정신적 본성론으로 또한 본성과 품성론으로 이어져 왔지만 그 모두가 모순을 안고 있다. 그리스도의 인성과 우리의 인성 사이에서 유사점과 차별성이라는 두 가지 범주를 설정하지 않고서는 문제가 풀려지기 어렵다. 육체적 저급한 본성에 있어서 그런 죄 있는 정욕(passion), 경향 및 성향을 지녀 죄의 감염이 된 것으로 본다. 그러나 고차원적, 정신적 본성에서는 그런 것들을 지니지 않았다고 구별한다. 이런 시각은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의 인성과 우리 인성과의 차별성을 시인하는 꼴도 된다.

A. 그리스도와 우리의 인성의 유사성

1.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같은 인간의 본성을 나누고 있다.

예수께서는 우리와 같은 인성인 혈과 육을 지녔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 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2:14)(참고, 요일 4:2-3).

2.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 어머니를 두셨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 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4:4).

. 3. 예수는 통상적인 인간 발전의 법칙에 순복하셨다.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 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2:52; 참조, 2:40, 46).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5:8)

4. 예수는 통상적인 인간들이 갖는 신체적 한계성을 체험하셨다. 그는 주리시었고(4:2; 21:18), 갈증을 느끼셨으며(4:7; 19:28), 피곤하여 주무셨으며(8:24), 행 로에 곤하셨다(4:6).

5. 경우가 달라도 시험의 성질과 지반은 같다.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4:15). “모든 일(in all points)"은 세 가지로 압축된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요일 2:16). 시험의 지반이 같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자율(autonomy)과 독립(independence)을 벗어나 천부께 의존(dependence)과 굴복(surrender)을 하는 일에 있어서는 같다는 뜻이다.

6. 꼭 같은 순종을 요구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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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아들의 인성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우리의 영혼을 그리스도께 연결시키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연결시키는 금고리이다. 이 문제는 우리의 연구 과제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실제적인 인간이셨다. 또한 그분께서는 인간이 되심으로 당신의 겸비에 대한 증거를 주셨다”(1기별, 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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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부정을 추호도 알지 못하신 그리스도께서 타락한 상태에 놓여 있는 인성을 쓰셨다. 이것은 유한한 인간으로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굴욕이었다”(1기별, 253).

““ 아담이 에덴에서 죄를 짓지 않았을 때에라도 하나님의 아들이 인성을 취하는 것은 거의 무한한 굴욕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인류가 4천 년간 죄로 말미암아 연약하여진 때에 인성을 취하셨다. 그는 아담의 모든 자녀들과 같이 유전 법칙이 끼쳐온 결과를 받으셨다. 이러한 결과가 어떠하였는지는 예수의 육신의 조상들의 역사 가운데 드러나 있다. 그는 이러한 유전을 지니고 우리의 슬픔과 시험을 당하시고 우리에게 죄 없는 생애의 모본을 주시기 위하여 오셨다”(소망,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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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사단의 유혹을 이겨냄에 있어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유혹을 받았을 때처럼 유리한 입장에서 황막한 광야에 처하여 계시지 못하셨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자신을 낮추셔서 인류가 에덴동산을 떠나 4천년 동안 유리방황하며 본래의 순결과 정직에서 떠난 그 인성을 친히 쓰셨다”(1기별, 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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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그리스도와 우리의 인성의 다른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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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 그리스도는 무죄하나 우리는 죄 있는 존재이다. 예수가 무죄하다고 해도 아담보다 불리한 입지를 당면하였다 (비교: 광야와 에덴동산, 40일 금식과 선악과, 십자가와 선악과).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7:26).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요일 3:5). 그러나 우리는 다윗처럼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51:5)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그리스도는 죄 있는 육신의 모양(homoioma)”(8:3)라고 한 표현은 매우 엄선된 표현 방식이다.

그분은 매사에 있어서 우리의 모본이시다. 그분은 우리와 같이 연약하신 형제이시 다. 그러나 같은 성정을 갖지는 않으셨다. 흠없는 분으로서 그분의 본성은 악과 상관 이 없었다”(2증언, 201-202).

그분도 죄를 범하실 수 있었고, 타락할 수도 있었지만 그분 속에는 단 한 순간도 악 한 성향이 없었다”(화잇주석, 1: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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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예수는 신성을 지니고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1:35).

그리스도께서는 실제적인 인간이셨다. 또한 그분께서는 인간이 되심으로 당신의 겸 비에 대한 증거를 주셨다. 그렇지만 그분께서는 육신으로 계신 하나님이셨다”(1기별, 244).

그리스도께서는 영원 전부터 하늘 아버지와 연합하셨으며 주님께서 친히 인성을 쓰 셨을 때도 하나님과 하나가 되셨다. 주님께서는 하나님과 인류를 연합케 하는 고리이 시다”(1SM 228).

3. 예수는 최대의 시험을 받았다.

4.. 예수는 성령으로 잉태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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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부패로 더러워지지 않으셨고(unsullied), 죄를 모르셨다(stranger to sin). 그러나 그분은 기도하셨으며, 때로 강한 외침과 눈물로 간구하셨다. 그분은 그분의 제자들과 자신을 위해 기도하시며 인간에 공통적인 바 우리의 필요와 연약함과 실패를 공감하고자 하셨다. 그분은 강한 탄원자이셨다. 우리처럼 타락한 본성의 정욕을 갖지 않으셨지만 그와 같은 연약성을 이해하며, 우리와 같이 시험을 받으셨다. 예수께서는 그분의 아버지로부터 도움과 지지를 받아야 하는 그런 고뇌를 겪으셨다”(2증언, 508-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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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는 인성을 취하심으로 인류의 머리의 지위를 취하여야 하셨으나 인간의 죄성은 취하지 않으셨다(7BC 925).

완전 무죄이셨던 그리스도의 인성(3:15; 8:17; 고후 5:21; 4:15; 벧전 1:19)그리스도가 타락한 상태 가운데 있는 인간의 본성을 입으셨을 때 그는 죄에 조금도 참여하지 않으셨다. 그도 인간을 두르고 있는 연약에 싸여 있었다”(화잇주석,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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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의 모본이시다. 그분은 우리의 연약성(infirmities)에 있어서 형제가 되신다(우리와 같이 연약성을 지닌 형제이시다). 그러나 같은 성정(정욕)을 갖지는 않으셨다. 무죄하신 분으로서 그분의 본성은 악과 상관이 없었다” (2T 20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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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그리스도 인성의 독특성

1. 그리스도의 인성은 아담의 타락전 인성이나 오늘 우리의 인성과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다. 타락전 아담에게는 무죄한 연약성도 없었고, 죄 있는 성향도 없었다. 그러나 예수는 죄된 성향은 없었지만 무죄한 연약성은 지녔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마귀의 유혹을 받을 때에 그는 죄에 오염되지 않은 상태에 있었다. 그의 모든 생리기관과 기능들은 알맞게 계발되어 있었으며 잘 조화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1기별, 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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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예수는 우리와도 정확하게 같은 분이 아니었다. 우리는 연약성도 죄 있는 성향도 지니고 있는 존재이지만 그분에게는 죄 있는 성향이 없으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독특한 분(The Unique One)이었다. 특히 그의 독특성은 무죄한(sinlessness) 인성이라는 점에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 나름대로의 독특성을 지닌 인성이면서도 성육신의 신비 속에 가려져 있다. 그리스도가 타락한 본성을 취하였다고 하는 것은 4000년 동안 내려온 연약성(infirmities)과 채무(liabilities)라는 죄의 결과를 짊어지신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엘렌 화잇은 그리스도께서 희생제물, 대속자(Substitute), 인간을 죄책에서 해방시키시는 분에 관련된 진술을 할 때는 그분의 무죄성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우리의 모본으로 죄와의 투쟁에서 승리를 강조할 때는 우리와 그 분과의 동일성(identity) 범주에 드는 진술들을 하고 있다. 엘렌 화잇은 그리스도의 인성의 무죄성을 인식하는 순서를 구주-대속자-주님 되심을 선행시키고, 그 다음에 모본자 되심이 오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순서를 도치시킬 때 신학적 혼란이 야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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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엘렌 화잇은 빌립보서 2:5-8의 주석에서 그리스도의 성육신 이적의 신비 관점에서 고찰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우리가 깊은 연구를 하기 원할진대 먼저 땅 또는 하늘에서 일찍이 일어난 가장 경이스러운 일, 곧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에 우리 마음을 고착시켜야 한다”(7BC 904).

성경신앙의 지주가 되는 이 성육신을 가장 잘 나타낸 성경 본문은 다음과 같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14).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은 신비하게 결합되었다. 인간과 하나님이 한 분이 되신 것이다(The Faith I Live By, 48).

엘렌 화잇은 Baker에게 보내는 편지는 바로 이 성육신의 신비를 지적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모든 일에 한결같이 시험을 받을 수 있었지만 죄가 없었다는 점은 죽을 수 앆에 없는 우리 인생에게는 설명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신비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지금까지 신비요, 앞으로도 신비로 남아 있을 것이다. 나타난 것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을 위한 것이지만 근본적으로 그리스도를 전혀 우리와 꼭 같은 인간으로 만들어 버리지 못하도록 모든 사람에게 경고하라”(7BC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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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인성은 죄의 영향은 받았지만, 죄의 감염을 받지 않았다. 죄의 개념은 행위 개념 이상으로 상태와 관계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죄를 행위 개념 일변도로 이해하는 타락 후인성론의 그리스도 인성관은 천박한 죄관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리스도는 먼저 우리의 구주(Saviour)와 주(Lord)가 되신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우리의 모본이 되신다. 이 순서는 뒤 바뀌어서는 안 된다. 아무리 그의 모본성을 강조하더라도 그의 구주와 주님 되심의 범주를 전제로 한 논리 전개라야 한다. 다시 말하면 모본되심을 구주되심의 범주를 넘어서까지 그리스도의 인성 문제를 부각하는 것은 성서의 참된 그리스도의 모습과는 간극을 야기시킬 것이다.

. 그러나 그가 취한 인성은 오염되지 않았고 흠이 없었다(참조 요일 3:5). 한편으로 엘렌 화잇이 그리스도의 인성을 무죄한 인성으로 묘사한 진술들은 그의 구주되심에 역점을 준 존재론적 진술들로 보이며, 다른 한편으로 죄의 영향을 받은 인성을 취한 것으로 진술한 것들은 기능론적 모본성 내지 인간와의 일체성(identity) 입장에서 접근하는 인상을 주고 있다. 엘렌 화잇의 진술들을 성경 본문의 이 같은 진의를 일탈하는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남용 내지 왜곡에 불과하다.


Posted by KAHN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