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교제(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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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다음 글은 2016년 12월 17일 대학교회 안식일학교 제4반 보고회에서 5~6분 동안 아주 압축하여 발표하였습니다만 아쉬어 그 내용 전부를 여기에 전재한 것입니다. 교회 부흥의 길에 관한 답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여기에 부족하지만 담아 본 것입니디.>
성도의 교제(친교)
20대 초 처음 교회 나가서 얼마 안 되어 전도회가 있었다. 그 전도회란 무엇인지도 모르는 시절이었다. 목회자가 부임하지 않아 장로님이 지도하는 시골교회에 얼마 안 되는 소수의 신자들이 거창한 전도회 준비를 하는 일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전도회 강사 목사님이 오셔서 안식일 오후에 교인들을 모아놓고 전도회 준비를 이렇게 안하고 있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책망하였다. 몇 안 되는 청년들에게는 더욱 크게 나무라셨다. 이제 갓 배우려고 찾아 온지 얼마 안 되는 나는 황당한 느낌이 들었다. 집회 후 나처럼 교회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던 몇 청년들이 모여 나와 같은 심정을 토로하는 것을 들었다. 가까이 지내던 청년은 그 뒤에 교회에 나오지 않았다. 나는 다른 청년들과 함께 노방전도, 플래카드 부착 등에 나서긴 하였지만 무엇을 알거나 사명감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래도 참여한 것은 신자들과 작은 모임에 어울려 집집에서 친교도 나누고 식사도 나누는 일에 동참했기 때문이다. 이 잊을 수 없는 젊은 날의 경험이 있은 지 50여년 도 훨씬 지났다. 리더는 먼저 초보자들을 양육하고 신앙을 정착시켜야 한다. 이 과정에 필수적인 것은 성도의 교제인 것이다. 이 기본기가 결여된 교회의 프로그램이나 활동은 겉돌 뿐이다. 그 시절 교통수단도 열악하였던 그 옛날 멀리 떨어진 다른 지역 교인들이 많이 와서 정성껏 도우며 위로한 그들의 친교의 사랑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감동이었다.
노년이 많아져 가는 교회
인구 절벽이란 말이 유행어가 되었다. 대학에 진학할 청년이 크게 감소한다는 경보로 대학들이 활로를 찾느라고 고투하고 있다. 내가 섬겨 온 교회들에는 노인들이 많다. 좋던 싫던 노인세상이 되어간다. 교회가 노인 프로그램에 신경 써야 할 시대가 오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고목에는 눈먼 새도 안 앉는다‘고 하지만, 교회는 그런 소외된 인간들을 안고 간다. 성경은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고 한다(갈 3:28). 어느새 80고지를 향하여 나가고 있는 터이기에 늙은 자의 아름다운 것은 백발이고(잠 20:29), 그 白髮이 영화의 면류관이라고 한(잠 16:31) 메시지가 달리 보인다. 추한 노년이 얼마든지 올 수 있기에 성경은 늙은이도 꿈을 꾸어야 한다고 한다(욜 2:28). 교회는 노인에게 꿈을 일깨운다. 노인은 외롭다. 그러나 교회는 노인들에게 친교의 장을 마련해 주어 사는 재미를 찾게 하고 천국 가는 징검다리가 되어준다. 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노인은 보배 덩어리가 아닐까? 어떤 사람은 한 노인이 쓰러지는 것은 도서관 하나가 불타 없어지는 것과 같다고도 한다. 이는 70 혹은 80여년 이상 사는 동안 온갖 풍상을 겪으며 체득한 지혜와 배움. 그리고 노인의 현명한 조언과 선한 영향력 때문이리라.
I. 교회의 본질
신약성경은 교회에 관한 이미지를 여러 가지로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몸((유기체), 성전(거룩성), 신부(사랑 받는), 위에 있는 예루살렘(천적 존재), 가장 친근하고 서로 존중하는 한 가족, 진리의 기둥, 전투하는 군대 등이다. 교회는 은혜의 보물창고, 요새, 도피성이 된다. 이 중에서도 교회는 하나님의 권속(family image)이라는 표현이 우리의 관심을 끈다(엡 2:19). 교회는 아버지 어머니가 있고 형제자매가 있는 가족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가족 안에서는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장 사랑 받고 인정 받고 존중히 여김을 받는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구원 받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고 새 생명을 부여 받은 믿는 형제자매들의 공동체이다, 처음 교회에 나갔을 무렵 어느 목사님이 나를 보고 “형제”라고 부른 일이 충격적으로 느껴졌던 일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교회는 사상가들의 단체도 노동 단체도 아니다. 교회는 영 가족이다. 그 첫 번째 본질적 특징은 믿는 자들의 모임(가족)이라는데 있다. 에베소서 2:19에 따르면 교회는 외국인도 아니요, 낯선자도 아니고 하나님의 가족이다. 그러나 교회에 나가서 외로움에 빠진 분들이 보인다. 그런데 교회에 외국인들이나 낯선자들이 너무 많아 보인다.
애버리 덜레스(Avery Dulles)는 <교회의 모델(Models of the Church)>에서 교회를 5가지 모델로 나누고, 각각 7대 기준에 따라서 평가를 내리고 있다. 여러 해 전에 앤드루스대학교 세미나리 한 교수가 이 5대 유형을 크게 두 범주(존재론적 범주와 기능론적 범주) 로 나누어 설명한 것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A. 존재론적 범주
1. 제도로서의 교회 – 가시적 직제가 구조화된 공동체, 성경과 신경중심의 ,교조주의화 및 교회계층구조 등 특색이 있다 그러나 경직화 위험성을 안고 있다.
2. 성도의 교제로서의 교회- 그리스도의 몸, 인격 대 인격의 친밀한 성도의 교제의 영적 결합체, 소수 사람으로 구성, 구성원 상호간의 친밀성, 신비적 체험으로 연합 등이 그 특 색이다. 본회퍼가 추구한 교회상. 그러나 열광주의 일변도, 그릇된 기대를 만들 수 있는 위험성도 있다.
3. 성례전으로서의 교회- 기도와 예배 강조한다, 로마 가톨릭교회상의 기본 특색이다. 덜레 스는 이 교회상에 집착하나 의식주의와 성경이 제켜지는 문제성을 안고 있다.
B. 기능론적 범주
4. 사신(herald)으로서의 교회- 말씀 중심의 교회로 메시지 선포 사명 구현에 역점을 두고 있다. 칼 바르트가 추구한 교회상이다. 그러나 싸구려 은혜 강조와 근본주의 화 위험성을 지녔다.
5. 종으로서의 교회(섬김으로서 교회)-세속적 삶을 변혁시키는 교회하지만 세속적 가치 구현 에 몰두할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 세속신학이 이 교회상을 추구하고 있다.
5대 유형 중 어느 교회상을 선호하기 보다는 각 유형의 장점을 긍정하고 단점을 극소화하는 균형진 이해가 요청된다. 어느 유형 하나가 다른 유형을 배척하기 보다는 서로 보완해 나가야 한다. 특히 존재론적 모델을 먼저 구현하고 그 다음에 기능론적 모델을 동시에 추구해 가는 아우름이 필요하다.
II. 코이노니아 (koinōnia, fellowship)
교회는 성도들의 코이노니아이다. 헬라어 코이노니아(koinonia)는 문자적으로 “친교,” “우정.” “교제”를 뜻한다.
A. 교회의 두 번째 특징은 교제(fellowship)에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모임이고(고전 1:9), 믿는 자들이 친교하는 연합이며(빌 2:1), 성령의 교통하심이 있는 공동체이다(고후 13:14). 신약교회의 탄생의 기본 특징은 계속하여 사도의 가르침을 받으며 서로 교제(koinōnia)하며 떡을 떼는 일이었다(행 2:42). 마르틴 루터는 교회론의 핵심을 여기에 두고 있다. 즉, 오순절 다락방에서의 영적, 사회적 교제와 물질적 나눔의 친교에서 교회가 탄생하였다. 나누면서 자기를 희생하는 의미가 초기교회의 특색이다(행 2:42; 롬 12:13; 15:26; 갈 6:6; 고후 8:4; 빌 4:15). 심지어는 다른 사람의 죄나 약한 것을 함께 책임지고 처리하는 의미도 담겨 있다(딤전 5:22; 요이 11). 로마서 15:26에 나오는 “연보” 또는 “동정”은 코이노니아의 역어이다. 우리는 이 용어를 사용한 것에서 선물로 표현된 나눔과 교제가 밀착된 개념을 볼 수 있다.
교회는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와 몸에 참여하므로 그리스도와 교제하며, 그의 제자들과의 교제(갈 2:20)하는 모임이다. “fellowship”에는 참여적 의미가 담겨 있다. 접착제(bond) 같은 친교가 있는 교회는 성령 충만한 신자들로 짜인 관계이다. 이것이야 말로 교회 성장과 부흥의 발판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절친한 그리스도인 친교의 유대로(in the closest bonds of Christian fellowship) 연합되기를 원하시며 우리 형제들 사이의 신뢰는 교회의 번영에 필수적이고 행동의 일치는 신앙의 위기에서 중요하다”(3T 445-446)
“시기와 질투는 마음에서 몰아내고, 그리스도의 화평을 받아 들여 교인들이 참된 그리스도인 교제(fellowship)로 연합되어야 한다”(6T 202).
B. 교회의 이같은 원리를 사도신경에서는 성도의 교제 (the communion of saints, communio sanctorum)로 표현한다. 마르틴 루터는 교회를 <성도의 교제>로 보았다. 개신교는 로마가톨릭적인 죽은 성도와의 교제 개념을 배척한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모든 신도의 연합으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일상적 삶을 강조하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나누며 살아간다. 본회퍼는 <성도의 교제>라는 박사 논문은 이 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그는 회중의 모임과 하나님과의 교제를 강조하였다. 그는 핑겐발데 신학교 안에서 형제의 집을 세워서 공동생활을 시작했고, 엄격한 영적훈련을 시작했으며, 모든 것을 나누고, 같이 살고 같이 기도하고 서로 죄를 고백하며 용서했다. 교회는 하나님과 절대적인 관계에서 출발하여 인간들 사이의 '나와 너'의 관계와 책임을 강조한다.
성도의 교제는 교회 안의 작은 교회를 중심으로 하여 불길이 타오른다. 이런 현상은 오순절 다락방의 교회 탄생 때 나타났다. 교회란 그리스도와 함께(with), 그리스도 안에서(in),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to), 그분의 자녀들이 은혜를 체험하려는데(for) 있다.
교회 거죽은 신조, 예배, 제도 등 외적이 끈으로서의 조직을 지녀 게셀샤프트 같지만, 그 본질은 일차 집단인 게마인샤프트이다. 게마인샤프트로서의 교회특성은 성도의 교제라는 인격 대 인격의 친밀한 결합체, 구성원 상호간의 친밀성에 있다. 일차적인 결속의 끈이 되는 것은 성령의 내적은총과 은사들이다. 이 은사를 바쳐서 영적 공동체 세우는 일을 해 나간다. 그리스도의 몸은 신적인 생명의 원리에 의하여 성장하고 자신을 교정하며 변화를 해가는 유기체이다. 교회가 위계질서적인 제도로서 화석화되는 길을 막는 것은 신비한 몸으로 신적인 교제를 나누는데 있다.
III. 기적의 산실 작은 교회
오늘 이 시대 교회가 사귐과 나눔이라는 미덕을 잃어버린 채, 개인주의로 격리된 공동체의 상실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교회는 잠시 모였다가 흩어지는 개인의 병립(竝立, coexist)이 아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의 유기적 총체이다. 교회는 느슨한 연맹체도 아니요, 복합적인 기구나 조직도 아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통일된 교제와 나눔의 공동체(fellowship community)이다.
이 시대의 조류가 되고 있는 끊임없는 시설 확장이라는 과잉투자의 초대형교회 모델에서는 제도, 엄청난 프로그램들, 봉사, 전도는 휘황찬란하겠지만, 생명의 교제인 형제 됨과 순수한 교제는 멀어지게 마련이다. 교회는 막강한 직제의 지도자 군림도 아니다. 한스 큉은 <고뇌하는 교회>에서 가톨릭교회의 위기의 근본원인을 교황군주주의(papal absolute monarchy)에서 찾았다.
이미 선구교회가 이런 과정을 거쳐 쇠락의 길을 걸었던 길을 가고 있는 것이 한국교회의 현주소이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하는 작은 공동체 안에 일어나는 성도의 교제를 멀리하고는 길이 안 보인다. 사랑에서 비롯되는 완전한 자기 헌신에 의해 이루어져 가는 본래적인 교회 공동체의 회복의 길을 찾아야 한다. 프로그램의 효율성에 매달리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길은 교회 안의 작은 교회의 활성화로부터 찾아야 한다. 큰 교회라고 할지라도 이 생명을 살리는 작은 교회들의 모임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나라의 맥을 잃어 갈 것이다. 교회 안의 교회(church within church)가 작은 교회이다. 작은 교회는 교회의 세포 안의 미토콘드리아 역할을 한다. 작은 교회에서 타오르는 불꽃이 큰 교회의 생명선이 된다. 그래서 서로가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이루어지는 깊은 영적 교제를 해 나가게 한다. 작은 교회의 신자들의 불타오르는 믿음, 소망, 사랑의 영적 삶이 교회를 살리는 불씨가 된다.
1844년 10.22.의 대 실망을 돌파한 계기는 그 해 12월 포트랜드 남쪽 Elizabeth Haines 부인의 가정에 모인 5명의 여인들의 작은 기도회 모임에서 일어났다. 신앙 동지들이 돌아가면서 차례로 눈물 어린 기도를 올리는 중 EG Harmon이라는 17세 처녀가 올린 기도가 응답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이 작은 무리의 기도회에 성령의 감동을 입혀주었다. 여기에서 하늘가는 좁고 곧은 길에 관한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 백성들을 위로 하고 격려하며 걸어가야 되는 일을 보여 주신 것이다.
잭슨 캐롤(Jackson W. Carroll )의 <작은 교회가 아름답다 (Small Churches Are Beautiful)> 가 돋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참고: Review by: Everett L. Perry Journal for the Scientific Study of Religion Vol. 17, No. 2 (Jun., 1978), pp. 197-199.).
참 교회란 어떤 교회인가? 그것은 건물 크기, 헌금 규모, 교회 직제와 조직 확대, 해외 선교를 포함한 프로그램의 크기에 의하여 결정되지 않는다. 참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신앙으로 분별하는 하나님의 백성들(laos tou theou)이 운명 공동체가 되어 하늘의 권능을 받아 그것을 증거하고자 헌신한 공동체이다. 마치 소수가 모인 오순절 다락방에 이른비가 내릴 때 선교폭발이 일어났던 것처럼, 종말론적 백성들이 비록 소수라고 하더라도 늦은비를 받으면 선교의 대폭발이 일어날 것이다.
친교는 기적을 낳는다.
미토콘드라아 같은 교회가 기적의 산실이 된다. 늦은비의 체험을 한 작은 교회들의 구성원들이 나아가 집집방문을 하고 메시지를 전할 때 치유의 이적, 영혼들의 회심이 일어난다.
“나는 도시와 시골에서, 그리고 땅의 높은 곳과 낮은 곳에서 비추고 있는 빛의 줄기들을 보았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결과로 모든 도시와 촌락들에 그분을 위한 기념물들이 생겼다. 그분의 진리는 온 세계에 전파되었다.”(9T 28-29)
“밤의 이상에서,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 있을 큰 개혁 운동에 관한 광경이 내 앞을 지나갔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었다. 병자들이 고침을 받았고, 다른 이적들이 행해졌다. 심지어 오순절의 큰 날 전에 나타난 것과 같은 중재의 정신이 보였다. 수백, 수천의 사람들이 가정들을 방문하고 그들 앞에 하나님의 말씀을 펴고 있는 것이 나타났다. 사람들의 마음은 성령의 능력으로 각성되었고 참된 회심의 정신이 나타났다. 사방에서 진리의 선포에 대하여 문을 활짝 열었다. 세상은 하늘의 감화로 환하게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진실하고 겸손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큰 축복을 받았다. 나는 감사와 찬양의 목소리를 들었다. 우리가 1844년에 목격한 것과 같은 개혁이 주어지는 것처럼 보였다.”(9증언, 126)
“위대한 복음의 사업은 그 시초에 나타났던 하나님의 능력 못지않은 큰 능력이 나타남으로 마쳐지게 될 것이다. 복음 사업의 시초에 이른비가 내림으로 성취된 예언들은 그 사업의 종말에 늦은비가 내림으로 다시 성취될 것이다. 그리하여 사도 베드로가 기대했던 “유쾌하게 되는 날”(행 3:19) 이 이를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행 3:20)라.
하나님의 종들은 거룩한 헌신으로 빛나고 밝은 표정을 얼굴에 짓고, 하늘에서 온 기별을 선포하기 위하여 이곳에서 저곳으로 분주히 왕래할 것이다. 온 세상은 무수한 음성으로 경고를 받을 것이다. 이적들이 일어나고, 병자들이 고침을 받게 될 것이며, 표적과 기사들이 믿는 사람들에게 따를 것이다. 사단도 또한 거짓 기사들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의 눈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내려오게까지 할 것이다(계 13:13 참조). 이리하여 세상의 거민들은 그들의 입장을 분명히 취하게 될 것이다.”(쟁투, 611-612).
(참고: James Laney 전 주한 미 대사(1993-97)이 외로운 노인과 나눈 친교 이야기
학자요, 정치가요, 목사인 제임스 레이니(James T. Laney) 교수는 1993∼97년까지 주한 미국대사로 재임하였다. 그는 주한 대사의 임무를 마치고 귀국하여 에모리 대학(Emory University )의 교수가 되었다. 건강을 위해 그는 매일 걸어서 출퇴근을 하는 중 어느 날 레이니 교수는 쓸쓸하게 앉아 있는 나이 든 노인 한 분을 만났다. 그는 노인에게 다가가 다정하게 인사를 나누고 말벗이 되었고 그 후 시간이 날 때마다 출퇴근길에 그 노인을 만나 이것저것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며 말벗이 되기도 하고 그 노인의 집 마당의 잔디를 깎아주거나 커피를 함께 마시면서 2년여 동안이나 친교를 나누었다.
어느 날 레이니 교수는 며칠 째 출근길에 그 노인을 만나지 못했다. 궁금하게 여긴 그는 그 노인의 집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는 그 노인이 어저께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깜짝 놀란 레이니 교수는 곧바로 장례식장을 찾아 조문을 하였다.
그 때 한 사람이 다가와 돌아가신 회장님께서 당신에게 남긴 유서라면서 봉투를 건네 주었다. 그 봉투 속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유서가 들어 있었다. "당신은 2년여 동안 내 집 앞을 지나면서 나의 '말벗'이 되어 준 친구였소. 우리 집 뜰의 잔디도 함께 깎아주고, 커피도 나누어 마셨던 나의 친구, 레이니 교수..... 고마웠어요. 감사의 뜻으로 당신에게 25억 달러와 코카콜라 주식 5%를 유산으로 남겨드립니다".
너무 뜻밖의 유산을 받은 레이니 교수는 세 가지 점에서 놀랐다. 첫째는 전 세계적인 부자가 그렇게 검소하게 시골에서 살고 있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코카콜라 회장이란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무런 연고도 없고 지나가던 사람일 뿐인 자기에게 그렇게 큰돈을 준 것에 놀랐다.
친교가 기적을 낳은 것이다. 외로운 노인의 목말라하는 마음을 다한 친교가 노인의 마음에 깊은 감동으로 이어져 거금을 그 사람에게 남겼다. 거금을 주어도 자기를 위하여 사용할 사람이 아니라는 신뢰가 있었을 것이다. 레이니 교수는 받은 유산을 에모리 대학의 발전기금으로 내놓았다. 엄청난 돈을 학교와 제자들에게 내놓자 에모리 대학 이사회에서 그를 총장으로 모셨다. 레이니 교수는 총장을 역임하고, 지금은 명예총장으로 있으면서 한반도 전문가로 남북문제해결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나눈 따뜻한 마음들을 하나님은 잊지 않으시고 갚아주신다. 그 축복의 결국은 천국으로 향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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