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tledge의 <The Crucifixion: Understanding the Death of Jesus Christ> 서평
Fleming Rutledge의 <The Crucifixion: Understanding the Death of Jesus Christ> 서평
존 스토트(John Stott)의 <그리스도의 십자가 (The Cross of Christ)> (380 pp, 1986) 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관한 복음주의 진영의 대표작으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영국교회 여류 사제인 러트리즈(Fleming Rutledge)가 그 뒤를 이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관한 새 연구의 620쪽 작품 The Crucifixion: Understanding the Death of Jesus Christ.을 2015년에 펼쳐냈다. 이는 스토트 이래 최대 역작으로 평가 받고 있다.
그의 저술 동기는 십자가 설교는 그리스도교의 본질에 속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새로운 것을 급진적으로 제시하고 있다고 본다. 학자들은 통상적으로 고대 이스라엘과 현대 영적 이스라엘 사이의 연속성에 역점을 두어 왔지만, 저자는 그 불연속성을 강조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교 신앙의 급진적 새로움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급진적 참신성을 바울신학에 대한 투시와 묵시문학의 시각에서 찾는다. 묵시적이라 함은 인간적이 아닌 신적인 새 창조에서 완성되는 하나님의 통치의 개입임을 강조한다. 이 묵시적 개입은 특히 세상의 임금인 사단-마귀에 대한 전쟁으로 진입한다. 바울이 선포한 경건치 않은 자에 대한 칭의와 그 이전의 다른 형태의 신앙 사이에 불연속성을 배경으로 한다. 그러나 불연속성이라는 것은 연속성 속에 함축적으로 내재된 것일 수 있지 않아 한다.
악은 無, 즉 선의 결핍 내지, 존재의 결핍으로 어둠의 권세 역할을 한다. 우리는 현재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급진적인 악을 대면하며 살고 있다. 악은 온 세상에 침투하여 집요하게 그 세력을 펼쳐가고 있다. 대량학살이 여기저기에서 일어나고 있다. 악의 세력은 개인의 생명을 초개처럼 앗아가고 있다. 그 악은 각 개인의 속에도 도사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그 해결책은 급진적인 것이라야 한다.
그래서 저자는 예수의 죽음의 사실에 관심을 돌릴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가 소름끼치는 방식으로 사형이 집행된 사실에 초점을 모으고 있다. “십자가의 공포는 대문자로서의 죄(Sin)와 죽음(Death)의 멸망시키는 권능과 같은 것이다.”
저자는 속죄이론을 정교하게 다듬어 구축하는 일f에는 별 관심이 없다. 저자는 성경과 교회 전승에 등장해 온 여러 해석학적 요소들의 강점을 찾는데 역점을 기우리고 있다. 그래서 희생제물, 속전, 구속, 유월절, 출애굽 영상, 최후 심판, 승리하신 그리스도, 음부로 내려가심, 대속, 요점반복(recapitulation), 합성과 참여의 의미를 조사 검토하고 있다. 저자는 심지어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안셂의 <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나> 책에 대한 헐뜯고 있는 주장에 대한 올바른 이해까지도 추구하고 있다. 안셂은 인간의 죄의 무게가 얼마나 큰지 누구도 잘 모른다고 보았다.
십자가는 죄를 단순하게 용서하는 수단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인간이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왜 바로 죄를 잊게 하고 용서하지 않는가 하는 의구심을 갖지만,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프로젝트 범주를 다 못 보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프로젝트는 죄 용서 뿐만 아니라 잘못된 것 바로 잡는데 있다. 하나님의 자비에는 엄청난 광활성이 있다. 여기에 전통적인 각 해석의 동인을 따로 떼서 그 하나만 보면 진리가 곡해되기 십상이다. 모든 해석들을 총체적으로 취합하여 균형있게 보아야 한다. 여기에서 십자가에 대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바로 볼 수 있게 한다. 삼위 하나님의 고역이라는 시각에서 십자가를 조명하여야 한다. 성부 하나님을 벌을 주시는 분으로 묘사하는 것은 삼위 사이를 이간시키는 일이 된다. 삼위 하나님은 하나로 연합되어 있다.
저자는 십자가에 못박힌 사건은 대속론적 접근방식을 제켜두고 그 진의를 다 이해 할 수 없다. 그러나 대속론으로 십자가 처형의 무게를 다 설명되는 것도 아니다. 여기에서 해방신학적 접근도하면서 아울렌의 <그리스도 승리자 (Christus Victor)> 적 승리자적 이해를 강조하기도 한다.
억압(oppression), 속박(bondage)에 사로잡혀 있는 인간을 그리스도가 해방시켰다. 인간은 모두 그 무엇에 매여 있는 존재이다. 그러나 승리자 그리스도론은 그리스도를 승리자이며 '해방자'(liberator) 로, 그의 십자가 죽음을 사탄, 악마, 악령을 이김으로 그 힘에서의 해방시켰다. 요컨대, 그리스도의 십자가 상의 죽으심은 스펙트럼처럼 다채롭다.
용서로는 충분하지 않다. 구속에 관한 신조로도 충분하지 않다. 인간의 내재적인 선이란 것도 충분하지 않다. 인간에 속한 모든 것은 정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 자비의 선포와 이 세상 질서와는 독립된 권능이 창조의 신적 목적의 대 원수가 장악하고 있는 것을 부셔야 한다.
“만유의 상속자”(히 1:2)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정죄 받고 배척당하신 의로우신 분으로서 제물로 바쳐지셨다. 겟세마네 이후에 자신을 완전히 포기하신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완전한 연합을 이루셨다. 그리고 골고다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셨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다”(사 53:3). 비인도적이고 사악한 마귀의 세력이 예루살렘을 장악,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았다. 그 분은 유기당하고 버림받았으며 하나님으로부터도 버림받았다. 그 분은 대문자 죄(Sin)와 죽음(Death)의 권세(Power)를 부서뜨리기 위하여 홀로 모든 인간의 대표자로 매달려서 모든 인간을 대신하여 정죄의 고난을 받았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dikaiosyne theou)의 권능이야 말로 이 세상의 악을 바로잡고 죽은 자를 부활시키셨다. 하나님의 아들의 보혈이야말로 죄에 대한 완전한 제물이 되었고, 포로된 자들을 구출할 속전이 지불되었다. 무덤의 권세가 습격당하였다. 홍해를 가로질렀으며 원수는 수장 당하였다. 죄(Sin)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집행된 것이다. 아담의 불순종이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요점 반복되어 새로운 창조가 일어났으며,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자들은 그 분과 연합되었다. 현세적 악이 지배하는 나라가 지나갔다. 아직 약속된 하나님의 왕국 승리의 성전이 다 끝난 것은 아니지만, 신도들은 교회의 십자가의 증인으로 나서야 한다. 성육신하신 아들은 아담의 육신으로 싸웠으며 사탄에 대한 승리를 이루셨다. 하나님의 아들의 이 초월적인 승리가 이 악과 잔혹함이 지배하는 코스모스를 의로우신 창조주께로 순응시키는 길이 열린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의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성취되었으며, 현재는 성령의 권능으로 이루어져 가고 있다. 마침내는 그리스도 예수의 날에 완성될 것이다. 이 순례의 길에 선 각 신자들은 바울처럼 다음의 고백을 하며 행진하여 갈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이 책은 희생제물되신 그리스도에 초점을 두고 있어서 하늘에서의 대제사장으로 봉사하시는 국면은 다루어지지 않은 한계성을 지녔지만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종합적으로 접근하고 있어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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