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 부름 받은 존재
자유로 부름 받은 존재
요 8:32-36; 갈 5:1,6, 13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갈 5:13).
A. 내적 죄로부터의 자유
예수께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신 것은 죄로부터 자유이다(요 8:34-35).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자유의 선물을 주시기 위하여 오셨다. 그는 자기의 사명을 몸, 마음 영혼이 사단에게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선포”(눅 4:18)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예수의 복음은 가난한 자에게는 구제를, 무지한 자에게는 빛을, 고통 받는 자에게는 그 고통의 경감을, 죄의 노예들에게는 자유해방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유를 주시고자 오셨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 8:32,36).
우리 인간은 본질상 죄의 노예다.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자랑할지라도 이방인들과 다를 바가 없다. 죄의 노예로 전락하여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그들은 정치적 자유가 없었다. 유대인들은 로마의 지배 아래에서 겨우 자기들의 종교의 자유를 얻어 지내고 있었다. 그들은 예배드리는 자유를 줄기차게 견지하여 온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하나님께 바치기를 거부하여 다른 세력의 지배하에 있었으면서도,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사단의 장악 아래 들어가 있으면 비참한 종살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기를 거부하는 영혼은 모두 다른 세력의 지배를 받게 된다. 그는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가 자유를 말할 수 있을지라도 가장 비참한 종살이 가운데 빠져 있다. 사단이 그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그는 진리의 아름다움을 볼 수 없다”(DA 466)
종교적 자유를 위해 분투해 온 유대인들은 예수의 종살이 선언을 듣고 반발한다. 자유의 본질은 죄의 노예에서 해방되는 것에 있다.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8:34)” 이 선언에 그들은 반발하지만, 성경은 율법 앞에 무능한 인간의 실존을 선언한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하고, 하지 말아야할 것을 하는” 존재이다. 가장 먼저, 자신이 죄의 노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율법의 저주 아래에서 죄의 종으로 전락하였다. 죄의 노예 상태를 두고 바울은 이렇게 선언하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롬 7:24). 이는 자유가 없다는 내적 고백이다.
6.25 공산주의의 체험, 죄의 종으로 살아가는 것은 정치적 식민주의 보다 더 비참하다.
진정한 해방은 자기중심적인 내적 자아(ego)의 전제로부터 해방에 있다. 특히 죄의 속박에서 해방되는 때 진정한 영적 자유를 향유할 수 있다(요 8:34). 악을 선택하는 것은 곧 이 자유를 포기하는 것이다. 복음은 인간에게 참 자유를 준다. 이 자유는 그리스도의 선물이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는 해방자가 되신다(요 8:32). 예수는 인간을 죄악의 사슬로부터 자유케 하러 오셨다. 진리를 받아들인 자들에게 자유가 약속되어 있다(고후 3:17; 갈 5:1).
유대인들이 종이 아닌 아브라함 자손이라고 할 때 예수게서는 대답하신다.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죄로부터 자유로운 의인이 없는 세상이다.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 14:3).
예수께서 말씀하신 자유는 죄의 멍에에서 해방시키는 자유이다. 이것은 인간의 근원적인 자유이다. 예수께서는 이 자유를 주시고자 오셨다. 죄로부터의 자유, 물질의 노예로부터의 자유, 정욕으로부터의 자유, 사탄의 지배에서 자유, 죽음으로부터의 자유...
바울의 갈라디아서를 두고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인의 마그나카르타라고 한다.
B. 우리를 자유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요 8:36).
참된 자유는 하나님의 아들 됨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사단의 노예로 전락된 자들을 속량하시었다. 아들과 종의 차이는 자유가 있느냐 없느냐에 있다.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요8:35).”
“인간이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데 있다(요 1:12).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다(요 1:17). 그리스도는 진리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자유하게 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4:7) .
“성령의 감화 아래서 누구를 섬길지를 선택할 자유가 주어져 있다. 사람이 그리스도에게 복종할 때 일어나는 변화 가운데 가장 높은 의미의 자유가 있다. 죄를 버리는 것은 스스로가 해야 할 일이다.”(DA 466).
하나님의 아들만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한다.
육체의 욕망을 제어하여야 한다. 죄의 마수에 끄려 다니는 인간의 종말은 비참하다. 유혹의 마수가 있는 곳에 맴돌면 걸린다. 인간의 가치는 그가 누리는 자유에 있다. 인간의 행복도 이 자유의 범주에 비례하여 행복한 것이다.
외적, 내적 억압에서 자유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죄가 인간의 자유를 죄를 짓는 자유로 만든 것을 본래 대로 은혜가 자유의지를 회복시키고 참된 자유를 향유케 한다. 그리스도께서 은혜로 주신 이 죄로부터 자유야 말로 참자유의 출발점이 된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도록 하시고자 골고다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다.
C. 적극적 자유
진정한 자유는 “~을 위한 자유 (freedom for ~)” 곧 적극적 자유. 이는 곧 사람에게 결단과 책임을 요청하는 적극적 자유이다. 인간이 책임적인 자유의 존재로 부르심을 받았다. 이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갈 5:13). 적극적 자유는 사랑의 종이 되는 결단과 책임을 요청한다. 참다운 자유를 위하여 많은 짐을 져야 한다. 사랑으로 서로 섬기는 일이 진정한 자유이다.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자유의 길이다. 승리의 길이다.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는 이 적극적인 자유가 자유의 목적이며 소명이 된다. 우리는 우리가 추구하는 이 적극적 자유만큼 행복하게 되어 있다.
삼육학교의 교훈인 <진리, 사랑, 봉사> 구호는 인생의 목적이 출세가 아니고 섬기는데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전통적으로 교육의 목적은 출세, 입신양명에 있었다. 그리스도교 교육 목적은 지나간 우리 역사의 교육의 목적을 뒤집어 엎어놓은 것이다.
해방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자유는 역설적으로 다시 자아가 성령에 기속되어 부름 받은 종의 신분으로 이어진다. 이는 창조적 자유이다!!! 에릭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 - 참된 자유를 수호하고자 자기의 자유를 제한시키고 사랑의 종이 된다.
진리 그 자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시려고 십자가를 지셨다. 진리를 삶의 지표로 삼고 가는 사람은 감사하며 겸손히 섬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이 적극 적 자유를 위하여서 이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으로 창조되었다(고전 11:7). 하나님께 영광 찬송을 돌리도록 창조되었다(엡 1:14).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사례1: 세계적인 석학이 어느 교회에 나오면서 자기가 할 일은 교회당 입구에 무질서하게 놓인 신발을 정리하는 것으로 일고 봉사한 사례. 안식일 점심식사를 열심히 준비하는 여 집사님들과 설거지하는 장로님들 모습은 아름답다. 밥맛이 난다. 자기 시간과 재물을 바쳐가며 섬기는 곳이 교회이다. 이것이야 말로 섬김을 받고자 오신 것이 아니요 섬기려고 오신 우리 주님이 걸어가신 발자국을 따르는 제자의 길이다.
겔 36:26 하나님의 신이 우리 안에서 이 자유를 행케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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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자유의 삶의 비결
자유의 삶의 비결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에 있다. 유대인들이 내걸고 있는 것은 아브라함 자손이란 점이었다. 그들은 외적, 혈연적 계승을 근거를 들었지만, 예수께서 더 중요하게 여기신 것은 아브라함의 순종을 본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천주교는 사도적 계승을 정통성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아오고 있다. 그러나 EGW의 필치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브라함의 자손됨은 이름이나 혈통으로써가 아니라 성품의 같음으로만 판명된다. 그러므로 사도직의 계승은 교권의 전달에 의존되는 것이 아니요 영적 관계에 달려 있는 것이다. 사도들의 정신으로 움직여 행동하는 생애, 사도들이 가르친 진리를 믿고 가르치는 것, 이것이 참된 사도직을 계승한 증거이다. 이것이 사람들을 복음의 첫 교사들의 계승자가 되게 하는 것이다”(DA 467).
그리스도인에게 영적 자유는 자동적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자유가 지동적으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다. 자유를 위해 부르심을 받았지만 육체 소욕대로 살면 죄의 종으로 전락된다(갈 5:13 ).
자유를 얻고 본능에 이끌려 살면 종의 멍에를 다시 메게 된다. 포도나무가 되시는 예수님께 붙어 있을 때(요15:10)! 곧, 그리스도의 말씀에 거할 때 자유가 유지된다(요8:31). 내 말에 거한다는 것은 순종을 통하여 자유가 지켜진다는 것이다.
“내 계명을 지키는 것”이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하는 길이 된다(요 15;10). 기차가 선로 안에서만 자유롭듯,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으로 참 자유가 온다. 기차가 철로 위에서만 자유하고, 물고기가 물속에서만 자유하듯이 하나님 백성은 말씀 안에서만 자유하게 된다.
호 소:
우리나라를 이끌 지도자를 선택하는 일에 있어서 누가 우리 자유를 확대시킬 것인지, 누가 우리의 자유를 제한시킬 것인지를 깊이 생각하고 판단해야 한다. 인간은 온갖 죄악들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죄악의 동아줄에 묶여 살아가는 존재로 전락되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과거의 어느 때보다도 죄악들을 합리화시켜가고 있다. 동성애나 동성혼이 법으로 보호 받을 만큼 되어 버렸다. 니느웨 성의 탄식하는 의인들이 발버둥을 치면서 빛을 찾았던 것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는 탄식소리가 높아만 간다. 심지어 하나님의 자녀라고 일컫는 나라고 하는 존재 역시 지금 율법의 정죄 아래에서 죄의 포로가 되어 있지는 않는가?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근원적인 자유를 주시려고 오셨다. 그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악의 멍에를 부수시고자 우리를 부르셨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케 하시려고 보혈을 흘리셨다. 그 분을 우리가 모시면 우리에게 참 자유를 주신다. 그리고 죄에서 해방시키신 그 분께서 구원 받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동역자로 나서라고 부르시고 있다. 우리는 아무런 자격도 권한도 없지만 주님께서는 우리를 천국건설의 일꾼으로 나서라고 하신다.
[참고 자료]
1. 자유인 흑인의 노예의 섬김 자원
링컨 대통령이 미국을 다스릴 때 흑인 노예들이 고통을 많이 당했다. 주인이 하라는 일을 다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흑인 노예들은 피 흘리도록 채찍에 맞기 일쑤다. 어느 날 지나가던 백인 교수가 매 맞는 흑인 노예를 보고 몇 배의 값을 치루고 산 후 데려다가 돌보아 주었다. 흑인 노예가 어느 정도 몸을 회복하자 백인 교수는 말한다. "내가 값을 치렀으니 당신은 노예가 아니고 자유인이 되었소. 이제는 돌아가 자유인으로 사시오." 그때 흑인 노예는 눈물을 흘리며 "선생님은 악한 주인의 손에서 나를 구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자유인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제 자유인으로 당신을 섬기게 허락해주십시오" 라고 사정한다. 흑인은 종으로서가 아닌 자유인이 되어 사랑으로 주인을 섬기는 일을 기쁨으로 하였다.
이미 자유의 몸인 된 흑인 노예가 사랑으로 섬기는 것처럼, 예수 믿고 자유를 얻은 우리도 자발적으로 주님을 섬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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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무디 사경집회 이야기
미국 메사추세츠에서 열린 무디 선생의 성경 연구 집회에 영국의 귀족들이 방문하여 참관하는 일이 있었다. 당시만 해도 영국에서는 손님이 오면 종이 밤새도록 손님의 구두를 닦아 놓는 풍습이 있었다. 무디 선생의 제자들 사이에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토론이 벌어졌다. 결론은 '여기는 미국이니까 손님들의 구두를 닦지 말자' 한 것이었다. 그런데 한 제자가 이 이야기를 무디에게 전하면서 그의 생각을 물었다. 무디는 빙그레 웃으며, "글쎄, 주님께 물어볼까?" 하였다. 이튿날 아침, 영국의 귀족들이 일어났을 때 그들의 구두는 모두 깨끗하게 닦여져 있었다고 한다. 무디 선생이 밤에 종이 되어 구두를 닦아 놓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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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흑인 발 씻긴 백인 대법원장 이야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종차별로 악명 높던 남아공화국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남아공화국은 인종차별이 심했기 때문에 흑인과 백인이 함께 예배를 드리지 않고 별도로 예배를 드렸다. ‘성 시온교회(Holy Church of Zion)‘라는 흑인교회에서는 고난주간의 성만찬을 행하기에 앞서 세족례(洗足禮) 의식을 진행하였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었듯 서로 발을 씻겨주며 예수의 겸손을 배우기 위해서 이었다.
이 세족례를 행하는 흑인 교회에 올리버라고 하는 백인 대법원장이 이곳을 혼자 방문했다. 세족례 시간이 되자 그는 마르다라는 흑인 여성을 앞으로 불러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정성을 다해서 발을 씻겨주었다.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라 숨을 죽이고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백인인 대법원장‘이 흑인의 발을 씻긴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을 뿐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발을 다 씻긴 올리버 대법원장이 그들에게 말했다. "여러분, 이 사람은 내 집에 노예로 있는 사람입니다. 한평생 우리 집 아이들의 발을 수백 번 씻겨 주었습니다. 그걸 보는 내 마음은 늘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오늘 내가 우리 집 아이들의 발을 씻어준 바로 이 사람의 발을 씻겨 주어야 내 마음이 편안할 것 같아 이렇게 한 것뿐입니다. 뭐 대단한 일을 행한 것도 아닌데 그렇게 이상하게 여길 것이 없습니다."
올리버 대법원장은 이 일 때문에 대법원장직에서 파면을 당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이제야말로 참으로 하나님께 찬양할 자유로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기뻐하며 감사했다고 한다. 백인 우월주의가 지배하고 있던 그 사회였지만 올리버는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과 사랑의 정신을 앞서 실천하였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을 우리가 본 받아 살아간다면 우리의 사회는 시기와 다툼이 아니라 평안과 사랑이 넘치는 사회가 될 것이다. 우리는 자칫 남을 억누르며 큰 소리 쳐야 존경을 받는다고 크게 오해할 때가 많다. 나의 행동을 가만히 되살펴볼 때 스스로 부끄러운 일이었음을 고백하게 된다.(경북대학교 정충영 교수 자료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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