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참 종교는 제도나 신조나 의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최대의 선을 베풀고 진정한 선으로 사랑의 행위를 나타내는데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백성들을 가르치고 계실 때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는 질문을 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주변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예수의 대답을 기다렸다. 질문 속에 들어 있는 함정을 간파하신 예수께서는 논쟁에 휩쓸려 들어가지 않으셨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질문한 율법사에게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눅 10:25)고 반문하셨다. 당대 지배층은 예수께서 율법경시론이나 율법폐기론적 발상에 빠져 있다고 흠집을 내고 있던 중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제도와 법의 근본정신을 들추어내게 하였다. 율법사가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라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하셨다(눅 10:26-28).
인간이 나 사회 및 국가의 운명은 법의 근본정신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공평하게 사랑하는 일은 일상 생애에서 실천되어야 할 원칙이다. 예수께서는 이 원칙이 무시 내지 유린되고 있는 사법적 질서 세태를 폭로하신 것이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마 23:15)은 당대 사법권을 장악한 지도층에 속한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들을 두고 날카롭게 “소경된 인도자”(마 23:16)라고 반복적으로 지적하거나, “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마 23:33)라고 쏘아붙였다. 그들은 사법징서 장악에만 눈이 충혈되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마 23:2)라고도 비판하셨다.
예수께서는 사법권 장악자들의 내면의 실상을 폭로하셨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마 23:25). 그들은 법의 형식과 조문의 포로가 되어 있어서 그 근본 원리와 정신을 망각하였다. 그래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 23:23). 그렇다. 율법의 의, 인, 신을 망각한 사법권장악자들이 노린 것은 결국 예수의 생명이었다.
세상 법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에게 도덕법, 국법, 제사법, 건강법을 주셨다. 따라서 선민들에게는 하나님이 입법자로서 직접 제정하여 주신 법에 순종하면 되었다. 그 법체계 자체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배척할 수 없는 당위법적 성격을 지녔다. 그러나 선민들의 역사는 신정법을 끊임없이 범하여왔으며, 급기야는 법의 진정한 알맹이 정신인 義 仁 信을 구현하기보다는 껍데기 의식을 거행하는 이중인격자들로 전락되고 말았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사람이 만든 법령과 율법 준수의 외적 형식에 더 큰 비중을 두었다. 율법 자체의 참된 정신 곧 하나님을 사랑하고 동료 인간들을 사랑하는 것은 거의 완전하게 잊어버렸다. 예수께서는 산상 보훈을 통하여 율법을 외형적으로 준수하려는 인간의 정신을 개혁하고자 했다. 마태복음 5-7장은 시내산에서 선포하신 법에 관한 입법자의 유권적 해석이 된다.
복음과 문화의 관계
이 주제는 결국 그리스도(복음)와 문화(법)의 상호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로 나갈 수 밖에 없다.
칼 바르트의 율법과 복음의 관계 정립을 살펴보면 복음이 율법에 선행하며 율법은 복음에 종속된다는 구도로 나타난다. 그 결과 율법은 달걀 껍데기 같은 형식에 빗댄다. 율법을 문화 영역으로 보는 시각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한다. 인간의 법은 문화적 의상을 하고 나타나지만, 하나님이 주신 율법은 인간의 문화를 이끌어 나갈 방향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폴 틸리히는 종교와 문화의 융합 유형을 지향하고 있다. 그에게 종교는 문화의 실체요 문화는 종교의 형식이 된다. 이 비빔밥적 이해에는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영원을 상실한 현대문화의 함정 속에 있는 ㅇ니간을 하나님의 성소로 보고 일하는 매일이 주일로 보자는 억지를 부린다.
리처드 니버는 복음과 문화의 다섯 가지 유형을 상정하고 있다.
1. 상호 대립적 관계(Christ against culture) -
요한1서에 따른 복음과 문화의 대립 유형이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요일 2:15). 악의 세력이 이 세상을 장악하고 있다.
2. 문화의 그리스도 (Christ of culture)
문화적 그리스도교 조성을 표방한 문화주의 유형이다. 이 유형에서는 복음이란 문화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지 않고는 있을 수 없다. 쉴라이에르마허나 사회복음 운동가들이 여기에 속한다. 문화적 프로테스탄티즘을 조성하고자 한다.
3. 문화 위에 있는 그리스도(Christ above culture)
문화와 복음의 종합을 주장하면서 그리스도를 문화 위에 두는 종합주의 유형이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 모델을 지향하였다.
4. 문화와 복음의 역설적 관계(Christ and culture in paradox)
각기 다른 문화와 복음이라는 두 사이에 격심한 대립과 모순이 되면서도 불가분리의 관계를 지닌 이원주의 유형이다.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의 대립성을 강조한 루터의 모델이다.
5. 문화의 변혁자 그리스도(Christ, the transformer of culture)
그리스도를 타락한 문화의 개조 변혁자로 보는 유형이다. 칼뱅의 모델이다. 모리스를 중심으로 하는 복음주의신학자들이 여기에 속한다.
로버트 코크란(Robert F. Cochran, Jr.)은 니버의 <그리스도와 문화>에 나오는 5개의 범주 유형을 활용하여 법에 관한 그리스도교적 관점을 풀어보고 있다. 즉, 문화 위에 더해진 그리스도라는 종합주의로 보는 로마 가톨릭주의적 시각, 문화를 변혁하는 그리스도라는 칼뱅주의적 변혁주의적 시각, 문화에서 분리된 재침례파의 분리주의적 시각, 문화와 복음의 이원론적 긴장관계로 보는 루터파적 시각이다.
종합주의 시각에서는 자연법을 그리스도교적 가르침과 화해시키려고 한다. 이 시각에서는 세속의 법에 높은 가치를 부여한다. 이 시각에서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이 자연법과 융화될 수 있다고 본다. 변혁주의에서는 그리스도교적 통찰을 통해 낮은 가치를 지닌 법을 그리스도교의 원리에 따라 변혁하려고 한다. 분리주의에서는 스스로를 세상과 세상 법으로부터 분리시키려고 한다. 세상 법은 낮은 가치를 지녔을 뿐이다. 이원주의자는 법을 타락한 세상에서 악을 억제하는 필요악으로 간주한다. 문화주의자는 그들의 문화에 속한 법을 그리스도교적 가르침과 조화 되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법에 관한 특별한 관점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러한 각각의 시각은 2001에 Yale University에서 출판된 그리스도와 법 (Christian Perspectives on Legal Thought) 에서 각 범주의 대표자들의 논문에 잘 펼쳐져 있다.
복잡다기한 후기 산업사회에서 끊임없이 생산되는 법조문들이 니버의 5대 유형이라는 것 중 어느 하나에 모두 다 붙잡아 둘 수 있는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그리고 각 유형이 서로 상충관계나 중첩관계가 되는 것은 아닌지 장담할 수가 없다. 법 전문가도 다 알기도 전에 실정법은 끊임없이 생성, 사멸되어가고 있다. 법실증주의라는 우상이 얼마나 악한지, 얼마나 음험한지를 두고 불붙는 논란이 일고 있는 마당에 거기에서 법의 진정한 정신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노회한 정략가들이 책략적으로 마련해 가는 법규 같은 것을 두고 대통령을 탄핵하고 사법 집행관들은 사건 전모를 다 파악하지도 않고 판결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우종창 기자가 헌재판결문을 분석한 글을 보면, 문제의 법규 그 자체를 제쳐두고라도, 팩트 자체를 다 파악하지도 않고 팩트와 어긋난 판결한 소경들이 아니었던가.
인류의 법사상은 ‘법실증주의’가 늘 승리하여 온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거기서 일어난 대립, 갈등은 시간이 흐르면서 비판 받고 교정해 간다. 이것이 법사상의 발전 역사의 실태이다.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의 실재를 인정하듯, 법 역시 보이는 법과 보이지 않는 법이 존재한다. 보이는 법은 불완전할 뿐만 아니라 왜곡 악용되기 일쑤다. 이 땅의 실정법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와 그 사법권 장악자들의 흑심은 하늘의 법 집행자의 법정에 설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는 질문에 대답을 하여야 한다.
'성경으로부터 풀어내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유로 부름 받은 존재 (0) | 2017.05.05 |
---|---|
“옥에 있는 영들” (0) | 2017.04.28 |
죄악은 결국 자기를 소멸시킨다 (0) | 2017.03.02 |
판단의 원리와 유보를 생각하면서 (0) | 2017.02.24 |
덤으로 사는 존재 (0) | 2017.02.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