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틴 루터의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와 재림신학

 

들어가며

지난 1031일은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일이다. 15171031Martin Luther(1483. 11. 101546. 2.18)이 기념일을 맞이하여 그리스도교계 내에서는 여러 가지 뜻 깊은 행사들이 진행되었다. 미국 재림교회 학자들도 이에 맞추어 2016년 독일 Friedensau Adventist University에서 심포지엄 행사를 하였으며 거기에서 발표된 논문들이 얼마 전 단행본으로 발간되었다. Here We Stand: Luther, the Reformation, and Seventh-day Adventism (pacific press, 2017)이라는 책자가 바로 그것이다. 19세기에 일찍이 엘렌 화잇은 각 시대 대쟁투에서 루터의 역사적 신학적 사상을 잘 기술하였고, 1983년에는 W.L. EmmersonThe Reformation and the Advent Movement 을 출판하였다. 이런 역사적 유산들은 재림교회가 루터의 개혁 사상에 상당히 깊은 영향을 받았다는 증거들이 될 것이다. 루터의 사상을 여러 각도에서 비추어 보는 재림신학계의 활동을 통하여서 그래도 가장 중요한 점은 믿음을 통한 오직 은혜로 구원 받는 다는 신학 사상일 것이다. 이에 여기 이 글에서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에 관한 이해에 있어서 루터에게 얼마만큼 신세를 지고 있는가? 하는 주제를 개요적으로 다루어 보기로 한다. 필자는 본인의 연구를 여기에 기술하기 보다는 Woodrow W. WhiddenII“Luther, Seventh-day Adventists, and Righteousness by Faith" 논문을 편역하여 소개키로 한다.

 

일반적으로 루터의 칭의관은 그의 친구 필립 멜랑히톤(Philipp Melanchthon, 1497-1560)의 체계적 정립을 통하여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멜랑히톤의 법정적 칭의 개념 일변도라는 대변적 설명은 정확치 않아 보인다. 멜랑히톤이 루터의 칭의를 법정적 칭의로 국한시킨 것은 문제성을 내포하고 있다. 법정적 칭의가 성화와 갱신의 문제와 분리되면서도 긴밀한 연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을 간과하여 법정적 칭의 일변도로 나간다면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축소시키는 꼴이 될 것이다. 양자를 구분은 하되 분리할 수는 없는 관계로 보아야 한다(distinct, but inseparable). 이런 점을 감안하면서 칭의와 성화에 관하여 루터는 어떻게 보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에 관한 루터의 사상 개요

이 주제에 관한 학자들의 시각이 다양하다. 그러나 Anthony N.S. LaneA Concise History of Christian Thought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06) 159-160 Alister E. McGrathReformation Thought: An Introduction (Malden, MA: Wiley-Blackwell, 2012) 117-128은 루터의 믿음의 의에 관한 배경과 그 사상을 비교적 잘 요약하고 있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의 교리는 15171031일에 내 건 루터의 95개 조항에는 담겨 있지 않았다. , 종교개혁의 처음 횃불이 된 조항에는 들어 있지 않았다. 프로테스탄트의 믿음의 의(칭의) 교리가 정립된 것은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다음이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처음에 아우구스투스파의 승려로서 지냈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의 칭의 사상의 기초적 틀 속에 머물러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그것을 죄인이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할 수 없는 무능력을 인정하고 구원의 필요성을 절감하면서 하나님께 믿음으로 돌아서는 것으로 보았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부어주신다. 이 성령께서 죄인의 의지를 치유하시며 그의 마음속에 사랑을 부어주신다. 아우구스투스는 이렇게 의롭게 된 것(being made righteous), 즉 이기적인 자아 중심으로부터 사랑하는 인간으로 바뀌어 진 것을 칭의로 본 것이다. 이렇게 의롭게 변화되었기 때문에 신자는 사랑으로 동기화된 마음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있게 된다고 본 것이다.

루터는 종교개혁 초기에 이런 아우구스투스의 가르침에 입각하여 나갔지만, 점점 더 믿음의 필요성을 절박하게 의식하였다. 중세 로마가톨릭교회의 성례전 의식은 은총이 자동주입되는 기능을 가진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는 개인의 주관적인 감지 여부와 상관없이 객관적으로 그리고 즉각적으로 은총을 공급하는 효험이 발동하게 되어 믿음이라는 것이 은총 발생의 유효적 원인이 아니게 된다. 聖事는 완수된 성사의식의 권능으로 자동적인 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ex opere operato-by the work that has been worked).

루터는 이런 중세의 성례전 의식이 마치 주사를 맞거나 의약품을 복용한 때처럼 곧 구원으로 효력을 발생한다는 사상체계로 보아 반대하고 나섰다. , 루터는 살아있는 개인적 믿음의 중요성을 역설하여 나간 것이다. 1520년대 초에 이르러서는 루터는 바울이 말한 의롭게 하다는 사상을 의롭게 되다거나 선한 사람으로 변화된다는 것이 아닌, “의롭게 여기다(to reckon righteous)" 또는 무죄로 석방하다로 이해하였다. 그리하여 칭의는 내 안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보다 나를 어떻게 보느냐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루터에게 있어서 칭의란 하나님이 사람을 변화시키기 보다는 사람을 수용하는 것에 그 핵심이 있다. 루터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인간의 신분인 칭의와 거룩함 중에 자라나는 성화 사이를 구별한 것이다.

만일 선한 행실이 없이 믿음의 기초(basis) 위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거나 하나님께 가납된다면, 신자가 그 결과에 대한 걱정을 제켜두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 루터의 가르침은 이 점에 있어서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그래서 루터는 칭의와 성화를 구별을 하면서도 둘 사이에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보았다. 칭의는 성화 없이 존재할 수가 없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는 가납 받은 사람을 또한 변화시키신다. 칭의와 성화가 항상 함께 간다면 그 둘을 구별한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뜻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단순하다. 오직 믿음에 의한 칭의,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믿음을 통하여서만이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받는 칭의로 내가 하나님의 가납하심을 받았다는 점을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 내가 선한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돌아가셨기 때문인 것이다. 요점은 칭의가 성화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느냐에 있지 않고, 칭의라는 기초(basis)에 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가납하심을 받는 것이 나의 선한 삶에 기초를 두고 있다면 거기에는 누가복음 18:9-14에 나오는 도덕적으로 상당한 수준의 바리새인처럼 밉살스런 존재로 전락되어 의롭다고 하시는 보증을 받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오직 믿음으로 만의 칭의는 십자가 상의 예수 그리스도의 기초 위에서 하나님 앞에서 의의 보증을 받을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인정과 가납함을 받기 위하여 선행을 추구해 나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미 받아 주셨기 때문에 선한 삶을 추구해 나간다. 이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내기 위한 공로의 축적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으로써의 받은 은총에 향한 자유로운 사랑의 반응이 된다.

재림교회는 16세기의 루터와 대 개혁자들이 남긴 4"오직"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그리스도-sola Christi)이라는 프로테스탄트의 영적 유산에 심대한 영향을 받아 왔다. 재림신학은 오직 믿음으로 시작되는 이 유산에다가 멜랑히톤과 Jacobus Arminius 그리고 John Wesley가 닦아 놓은 선택의 자유가 배어 있는 은혜 사상을 결합시킨 체계로 발전되어 나갔다. 이는 아우구스투스 유산을 토대로 하여 훗날 굳어버린 저항할 수 없는 은혜와 이중 예정론 체계를 금과옥조로 강조하는 교회들과 현격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는 특징이 된 것이다.

그러나 재림교회 내에서 16세기로부터 18세기에 이르기까지의 유럽 종교개혁자들의 개혁적 사상을 계승 발전시켜 가는 일에 있어서는 몇 십 년이 걸렸다. 이런 시간적 간극이 있었던 이유는 1840년대 후기부터 1870년대 중반까지의 재림운동 선구자들이 다니엘과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묵시문학적 예언을 중심으로 마지막 시대 사건들에 역점을 둔 재림 선포와 하나님께서 선포한 도덕률 십계명의 권위와 그 역할을 강조하는 일에 초미의 관심을 쏟았기 때문이다. 재림교회 내에서는 상당기간 동안 이런 종말론적 예언 선포, 재림 전 심판 및 율법과 안식일을 더 강조하는 기류가 보여준 결과에 대한 심각한 자기반성과 성찰이 있었고, 그 결과 개혁자들의 개혁 유산의 둥우리 속으로 회귀하여 그리스도 중심적, 은혜 주도적 구원관 투시를 하였던 것이다.

요한계시록 제 14장에 나오는 세 천사의 메시지를 온 세상에 전파시켜야 하는 종말론적인 사명완수를 교회의 정체성과 예언적 사명으로 여긴 재림교회가 전하는 메시지는 타 교단으로부터의 집중적 비판을 면키 어려웠다. 이에 대응하는 변증과 토론의 과정에서 재림교회 초기 형성기 선구자들 (조셉 베이츠, 우라이어 스미스, 제임스 화잇 부부 등) 중에서 특히 화잇 부부는 율법, 안식일, 조사심판에 대한 외부의 교단들이 부정적 선입관념에 얽혀 있어 그들과 이전투구 하는 양상의 전개 상황 속에서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점을 감지하였다. 이 상황에서 이 부부는 재림교회가 전파하고 있는 교리들에 문제가 있다고 하기 보다는 그것들이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하는 은혜라는 수레에 실어서 설파되지 못한 점을 아쉬워하면서 재림신학과 복음 선포 진리의 초점이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하는 의가 되어야 한 할 것을 역설하기 시작 했다.

1870년대 후반 및 1880년대 초엽부터는 화잇 부부는 예언 해석과 재림교회의 독특한 진리들(죽은 자의 상태, 지옥, 건강개혁, 조사심판 등)을 전파하는 일에 있어서 보다 더 은혜 중심, 그리스도 중심으로 발전시켜 갔다. 요컨대, 화잇 부부는 재림교회라는 길보아의 언덕에 이슬도 비도 내리지 않고 콩 볶는 듯 하는 총소리만 요란하여 온 상황 속에서 구원을 지향하는 영적 부흥을 이끌어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영적 부흥 운동의 견인차 역할을 하였던 제임스 화잇이 얼마 못가서 잠들었다(1881). 그러나 화잇 여사는 이 비극을 딛고 일어서서 이 불길을 계속 지펴갔다. 특히 화잇 여사는 1883년 재림교회 대총회 기간 중 재림교회의 부흥운동과 공중전도가 더욱 그리스도 중심, 은혜에 초점을 둔 집회가 되어야 할 것을 역설하였다. 1883년 대총회에서의 이 메시지는 이어지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의 선구자들, 즉 엘렌 화잇과 두 젊은이들 (A.T. Jones, E.G. Waggoner)의 격동시키는 활동을 예비시키는 길을 마련하였으며, 재림교회의 역사의 분수령이 되는 유명한 1888년 미네아폴리스 대총회를 이끌어냈다.

그러면 이들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의 선구자들이 전한 메시지는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은혜는 죄인들이 죄를 깨닫게 하고, 죄인들을 그리스도에게 이끈다. 그리고 이 은혜가 죄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사랑하시고 계시고, 믿음의 칭의로만 죄인들을 용서하시기 원하시며, 성령의 거룩케 하시고 온전케 하시는 내주 역사를 통하여 품성을 변화시키거나 정결케 하신다는 진리를 각성시키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요체가 되는 체험은 회심시키며 의롭게 하시는 은혜와 성화케 하시는 은혜를 신학적으로 그리고 실천적으로 적의하게 연계, 조정하는데 있다. 이 접합점이야 말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에 관한 대부분의 논의의 중요 포인트가 되는 것이다.

재림교회의 신학 사상에 있어서 논의는 세 가지로 요약 정리할 수 있다. 그 첫 번째는 율법에 순종하는 행위로 칭의가 일어난다는 시각이다. Joseph BatesUriah Smith를 추종하는 무리들은 이런 시각의 덫에 걸려 있었다. 이와는 반대하는 둘째 번 시각은 미네아폴리스 회의에서 기별을 전한 A.T. JonesE.J. Waggoner가 전한 믿음의 의의 시각이다. 이 두 개혁자들은 처음에는 바른 궤도 위에 있었지만, 후에 자기들 지지자인 Ellen White W.C. White으로부터 강력한 백지 위임장이라도 받은 듯이 임의로 사상을 펼쳐나가다가 주관적인 은혜 중심 내지 완전주의로 함몰되어갔다. 그리하여 로마가톨릭교의 트렌트 회의에서 성령의 내적 사역으로 성화되어간 만큼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선언된다는, 즉 칭의와 성화가 함께 간다는 평행적 진전이라는 사상의 틀과 거리가 그리 멀지 않게 되었다(특히 E.J. Waggoner). 세 번째 입장은 Ellen White의 사상에 나타난 은혜로 구원 받는다는 효과적(유효적)-법정적 칭의론(effective-forensic justification) 시각이다.

JonesWaggoner 의 후기 신학 사상과 그들의 주관주의적 접근방식의 개념들을 올바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당대 신학적 인식 상황을 포착하는 일이 중요하다. M.L. Andreasen의 마지막 세대 신학(the last generation theology)E.J. Waggoner의 주관주의적 칭의 사상, 완전케 하는 성화 사상 및 그리스도의 타락 이후 인성론에 심대한 영향을 받았다. M.L. AndreasenE.J. Waggoner의 상상에 의거 마지막 세대 성도들이야 말로 하나님의 율법에 완전한 순종이 가능하다고 하여 하나님을 친히 옹호하는 모델적 전리품으로서의 역할을 한다는 주장을 펼쳐 나갔다. 환언하면, 남은 백성의 완전한 순종을 하나님 율법에 순종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루스벨의 반역논리를 물리칠 수 있는 답변이자, 대쟁투 승리의 절대적 핵심사항으로 부각시킨 것이다. 이 주관주의적, 완전주의적 사상은 20세기 전반부까지 교단 내에 상당을 영향을 끼쳤으며 신학적인 혼란도 조성하였다.

그러나 1950년대 대총회에서 L.E. Froom의 지도하에 영국 출신 신학자 Edward Heppenstall 박사는 프로테스탄트적 구원론 사상, 즉 효과적 또는 법정적 칭의 신학사상을 강력하게 부활시켜 나갔다. 이를 이어서 앤드루스대학교 신학대학원의 두 조직신학 영역의 거장 교수인 Raoul Dederen 박사와 Hans K. LaRondelle 박사는 이같은 효과적 내지 법정적 칭의론의 신학을 발전시켜 나갔다. 동 대학원 신약학 교수인 Ivan Blazen 박사 역시 같은 방향에서 가르쳐 왔다. (필자는 이분들의 신학강의실에서 배웠던 축복을 받았다.) 재림교회 내 신학계 내에서 종교개혁적-복음주의적 사조의 부흥 발전과 아르미니우스-웨슬리의 선택의 자유와 은혜 신학과 성화론적 주제가 가미 융합되어 교단 내에 풍미하므로 인하여 교단 내 A.T. Jones. E.J. Waggoner M.L. Andreasen의 완전주의적 구원론 기류를 교정 및 중화시켜 온 것이다.

이와 동시에 교단 내 한편에서는 더욱 프로테스탄트적 내지 복음주의적 신학 노선의 발전 증진에 반기를 든 A.T. Jones. E.J. Waggoner M.L. Andreasen의 완전주의적 구원론을 강력하게 부활시키고자 하는 Herbert Douglass, Keneth H. Wood, C. Mervyn Maxwell과 이들을 추종하는 무리가 이른바 역사적 재림교도들(historic adventists)로 자처하면서 일어났다. 이에 덧 부쳐 키가 큰 Robert Wieland와 키 작은 Donald K. Short 아프리카 선교사 출신들이 1888년 메시지 연구위원회(1888 Message Study committee)를 창설하여 JonesWaggoner의 후기 사상을 고취하는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필자가 이들의 일련의 특별집회에 참석하였을 때 교단에 대한 비판 일변도이고, 아직 미숙한 강사를 동원하는 등에 실망도 하였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에 관한 재림교회의 표본적인 해설은 Hans K. LaRondelle 교수와 Ivan Blazen 교수의 논문에 나와 있다. Blazen의 글 구원(salvation)”Handbook of Seventh-day Adventist Theology (Haggerstown, MD: Review and Herald publ. Assn., 2000)dp 게재되어 있다. Hans K. LaRondelle 박사의 글 “The Seventh-day Adventist View of the Relationship of Justification -Sanctification-the Final Judgment"은 재림교회 학자들과 루터교회 학자들 사이의 국제적 대화에서 제출된 것으로 Lutherans and Adventists in Conversation: Report and Papers Presented, 1994-1998에 수록되어 있다.

재림교회의 구원론 핵심에 관한 논의와 토론의 핵심에 아직도 담겨 있는 질문들은 !) 칭의, 성화 완전의 의미 규명, 2) 구원론 각 국면에 있어서 이들 세 가지가 개인적 구원 체험과 함께 상호간의 적의한 관계 규명과 3) 교회가 복음 선포에 있어서 각 국면을 소개하는 방법 규명하는 일에 있다.

 

Blazen 교수의 구원론: 칭의, 추정 및 참된 구원의 보증

블레이진 교수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와 성화에 관한 정교한 해설을 하고 있다. 의롭게 하시는 은혜는 칭의를 위한 유일한 공로의 기초를 제공하고, 성화시키는 은혜는 싸구려 은혜 추정 같은 것을 넘어서 효과적으로 구속하신다. 은혜가 죄책(guilt), 죄의 권세(power)(현재) 및 죄의 궁극적인 현존(presence)(재림 시)으로부터 구원한다. 블레이진 교수의 가장 호소력 있는 통찰은 칭의의 법정적 국면을 구원의 관계적 범주와 연관시켜 다루고 있는데서 나타나고 있다. , 법정적 용법을 다룸에 있어서 구약성경상의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관계 문맥을 신약성경의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에 관한 기본적 배경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은 로마서에 관한 새 학파의 시각과 일치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이 구약적 언약관계 배경이 전부는 아니다. 법정의 심판과 관계가 용서하시는 은총과 하나님 인간 사이의 인격적 관계의 차원 높은 열쇠가 되어 있다. 심판자로서의 하나님 개념이 넘치게 나오고 있으며, 그것이 아버지로서의 하나님 개념으로 대체되어 있지도 않다. 이 법적 및 관계적 범주들로 인하여 소망을 보증하는 양자 신분으로 옮겨질 수 있게 된다. , “우리가 아직 도덕적으로 연약하고 경건치 못한 죄인들로 하나님을 향하여 원수가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가장 어려운 일, , 죄인들을 의롭게 하기 위하여 자기 아들을 죽으시도록 내어 주셨다면, 하물며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새 친구들을 하나님의 궁극적인 진노로부터 즐겨 구원하실 것이라는결론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로마서 5:11에서 말씀하신 대로 신자들은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 할 수 있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것이 다가오는 영광을 약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신학적 사상이 재림신도들이 두려워하는 싸구려 은혜라고 하는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은혜에 관하여 일어나기 쉬운 추정 태도)를 어떻게 불식시키고 있는가? 블레이진 교수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관한 성경 본문들이 거짓된 견해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아무리 일을 하셨더라도 (싸구려 은혜로는) 절대로 전혀 구원 받지 못한 것과도 같이,’ 마찬가지로 심판 본문들이 한 번 구원 받았다면, 내가 무엇을 했던지 간에 항상 구원 받는다는 그런 잘못된 견해를 허용치 않는다. 구원은 항상 선물이다. 그렇다고 이 선물은 동 시여자가 신자의 삶에서 주님이 되시는 일을 부인하는 때에는 남아 있을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나서 블레이진 교수는 다소 성긴 결말을 맵씨있게 유도해 내고 있다. “이끌어 낸 결론이란 것은 만일 칭의가 보증을 시여한다고 해도, 심판이야 말로 그리스도에게 헌신하는 관계없이 그를 따르는 것이 가능하다는 위험한 망상을 지켜 내게 할 것이다. 선행은 보증을 분여 해 주는 것이 아니지만, 그 선행을 하도록 자극하신 분께서 보증을 하시고 있다.”

 

라론델의 효과적-법정적 칭의관

라론델 교수는 의롭게 하는 은혜가 단절 없이 성화케 하는 은혜 또는 변화시키는 은혜를 심판의 배경과 신자의 구원의 보증에 연관시키는 견해를 피력 용해시킨 중에 사용된 어구가 효과적-법정적 칭의이다. 라론델 교수가 사용한 이 어휘는 블레이진 교수의 견해와 본질적으로 동일한 역동성을 지닌 것이 분명하다. 법정적이라는 어구는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객관적이고 법정적 신분을 법적으로 의롭다고 선언하는 것을 지칭한다. 반면에 효과적 이라는 어구는 신자의 영혼 안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내적 변화시키는 권능이 신자를 변화시킨 결과로 오는 신자의 도덕적, 영적 특성을 환기시킨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 효과적 칭의는 아주 집요하게 괴롭히며 힐책하는 품성의 결함을 실제로 이기게 하도록 분여하는 권능이다. 이러한 결함과 과오를 유지시키는 문제는 그 결함과 과오가 신자들을 강팍케 하여 하나님의 선하심에 둔감케 한다는 추정에 있다. 그 강팍케 하는 일은 신자들로 하여금 법적 및 체험적 두 불가분리적 측면을 지닌 하나님의 은혜의 화목시키시는 선하심에 감사케 하고 의존케 하는 것을 침식 시키는 작용을 유발시킨다는 점이다. ‘엘렌 화잇과 재림교의 일치된 구원론, 그리고 종교개혁자들의 구원론은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원칙의 지배를 받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야 말로 신자의 구원을 위한 유일한 공로 기반이 된다. 인간의 모든 노력은 인간을 위한 칭의나 또는 하나님의 용서에 있어서 배제된다. 성화된 삶의 선한 일들은 참된 믿음의 현존을 증명하고 옹호하는 가시적 징표들이 된다. 용서하시는 은혜와 변화시키시는 은혜 사이의 분리할 수 없는 상호관계에 관한 재림교회 내의 가장 간결한 진술은 엘렌 화잇의 각 시대의 대쟁투 256 쪽에 나온다. “그는(웨슬리) 엄격한 자기 否認의 생활을 계속하였다. 이제는 그것이 믿음의 지반이 아니고 결과였으며, 성결의 뿌리가 아니고 열매였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은혜는 그리스도인 소망의 토대(기초)이며, 이 은혜는 순종으로 나타날 것이다.이 진술은 John Wesley의 복음에 관한 후기 체험의 정점에 관한 묘사이다.

 

맺는 말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에 관하여 재림교회가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로부터 물려받은 핵심적 사상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입혀주신 의에 있어서 오직 믿음(sola fide)으로 말미암은 칭의에 관한 루터의 성숙한 견해는 열쇠가 되는 선물이다. 그렇지만 멜랑히톤 자유의지, 은혜 및 오직 믿음은 루터의 최대의 주제인 오직 성경과 오직 은혜와 결합되었으며 이어서 jacobus ArminiusJohn Wesley의 신학을 만나 리셋이 되어 재림교회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형성된 유산을 이어 받은 재림교회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루터가 남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복음의 독특한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오직 영광을 돌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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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AHN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