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손아귀로부터 엑서더스
과거의 손아귀로부터 엑서더스
현재는 끊임없이 과거로 바뀌어간다. 그리고 그 과거를 잊어간다. 그러나 잊어지지 않는 일들이 있다. 과거를 기억하는 일도 필요하고 망각하는 일도 필요하다. 어떤 분은 지난 일들을 미주알고주알 다 기억하고 있는 반면에, 또 다른 사람은 과거를 모두 망각해 버린 경우도 있다. 과거를 기억 또는 망각하는 일에는 순기능과 역기능이 있다.
옛날 할머니는 오래 전 상황을 잘도 기억하여 말씀하셨다. 총명한 기억력은 축복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총명한 기억이라고 해도 역기능을 수반하고 있다. 기억력이 너무 출중했던 사람들이 별로 행복하지 못하다는 조사연구도 있다. 지나친 기억력으로 두뇌 기능이 혼란스러웠고 필요한 기억보다 필요 없는 기억이 더 오래 지속됐기 때문이란다. 따라서 이상적인 것은 기억하는 일과 잊어버리는 일에는 적절한 조화를 갖추는 것이라고 한다. 자기 마음대로 잊어버리기도 하고, 기억하기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지만 어느 누가 그런 제어를 할 수 있단 말인가?
기억 - 거룩한 일
신앙을 표현하는 많은 사상들은 수백 또는 수천 년 전에 출발한 별빛과도 같다. 그것들은 오랜 세월동안 영글어져 별빛과도 같이 찬란하다. 그것은 인간의 영혼 속에는 오래 동안 공동 기억되어 온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주어져 있다(전 3:11). 현재의 물질세계가 인간 존재의 총화를 구성하고 있지 않다. 인간은 두 세계와 연결된다. 즉 육체적으로는 세상에, 지성적·정서적·심리적으로는 영원한 세상에 연결된다. 죄로 인해 어두워진 의식을 갖고서도 인간은 이 불만족스러운 삶의 좁은 경계선 저 너머에서 삶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을 희미하게나마 깨달으면서 살아간다. 우리는 이 기억을 의지하여 신앙에 입문하기도 한다.
따라서 기억은 신앙의 근원으로 연결시킨다. 우리는 지난 날 조상에게 주어진 공동 유산을 회상하고 기억하라는 명령법 아래 서 있다.
“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 그리하여 네가 눈으로 본 그 일을 잊어버리지 말라 네가 생존하는 날 동안에 그 일들이 네 마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조심하라 너는 그 일들을 네 아들들과 네 손자들에게 알게 하라”(신 4:9).
고대 유물을 기념물로 보관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옛적에 켜졌던 촛불의 생명력이 내 안에서 다시 켜지고 솟구치게 하는 일이다. 그래서 과거를 기억하고 회상하는 일은 거룩한 일이다. 과거를 기억하므로 현재를 거룩하게 만든다. 출애굽한 역사적 사건과 십계명을 기억하여 지키라는(신 5:15) 교훈을 별처럼 빛나는 추억의 가람(강)으로 삼아 그 가람에서 우리 영혼이 끊임없이 추억의 생수를 마셔야 한다. 그래서 나는 내가 살고 있는 마을이 <별 가람>이라고 유추해 본다. 또한 가람(伽藍)은 산스크리트에서 도를 닦는 곳이고 가르치는 곳이다. 현재 있는 곳이 생명수가 흐르는 가르침을 받는 가람이 되어야 한다.
큰 별 가람 이병기 선생은 현대 시조의 아버지로 칭하여지고 있다. 그의 시 “별” 은 어린 시절 동요로 박혀져 잊히지 않는다.
별
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 앞에 나섰더니
서산머리에 하늘은 구름을 벗어나고
산뜻한 초사흘 달이 별과 함께 나오더라.
달은 넘어가고 별만 서로 반짝인다.
저 별은 뉘 별이며 내 별 또한 어느 게오.
잠자코 호올로 서서 별을 헤어 보노라.
망각 - 생존의 길
과거로 들어가 버린 삶을 망각의 세계로 넘겨버리는 것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다. 어두운 과거의 삶에 대한 기억은 현재를 옥죄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어두운 과거에서 벗어난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과거는 그림자처럼 현재를 따르고 있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다. 이런 점에서 명석한 히브리대학교의 교수 유발 노아 하라리(Yuval Noah Harari)가 <호모 데우스(Homo Deus)> (인간 신)에서 "역사 공부의 목표를 과거라는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이는 정곡을 찌른 통찰이다.
그런데 하라리는 인간에게는 사실상 자유의지가 없다고 못 박는다. 그것은 윤리적 판단이 아닌 사실 판단의 영역에 속하는데 생명과학의 최신 연구 결과들에 비추어 보면 사실적 판단도 될 수 없다. 그것은 인간은 자유의지, 자아 같은 것이 없고 그저 물리적, 화학적 법칙의 지배를 받는 존재일 뿐이기 때문이란다. 즉, 인간은 유전자, 호르몬, 뉴런의 작동을 받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결정론과 무작위성의 지배를 받는 인간에게는 자유라는 부스러기를 하나도 남기지 않는 존재로 전락되 버린다. 진화론자들이 자유를 관속에 넣고 못 박아 버려 자유라는 말은 영혼처럼 알맹이 없는 용어로 전락해 버렸다. 그렇다면 인간이 과거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통찰은 자기모순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호모 데우스>는 이 시대 문명이 결국 인공지능의 신에 의하여 좌지우지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영원한 것을 갈망을 품으면서 살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영원의 의미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드물다. 진리는 하나밖에 없지만 그것을 오해 내지 곡해하는 길은 많다. 즉, 삶의 목표에 이르는 진리의 길은 하나 밖에 없지만, 그 목표에서 벗어나는 길은 여럿이 있다. 인간에게 무엇이 최후의 목표인가? 우울함, 공허함, 어두운 지난날에 대한 기억,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차 있는 현재의 나 자신을 언제까지 계속시킬 것인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넜지만 광야의 40년 동안 과거의 손아귀에 따라 빗나간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200만 명 중에서 과거에서 벗어난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였다. 불행한 과거에 매여 죽은 사람들이 많다. 고대 이스라엘은 과거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되어 광야에서 다 죽어야 했다. 그리하여 가나안에서의 새 역사 개척은 새 세대의 몫이 되었다. 어두운 과거에 얽혀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것은 죽은 과거의 포로가 되어 있는 삶이다. 이 어둔 과거를 처리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별처럼 확실하다.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과 그 기업에 남은 자의 허물을 사유하시며 인애를 기뻐하시므로 진노를 오래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19 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20 주께서 옛적에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야곱에게 성실을 베푸시며 아브라함에게 인애를 더하시리이다”(미 7:18-20).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시 103:12).
망각의 길
새 시대의 여명을 알리는 침례 요한 은 요단강에서 침례를 베푸는 일을 했다. 예수께서도 이 의식에 참여하시어 모든 의를 이루셨다. 죄스럽고 부끄러운 과거를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의 물 무덤에 묻고, 그의 부활에 참여하여 새 피조물로 탄생하는 것이 침례의식이다. 침례는 한마디로 죽어버린 과거의 삶에서 새 생명으로의 변환을 말하는 것이다.
이 의식은 마치 가전제품을 전원에 연결시키는 일과도 같다. 침례는 예수와의 영적으로 연결시키는 연합을 의미한다. 또한 침례는 그리스도의 몸 즉 교회와의 연합되는 것을 뜻 한다 (고전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침례는 새로운 삶으로의 결단을 요청하고 있다. 그것을 두고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이 시작하는 것이라고 한(벧전 3:21). 자아에 매여 살면 죽은 과거가 살아난다. 그래서 자기중심의 삶의 방식을 탈피하고 “다른 이를 위한 삶”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받기 위하여서 사는 삶을 주기 위하여 사는 삶으로 전환시킨다. 산다고 하는 것은 준다는 것으로 여길 때 자기의 죽은 과거를 망각시키는 길이 된다.
'구원'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원 원리에 나타난 두 면 (0) | 2018.12.28 |
---|---|
언약의 두 날개 (0) | 2018.12.17 |
영적 순례의 길을 찾아서 (0) | 2018.07.02 |
마르틴 루터의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와 재림신학 (0) | 2017.12.01 |
성화 (Sanctification) (0) | 2017.02.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