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칭의론을 보는 시각들
바울의 칭의론을 보는 시각들
-김세윤 교수의 ‘유보적 칭의론’ 논란을 보면서-
지난 해 동안 한국 개신교 신학의 화두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의 이슈이었다. 이는 풀러신학대학원 김세윤 교수가 16세기 종교개혁 이래 전통적인 종교개혁적 관점에서 형성된 바울의 칭의론에 대한 문제점을 부각시킨 강론과 저술 출판이 그 도화선이 되었다. 이 논쟁에서 김 교수가 바울신학의 새 관점을 중심으로 한 유보적 칭의론을 놓고 학자들의 설왕설래가 이어졌다.
어느 논객은 김 교수의 주장을 두고 제기되어 온 비판은 이렇다.*
“불건전한 신학의 결집,” “짝퉁”이며 “개악”이다.
“새 관점과 김세윤의 칭의론은 정통신학의 결과가 아니라 탈기독교적 자유주의 신학, 종교사학파, 유태인의 장학금을 받은 것으로 의심되는 현대주의 신학자의 사상 등 불건전한 신학들의 결집이다. 역사적 기독교를 진지하게 고백하는 신학자들이 만들어 낸 가르침이 아니다.”
로마가톨릭교회 트렌트공의회가 1547년에 채택, 반포한 칭의 교령과 차이가 없다.
그렇다면 김세윤의 칭의론 사상은 과연 모두 잘못되었는가?
김세윤의 칭의와 성화 (두란노, 2013)을 읽다보면 나름대로 논지가 선명하여 참고할만하다. 그렇다고 바울신학의 새 관점에 따르는 김세윤이 펼치고 있는 모든 주장이 옳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개신교 신학의 법정적 칭의론 일변도의 구원론 사상에 약점이 있다는 그의 주장을 경청할만한 부분도 있다는 것이다.
유보적 칭의론
김세윤에게 칭의는 무죄선언, 곧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사건이다. 그는 슈바이처가 “칭의론은 윤리를 낳지 못한다”고 한 말을 상기시키면서, 한국교회에 윤리가 결여되어 있는 이유를 전통적, 법정적 칭의론에 붙든 탓이라고 본다. 전통적 구원론은 칭의의 현재적 의미를 망각하고, 윤리 또는 의로운 삶을 무시하고 만다고 지적한다.
김세윤에 따르면 칭의는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관계로 전이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칭의는 우리에게 종말적 최후의 심판 때까지 그 관계, 곧 순종 안에 있기를 요구한다. 성화는 칭의 다음에 오는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회복이라는 차원에서 칭의와 성화는 동의어이다.
김세윤의 ‘유보적 칭의론’은 구원받은 자의 탈락 가능성을 주장한다. 예수 믿는 신자라고 할지라도 믿음에 수반되는 순종이라는 기본 조건을 충족시키지 않으면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의 유보적 칭의론은 교회 안에 의의 열매가 많지 않다는 현실에서 출발한다. 이 시각은 교회 현장에 차고 넘치는 위선과 변화되지 못한 선택 받은 자들이 일으키고 있는 어둠을 직시한 당연한 시각이다. 유보적 칭의론 구도는 거짓 성도의 견인 진리를 배척하고 있는 것이다. 성화를 수반하지 않는 법정적, 객관적 칭의론 일변도의 시각은 거짓 성도 견인이라는 확신을 줄 뿐이다.
그러나 김세윤의 유보적 칭의론을 법정적, 객관적 칭의론 일변도에서 관계적, 주관적 칭의론을 접목하고 있는 점은 탁견이다. 이런 법정적, 및 관계적 칭의론이라는 통합적 시각에서 신자들에게 주어진 구원의 보증이라는 신약성경의 중요한 메시지를 강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구원의 보증과 칭의론은 상호 모순개념이 아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의 길을 <루터의 칭의론 + 웨슬리의 성화>를 정교하게 결합시킨 것이어야 했다. 칭의와 성화를 구분을 하면서도 분리시키지 않는 입장을 견지하여야 하는데 김세윤은 이를 동의어적으로 보는 빌미를 주고 있다.
개신교 신학자들이 김세윤의 주장을 수용하면 곧 구원의 탈락 가능성이 있고 칭의의 상실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내세워 비판하는 점에는 문제가 있어 보인다. 이른바 TULIP교리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전적 타락론에 따른 인간의 자유의지(선택의 자유) 결여 내지 제한론, 무조건적 선택론, 구원을 주는 은혜에 저항할 수 없다는 제한 속죄론, 구원 받을 사람들을 위하여 십자가의 속죄를 설명하고 있는 제한속죄론, 및 성도견인론을 채택한 도르트회의 결의가 모두 심각한 문제점을 지닌 항목들이다. 예컨대, 성경은 구원 선택을 받은 자가 넘어져 탈락할 가능성이 언제나 존재하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데 이 기능성을 간과한 이른바 이중 예정론적 교리에 바탕을 둔 칭의론을 전개하는 것은 호소력이 없어 보인다.
신자의 배도가능성
성도견인 교리는 “한번 구원 받으면 영원히 구원 받는다(Once saved, always saved)"라는 구호로 대중화 되었다. 이른바 도르트신경(The Canons of Dort)이 이 교리를 더욱 발전 강화시켰다. 동 제6조에는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사망에 이르는 죄 내지 성령을 거스리는 죄 같은 큰 죄를 범하여 타락하더라도 성령을 철수시키지 않고 양자와 칭의 신분을 철수시키지 않고 영멸에 처하지 않는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구원의 선택을 받은 자들이 배도할 가능성을 시사 내지 함축하고 있는 메시지가 성경에는 20여개 이상이 나와 있다. 구원을 잃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는 사례들이나 메시지 일부를 살펴보기로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택함 받은 가롯 유다는 배도자로 전락하였다. 오늘날 그리스도교계에는 거짓 구원의 보증을 가지고 살아가는 신자들이 많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요 15:6).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히 6:4-6). 본문의 원 수신자가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임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박해 때문이었던지 원래의 유대교적 신앙으로의 복귀이었던지 간에 구원의 신앙에서 이탈한 자들을 두고 한 말씀이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 9:27). 본문의 문맥이 상과 관련된 것이고 구원과 무관하다는 주장을 하는 해석이 있으나 상 받는 일에서 버림 받는 것은 곧 구원의 상실이 될 것이다. 이어지는 장에서 광야에서 멸망 받은 이스라엘을 예증으로 들면서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는 권면은 이를 뒤 바침하고 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 13:5).
위에서 지적한 점들을 고려하면, 김세윤의 칭의론을 두고 “하나님의 칭의가 불완전한 것이 되고, 칭의를 윤리적 행위로 완성시켜야 얻어지는 무엇으로 전락시키게 된다.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의 선물로 주어지는 칭의를 미완성의 불완전한 실체로 여기게 된다.”고 일방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지나쳤다. '그 주된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칭의는 완전하고 충분하지만, 인간편의 수용이나 적용에서 바르지 않거나 미비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책임이 되기 때문이다. 구원 탈락 가능성을 언급하면 마치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인간의 책임을 하나님께 덮어씌우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언약적 율법주의(covenantal nominism)
김세윤의 칭의론은 ‘언약적 율법주의’와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즉 신자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을 때, 의인이라고 칭함을 받는데, ‘언약적 율법주의’는 종말론적 유보, 곧 구원이 벌써 이루어졌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구조 속에서 구원론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고 비판한다.
김세윤은 바울신학을 새롭게 풀이한 1977년 E.P. Sanders 및 그의 주장을 이어 받아 발전시킨 바울신학의 새 관점 사상 개요를 소개하고 있다. 샌더스는 개신교 신학자들이 바울의 칭의론을 율법주의적 유대교 구원론의 토대 위에 구축되어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샌더스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은혜로 선택하여 주고 언약을 주시고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 언약의 법을 지키게 하신 “언약적 율법주의(covenantal nominism)” 종교이었다고 한다(김세윤, 22).
샌더스에 따르면 유대교의 신앙 기본 명제는 다음과 같이 압축할 수 있다. 1)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의 선택에 기초한 언약이 선행되고, 2) 율법은 언약의 법의 형식인 언약당사자의 의무 규정으로 3) 하나님의 보호 약속과 4) 이스라엘의 순종의무를 담고 있으며, 위반 시 5) 순종과 불순종에 따른 상벌이 따르고, 6) 용서 받는 길인 속죄의 수단을 담고 있으며, 7) 그 속죄는 깨진 언약관계 회복이 되며, 8) 하나님의 자비로운 언약관계를 유지하는 자는 율법에의 순종, 속죄, 구원으로 이어지는 축복을 받는다.
본래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와 취지는 샌더스가 지적한 대로 은혜스러운 것이었다. 바른 지적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배도하여 율법주의적 구원론으로 전락시킨 것이다. 김세윤은 위 기본 명제들을 바울신학의 새 관점에 근거를 두고 말하고 있지만, 동 새 관점의 기본 명제에 나오는 언약 규정에 관한 연구는 이미 1950년대에 G.E. Mendenhall의 종주권 조약 연구 이래 밝혀진 바 있었고, 언약적 율법 사상은 언약신학 역사에 그 궤적을 두고 있으며 이는 개신교 신학에서도 광법위하게 수용되어 온 것이다. 김세윤이 이런 폭넓은 틀을 활용하면서 시내언약의 틀이 본래 믿음의 칭의와 성화가 정교하게 짜여 있는 점에 주목했어야 한다. 모세 성막구도에는 번제단의 칭의, 성소봉사의 성화, 및 지성소 봉사의 영광화가 구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울의 새 관점을 주장하는 샌더스는 유대교를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 종교로 보았다. 유대교도 회개하고 성전에 가서 지은 죄에 대하여 제사하면 하나님의 자비로 용서 받고 구원 받는다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모세의 시내 언약에 의하여 구원 받고, 이방인들은 그리스도의 골고다 언덕에서의 새 언약으로 구원 받는다고 한다(김세윤, 30). 이런 인식은 시내언약 아래에서의 제사제도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이분법적으로 보는 문제를 안고 있지만 구원의 은혜를 전제로 한 점에서는 수용할만하다. 또한 바울의 새 관점이 할례와 제결의 법들을 도덕법에 속하는 안식일까지 한 묶음으로 처리한 것은 중대한 실수인 것이다. 또한 이른바 언약적 율법주의가 구약과 신약의 표상학적 통일성에 바탕을 두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안겨주고 있다. 구약 제사제도는 그림자이며 표상(type)이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실체(antitype)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바울이 로마서 전체를 통하여 이방인 신자와 유대인 신자의 결속을 강조한 것을 감안하여 보완하여야 할 것이다.
(* 최덕성 칼럼, “김세윤의 칭의론, 로마가톨릭교회 칭의론의 ‘짝퉁’” 크리스천투데이 (2017년 1월 7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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