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고후 12:5-12

 

약함에 움치려 드는 인간상

사람이 병이 들면 약해진다. 건강하던 때 기도했던 경우와는 판이하다. 또한 절박한 상황에서도 마음을 모아 간절히 기도 올린다. 주변상황이 매우 위태로워진 때 드리는 기도는 보통 때 드리는 기도와는 다르다.

사람들은 약함을 불행으로 본다. 그래서 자기의 약함을 자랑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감추려고 한다. 비천한 것 고난당하는 것, 가난, 신병, 외톨이된 것 등등은 인간의 약함들이다. 이런 것들은 모두 불행일까? 불행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그 약한 것으로부터 탈출하려고 애쓴다.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약함을 자랑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다. 조금이라도 약점을 보이면 사람들이 치고 들어온다. 박 대통령이 사과하자 사람들은 더욱 치고 들어가 탄핵으로 몰고 간 것은 그런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약한 것보다 강한 것을 자랑한다. 출세한 것, 부자된 것, 잘난 것 등등 강점 중심으로 자랑한다. 사람들은 더 강해지려고 일평생 몸부림을 치면서 살아간다. 강점을 극대화하려고 애쓴다. 처세술에 대한 책들의 내용이 대부분 강해지라는 것이다. 그러나 강함의 끝은 무엇일까? 허무함으로 끝난다.

 

바울의 생애를 살펴보면 세상의 인기 있는 조류와는 반대 방향으로 나갔다. 바울은 능력이 출중한 사도였다. 아무도 그가 이룬 업적을 능가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사역은 삼층천 계시를 보고, 죽은 자를 살릴 만큼 두드러진(outstanding) 슈퍼(super)급 사도에 속한다.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사도 바울은 자기가 환상 중에 하늘로 이끌려 올라간 체험을 소개한다. 그는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알 수 없는 3층천의 말할 수 없는 황홀경을 경험한 것이다. 그는 영적으로 신비롭고 깊은 세계를 경험한 것이다. 그런데 그는 자기가 경험한 것을 남의 이야기처럼 3인칭으로 기록했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자기의 약함에 대하여서는 1인칭으로 기록하고 있다.

당대 거짓 선지자들이나 사도를 빙자한 자들이 바울을 여러 가지로 의심하고 모함하고 비판했다. 그래서 바울은 변호 차 어리석지만 자기소개를 한다. 정통 유대인 혈통도 소개한다.

고후 11:22 그들이 히브리인이냐?...이스라엘인이냐...아브라함 후손이냐...그리스도의 일꾼이냐...혈통, 영적체험 등 자랑거리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고 있다. 이런 특징이 고린도 전후서 모두에 전반적으로 나타나 있다. 그의 신관부터 달랐다.

 

고전도전서에 나오는 약함의 메시지

1: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智慧롭고 하나님의 하심이 사람보다 하니라.”

1:27 “그러나 하나님께서 世上의 미련한 것들을 하사 智慧 있는 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 시고 世上한 것들을 하사 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3 “내가 너희 가운데 할 때에 하고 두려워하고 히 떨었노라

4:10 “우리는 하나 너희는 하고 너희는 尊貴하나 우리는 卑賤하여

9:22 “들에게 내가 와 같이 된 것은 들을 얻고자 함이요

15:43 “한 것으로 심고 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고후도후서에 나오는 약함의 메시지

10:10 “그들의 말이 그의 便紙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할 때는 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하니

11:21 “나는 우리가 한 것 같이 되게 말하노라

11:29 “누가 하면 내가 하지 아니하며 누가 失足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

11:30 “내가 不得不 자랑할진대 내가 한 것을 자랑하리라

12:5 “내가 이런 사람을 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하여는 한 것들 에 자랑하지 아니 하리라,”

12: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恩惠가 네게 하도다 이는 내 能力한 데서 穩全하여짐이 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한 것들에 하여 자랑하 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能力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3:4 “그리스도께서 하심으로 十字架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能力으로 살아 계시니 우 리도 그 안에서 하나 너희에게 하여 하나님의 能力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뿐만 아니라, 바울은 다른 서신에서도 약함의 신학적 사상을 펼치고 있다. “죄인 중에 괴수”(딤전 1:15), 만삭되지 못하고 난 자(고전 15:8),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 보다 더 작은 나(3:8) 등이다.

바울은 고후 11:19-28까지의 문맥에서 약함을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의 잔을 마시는 여러 경험들로 밝히고 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 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23-27). 이런 것들은 모두 바울의 약한 것들이다.

그이 약함에는 자기 자신의 육체적 허약성도 자기의 인간적 약점들도 포함시키고 있다. 약한 자가 약한 자를 불쌍하게 여기는 심정도 피력하고 있다. 마침내는 약한 것을 자랑한다는 역설적 진술도 여러 차례 하고 있다.

바울은 피하고 싶은 것,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숨기지 않고 고 부각시키고 있다. 그는 자기의 약함을 대강 자랑하지 않는다. 또한 마지못하여 하는 자랑도 아니다. 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자랑하고 있다. 이것은 겸손을 떠는 말도 아니다.

바울은 어떤 확신을 가지고 자기의 약함을 자랑하고 있다. 독립운동 하다가 감옥가면 그것은 영광스러운 것이다. 바울이 하나님 사업을 하다가 모진 고생을 한 것은 하늘의 영광스러운 훈장이 된다. 하나님은 약한 존재를 택하시어 거룩한 구속의 복음을 추진해 가고 있으며 그 약함이 오히려 영광스러운 것이라는 역설을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당대 고린도 지역의 문화나 오늘 이세상의 문화는 다르지 않다. 모두가 힘을 숭배하고 찬양하는 문화이다. 힘을 숭배하는 도시의 한가운데서 살았던 바울은 세상의 논리와 다르게 자기의 연약함을 자랑하고 있다.

드러낼 만한 것은 감추고, 부끄럽고 감출만한 것은 드러내는 것은 역설(paradox)이다. 여기에 영적 비밀이 있다. 비밀이란 무엇인가? 자기만 알고 남이 모르는 것이 비밀이다. 이 비밀의 내용은 약함이 곧 권능을 얻는 길이라는 것이다. 또한 믿음이 약함을 강하게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런 원리를 본문에서 설명하고 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7-9).

 

육체의 가시정체

성서학자들은 바울이 받은 <육체의 가시>의 정체를 두고 여러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혹자는 말라리아로, 혹자는 간질로, 또 다른 사람들은 안질로 풀고 있다. 상당히 많은 학자들이 간질병으로 보고 있다. 간질은 일단 발병하면 곁의 사람도 손 쓸 사이 없이 순식간에 의식을 잃으면서 입에 거품까지 물고 전신에 경련증상이 일어난다. 발작이 시작되면 모든 환자가 땅에 물건처럼 넘어지면서 경련을 일으킨다. 사도가 설교를 하다가 갑자기 쓰러져 입에 거품을 뿜는다면, 사도 바울의 체면은 어떻게 되며, 그가 선포한 말씀과 그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한 영적 메시지가 회중들 앞에서 힘을 받겠는가? 이들은 간질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도 없이 추정하여 말하고 있다. 약한자 중에 가장 약한 자로 일컬어진 엘렌 화잇을 간질환자로 보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말라리아나 간질병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사도 바울의 <육체를 찌르는 가시><안질>로 본다.

사도행전 9장에는 바울의 회심사건이 나온다. 사울이 예루살렘에서 다마스쿠스로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하러 가다가,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고 자기에게 말하는 소리를 듣는다. 사울은 "주여, 뉘시오니이까?" 하고 묻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이제 일어나 성안으로 들어가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을 일러 줄 자가 있다." 라는 말씀을 듣는다.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사울은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했고, 아무 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9:9). 사울은 이 일을 통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사흘간의 영적인 자기반성에 들어간다. 그는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었고(수동적 고통), 그 체험으로 충격을 받아 입맛이 떨어져 아무 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 금식을 한다.(능동적 단식).

율법의 대 스승 가말리엘 수하에서 받은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에 약속된 메시아관과 사상을 재검토해 나간다. 바울은 이제 자신이 그토록 박해하던 그리스도 예수에게로 포커스를 맞추며 올인하는 사흘 동안 구약성경이 예고하고 있는 메시야관에 관한 바른 이해로 전환한다. 유대인들은 현세적이고 정치적인 메시아관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고 바울도 그러하였다. 그는 이제 인류를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에서 해방시킨 메시아를 바라보게 된 것이다. 사흘의 암흑은 사울의 영적 소경됨을 상징하는 시간이며, 영적 무지와 혼돈을 바로잡는 정화의 밤이며, 영적으로 새로 태어나는 부활과 빛을 기다리는 밤이었다.

모든 것이 정리되도록 성령의 빛을 비추어 주신 주님께서는 사울이라는 이름을 바울로 바꾸어 주시고 이방인들의 사도로 삼으신다. 그리고 아나니아에게 말씀을 내리신다.

<"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異邦人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子孫들에게 하기 하여 한 나의 그릇이라 16 그가 내 이름을 하여 얼마나 苦難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9:15-16).

그리하여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按手하여 이르되 兄弟 사울아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聖靈으로 充滿하게 하신다 하니 18 卽時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浸禮를 받고 19 飮食을 먹으매 康健하여지니라“(9:17-19).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다시 보게 되었다. 누구나 이런 영적인 궤도 수정, 정화의 시간이 필요하다. 이것을 두고 Retreat라고 한다. 어둔 밤 같은 삶의 길에서 조용히 묵도하며 자신이 걸어 온 길을 살펴 나갔다. 특히 자기가 선동하여 돌에 맞아 죽게 한 스데반의 천사 같은 환한 모습과 그의 마지막 메시지가 뇌에 영상으로 각인되어 줄곧 비추고 있었다. 하나님의 섭리적 개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의 신적 본질, 메시야적 사명을 정리하여 나갔다. 이 영적 체험을 통하여 새 빛을 수용하였다. 그는 아나니아의 안수로 빛을 보게 되고, 그리스도교에 입문하는 침례를 받고 사도 바울이 된 것이다. 그런 그의 눈은 온전하지 못해 편지를 대필케 하고, 편지 끝에 큰 글씨로 자기의 이름을 밝혔다. 그는 가시처럼 고통스런 시력-사탄의 사자를 안고 살아가야 했다. 인간은 누구나 육체의 가시 즉 사탄의 사자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 세 번씩이나 이 육체의 가시를 제하여 달라고 기도했다.

 

약함=은혜 권능에의 길

바울은 간절히 기도한 후 노(No)의 응답을 받았다. 그리고 그 역설적인 축복도 알려주셨다. 고후 12: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내 은혜,” 내 능력,” 그리스도의 능력어휘들은 동의어적인 문맥으로 이어지고 있는 본문 구조이다. , 은헤는 그리스도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약한 것 때문에 은혜가 필요하고 그 은혜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된다. 이 능력이 우리 연약함을 완전케 한다.

우리가 좌절하기 쉬운 것은 예수를 믿는데 왜 여전히 아프고, 상황이 풀리지 않으며, 병이 낫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오히려 이 죄절의 수렁에서 넘어지기 쉽다. 하나님에게 기도해 보아야 별수 없었다고 포기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바울은 “No"의 응답 비밀을 고통 속에서 씨름하며 명상하면서 깨달아갔다. 약한 것을 완전하게 하여가는 비밀을 깨달았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을 때에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도록 세 차례 간절히 기도한 것과 흡사하다. 예수께서 십자가로 향하는 기도를 올리면서 고통의 잔을 마시기로 하였듯이, 3번의 겟세마네의 절규 같은 기도를 한 후 고통 속에서 응답 받았다. 바울은 자기가 응답 받은 이 비밀을 나누고 싶어 한다. 머리로 들어서는 안 되고, 온몸과 영혼이 이 진리를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면, 신자의의 삶 속에 어마어마한 은혜의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그리스도의 권능이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놓는, 엄청난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강하다고 자만할 때 넘어진다.

우리가 자랑하는 것은 한 순간에 무용지물로 전락되기도 한다. 자기가 잘한다고 여겼던 것들이 나중에는 자기의 발목을 잡기도 한다. 자기가 잘났다고 여기고,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여기고, 자랑거리로 삼았던 것이 나중에는 그것이 수치거리가 되어버린다. 자신만만한 건강을 자랑해도 나이가 들면, 근육이 풀어진다. 강하다고 자랑하는 것들은 언젠가 박살난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하면 그것을 무너뜨려버리신다. 그것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깨닫게 하신다.

바울은 자기 신앙의 큰 문제점인 자만 가능성으로 보았다. 이 점을 바로 잡지 않는 한 바울이 신앙의 정도에서 안전하게 서 있을 수도 또한 하나님의 종으로 성공적인 봉사를 할 수도 없다. 바울은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라고 (고전 10:12) 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문제이기도 했기 때문이리라. 자기를 자랑하는 일은 자기를 위험으로 빠뜨리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약한 자에게 이 거룩한 사업을 맡겼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능력이 없는 것을 절감하고 그리스도의 능력을 붙잡는 신자를 통하여 놀라운 일이 일어나도록 이끄신다.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 최고를 누리며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었을 때, 자기가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았을 때, 자기의 인생길에서 황금기가 왔다고 생각하고, 자기의 힘을 자랑하였을 때, 그 자랑의 혈기로 사람을 때려 죽였다. 이로 인해 그는 40년간 미디안 광야로 망명하였다. 하나님께서 그를 불렀을 때 그는 자기가 지닌 것은 지팡이 밖에 없다고 했다. 하나님이 미디안 광야에서 그를 부르셨을 때 그는 자기의 약함을 토로하고 있다. 지팡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권능의 도구가 되었다. 이 때야 말로 하나님의 도구가 될 수 있는 시점이었다.

삼손은 자기의 힘을 자랑하다가 파멸 당하였다. 원수들이 그의 두 눈도 빼고 머리털을 잘라버렸을 때 그의 체력은 쪼그라들었다. 그가 형편없이 약해졌을 때 그는 비로써 하나님을 의지하였다. 예레미야는 나는 아이라 말할 줄도 모른다고 했다. 하나님은 그를 앞세워 열방의 선지자로 삼으셨다. 베드로도 예수님 앞에서 또한 동료 제자들 앞에 호기를 부리고 이 사람들이 모두 다 배신해도 자기는 그러지 않겠다고 장담했지만, 무너지고 말았다. 그러나 무너진 다음에 하늘의 은사로 무장하게 되었다.

강하신 그리스도, 약하신 그리스도

그의 이름은 奇妙者, 謀士, 全能하신 하나님이라, 永存하시는 아버지라, 平康이라 할 것임이라”(9:6). “全能하신 하나님El-Gibbor로 챔피언, 최고위자 등의 의미를 지녔다. 예수님은 강하신 분 중에 가장 강하신 분이시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의 능력을 드러내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는 종의 종으로 내려 오셨다.

53: 2-7 “그는 앞에서 자라나기를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貌樣도 없고 風彩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欽慕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蔑視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艱苦를 많이 겪었으며 疾苦를 아는 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蔑視하였고 우리도 그를 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4 그는 로 우리의 疾苦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懲罰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苦難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함은 우리의 罪惡 때문이라 그가 懲戒를 받으므로 우리는 平和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같아서 그릇 하여 各其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罪惡을 그에게 擔當시키셨도다 7 그가 困辱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屠獸場으로 끌려가는 어린 과 털 깎는 앞에서 潛潛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주님께서 힘이 없어 붙잡히셨는가? 아니다. 우리의 약함을 친히 짊어지셔야 해서 십자가에서 제물이 되시어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다.

바울이 약함을 자랑한 이유

1. 약할 때에 하나님을 더욱 진지하게 의지하게 된다.

우리는 자랑할 만한 것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게 된다. 하나님을 어느 정도 의지하느냐가 중요하다.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만큼,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나타난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가진 것을 자랑하고, 의지할 만한 것을 스스로 만들려고 애쓰는 데 있다.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려면, 우리 안에 있는 힘을 빼야 한다. 자기의 무력성을 인정해야 한다. 물에 빠진 사람을 곧 살리려고 다가가 붙잡으면 둘 다 위험하다. 물에 빠진 자가 지쳐 축 처질 때 가서 잡아야 한다. 자기에게 있는 힘이 완전히 빠져야 한다. 자기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능력을 포기하는 것은 어렵다. 우리는 조금만 배불러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 형편이 약간 나아져도 기도발이 약해진다. 기도가 약해진다는 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세상 적으로 편하고 좋으면, 우리의 영혼은 쇠약해진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다. 이것이 신앙생활을 뒤덮고 있는 딜레마다. 경제적으로 부요하고, 세상 적으로 풀리는 것이 영적으로는 꼬이는 길이 된다.

고후 1:8~9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기가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바울은 자기가 당한 극심한 환난으로 통해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다.

친구가 많을 때보다 외로울 때, 건강할 때보다 병들었을 때, 성공했을 때보다는 실패했을 때, 사람들로부터 비난 받을 때, 배고플 때, 배신당했을 때가 은혜 받을 때이다. 의지할 것이 없어져서 하나님만 의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우리가 하나님만 의지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가운데 나타난다. 우리가 하나님만 의지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힘이 되신다. 하나님 외에 자랑할 것이 있으면, 그것은 족쇄가 되어버린다. 하나님만 의지하면, 하늘의 신비한 권능이 주어진다. 약할 때에 하나님의 임재를 더욱 강하게 경험할 수 있다.

 

3. 약한 자를 온전케 하는 그리스도의 능력(은혜)이 더욱 강하게 필요하다.

본문에서 은혜는 그리스도의 능력의 뜻을 지녔다. 약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권능이 더 절실하게 필요하여 그 은혜를 사모하고 구하므로 온전한 신앙으로 들어간다. 바울은 이 체험을 하면서 약한데 온전하여지게 되었다.

우리의 신앙의 신비는 십자가에 있다. 그리스도의 약함은 십자가였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셨을 때, 가장 약한 상태에 이르렀다. 그러나 약함의 죽음을 부활로 승리하셨다. 우리는 질그릇과 같다. 질그릇은 깨어지기 쉽다. 우리는 질그릇처럼 연약한 존재이다. 질그릇 같은 인간 안에 은혜의 복음의 보화가 안겨지면 우리에게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온전히 드러난다.

고후 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약하다. 깨어지기 쉽다. 아니 깨어져야 한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 권능뿐이다(sola gratia). 우리가 깨어질 때, 그리스도의 능력이 우리를 통해 드러나기 때문에 우리의 약함과 깨어짐을 염려할 필요가 없다. 할렐루야!

 

호소

우리가 겪고 있는 연약함, 사라지지 않는 아픔들은 우리를 은혜의 상승기류를 붙잡고 탈 때 해결될 것입니다. 약함을 불행으로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안에 상승기류의 비밀이 있습니다. 기도하는데도 고통이 사라지지 않는 데에는 하나님의 비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이 나를 살게 만들고, 이 은혜의 권능이 내 인생을 파워풀(powerful)하게 만들고, 다이내믹(dynamic)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우리 안에 머무르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야 말로 우리가 완전해 가는 비결입니다. 이 비결을 지닌 하나님의 백성들은 최고의 축복을 향유할 것입니다.

 

Posted by KAHN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