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9-11장에 담긴 구속사의 秘義(수정 보완)

 

로마와 로마교회 등장 파고

로마 교회의 기원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사도 바울이 직접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기 훨씬 이전부터 로마에 먼저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있었다(1장 참조). 아마도 오순절 성령강림 때 예루살렘을 방문 중이던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들', 즉 로마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 로마로 돌아가 거기서 복음을 증거하여 처음 로마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생겨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2:10 참조), 또한 얼마 후 예루살렘의 핍박을 피해 흩어진 상당수의 무명의 그리스도인 전도자들이 여행자로 로마를 방문하여 복음 증거의 사역에 헌신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래에서 더 언급하겠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이 그리스도로 보고 있는 "Chrestus" 선동 사건에 비추어 보아도 사도들이 로마에 가기 전에 이미 로마교회는 존재하였던 것이다.

로마는 당대 지중해 세계의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인 중심지이었다. 사람들은 각각 다른 목적을 가지고 모든 문물의 중심지인 로마로 향하여 거기서 제각기 꿈을 펼치고자 했다. 당시 로마에 거주하던 유대인들 사이에서 이루어지고 있던 그리스도인들의 선교활동은 유대교 신봉 유대인들로부터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던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심각한 분쟁과 혼란을 일으켰다. 이는 유대인 공동체 내 소동으로 확산되어 로마 제국에 역 반응을 초래하는 계기가 되었다. 회당과 교회의 문제가 조성한 혼란이 로마 정부가 개입하여 강경책을 시행케 하는 빌미를 제공한 셈이다. 로마 통치권자인 글라우디오(Claudius) 황제는 AD 49125일 유대인이라면 유대교 신자들이던지 그리스도교 유대인이던지 간에 모두 로마로부터 추방토록 하는 영을 내렸다. 로마의 역사가 수에토니우스((Suetonius)황제전(De vita Caesarum)은 이런 배경을 담은 저술이다. 그는 120년 경 줄리어스 시저로부터 12사람의 황제의 전기를 기록했는데, 클라우디우스의 생애(Life of Claudius)에서는 로마에서의 초기 기독교와 관련된 다음과 같은 짧은 기록을 남겼다.

유대인들이 크레스투스(Chrestus)의 선동으로 계속 문제를 일으키므로 그는 그들을 로마에서 추방했다(Iudaeos impulsore Chresto assidue tumultuantes Roma expulit”).5)

 로마에서 크레스투스(Chrestus), "그리스도"라는 인물을 두고 유대인들끼리 소요가 발생했기 때문에 추방했다는 것이다. 이 기록에 비추어 그리스도인들이 로마 거주 유대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 것이 화근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로마에서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믿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예수님이 메시아일 수 없다는 전통적 유대인들 사이에서 갈등이 첨예하게 일어난 것이다. 예수님의 메시아 지위에 관한 분쟁 내용은 다 알 수 없으나 정부에서 문제를 삼을 정도의 충돌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런 상황에 비추어 보아 AD 49년 경 로마의 교회는 유대인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주류인 교회에 소수의 이방인들이 참석하였던 것으로 우리는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고 있다.

로마의 유대인 사회는 극소수의 부유층, 지식층 외에는 대체로 가난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서로 다른 몇 개의 그룹이 도시의 여러 곳에 흩어져 살고 있었으며, 각 그룹마다 회당을 중심으로 공동체의 지도자가 있었다(28:17 참조). 그러나 어느 한 집단도 로마의 유대인 공동체 전체를 다스리고 있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로마에 있던 유대인들은 대부분 자치적인 성격이 강했으며, 그리스도인들이 어느 정도 자유롭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여건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로마의 유대인 인구는 약 5만을 헤아렸다고 전해 온다.

유대인 사이에 흩어져있던 이름 없는 그리스도인들의 전도활동을 통해 많은 수의 로마인들, 특히 종이나, 부녀자들, 그리고 동방으로부터 온 노예출신들이 복음을 받아들였다. 로마교회 구성원은 사회경제적으로 낮은 계층이 그 주종을 이루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로마서 제16장에 나오는 인물들의 구성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이들 개종 자들 중에는 여성 지도자들의 눈부신 활동, 노예들 중에는 고도의 기술을 보유한 전문인들, 교육받은 부류들도 들어 있었다. 이런 복합적 구성과 그리스도교의 지향하는 목적을 간파한 로마 귀족층이나 지배층 남자들은 심기가 매우 불편했고, 이것은 유대인과 로마인 사이의 중요한 갈등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었고 드디어는 추방령을 발한 것이다. 늘 사변이나 군사적 반란의 위험성을 안고 있는 로마제국으로서는 이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잠재적 위험군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유대인 추방령은 AD 54년 글라우디오 사후에 유야무야 되어 유대인들이 로마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로마에서 추방된 그리스도인 신자들이 로마 제국 내 여러 지방으로 흩어졌다. 그들 중에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도 있었다. 이들 부부 이름은 늘 함께 나오는 점에 비추어 복음 선교 부부 팀으로 비쳐진다. 이들이 고린도에 이르기 전에 이미 고린도 선교사업에 헌신하고 있던 바울은 이들로부터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교회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이들은 추방 후 고린도에 내려와 당시 고린도 복음화를 위해 애쓰고 있던 사도 바울을 만나 천막 만드는 일과 복음전하는 일을 함께 하며 바울의 선교에 동참하였다(18:1-3). 여기에서 자기들이 살고 있는 가정을 교회로 사용하기까지 활동했다 (고전 16:19). 바울이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간 AD 52년 가을 경에는 이들 부부는 에베소까지 동행하였다. 에베소에서 아볼로를 만나 성경에 관한 바른 이해를 하도록 도왔다. 이들 부부는 AD 57년 봄에 에베소를 떠나 로마로 복귀하였고, 바울은 로마서에서는 이들 부부에게 문안 인사를 보냈다((16:3-4).

서기 49년 소요로 인해 발효된 글라우디오의 칙령에 의해 유대인들은 로마를 떠나야 했고, 이방인들만이 로마에 남아 교회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54년 추방령을 내린 황제 사후 유대인들이 차츰 차츰 다시 로마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 사이 로마 그리스도교회는 이방인들의 리더십 아래에서 교회 성장이 진행되어 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로마에 있는 교회는 유대인 추방령 이전의 교회구성과는 반대로 이방인들 개종자들이 다수를 이루고, 유대인들이 소수가 되는 역전된 구도를 보이게 되었다. 이렇게 전과는 달리 새로워진 교회의 구성원, 또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 주가 되는 교회 리더십의 전환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공존에 상당히 어려운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었다. 특히 추방으로부터 귀환한 유대인 신자들이 많아짐에 따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교회 운영이나 신앙 이해에 있어서 충돌과 의견의 불일치, 나아가 때로는 멸시와 깔보는 태도까지 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 로마 교회가 혼돈을 겪는 가운데 세 번 째 전도여행 차 고린도에 머물고 있던 바울은 로마교회에 편지를 써서 보냈던 것이다.

 

로마서의 핵심주제?

이방인 선교사역에서 로마가 차지하는 중요한 위치와 전략적 의미를 잘 알고 있던 사도 바울은 선교여행 중 이미 자생적으로 커나가는 로마 교회에 서신을 보내 이들을 격려하는 동시에 복음의 본질을 구체적으로 정리해 문서화함으로써, 당시 로마 교회뿐만 아니라 후세 교회들이 복음을 지켜 가는데 필요한 매우 중요하고 귀중한 도구를 제공하였다.

카톨릭 교회가 주창하던 "믿음과 행위"로 말미암는 구원에 의문을 품고 있었던 마르틴 루터는 고민과 기도, 해산의 수고를 거치면서 찬란한 빛줄기와 같은 말씀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바로 로마서의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메시지이었다. , 로마서 1:16-17"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메시지이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난 16세기 이래로 로마서의 핵심 주제는 한마디로 오직 믿음(sola fide)“으로 말미암는 구원으로 이해되어 왔다.

최근의 로마서 연구 동향이나 바울 신학의 핵심 주제에 관한 연구가 발전되어 옴에 따라 바울이 로마서에서 진정으로 이야기하고자 하였던 바가 전반부에 나오는 핵심 메시지 "믿음으로만 말미암는 칭의"이었느냐를 중심으로 분분한 논의가 진행되어 왔다. 오히려 로마 교회에 공존해 있던 이질적인 두 세력, 즉 유대인들과 이방인 사이에 팽배한 갈등 관계를 조정하고자 하는 의도로 로마서를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가 대두되어 왔다. 이 새 관점의 요체는 로마서 1장이나 3장의 믿음의 의에 관한 메시지는 로마서 9-11장에 나오는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 사이에 야기된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등장한 하나의 이슈로 보면서, 9-11장 까지를 로마서의 골격을 이루는 중심부로 보고자 하는데 있다.

바울은 로마교회가 하나가 되기를 원했다. 그리고 로마교회가 하나 되어 스페인으로 가고자 하는 바울의 다음 선교여행을 후원해 주기를 바랐다(15:23, 28). 그래서 바울은 스페인으로 향하는 차기 선교여행 중 로마교회를 방문코자 하는 자신의 소망을 전달한 것이다. 분쟁이 있는 교회를 스페인 선교라는 키워드로 풀어나가고자 한 의도가 잠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우리는 로마서 전반부를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로마서 전반부 (1-8)에서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가 똑같은 죄인임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유대인, 이방인 모두가 오직 은혜로 구원받았음을 선포하였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이, 어느 누가 우월하지 않으며, 똑같이 죄인이고, 똑같이 "오직 은혜"를 매개로 하여 구원받았음을 확인함으로 그들 사이에 있는 어느 한 집단도 우월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유대인은 율법을 가졌다고 우월할 수 없고, 이방인 역시 모든 불의를 행하던 자들이었기에 우월할 수 없었다. 바울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인해 죄인되었던 자들이 구원받았음을 인식시킴으로 모두가 동등됨을 그들에게 전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맏아들이 되시고 유대인과 이방인은 형제가 되었다.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8:29).

로마서 중간부 (9-11)에서 바울은 보다 선명하게 유대인과 이방 교회와의 관계를 보다 직접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먼저 바울은 9장과 10장에서 육적인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라 믿음으로 난 자가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천명함으로 "이스라엘"의 개념을 인종적 이스라엘에서 영적 이스라엘로 바꾸었다. 바울은 이점을 갈라디아서에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바울이 다메섹 사건 이후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로 부름을 받았다(2:8; 3:1). 그는 로마서 10장에서 동족의 구원을 열망하지만, 이른바 선민 모두가 영의 자녀가 아니어서 이스라엘 중에 믿음에 난 의를 받은 남은 자만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그러나 육신의 자녀들은 열심이 있지만 하나님의 의에 관한 올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그리스도가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목적이 된다는 진리를 수용치 않았다. 예수 이름을 부르면 구원 받는 의에 이른다는 진리를 거절한 것이다(10). 그러나 이스라엘 모두가 그리스도를 배척한 것이 아니다. 그들 중에도 은혜를 따라 남은 자가 있었다(11:5).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렀고 그 수가 충만한 수에 이르러야 했다(11:11, 25). 그래서 바울은 이스라엘이라는 감람나무 가지 얼마가 꺾이고, 그 자리에 접붙임 받은 이방인이라는 돌감나무 가지가 들어서므로 인하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하여 깨우침을 받아 그리스도의 복음의 생명을 받게 되는 결과로 이끄신다는 비밀한 섭리를 밝힌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본래의 구속의 경륜 사명을 이루어 가고자 하여 선교적 사명을 준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의 실패로, 그 택함을 받은 자리에 이방인들이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너희는 유대이나 헬라이나 종이나 自由人이나 男子女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2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子孫이요 約束대로 遺業을 이을 갈 3:28-29).

무릇 이 規例하는 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平康矜恤이 있을지어다”(6:16).

하나님의 이스라엘은 그리스도 교회로 이면적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을 아우르고 있는 개념이다 (2:28-29).

이방인들이 이스라엘 자손이 되었음을 천명함과 아울러 유대인들에게는 육적인 혈통이 아닌 믿음이 이스라엘 백성의 신분을 결정함을 선포하였다. 이는 유대인들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획기적인 선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분명히 유대인이 좇으려고 했던 율법의 목표가 예수님이심을 천명함으로 예수님을 통해 믿음의 자손의 신분을 획득함을 보여주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에게 를 이루기 하여 律法의 마침이 되시니라”(10:4). Robert Badenassms 그의 박사학위 논문 Christ the End of the Law: Romans 10:4 in Pauline Perspective (Sheffield, England: JSOT press, 1985)에서 신약성경상의 <telos + Genitive 구문>의 용례 분석을 통하여 “telos”목적이나 목표를 뜻하는 것임을 밝혔다. 바울이 이 구문을 통하여 지적하고자 하는 의도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에 이른다는 것이다.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비밀(신비)

그러면 자연스럽게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선택하셨던 이스라엘을 버리신 것인가?"라는 질문이 따른다. 이스라엘이 인종적 이스라엘(ethnic Israel)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진 영적 이스라엘이라면, 인종적 이스라엘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바울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11장에서 하고 있다. 바울은 먼저 하나님께서 인종적 이스라엘을 버리신 것이 아님을 명백히 선언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시지 않으셨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예수를 믿는 남은 자들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근거를 제시하였고, 나아가 이스라엘의 넘어짐은 일시적일 것을 설명하였다 (11). 도리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들 앞에 교만하지 말고, 유대인들의 교만에 함몰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운 마음을 가질 것을 훈계하고 있다(11:20). 더 나아가 이방인의 수가 차면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게 될 것이 하나님이 그들에게 하신 약속임을 다시 확인시켜 주었다.

그리고 바울은 이 이스라엘과 이방 모두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비밀(musterion)"이라고 불렀다(11:25). 비밀이란 단어는 에베소서 532절에서 남자와 여자 두 사람이 만나 하나가 되어지는 "결혼"을 의미할 때 사용된 단어이다. 이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의미하기도 한다(5:32). 또한 이 용어는 그리스도의 성육신(딤전 3:16), 재림 시 성도들의 변화(고전 15:51), 적 그리스도의 반대(살후 2:7) 그리고 특별히 이방인이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영접된 것(16:25, 26; 3:1~6; 1:26, 27)에 적용되어 나타난다. 바울이 지금 선포하고 있는 비밀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목적이다.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가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 되어서 구원의 세계로 나가는 일은 구속사의 신비이다. 인간은 산산조각난 그리스도 교계의 얼룩진 모습에 탄식을 금치 못하고 날선 비평을 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문제를 풀어갈 것이다.

온 이스라엘은 구원받은 자들 전체 즉 모든참된 이스라엘(2:28, 29; 6:15, 16)을 구성하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나타낸다. 온 이스라엘의 정체가 무엇이냐는 주제에 관한 각양 견해들이 나돌고 있다. 그 대강은 다음과 같다.

1.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유대인들이 다 구원 받는다는 C.H. Dodd식 보편구원론적 시각 - 이는 인간의 선택의 자유와 믿음이 결여된 상태에서도 구원 받는 다는 것을 배격한 다른 성경절들(10:14-15; 잘려나간 가지 11:17-24)과 모순된 주장이다.

2. 영적 이스라엘 (교회) - Herman Riderbos 주장, 모든 시대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구원 받을 유대인과 이방인 신자들 - 문맥상 28절이 문제 되지만, 그리스도를 거절한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원수된 무리들이긴 하나 그들 중 하나님의 긍휼에 따라 구원 받을 자로 참여할 것으로 보기 때문에 가능성 잇는 주장이다. 육적 이스라엘을 대체하는 것이 아닌 포용적 개념으로서의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다.

3. 택함을 받음 남은 자 - 인종적 유대인 중 구원 받은 신자들이라는 시각이지만 위 2에 포용될 수 있다.

4. 인종적, 집합적 이스라엘 - 강퍅하여 그리스도를 거절하던 마지막 국가적으로 유대인들이 돌아서서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언약의 약속의 축복을 받는다는 입장으로 1948년 이스라엘 독립과 더불어 세대주의 종말론과 이에 동조하는 복음주의 교단들이 강조하는 주장이다. 트럼프가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수도로 인정하고 대사관을 옮기겠다는 정책의 뿌리에는 이런 신학적 배경이 깔려 있다.

 

각기 다른 배경과 취향을 지닌 두 인간, 즉 남편과 아내가 결합하여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 가는 것은 하나님의 비밀이 된다. 거기에는 서로에 향한 한 평생토록 변치 않는 헌신이 있기 때문이다. 참 감람나무 가지 얼마가 꺾이고 거기에 들 감람나무가 접붙임을 받아 하나 되는 것도 신비한 일이다. 이 신비한 일이 로마교회뿐만 아니라 모든 교회에서 일어날 것을 예기케 한다. 하나님의 거룩한 늦은비 성령의 강림으로 거대한 부흥의 물결이 일어나 진리되신 그리스도와 그 분의 말슴을 토대로 하나 되는 진정한 에큐메니컬 운동이 죄악과 반역의 역사의 끄트머리에서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주님이 오시는 날 다시 접붙임을 받아 생기가 넘쳐 흘러나가는 그 때 이 하나된 교회는 새하늘과 새땅의 "혼인잔치"에 참여할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의 하반부(12-16)에서 하나님의 이스라엘은 이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속에서 자신들의 위치와 사명을 이해했으므로 그리스도인답게 합당한 삶의 자세를 유지, 발전시켜 가야하는 실천적 교훈으로 권고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어 순종하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삶이 되도록 권면하고 있다. “믿어 순종하는 삶은 로마서는 시작 메시지일 뿐만 아니라 끝맺는 메시지가 된다(1:5; 16:26).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분열된 로마 교회가 하나 되기를 원했던 바울의 편지는 오늘날의 우리 교회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말하고 있다. 오늘날은 분명 이방인의 교회가 그리스도의 교회를 압도적으로 대표하고 있다. 믿는 유대인들의 교회의 목소리는 이방인들의 교회에 잘 들리지 않는다. 나아가 우리가 속한 이방인의 교회들은 유대인 교회들을 이해하려 하기 보다는 우월감 속에서 유대인의 풍습을 지키는 저들의 모습을 율법적이라고 정죄하고, 심지어는 반 셈족 운동을 펼치기까지 하여왔다. 그러나 바울이 명시하였던 바와 같이 유대인 교회와 이방의 교회는 하나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어느 편이 우월할 수도, 다른 편이 열등할 수도 없는 동등한 형제의 관계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하나된 교회의 모습이 우리가 그리스도께 바칠 신부된 교회의 모습일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그 끝을 우리가 얼마나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을까?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제시된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는 우리에게 "신비" 그 자체이다. 묵시문학이 예언한 대로 종말론적 여러 사건들이 전개되어가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가 앞으로 어떻게 마쳐질 것인지 마음 졸이며 시대를 주시하며 살고 있다.

Posted by KAHN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