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사(瀕死)의 사자상 (Löwendenkmal)>
<빈사(瀕死)의 사자상 (Löwendenkmal)>
프랑스 루이16세의 786명 용병들은 자식세대 일자리 계승위해 죽음을 불사하였다. 스위스 사람들은 이것을 잊지 않고 기리고자 이 죽음을 루체른에 <사자상> (The Lion Monument, Löwendenkmal) 에 담아 형상화시켜 우리의 가슴에 까지도 잊어버렸던 것을 되찾은 감격 같은 감동을 주고 있다. 온몸에 화살이 박힌 채 꺾인 프랑스 브르봉 왕가의 방패를 껴안고, 고통스럽게 마지막 숨을 내쉬는 사자의 모습이다. 배신과 반역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이 빈사의 사자상의 배경에는 스위스의 슬픔의 역사가 담겨 있다.
절대빈곤에 허덕이던 시절 스위스 사람들은 해외 용병으로 나가서, 가족들의 생계를 유지시켜 간 시절이었다. 그들은 1792년 프랑스 혁명 당시, 이들 786명의 용병들은 루이 16세를 지키고 있었다. 다른 국가들의 용병들은 모두 도망갔다. 그러나 786명의 스위스 용병들은 끝까지 프랑스 왕을 지키며 싸우다가 장렬하게 죽음을 맞았다. 그들이 도망가지 않은 이유는 단 한가지였다. 유일한 생계수단인 용병 직에 대한 신뢰를 잊어버리는 날, 자식 세대가 용병 직을 이어가지 못하게 되어 가족의 생계가 위태롭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목숨을 걸고 끝까지 싸우다가 장렬하게 죽는 선택을 한 것이다. 당시 전사한 한 용병이 가족에게 보내려던 편지에 "우리가 신용을 잃으면 후손들은 영원히 용병이 될 수 없기에 우리는 죽을 때까지 계약을 지키기로 했다"고 쓰여 있었다.
프랑스 혁명 기간 중 1792년에 이미 상황이 절망적이라고 판단한 루이 16세는 이 스위스 용병들에게 “그대들과는 상관없는 싸움이다. 고국으로 돌아가라”고 권했지만, 스위스 용병들은 “신의는 목숨으로 지킨다”는 답과 함께 끝까지 항전하다가 786명의 대원 모두 전멸하고 말았다.
루카스 아호른(Lukas Ahorn)이 1820–21년에 이 처절한 부모세대의 역사를 기리기 위해 지금의 사자상을 자연 속 절벽 동굴에 새겨 넣은 것이다. 흔히 <루체른의 사자 The Lion of Lucerne> 상이라고도 칭하여지기도 하는 이 조각은 스위스 사람들의 충정(loyalty)과 신뢰(faithfulness)의 클라이맥스가 된다. Mark Twain은 이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사자상을 두고 세상에서 가장 애통스럽고 감동을 주는 석재(石材) 조각상이라고 평했다. 이 사자상은 앞서 간 부모세대 역사 속에 베인 처절함과 용맹함으로 지킨 신의를 지킨 그 얼을 후손들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담겨있다. 이 메시지가 스위스 정신이 되어, 지금 경제 강국이 될수 있었던 배경일 것이다.
이처럼 절대적인 충성심 때문에 스위스 용병들은 유럽 여러 나라에서 환영 받았다. 그러나 이런 피눈물의 충정의 역사는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었다. 거슬려 올라가 1505년 6월 로마 교황 율리우스 2세는 자신의 신변 경호를 위해 스위스에 용병을 파견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해 가을 스위스를 출발한 150명의 스위스 용병들은 700여 Km를 행군하여 이듬해 1월 22일 로마에 도착하였다. 이것이 바로 바티칸 시국의 군대이자 교황의 경호대인 스위스 근위대의 출발이었다.
이들 스위스 근위대는 1527년 발생한 ‘로마 약탈’에서 그들의 명성이 헛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 당시 스페인 국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카를 5세가 교황 클레멘스 7세와 프랑스 연합군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로마를 약탈하는 일이 벌어졌다. 다른 군대가 모두 스페인군에 항복했는데도 스위스 근위대만큼은 끝까지 교황을 보호하여 피신시키는데 성공하였다. 당시 스위스 근위대는 187명 가운데 147명이 전사하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포위망을 뚫는데 성공했다. 이때부터 교황청 근위대는 전원 스위스 출신 청년들로만 구성되는 전통이 생겨난 것이다. 당시 목숨을 구한 클레멘스 7세 교황은 스위스 근위대 장병들에게 자신의 출신 가문인 메디치가를 상징하는 노랑과 파란색 줄무늬 군복을 입힘으로써 이들에 대한 변함없는 신뢰를 표시했다.
사실 스위스란 국가는 지금은 우리보다 4배 이상 소득을 올리고 있는 국가지만, 과거엔 유럽의 가난한 국가였다. 지금은 알프스산이 국가적 자랑이지만, 과거엔 발전하는데 장애요인이었다. 모든 국가들에 공통된 현상이듯, 자국 내에서 먹고살게 없으면, 외국에 가서 몸으로 벌어야 한다.
젊은 용병들이 목숨을 바치면서 송금한 돈은 헛되지 않았다. 스위스 용병의 신화는 다시 스위스 은행의 신화를 낳았다. 용병들이 송금했던 피의 댓가를 관리하는 스위스 은행은 목숨을 걸고 금고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스위스 은행은 안전과 신용의 대명사가 되어, 이자는 커녕 돈 보관료를 받아가면서 세계 부호들의 자금을 관리하는 존재가 되었다.
한국 역사에도 스위스보다 더 처절한 조상들의 슬픈 역사가 새겨져 있다. 참혹한 6·25 한국전쟁 시기엔 많은 군인들이 조국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생명을 바쳤다. 1960년대에는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는 가족들을 위하여 월남전쟁에서 죽음을 불사하면서 싸웠다. 대학 나와도 변변한 일자리를 얻지 못하던 시절에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독일 광부와 간호사의 길을 선택했다. 이들이 가족들에 송금한 금액이 당시 GNP의 2%를 차지할 정도였다. 1970년대에는 뜨거운 사막의 나라로 가서 모진 모래바람을 견디며 막노동을 한 것도, 모두 가족을 위해서였다. 이렇게 우리 역사 속에 있는 아픔들은 모두 부모세대가 자식세대를 위해 희생을 선택한 것이었다. 부모세대는 자식세대엔 그들의 가난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기꺼이 죽음의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다. 공짜 복지라면 자식세대의 희생쯤은 아랑곳하지 않고 막가는 오늘의 세태에는 미래가 실종되어가고 있다. 음흉한 정략가들은 대중에게 복지 포플리즘이라는 마약주로 취하게 하여 권력을 휘여 잡는다. 정치권에선 제 각기 공짜복지를 정치상품으로 내세우고, 국민들은 좋아한다.
재작년 6월 스위스 국민은 월 300만원의 기본소득 국민투표에서 무상복지를 77% 국민의 반대로 부결됐다. 이 부결 투표가 시사하는 의미가 크다. 반대표를 던진 유권자들은 곧 다가 올 재정난과 국가경쟁력 저하를 내다 본 것이다. 강제 임금 인상으로 해결되지 않는 ‘일자리 없는 저성장 시대’의 이 나라의 무상 복지가 수모를 당할 날이 곧 올 것이다. 거금의 공짜 복지 정책을 단연코 배격한 스위스 사람들은 이 시대 우리의 선생님들이다.
No crown, without the cross. 십자가 없이는 면류관 없다. 거룩한 분의 희생의 십자가로 인하여 오늘 우리를 위한 구원의 막이 오른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도 '스위스의 사자상'이 필요하다. 히브리서 11장에는 지나간 믿음의 선구자들의 용감한 믿음을 기리게 하는 고결한 선택을 한 역사, 고통의 역사, 처절한 배고픔과 희생의 역사가 압축되어 있다. 세상은 목숨을 건 이 거룩한 충정과 신뢰를 살려내는 우리를 보고 싶어 한다. 바벨론 도성을 지키는 자들도 이런 충정과 신뢰에 목숨을 걸어고 있는데, 하물며 남은교회의 신도들은 진리에 목숨을 걸고 충정하며 신뢰의 근위대이며 하나님과 동역하는 영적 용병으로서 바로 서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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