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사운동(The Charismatic Movement)

 

사단은 강신술을 역사의 최후 단계에서 대쟁투의 패감으로 사용한다. 사단의 영들은 마지막 때에 가능한 모든 종교적 방편을 동원하여 마치 그것들이 하나님께서 사용하여 일하시는 방법인 것처럼 호도한다. 그러나 거의 모든 이런 통로들은 강신술과 연계된 것으로 사실상 사단으로부터 온 것들이다. 사단은 교회의 은사갱신운동 같은 것도 활용한다.

 

I. 그리스도교의 제3세력 등장

 

A. 역사적 발전

전통적으로 그리스도교계의 양대 세력은 로마가톨릭교회와 종교개혁 이래의 역사적인 프로테스탄티즘이다. 그러나 20세기 벽두에 등장한 방언운동에 역점을 둔 오순절주의 계통의 교회들이 "그리스도교회의 제3의 세력(The Third Force in Christendom)" 또는 "새로운 종교개혁(the New Reformation)" 세력으로 급부상하여 왔다. 역사적 개신교회가 교리에 역점을 둔 근본주의,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과 회심에 역점을 둔 복음주의로 발전하여 온 반면에, 이들 오순절주의에서는 체험에 역점을 두고 있다. 20세기의 초엽의 고전적 오순절주의(Classical Pentecostalism) 성령운동을 두고 첫 번째 물결(the First Wave)”이라는 시각도 있다.

오순절주의교회들의 발전은 눈 부실만큼 활발하였다. 특히 그들의 방언운동은 1960년대 초 온 개신교회에 파급되었을 뿐만 아니라, 1967년 로마가톨릭교회까지 침투하였다. 그리하여 교황요한 23세는 새 오순절을 위하여 기구(祈求)하였으며, Vatican II 회의에서는 교황의 뜻을 받들어 은사를 받도록 격려하기도 하였다. Vatican II 회의가 끝난 지 2년 지난 후 로마가톨릭교회에서 방언현상이 일어났으며, 이 방언현상이 10여년에 걸쳐서 100여개 국가 안에 있는 로마가톨릭교회로 퍼져 나갔다. 오늘날은 큰 교단 거의가 이 방언 운동의 무대가 되었다. 1960년대부터 이른바 신오순절운동이라고 부르는 은사운동이 개신교회의 성령운동의 주축을 이루었다. 이어서 1970년대에 요원의 불길처럼 로마 가톨릭교회를 포함하여 범 교단적으로 번져간 이 현상을 소위 두 번째 물결(the Second Wave)”인 은사 운동(Charismatic Movement)으로 부르기도 한다. 1980년대 이후에 등장한 소위 세 번째 물결(the Third Wave),” 또는 표적과 이적 운동으로 불리는 빈야드운동(Vineyard Movement) 등에서는 예언운동이 강화된 형태로 발전하였다.

고전적 오순절주의가 되었던지 신오순절주의가 되었던지 간에 자기들의 성서적 존립근거를 요엘서 2:28에 두었다. 그들은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 때 방언의 은사 현현이 있었던 점에 비추어 방언운동을 사도교회로의 회복 내지 종교개혁의 완성이라는 시각에서 설명하면서, 그리스도의 재림 전 늦은비 성령의 약속의 구현으로 여겼다.

방언운동은 형식적, 지적인 예배의 냉냉함에서 만족을 얻지 못하는 예배에의 불만족을 극복하고, 현대 신자들의 사회적 불만족과 단절 및 정서적 박탈감, 긴장과 불안에서 해방되는 심리적 대안책이 되어 왔다.

 

B. 오순절주의의 신학적 뿌리와 초점

오순절주의의 신학적 뿌리는 감리교회의 성결운동(the holiness movement)에 두고 있다. 감리교회의 성결운동이나 오순절주의 모두 그 초점을 중생 후 추가적 경험에 두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이후에 오는 성령의 사역이다. 존 웨슬리는 칭의 다음에 오는 성화의 두 번째 사역을 강조하였다. Moody-Sancky의 복음선교 운동에 뿌리를 둔 Keswick 그룹에 따르면 성결운동은 회심 이후 성령의 두 번째 사역에 해당한다. 오순절주의자들은 세례 받은 이후 성령의 세례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특히 오순절주의자들은 이 성령세례와 함께 방언을 완전 복음(full gospel)"완전을 말하는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방언은 모든 성령의 열매에 진입하는 문이 된다. 이들은 방언을 그리스도 이상으로 중시하는 경향으로 나가고 있다.

 

오순절주의자들은 방언을 내적 성령침례의 가장 중요한 외적 표적(징표)으로 본다. 또한 회심을 통하여 개인적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만, 성령침례를 통하여 권능을 받아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게 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은 시작단계에 불과하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침례를 받는 완전한(충만한) 복음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C. 2단계 세례(침례)

방언주의자들은 방언을 둘째 침례로 본다.

 

<전통적인 입장>

출생-->중생=성령 침례-->(성령충만의 삶)-->사망

 

<2단계론>

출생-->중생-->성령침례=성령충만(은혜의 두 번째 사역)-->사망

(방언 수반)

 

오순절 주의자들은 성령침례와 성령 충만을 동의어로 간주한다(1:42:4 비교). 5:18의 성령 충만 명령을 성령 침례를 구하라는 의미로 풀이한다. 성령침례는 중생 후에 오는 제2의 성령의 역사라고 본다. 중생한 사람이 성령 침례를 받지 못한 경우가 있다. 성령침례와 물 침례를 구별한다. 사도행전에서 사마리아 성령 강림(8:1-13, 16-17), 고넬료에게 성령 강림 사건(10:44-45; 11:16-17), 에베소에서 침례요한 제자들 사건(19:1-7)은 이러한 근거가 된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들과 유대인 사이의 뿌리 깊은 적대감 해소 차원의 특별 사건, 고넬료 사건에서 선교의 지평이 확대되는 이방인 개종자에게 물 침례와 성령 침례를 하나로 묶어 볼 수 있는 여지, 에베소에서 침례 요한 제자들의 재침례적 성격을 중심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침례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의식이다. 단회적 사건이 곧 완전한 복음으로 연결된다. 복음을 보통 복음과 더 완전한 복음으로 나누는 일은 복음의 진정한 모습을 훼손시킨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때 완전한 복음을 향유하는 것이다. 성령의 임재의 진정한 표는 성령의 열매에 있지 은사에 있는 것이 아니다.

 

D. 성령침례와 성령충만의 상호관계

성령침례와 성령충만은 시작과 연속의 관계에 있다. 성령침례는 회심을 위하여, 성령 충만은 봉사를 위하여 각각 역사한다. 성령침례는 그리스도인 생활의 시작 단계에서의 성령의 역사이다. 성령침례는 성령 충만 생활의 시작이며 그 연속이다. 성령 충만은 믿는 자들에게 성령을 계속적으로 부어주심을 뜻한다. 그리하여 계속적으로 자라난다.

EGW은 이 같은 성령 안에서 자라남(growing in the Spirit)이라는 시각에서 모든 교역자들은 매일 성령의 침례를 위해 하나님께 탄원해야 한다”(행적, 50)고 표현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령침례는 회심을 갱신 강화하면서 이어지는 성령 충만을 지향하는 길이 된다.

그는[예수는} 매일 아침 여러 시간 동안 아버지와 교통하심으로 하늘의 빛을 사람에게 나누어 줄 준비를 하셨다. 그는 날마다 성령의 새로운 침례를 받으셨다. 주님께서는 매일 아침 이른 시간에 일어나셔서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기 위하여 자기의 심령과 입술에 은혜의 기름을 바르셨다. 그분은 하늘 조정으로부터 새로운 말씀을 직접 받으셨는데 그 말씀은 피곤하고 학대를 받는 자들에게 하실, 경우에 합당한 말씀이었다.”(실물, 139).

“Teach your children that it is their privilege to receive every day the baptism of the Holy Spirit. ”(CT, 131).

 

II. 신약성경상의 방언 현현과 그 이해

A. 방언(tongue)의 의미

희랍어 glôssa는 그 용례에 비추어 볼 때 여러 가지 의미를 지녔다. glôssa는 발성기관 또는 언어기관 (7:33, 35; 1:64; 3:13; 14:11; 3:5; 요일 3:18; 벧전 3:10; 16:10; 2:26)을 뜻하기도 하고, 언어 (2:11; 5:9; 7:9; 10:11; 11:9; 13:7; 14:6; 17:15; 2:6, 11)를 의미히기도 한다. 그 외에 불의 혀에서와 같이 은유적 의미(2:3)로도 사용되고 있다.

 

B. 방언의 목적

방언의 은사는 초기 교회에 그토록 중요한 것이었는가? 초기 교회에는 방언의 은사나 혹은 숙달된 외국어의 능력이 필요했었다. 복음은 세상에 전달되어야 했으나, 대부분의 승천 이후의 그리스도인들은 외국어를 구사하지 못했다(28:19-20, 16:15, 1:8). 방언은 교회를 세우는 것이어야 한다(고전 14:5).

 

C. 사도행전의 방언현현

오순절주의자들이나 은사운동을 하는 자들은 사도행전을 오순절주의 신학의 기본교과서로 여기고 있다. 2, 8, 10, 19장에 방언 은사가 현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마가복음 16:17에서 새 방언을 말하게 한다는 약속은 오순절에만 성취된 것이 아니다. 계속하여 이 불신자들에게 주어진 징표의 외연은 확장되어 나갔다.

a. 2장의 성령강림 - 예루살렘에서의 방언

b. 8장의 성령강림 - 사마리아에서의 방언

c. 10장의 성령강림 - 가이사랴에서의 방언

d. 19장의 성령강림 - 에베소에서의 방언

 

C. 사도행전의 방언과 고린도전서의 방언의 실체에 대한 제 시각들

a. 사도행전의 방언은 실제 사용 언어(다른 지역의 말)라는 시각

b. 사도행전의 방언은 엑스타시 음성이라는 시각

c. 사도행전의 방언은 실제언어와 엑스타시 음성이라는 시각

d. 사도행전의 방언은 말하는 외국어라는 시각

e. 사도행전의 방언은 듣는 은사라는 시각

f. 사도행전의 방언은 알지 못하는 말하는 언어와 알아 듣는 언어라는 시각

g. 고린도전서 방언은 실제 언어라는 시각

h. 고린도전서 방언은 엑스타시 음성이라는 시각

 

D. 사도행전의 방언 현현

1. 사도행전 2장의 방언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heterais glossais) 으로 말하기를(lalein) 시작하니라”(2:4)

여기서 방언은 배운 일이 없는 다른 언어이다. 오순절에 다락방에서 갈릴리 출신 제자들이 성령이 강림하시므로 다른 나라의 말을 하는 은사를 받았다. 고전적 내지 신 오순절주의자들이 방언을 말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연습을 하는 것은 여기 다락방의 장면과는 다르다. 청중이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dialektos)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2:8)라는 고백을 하는 것을 보아 다른 지역의 언어라는 점이 분명하다. 사도행전 2:6, 8에서 방언“dialektos” 이다. “dialektos”의 의미는 한 나라 또는 한 지역의 언어이다.

또한 사도행전 2장의 방언은 이적적으로 말하는(lalein) 방언이지만, 알아들을 수 있었기 때문에 통역이 필요 없었다. 이 방언은 이제 막 출생한 어린교회가 복음을 다른 지역의 말(외국어)로 전하는 일을 위하여 주어졌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나타난 이 방언 능력은 그들의 방언을 통한 복음 선교가 신적 기원과 후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불신자들에게 각인시키는 징표가 되었다.

2. 사도행전 10장의 방언

가이사랴의 로마 백부장 고넬료가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경건한 사람으로 회당 예배에 참석하고 있었지만, 고루한 랍비식 유대인들의 눈에는 그가 아직도 유대인과 교류하기에는 부정하고 불결한 이방인에 불과하였다. 천사는 고넬료에게 명하기를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부르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아직 선민의식과 유대인 전승의 편견의 올무에 사로잡혀 있던 베드로에게 비몽사몽간에 이상을 보여 주어 그가 지닌 편견을 깨우치셨다. 이어서 고넬료의 사신의 방문을 받고 성령의 명에 따라 고넬료의 집에 갔다.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강론하는 중에 성령께서 말씀을 듣는 고넬료의 집 모든 무리에게 갑자기 임하였고 성령 받은 자들은 방언을 말하였다.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45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46 이는 방언(glôssa)을 말하며(lalein)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47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침례 줌을 금하리요 하고”(10:44-47).

베드로가 47절에서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라고 한 점에 비추어 오순절 경험을 상기시키고 있다. 베드로는 할례자들의 힐란을 받고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11:17) 대답하였다. 그렇다면 여기 방언 역시 외국어 방언이다. 방언을 말하는(lalein) 이들은 하나님을 높였다.

 

3. 사도행전 19장의 방언

 

바울의 제3차 선교 여행 중 에베소 지역에 2년간 체류할 때 침례 요한의 12제자들에게 예수의 복음을 전하였을 때 그들은 완전한 복음의 의미를 이해하고 예수의 침례를 받았다. 이 때 그들은 성령을 받고 방언과 예언하는 은사를 받았다(19:6). 방언을 "말하는 (lalein)" 일은 이전의 오순절 때와 같은 표현이다. 여기서 방언을 말하고 예언을 한다는 것은 동일한 은사를 두고 사용된 동의어적 표현이다. 방언을 말하는 것은 사도행전 10:46에서처럼 하나님을 높이고 영광스럽게 하는 일이며, 예언한다는 것은 사도행전 2:11에서처럼 하나님께서 힘있게 하시는 큰 일에 대한 선포이기 때문이다.또한 사도행전 10:462장의 이적적인 외국어 은사와 연결된 것과 마찬가지로, 사도행전 19:6에서 요한의 제자들이 예언을 하였다는 말은 사도행전 2:17, 18의 대응어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D. 고린도전서 12-14장의 방언

오순절주의자들은 고린도전서 12-14, 특히 14장을 알아듣지 못하는 엑스타시 방언의 성경적 근거로 제시한다. 14장은 먼저 예언하는 일을(1-25), 그리고 다음으로 방언하는 일을(26-40) 다루고 있다.

1. 번역

고린도전서 14장의 방언 (tongues)에 대한 성경 번역은 다양하다.

(1) KJV - "unknown tongues"

방언 앞에 형용사 “unknown"이란 표현을 삽입하고 있다. 원문에 나오지 않는 어휘를 추가하여 번역한 것이다(고전 14:2, 4, 14, 19, 27). NKJV은 이를 바로 잡아 “unknown"을 삭제하였다. NASV, RSV, NRSV 역시 “unknown"을 배제하고 있다.

(2) NEB - “ecstatic utterance/speech/language,” 또는 “speech/language of ecstasy" (3) JB - “the gift of tongues"

(4) TEV - “strange tongue(s)"

(5) NIV - "tongue(s)", 그러나 난외 주에서는 "another language," "other languages"로 표기하고 있다.

(6) NRSV - "tongues", 사도행전 2장에서는 “languages로 표기

(7) 독일어 성경 - “language(s)"

(8) 중국어 성경 - 方言

(9) 일본어 성경 - 異言

2. 어휘 사용 특징

(1) 고린도전서 14장에 “tongue(s)"라는 표현이 17회 나온다. 이는 모두 희랍어 ”glossa“의 역어이다. 이 같은 말이 마가복음 16, 사도행전의 오순절 방언(2), 가이사랴의 방언, 에베소의 방언에 사용된 어휘와 모두 같은 표현이다.

(2) “방언을 말하다12회 나오는 바, 여기서 동사 말하다(speak)”는 희랍어 "lalein"의 역어로 같은 어휘가 사도행전 방언 사건과 마가복음 16:17에 나온다.

(3) glossaLXX와 고전 희랍 문학 용례에서 한결 같이 언어 기관이나 알아들을 수 있는 인간 언어를 지칭하고 있다.

(4) 이사야 29:2432:4에서 사용한 방언은 엑스타시한 언어로 볼 수 없다.

(5) 사도행전 2:4에서 사용된 형용사 heteros(other)가 고전 12-14에서는 나오고 있지 않은 점을 근거로 혹자는 고린도전서 방언과 사도행전 방언의 차이성을 주장한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2장의 경우 다른이라는 어휘는 각 지역에서 모인 청중들의 다양성을 전제로 할 때 어울리는 표현이 될 것이다.

(6) Origen 같은 사람은 고린도전서 14장에 나오는 희랍어 "laleo"(to speak)를 더듬는 불완전한 발음 “lalling" 같은 것으로 보았다. 이런 시각에서 고린도교회 방언을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으로 풀이하는 시각이 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4:29 기타 14:9의 용례에 비추어 보면, laleo는 못 알아듣는 어휘가 아니다.

(7) 고린도전서 14:21은 이사야 28:11을 인용하고 있는 바, 이사야는 앗시리아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다른 방언(heteroglossois)을 말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어 바울이 방언을 외국어로 보고 있는 증거가 되고 있다.

(8) 14:2의 비밀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pneumati-pneuma의 중성 단수 여격) 비밀(mysteria)을 말함이니라”(고전 14:2).

NASB영으로"in his spirit"으로 번역하여 인간의 영으로 보고 있다. 이는 원어에 없는 그의라는 말을 삽입하여 번역한 것이다. KJV“in the spirit"로 번역하여 인간의 영인지 성령인지를 확연하게 하지 않고 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방언 말하는 것을 성령께서 고취하는 영적 선물로 보고 있어(고전 12:10, 28, 30), 14:2영으로성령으로풀이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따라서 성령께서는 비밀을 말씀하시는 원천이 된다.

바울은 골로새서와 에베소서에서 10회 이상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바, mysteria를 감추인 것이나 비밀스러운 진리로 말하고 있지 않다. 그는 내 그룹에서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알 려져 있는 군사용어인 mysteria를 빌려,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그리스도에 관한 어떤 것을 함축시키고 있다. 즉 계시는 비밀 사상의 기초가 된다. 14:2의 비밀은 한 때 감추어져 있던 하나님의 진리가 이제 그 충만한 의미를 드러내 알려진 구원의 경륜을 지칭한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바로 이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를 말한다는 것이다. 이는 오순절주의자들이 주장한 것처럼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는, 또한 인간의 영으로 인간에게 말하는 그런 엑스타시한 언어가 아니다. 오로지 성령께서 알게 하신 그리스도에 관한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이다.

(9) 방언을 말하는 것은 불신자들에게 복음 선교의 표적(징표)이 되어야 한다. 바울은 방언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은사라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고전14:22) 이 말은 방언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전도하기 위한 은사임을 분명히 가르치는 말씀이다. 믿지 않는 국외자가 교회에 들어 왔을 때 혼잡스러운 방언으로 꽉차 있으면 미친 짓으로 보게 된다. 오순절 때에 불신자들은 외국어를 말하는 사도들을 보고 새 술에 취하였다고 비방하였다(2;13). 오순절에 방언의 은사를 주신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방언으로 복음을 듣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구원의 복음은 처음부터 각각 자기 방언으로 들어야 한다는 것을 성령께서 실연(實演)을 통하여 계시하신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4:23에서 불신 국외자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외국어를 무질서하게 말하는 예배를 보고 비방할 것이니 조심하라고 한 것이다. 바울은 방언이 교회를 세우는 것이어야 하고, 복음선교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다.

그런데 요즘 소위 방언이라고 지껄이는 것은 지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8:19)의 형태를 보이는 것 같다. 사람들은 고전14:2을 제시하면서 방언은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알아듣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요즘 성령을 받은 표는 교회에서 모든 교인이 마치 여름 논바닥의 개구리 소리 같이 지절거리고 있어 이는 분명히 고전14:28을 무시하는 형태이다. 결코 성경이 가르치는 방언이 아니다. 우리는 이런 속임수에 속을 필요가 없다. 성경은 분명한 것을 계시하셨기 때문이다.

 

(10) 방언에는 통역이 수반되어야 한다(14:27). 통역은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바꾸어 전달하는 행위이다. 이는 다른 지역에 복음전도의 필수사항이다. 고전 14장에는 분명히 방언을 알아듣는 사람이 있다고 가르친다. 그것은 통역하는 은사를 받은 사람을 통하여서다. 그렇기 때문에 방언을 하는 사람들은 통역하는 사람이 있을 때 하라고 한 것이다. 만일 사람이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말이라면 통역도 있을 수 없다. 통역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 방언을 알아듣는 사람이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고전14:2의 말씀은 공중 집회에서 통역하는 사람이 없을 때 혼자 하는 방언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런 경우는 교회에서 방언을 하지 말라고 분명히 지시하였다(고전14:28).

이 방언은 질서있게 하고 통역을 하여야 한다.“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다불과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고전 14:27)

 

(11) 사도 바울의 방언 능력

사도 바울은 당시 유대인들의 통용 언어인 아람어 외에도 여러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으므로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전 14:18)고 하였다.

바울은 이교도들 사이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 예수님과 사도들 당시에 유대인들의 통용 언어였던 아람어 외에도 빈번히 방언을 사용해야만 했다. 고린도는 로마제국의 여러 지역 사람들이 거쳐 가는 거대한 항구 도시로 상업의 중심지였다. 고린도교회의 어떤 이들은 다른 교인들이 잘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들을 자랑삼아 사용하는 일이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바울은 그들에게 통역자를 세우든지 아니면 그렇게 하지 말라고 권면했는데, 왜냐하면 그 말하는 사람 외에는 회중 가운데서 아무도 그것으로 인해 유익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참고, 고전 14:4).

 

III. 재림교회와 성령운동

1. 성경주석

오순절의 방언 은사는 인간의 완전한 언어로 되어 있었다. 인간의 어떤 언어와 일치될 수 없는 지껄이는 소리들은 진짜 은사가 왜곡된 것이 아니라 가짜 은사이다 (재림교 성경주석, 한국어판, 12, 619).

“ the gift in Corinth ought to be explained on the basis of the manifestations on Pentecost (Acts 2) and on other occasions (Acts 10:44-46; 11:15; 19:6) and that therefore the purpose was clearly to enable men to preach the gospel in tongues formerly unknown to them. Passages like 1 Cor. 14:2, which indicate that no man understands, they interpret as meaning that no one present understands, although foreigners might. ”(SDABC, 6BC 796).

 

2. 사도행적

불의 혀 모양은 그때에 제자들에게 내려 주신 선물의 상징으로서,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그들이 이제까지 알지 못하였던 언어들을 유창하게 말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불의 모양은 사도들이 일하는데 가져야 할 불붙는 열정과 그들의 사업에 수반될 능력을 의미하였다.”(행적, 39)

이러한 언어의 다양성은 복음 선포에 큰 장애가 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적적인 방법으로 사도들의 부족함을 채워 주셨다. 성령께서는 그들 홀로로는 일생 동안에도 이룰 수 없었을 일을 그들을 위해 해주셨다. 사도들은 이제 그들이 위하여 수고하고 있는 사람들의 언어들을 정확하게 말하면서 널리 해외에까지 복음의 진리를 선포할 수 있었다. 이러한 초자연적인 선물은 세상에서 그들의 사명이 하늘의 인정을 받고 있다는 강력한 증거가 되었다. 이 때로부터 제자들의 언어는 그들의 본국어로 말하든지 외국어로 말하든지 깨끗하고, 간결하고 정확하였다.”(행적, 39-40).

 

3. 재림교회 초기 역사에 나타난 방언현상

재림교회는 이런 방언하는 교회 대열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지 않다. 엘렌 화잇 생존 시 재림교회 내 일각에서 방언을 필두로 하여 엑스타시 체험운동이 일어났지만 이는 곧 극복되었다. 초기의 엑스타시 운동은 고성찬양, 몸이 넘어짐, 신유, 방언 등 현상이 수반되었다. 진정한 예배의 영적 생동력 현상이 나타나는 중에도 이상스러운 현상이 수반되어 혼란스러운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를 두고 엘렌 화잇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나는 사단이 자기의 대리자들을 통하여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일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진리를 거역한 성직자들을 통하여 일했는데 그들은 자기들에게 멸망을 가져올 거짓을 믿을 만큼 무서운 기만에 빠져 있었다. 저들이 설교할 때나 기도할 때에 어떤 이들은 힘없이 엎드러지기도 했는데 그것은 성령의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고 자기의 대리자를 유혹하고 그들을 통하여 사람들을 속인 사단의 힘이었다. ”(초기, 43-44).

방언하는 자가 어떤 인디안 말이라고 하여 해당 언어 인디안 사람을 청빙하여 검증하는 헤프닝도 일어났다. 북 위스콘신 주에서의 거짓 성회이론과 방언현상 등 광신적 현상을 두고 엘렌 화잇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사단이 그의 마음을 지배했으므로, 그는 북부 위스콘신에서 진리의 사업에 큰 손해를 주었다.”(1증언, 335).

포트랜드에서 전개된 방언은사운동에 대하여서도 유사한 기별을 주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은사를 그들이 가지고 있다고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이 그런 은사들을 받지 않게 해주시기를 바란다. 이 은사들이 그들에게 어떤 일을 하는가? 이 은사들을 활용함으로 그들이 믿음의 연합을 이루고 있는가? 그들은 불신자들에게, 하나님이 진리로 그들과 함께 계심을 확신시켜 주는가? 각각 다른 견해를 가진, 불협화음을 일으키는 이런 사람들이 함께 모여 상당한 흥분 상태에 빠지고 미지의 방언을 지껄인다면, 그들은 불신자들이 다음과 같이 말할 수밖에 없도록 빛을 비추는 것이다. ”(1증언, 418-419).

 

4. 각 지역 방언으로 전 세계의 복음 전도

700개의 언어와 1,000개의 방언들을 사용하는 교인들을 가진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209개국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있다. 교인들 중 거의 90퍼센트는 북미 지역 밖에 살고 있다. 86개의 대학과 대학교, 834개의 중고등학교, 4,166개의 초등학교, 125개의 성경통신학교, 36개의 외국어 학원 등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51개의 출판소는 190개 언어로 인쇄물을 출판하고, 우리의 단파 라디오 방송국은 세계 인구의 약 75퍼센트에 방송을 한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선교 사업에 풍성하게 축복하셨다”(기본교리 27, 316).

 

IV. 결론

소위 성령침례의 외적 표적인 방언은 성령 침례의 위조품이다. 고린도전서(12:8-10; 14)만 방언을 성령의 은사에 포함시키고 있고, 로마서(12:6-8)와 에베소서(4:7-13)는 방언을 성령은사에 포함시키고 있지 않다. AD 57년 봄에 기록된 고린도전서에서 방언을 은사에 포함시키고 있지만, AD 57-58 겨울에 기록한 로마서와 AD 62년에 기록한 에베소서는 방언을 더 이상 성령의 은사로 열거하고 있지 않다. 성령의 은사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에 어떤 것은 목록상 단회적으로 나오고, 다른 어떤 것들은 다른 목록에도 중첩하여 나온다. 게의 목록표에 모두 나오는 것은 방언이 아니고 예언이다. 성령의 침례의 진정한 표적이 있다면 차라리 예언의 은사를 지목하여야 할 것이다. 바울 자신도 예언은사를 선호하였다(고전 14:5). 바울은 고린도교회에서 방언이 문제를 야기하고 있어 이를 제제하고자 방언문제를 기록하고 있지, 방언을 권고 고취하기위하여 기록한 것이 아니다. 바울은 성령의 은사보다 더 성령의 열매를 강조하고 있다.

오늘날 방언 은사운동이 온 세계 교회를 휩쓸고 있는 것은 마지막 때의 짝퉁 오순절 운동이 되기 때문이다. 종말론적으로 이 방언운동은 교회들의 연합을 이루는 방편이 되고, 짝퉁 늦은비 성령운동 예언의 성취가 될 것이다.

마지막 때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에 신앙의 토대를 두는 것이 안전한 방책이 된다. 은사보다 은사를 주시는 분에게, 성령의 체험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체험에, 가장 작은 것보다 예언은사와도 같은 다른 은사에 역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그리스도를 넘어선 완전한(충만한)복음이란 있을 수 없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10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2:9-10)가 되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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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AHN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