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 전통의학을 적용하는 교회를 보며
민간 전통의학을 적용하는 교회를 보며
들어가는 말
침구(鍼灸, acupuncture and moxibustion)하는 교회에 나가면서 그에 대한 이해를 어떻게 할 것인지가 내 개인적인 과제가 된지 오래되었다. 돌보는 신앙공동체로서 침구 특성화를 통하여 구령사업에 매진하는 현장을 찾는 분들이 있다는 것 자체가 그 존재의미를 밝히지 않나 싶다. 그렇다고 교회가 고대 동양의 철학과 종교에 그 신비적 뿌리를 둔 민속적인 치료의 철학과 종교의 토양까지도 수용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에 대한 한계 설정을 필요로 한다.
침구의 역사와 발전
침술은 2500년 전의 의학서 黃帝內經에도 나올 만큼 고대 중국에서 발생했다. 전통적인 중국 의학은 중국 종교의 소산물이다 (Reisser and Weldon, New Age Medicine, 54). 그 핵심에는 이원론적 음양의 기와 오행 신념이 깔려 있다. 그러나 이를 토대로 하는 치료행위는 전문가로서 소양을 갖춘 사람들뿐만 아니라, 비전문가인 일반 대중들도 쉽게 할 수 있는 간편한 치료방법도 들어 있다. 그리하여 다수의 대중들이 이 치료를 선호하는 양상으로 발전했다.
1949년 모택동 휘하의 중국 공산당 정권에서는 이 전통의학을 부흥을 강조했다. 그러나 1971년 까지는 미국을 위시하여 서구사회에서는 이 중국 전통의학에 대한 이해가 별로 없었다. 동년 뉴욕타임스 (The New York Times)의 논설평론가이며 동 신문사의 부회장이었던 James Reston이 중국 여행 시 체험한 사건이 전환점을 만들었다. 여행 중에 맹잠염을 앓은 그가 수술을 받은 후에 위염이 발작하여 고통을 받던 중, 침술로 거뜬히 치유를 받았다. 미국에 돌아간 후 그는 이 체험을 1971. 8. 22자 뉴욕타임스에 기고하였다. 그 결과 침술이 대중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일단의 의사들이 중국 현장을 방문하여 참관, 그 학술적 의미를 조명하는 과학 저널에 기고하는 일들이 있었다. 그 이듬해인 1972년 닉슨 대통령이 중국과의 외교관계 수립의 여파로 문호개방과 더불어 침술의학의 관심도가 서구사회에 유포되어 갔다. 그리하여 서구사회에서 침술은 뉴 에이지(new age)의 대안 치료 방식으로 자리를 굳혀 갔다. 저명 정치가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윈스틴 처칠경도, 유명영화 배우들도, 유명 스포츠 선수들도 이 침술의 시술을 받는 열풍이 불었다.
경락과 기
침술은 침을 사용하여 기(氣)의 흐름을 자극한다. 기는 음양이라는 이원적인 우주적 에너지라고 한다. 인체에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어떤 기운이 흐른다고 한다. 해부학적으론 존재할 수 없지만 분명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인 기(氣)가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는 유물론적이다. 이 유물론적인 기의 흐름은 일정한 계통을 따라 흐르는데 경(經)은 곧게 수직으로 흐르는 큰 줄기를 말하고, 락(絡)은 옆으로 흐르는 가지를 말한다. 즉, 경락이란 기가 흐르면서 피부와 피하조직에 나타나는 반응점이 연결된 선이다. 한의학에서는 이 경락에 침과 뜸 치료를 하여 많은 효과를 보고 있다. 인체 내에 수많은 작은 경혈이 있지만 그 중에도 14개의 불가시적인 경혈이 중요하다. 장부의 각 질병 별 경혈점들을 숙지하는 것이 침술과 뜸 치료의 성패를 좌우한다. 침술은 바늘로 찔러 경혈을 자극하고, 뜸은 열로 경혈을 자극해서 우주적 에너지의 흐름을 원활하게 회복시킨다. 그러나 거미줄처럼 분포되어 있는 그 많은 경혈점들을 모두 숙지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이런 침술과 듬 치료의 근본 바탕에는 중국식 음양오행 사상이 바탕이 되어 있다.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
음양오행설은 우주나 인간사회의 모든 현상 및 만물의 생성소멸을 陰陽과 金木水火土라는 五行의 소장(消長), 변전(變轉)으로부터 설명하려는 학설이다. 동양철학에서 음양은 이원론적인 것으로 우주 만물에 두 가지 요소의 대립적 관계를 상징한다. 이 양극은 삶의 모든 기본적인 대립관계를 다 망라한다. 단순하게 말한다면 음은 - (마이너스), 양은 + (플러스)를 뜻한다. 밤, 달, 어둠, 여자, 땅은 음에 속하고, 낮, 해, 밝음, 남자, 하늘은 양에 속한다. 심장은 양에 속하고 신장은 음에 속한다고 하는 것은 아리송하기까지 한다. 더 나가서 선과 악, 능동과 피동, 적극과 소극, 여름과 겨울도 양과 음으로 이해하면서 더 나가서는 인간관계나 사회적 관계의 두 축이 되는 요인으로까지 본다. 음양 두 사이가 비록 긴장관계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당장 적대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다. 음양은 수레의 두 바퀴와도 같다고 한다. 이 대립되는 두 사이에 상호의존과 상극의 이치를 오행적으로 적응하여 설명하여 나간다.
오행은 다원적이다. 심지어 인체 내 장부(臟腑)까지도 연계 적용하여 그 건강상태를 풀어낸다. 한의학에서는 인체 장부의 다섯 기관 즉, 간장(肝臟), 심장(心臟:염통), 비장(脾臟:지라), 폐장(肺臟:허파), 신장(腎臟:콩팥)을 중요시하며, 이 오장(五臟)을 오행(五行)에 각각 대응시킨다. 그것은 각 장부의 기능이 각각의 오행이 가지는 속성과 비슷하기 때문으로 본다. 오행에 속한 요소들의 배합 비결이 곧 질병 처방과 질병치료의 관건이 된다.
우주적 이원론적 기가 인체 내에서 운행할 때 특히 경혈이라는 불가시적 통로를 통하여 흐른다. 음과 양의 에너지가 조화를 이루고 있을 때 건강과 활력이 있다고 본다. 반대로 두 사이에 부조화가 야기 될 때 우주적 기의 흐름이 막히게 되어 고통과 질병이 야기된다고 본다. 이것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귓불에 금속을 매달게 하므로 음을 보완시키기도 한다. Felix Mann은 The Merdians of Acupuncture에서 기를 ‘전기적 감극(減極)의 파(波)’로서 자율신경계의 섬유인 경혈을 타고 운행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London: William Heinemann medical B ooks, 1964), 13>. 그는 기라는 것을 전기파로 보고 있다.
기의 실체
북미지회 부회장을 역임한 Manuel Vasquez 박사가 로마 린다 의대를 졸업하고 한 때 통증치료소장을 역임하면서 침술을 이용하여 통증치료를 한 Peter Yuen 박사에게 경락 (meridians and collaterals)에 관한 문의를 한 바 있었다. 즉, 한의학의 경락이 서구 의학의 무엇에 상응한지 물었다. Yuen 박사는 ‘모릅니다. 매우 어려운 점입니다’라고 하면서 Kirlian photography에서 방출되고 있는 기운이나 영광(靈光, aura)에 가깝다고 대답하였다. 베이징 국제 침술센터 Will Baron가 Vasquez 박사에게 ‘기’에 관하여 “해부학적 신경계와 공존하는 것으로 보이는 신비한 에너지 시스템”으로 정의를 내렸다. 인간의 이해한계를 넘어선 기에 관한 논의는 오행의 상극-상생과 더불어 한의학의 미스터리 분야로 남아 있다. 이 분야는 실증적 증명보다는 형이상학적 가설로 보일 수밖에 없다. 사실상 각 분야를 음과 양으로 구분하는 것과 인체 장기를 오행에 적응시키는 작위는 다분히 인위적이고 작위적이다. 그런대 인간계와 자연계의 모든 사상(事象)의 상관관계를 특히 오행과 관련시켜 적용시켜 설명하므로 길흉과 운세까지도 예언한다는 음양오행설은 증명되지 못한 가설에 토대를 두고 있다.
개인적 의견
이 글을 마치면서 지적하고 싶은 점은 다음과 같다. 인체 내 무수한 경혈을 나타내는 경혈은 인체 내 신경과 혈관 흐름의 교차지점으로 보인다. 큰 교차지점이나 작은 교차지점이 갖고 있는 사명은 그것들이 원할한 흐름이 되도록 해야 하고 그 원할한 흐름을 위하여 침술이나 뜸을 사용하고 있다는 판단이 든다. 흔히 '기가 막힌다'라는 말을 하는 것에서 보듯이 막힌 것을 뚫어주어 원할하게 흐르게 해야 한다. 그런데도 구태여 기를 가리켜 신비한 우주적, 유물론적인 에너지라고 하므로 추상화, 형이상학화 시킨다면 이해하기가 어렵게 된다. 음양오행에 기초한 사주팔자 등 운세 판단은 근거없는 인간들의 가설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동양철학이나 종교적 배경을 배격한 침구시술이 바람직하다. 경혈의 원할한 흐름을 위하여 뉴스타트적 삶의 방식이 필요하다. 특히 스트레칭과 근육 운동을 하는 일 그리고 적당한 마사지나 지압이 인체 내 혈액의 흐름을 증진시킨다.
엘렌 화잇 여사의 활력 증진의 길
엘렌 화잇은 “활력(vital force)”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남겼다. 재림신도는 ‘기’라는 유물론적인 모호한 말보다 ‘활력’이라는 단어 사용을 선호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엄청나게 많은 활력(vital force, vital energy)을 주셨으므로 인간은 비뚤어진 습관의 축적의 결과로 임한 수많은 질병들을 저항할 수 있었으며, 6천년 동안 생존할 수 있었다. 이 사실 자체만으로도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을 당시에 그에게 베풀어 주신 능력과 전기력에 대해 충분한 증거가 된다. 2천년 이상 범죄하며 비열한 정욕에 몰두한 다음에야 인류에게 어느 정도 신체적 질병이 초래되었다. 만일 창조 당시의 아담이 현재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도 이십 배 이상의 활력을 부여받지 못했더라면, 현재와 같이 천연 법칙을 어기는 습관을 가진 인류는 멸절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처음 강림하셨을 때, 인류는 너무나 신속히 퇴화되고 있었으므로 축적된 질병은 그 시대의 사람들을 짓눌렀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재앙과 재난을 가져왔다.
현재 시대의 비참한 상태가 내 앞에 제시되었다. 아담이 타락한 이후로 인류는 퇴보되어 왔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남녀들이 처한 현재의 통탄할 만한 상태에 대한 이유가 내게 제시되었다. 어느 정도 신체적·정신적·도덕적 퇴보를 저지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일을 해야 할는지에 대해 생각할 때에 내 마음은 병들고 피곤해졌다.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현재처럼 연약한 상태로 만들지 않으셨다. 이와 같은 사물의 상태는 섭리의 역사하심이 아니었으며, 인간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될 것은 그릇된 습관과 남용 때문에, 또한 하나님께서 인간의 생존을 주관하도록 하신 법칙들을 범하였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다. 식욕의 방종의 유혹을 통하여 아담과 하와는 최초로 높고, 거룩하고, 행복한 상태에서 떨어졌다. 또한 동일한 유혹을 통하여 인류는 연약해졌다. 그들은 식욕과 정욕이 왕좌를 차지하도록 허용했으며, 이성과 지성을 그 아래 굴복시켰다.
신체 법칙을 어기는 일과 그 결과로 인한 인간적 고통이 너무나 오랫동안 만연했기 때문에 남녀들은 질병과 고통과 무기력함과 일찍 죽는 등의 현상태가 마치 인류에게 지정된 몫이라도 되는 것처럼 바라보고 있다. 인간은 그의 창조주의 손으로부터 완전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왔으며, 또한 활력으로 충만케 되었기 때문에, 1천년 이상이 지난 다음에야 그의 부패한 식욕과 정욕과 신체 법칙을 어긴 결과들이 인류에게 감지되기에 이르렀다. 좀더 최근의 세대들은 모든 세대들이 느꼈던 것보다도 더 신속하고 무겁게 연약함과 질병의 압박을 느끼고 있다. 식욕과 정욕에 탐닉함으로 말미암아 활력은 현저하게 약화되었다.
아담으로부터 노아에 이르기까지의 부조들은 극소수의 예외를 빼놓고는 거의 1천년 가까이 살았다. 노아 때로부터 수명은 짧아졌다. 질병으로 고생하는 이들이 모든 도시와 촌락과 마을로부터 고침을 받기 위하여 그리스도께로 이끌려 왔다. 그 시대 이후로 이어지는 세대를 통하여 질병은 끊임없이 증가되어 왔다. 생명의 법칙을 어기는 일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사망률이 두려울 정도로 증가해 왔다. 인간의 수명은 짧아졌고, 그리하여 현 세대는 창조된 후 첫 수천년 동안 살았던 세대들이 활동기에 들어가기도 전인 나이에 무덤으로 내려간다.”(3증언, 138-140).
‘활력’을 사용한 문맥을 보면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부여하신 생명의 기대 연한 총량과 관련되어 있다. 천연 건강법칙을 벗어난 생활과 죄악에 빠진 생활이 활력을 고갈시킨다. 마약 사용은 활력을 파괴한다(2SM 281), 의심은 활력을 감축시킨다(3BC 1146). 유해식품과 드링크 류 (2SM 414)와 식사 시간 이외 먹는 일은 활력을 시들게 한다(CG 388), 과도한 성생활(2T 472)과 정욕의 방종은 활력을 고갈시킨다(3T 138). 자위행위는 뇌와 몸의 활력을 약화시킨다(4T 97). 과로는 활력을 감소시킨다(Te 139). 번민 걱정은 활력을 감축시킨다(3BC 1146).
한의학의 침구요법을 추구할 때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고 뉴 에이지운동의 범신론적 세계관을 벗어나야 한다.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전적으로 신뢰하면서(출 15:26). 여호와는 라파(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상심한 자의 마음과 병든 자의 신체를 고치신다. 이 세상에는 두 개의 치료 권세가 있다. 하나님의 치료와 사탄의 치료가 그것이다. 강신술이니나 오컬트에서도 치료가 일어난다. 어느 치료를 의지할 것인가?
참고서: Manuel Vasquez, The Main Streaming of New Age. Nampa, Idaho,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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