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The Trinity)교리에 대한 이해
I. 삼위일체 교리의 중요성
삼위일체 교리는 그리스도교 신앙에 있어서 핵심적인 교리이다. 신자들은 삼위의 이름을 찬양하고, 신앙고백을 하고 침례를 베풀고 기도한다. 또한 이 교리가 그리스도교를 타 종교와 구분을 하게 한다. 이단의 뿌리에는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빗나간 이해가 들어 있다. 따라서 삼위일체의 교리는 그리스도인 신앙의 거짓 해석을 교정한다.
II. 삼위일체의 교리 의미
“삼위일체(trinity)"라는 표현이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동 표현은 성서적이다. Tertullianus (c.155-220)가 이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성경은 하나님이 삼위(3인격)로 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삼위일체 교리는 구약성경에서도, 그리고 신약성경에서 는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런 현상은 하나님의 계시와 구속 사역의 점진적 계시 현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오순절 사건은 이런 명료성을 확립한 지반이 된다. 이 교리는 분명히 특별계시의 교리로서 자연에는 계시되지 않은 교리이며, 인간의 이성으로는 발견할 수 없는 교리이다. 삼위로 구성된 신성이 한 하나님이 되고 같은 신적 본질을 지닌 것은 경건의 비밀에 속한다(딤전 3:16). 그러기에 사람들은 이 경건의 비밀을 이해하는 일에 있어서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삼위일체 교리가 신앙의 핵심 진리가 된다는 양면성을 담고 있는 점을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계시된 메시지를 통하여 그 비밀의 핵심적인 부분은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신적 본질, 뜻, 목적에 있어서는 하나 되시나, 영원하신 성부, 성자, 성령이라 불리우는 삼위(3인격)은 각각 자기 신성과 자기 신적 본질(autotheos, autousia)을 가졌지만 통일, 조화(unity)를 이루면서 존재한다. 삼위 사이에 통일성과 조화성(unity)이 있다는 것은 외적 구분이 가능하면서도 조화와 연합 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삼위일체를 각위 사이에 구분이 불가능한 합성된 단위(unit) 개념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다.
이 삼위는, 여러 사람의 여러 인격들처럼, 전혀 다른 세 인격이 아니다. 삼위는 같은 신적 본질, 동등한 인격이지만 다른 현존(subsistence)으로 존재한다. 신적 존재에 있어서의 이들 삼위는 상호간 인격적 관계를 가지며, 각위가 완전한 하나님이시다. 그 위들은 그 본질적 존재에 있어서 동등하여 한위가 다른 위에서 종속되지 않는다. 그러나 구속사업을 위한 역할 분담 질서를 위하여 삼위 사이에 기능상의 종속성을 표출한 성경절들이 나타난다. 그리하여 구속의 경륜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성부가 제1위요, 성자가 제2위요, 성령이 제3위로 라고 볼 수 있는 위상으로 나오지만 삼위 하나님은 상호 연대하여 구속사업을 하신다. 삼위 하나님께서는 상호간 존중하고 경의의 관계를 맺는 완전한 이해, 완전한 이타적 사랑, 역할을 분담하는 완전한 협력과 연합, 및 하나 되는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어 가정, 신앙공동체인 교회, 인간사회의 여러 공동체의 지향 모델이 되고 있다. 혹자가 성부 하나님은 죄인을 처벌하기 원하며, 성자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하기 원하신다는 시각은 이런 완전 조화관계와 신의 속성을 오도하는 이해에 불과하다. 성부 하나님은 구속 사업을 사랑으로 주도하시며, 성자 자원하여 자기를 비하, 희생하시어 구속사업을 이루신다. 사랑으로 인간을 구원하는 성령께서는 사람들을 변화시켜 죄를 싫어하는 새 사람이 되도록 역사하신다.
III. 역사적 개관
고대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통일성을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Shema의 기도문인 신명기 6:4( "Hear, O Israel, the LORD our God, the LORD is one."-“Shema Yisrael Adonay Elohenu, Adonay echad”)을 매일 하루에 두 번 반복 암송하였다. 이는 다신교 고대 사회에서 일신교적 선포이다. 쉐마의 기도문은 하나님이 한분이시라는 선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구약성경 도처에 하나님은 하나 되심(oneness)을 강조하고 있다(신 4:35, 39; 느 9:6; 시 86:10; 사 44:6; 슥 14:9). 유대교는 삼위일체교리가 없다. 하나님의 유일신적 개념에 역점을 두고 있는 것이 유대교이다. 그렇다면 쉐마의 기도문에는 삼위일체의 여지가 없는가? 이 점은 후술키로 한다.
제1세기 그리스도인들은 삼위 하나님을 신봉하는 일에 아무런 모순을 느끼지 못하였다. 그들은 삼위하나님 존재를 선언하였지만 논증하지는 않았다. 1세기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하나님 되심에 대한 이의가 없었다.
복음이 헬라 세계에 전파되어 많은 이방인들의 개종이 일어나면서 삼위 사이의 관계를 정의내리고자 하는 시도들이 일어났다.
A. 초기교회사
2-3세기에 삼위일체 신관과 관련하여 세 가지 사상적 조류가 나타났다.
(1) 종속론
사도 시대가 지난 이후 몇 세기 동안 상당수의 교부들(Irenaeus, Origenes 등)은 종속론자들이었다. 즉, 성부께서 세상을 창조하고자 아들과 성령을 발출 내지 유출하셨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절대적 통일성과 초월성을 강조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영원한 삼위의 공존성을 파괴하였다. 오리게네스(185-254)는 하나님의 단일성을 강조했지만, 이보다는 위격의 구별성을 더 강조했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성부만이 하나님이다. 로고스와 성령의 신성은 성부로부터 파생된 피조적 존재인 것이다. 위격을 표현하기 위하여 그는 ‘휘포스타시스’라는 말을 사용했다. 이로써 성부와 성자는 위격적으로는 성부와 다르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단일성을 표현하려고 성자와 성령이 성부와 연합되어 있다는 ‘호모우시오스’라는 말을 썼다. 그 결과 엄밀한 의미에서 성자께 기도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성자가 성부 아래 있듯이, 성령도 성자 아래 있다는 차등 위계적인 신론을 펼쳤다. 이는 그가 신플라톤 사상을 원용하여 신론을 전개한 결과이다.
(2) 역동적 군주론(Dynamic Monarchianism)
이름이 암시하는 대로 군주론은 신성의 통일성을 강조한다. “군주”(monarch)는 문자적으로 ”유일한 통치자“를, "역동( Dynamis)"은 “권능”을 뜻하는 헬라어에서 유래한다.
Theodotus 는 그리스도 안에 있던 신성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비인격적 권능(dynamis)이고 하나님 자신은 아니라고 보았다. AD 195년에 이 주장은 정죄 받았다. AD 260년 경 안디옥교회의 감독 Paul of Samosata (260-270 안디옥 감독)는 이 역동적 군주론을 발전시켰다. 예수는 수침 시 Logos를 받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이는 일종의 양자론적인 기독론이다. 그래서 그는 보통 인간 예수와 구분되는 존재가 되었다. Logos는 비인격적인 하나님의 힘이어서 이 Logos를 받은 예수는 수퍼스타가 되었다. 모세나 선지자들 안에도 로고스가 거주하였지만 예수의 경우 양적으로 그들보다 훨씬 능가하는 거주였다. 예수가 자신의 고유한 신성을 갖지 못하고 참된 인간 영혼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신성한 능력이 예수의 인간 육체에 생기를 넣어 주었다고 가르친다. 역동적 군주론자들은 신성의 통일성을 견지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을 완전히 부인하여, 그를 단지 하나님이 택하여 메시야가 되게 하고 신성의 위치에까지 격상시킨 단순한 인간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이 이론의 변형된 형태인 양자론(Adoptionism)에 따르면, 인간 예수는 완전에 도달했고 침례 시에 하나님의 아들로 입양되었다. 사모사타 바울의 양자론은 AD 268년 안디옥 회의에서 배척 받았다.
(3) 양태론적 군주론(Modalistic Monarchianism)
Sabellius (c. 215)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하나님과 동일시하였다. 성부, 성자, 성령은 하나인 동시에 동일 본질에 속하기 때문에 그 이름으로써만 구분된다. 그는 태양, 열, 광선의 상호관계 논리를 삼위에 비유적인 적용을 하여 아버지는 태양, 아들은 광선, 성령은 가열 능력으로 보았다. 요컨대 삼위는 같은 하나님의 현현하시는 존재 양식으로 보았다. 삼위의 각 칭호는 시대별로 하나님의 현현 양식일 뿐이다. 신성에 역점을 둔 이 입장에서는 그리스도가 참된 완전한 인성을 지녔다는 점을 부정한다. 역동적 군주신론과의 차이점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하나님과 동일시하였다는 점에 있다.
양태론적 군주론자들은 한 하나님이 다른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냈다고 가르쳤다. 그들은 인격의 구분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삼위일체적인 성격에 관한 신조를 완전히 버렸다. 그들은 아버지와 아들의 참된 신성을 인정했으나, 그 둘은 동일한 신적 존재에 대한 서로 다른 명칭에 불과하다는 설명을 첨가했다. 이 견해는 종종 Sabellianism 또는 성부수난설(Patripassianism)이라고 불리는데, 그것은 아마도 성부가 성육하여 아들이 되었고 그 후에 그리스도로서 고난을 받고 사망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와 비슷하게 부활 시에 아들은 성령이 되었다. 이는 Noetus (180-210), Praxeas(c. 190 in Rome) 등의 사상이 발전된 주장이다.
B. Arian 논쟁과 Nicea 회의 325 homoousios/heteroousios/homoiousios
Constantine 황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의 실체(substantia)에 관한 논쟁이 그리스도교의 통일과 제국의 평화를 교란하는 것이라는 이유로 325년에 Nicea회의를 소집하였다. 이 회의의 두 주역은 아리우스와 아다나시우스이었다.
substantia(substance)는 사물의 근저에 있는 것, 즉 사물의 가장 본질적인 실재를 의미한다. 이 두 사람이 이 용어를 중심으로 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의 본질을 어떻게 보았는가?
1. 아다나시우스(Athanasius, ca. 296-373)
(1) 아다나시우스는 황제가 정치적 후원한 아리우스의 빗나간 기독론을 끈질기게 배척하면서 대항한 알렉산드리아 감독(328-373)이었다. 그는 다섯 차례나 감독직에서 추방당하였으며, 20여 년간을 망명 생활을 하였다. 그는 체계적인 신학자이라기보다는 목양자적 모습이었다. Against the Heathen(c. 318), On the Incarnation(c. 318), Against the Arians(c. 335) 등을 저술하였다. 그가 사망한 이후에도 아리우스 논쟁은 계속되어 갔다. 그러나 그의 신학 유산은 콘스탄티노플 회의(381)에서 최후의 승리를 하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2) 그는 그리스도의 본성을 성부 하나님의 본성과 동일 본질(homoousia)로 보았다. 이 homoousia는 homo와 ousia의 합성어로, homo는 ‘동일한,’ousia는 실체(substantia)를 뜻한다. ousia는 같은 계층에 속한 구성원으로서 공통적으로 지닌 동일성, 내적 특성으로 성자의 ousia는 성부와 성자의 신성 및 공동 영원성을 지녔다고 보았다. 그의 이런 사상의 근본적인 동인은 구원론에 초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즉 예수 안에 피조된 半神半人적인 본질만 있다면, 그를 통한 구원은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3) 그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연합과 성부-성자 사이의 동일본질(homousios)론을 강조하였다. 그는 그리스스도교의 진리를 철학적 구도 안에서 이해하는 것을 배척하고 성경을 중심으로 전개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의 본질을 구원론적 차원에서 접근하였다. 구원과 창조의 근원은 같다. 구원에는 창조의 권능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본질이 성부와 동일 본질이 아니라는 아리안주의는 인간의 구원이 불가능하다고 보아 아리안주의를 배척하였다. 만일 그리스도가 성부의 본질보다 낮은 본체의 하나님이라면, 그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완성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타나시우스는 ‘호모우시오스’가 성자의 완전한 신성뿐 아니라 동시에 신성의 단일성까지도 표현한다고 해석했다. 그러면서도 용어 사용에 대해서는 유연한 자세를 취했다. 초기에는 성부와 성자의 단일성은 고려하지 않고 로고스의 신성만 강조했지만, 후기에는 신성의 단일성을 강조하다 보니 위격들 간의 구별이 모호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는 성부의 신성과 성자의 신성은 동일하다는 주장을 하면서 성부와 성자를 구별하였다. 그러므로 아리우스派가 비난하듯이 그가 양태론에 빠진 것은 아니지만, 양 위격 간의 구별을 분명하게 제시할 수 있는 ‘위격’이라는 용어가 그에게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2. 아리우스(Arius, 250 또는 256-336)
(1) 리비아 출신으로 안디옥 Lucien 문하생이었으며, 알렉산드리아교회 감독으로 철학적인 신의 개념을 기초로 하여 유일신 사상을 전개하였다. 신은 한 분으로 나눠질 수 없는 본질을 가졌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신성은 성부의 신성과 동일할 수 없는 차별성을 지닌 것으로 추론하였다. 그는 신성의 단일성과 종속설을 철저하게 고수했다. 성부의 본질은 초월적이고 불변하므로, 타자에게 수여될 수가 없다. 성부 이외의 모든 타자들은 피조물이요, 無로부터 피조되었다. 신의 절대 통치권 옹립에 토대를 둔 그의 기독론은 Thalia 저술에 잘 나타났다.
(2) Thalia의 그리스도론
* 성부 하나님은 성자를 창조하시기 전에 홀로(Monad) 존재하셨다. 즉, 아버지가 아니신 때 가 있었다. Dyad 후에 아버지가 되셨다.
* 말씀은 항상 하나님과 함께 계신 것이 아니었다.
* 아버지는 아들에 선재하시었다. 성자 하나님은 낳기(begetting)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 다. 성자는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그리스도는 무 존재(non-being)로부터 나왔다.
* 그리스도는 다른 만물처럼 하나님의 뜻에 따라 만들어진 피조적 존재(creature)이다.
* 성자가 성부와 함께 영원하다면 유일신론에 금이 간다고 보았다.
* 만물이 창조되고 만들어진 것처럼 아들도 하나님의 의지에 의하여 존재의 시작이 있게 된 피조된 존재이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존재하게 되었다. 모든 존재가 본질상 하나님과 다른 것처럼 말씀도 아버지와 다르다 (heteroousios).
* 그리스도는 시작이 없으신 성부와는 동등하지 않은, 즉 하나님이 낳으신 분이다.
* 성부는 인간을 직접 창조한 것이 아니고 시간 속에서 또는 시간 이전에 먼저 로고스를 창 조한 후 이 로고스가 인간을 창조하였다. 아버지는 이 세상을 직접 창조하지 않았고 아들 이 창조하셨다. 아버지는 낳으신 분(Begetter)이고, 아들은 낳아지신 분(begotten)이 다.
* 성자의 상징-말씀, 아들, 지혜, 권능, 빛
그리스도를 나타낸 이런 상징들이 아버지에게 적용되는 경우와는 사뭇 차이가 있다. 아 버지로부터 파생된 것과 아버지가 지니신 것과는 구별하여야 한다.
* Triad--성부, 성자, 성령은 본질상 달라(heteroousios) 분리되었고(separated), 소원되 었으며(estranged), 연계되지 않았으며(disconnected), 상호 참여가 없으시다.
* 따라서 삼위에게 돌리는 영광에는 차서와 위계가 있게 마련이다.
(3) 주요 Arian Texts
* 그리스도의 승귀를 전달하는 본문들
빌 2:9-10
시 45:7-8
히 1:4
* 아들의 창조에 관련된 본문들
히 3:2
행 2:36
잠 8:22
* 성자와 성부의 관계에 관련된 제4복음서의 본문들
요 14:10
요 17:3
요 14:28
요 10:30
요 17:11
* 성육신을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본문들
마 11:27
마 28:18
요 3:35
막 14:32
눅 2:52
마 26:39
요 12:27
* 자주 사용하는 본문들
요 1:1 관사 없이 사용된 단어 God의 의미
요 14:28
막 13:32
고전 11:3
고전 15:28
빌 2:5-9
막 10:18
막 15:34
(4) 아리우스 기독론 비평
① 아리우스의 신관은 성자와 성령이 영원하지 않다는 점에서 다분히 다신론적이어서 삼위 이름으로 시침하는 것이 무의미하게 된다.
② 더 나아가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구원 개념을 손상시키고 있다. 완전한 창조주가 아닌 신분으로 재창조주가 되어 재창조 과업을 완수한다는 것은 모순이 된다. 그리스도가 완 전한 신성을 가지지 못한다면 재창조주로서 역할을 다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③ 그리스도의 신성의 여호아 되심에 관련된 성경 본문들과 상치된다.
3. 니케아회의 이후
카파도키아 세 신학자들은 아타나시우스가 남겨놓은 문제를 극복하였다. 그리고 이는 성령의 신성 문제 해명으로 연결되었다. 니케아 수용자들 중에도 성령의 신성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명료하지 못하였다. 심지어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이었던 마케도니우스(342-360)는 성령을 부인하는 이론을 파급시켰다. 이 성령부인론자들은 성령을 두고서 하나님이 우리와 세상 가운데서 일하려고 창조한 도구요 능력일 뿐, 하나님은 아니라고 보았다.
아타나시우스는 성령도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말했다. 다만 위격이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았다. 세 캅바도키아 신학자들은 오리게네스 전통을 따라 신성의 단일성이 아니라 구별되는 세 위격들에서 출발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공통적인 본성과 상호 구별되는 위격들을 구분하기 위하여 ‘본질’과 ‘고유성’을 각각 사용하였다.
바실리우스(329-379)는 고유성으로서 성부의 父性, 성자의 子性, 성령의 聖力 또는 聖化를 말하였다. 나찌안주스의 그레고리(329-390)는 성부께는 태어나지 않음, 성자께는 태어남, 성령께는 발출이라는 고유성을 부여했다. 그는 삼위 안에서 일체가 경배를 받으며, 일체 안에서 삼위가 경배를 받는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신성과 君主權을 성부에게만 국한시키는 것을 반대하여 군주론이 지닌 최대 약점을 극복하였다.
닛사의 그레고리(330-395)는 태어나지 않음, 독생 하심, 성령의 발출은 ‘성자를 통하여’라고 제안했고, 성부는 성자나 성령과 무관하게 사역하시지 않기 때문에, 신성은 하나라고 했다. 이들은 계시에서 전개되는 행위의 단일성에서 본질의 단일성을 찾았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신성의 단일성과 위격의 구별성을 확보했다.
콘스탄티노플회의(381)는 성령의 ‘호모우시오스’를 문자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성령께서는 성부로부터 나와서 성부, 성자와 함께 경배와 영광을 받으신다는 식으로 성령의 신성을 고백했다. 1년 뒤의 또 다른 회의는 ‘호모우시오스’를 성령께도 돌려드렸다.
‘호모우시오스’라는 용어를 도입함으로 교회는 아리우스 이단을 대항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바실리우스는 아리우스가 성경의 모든 말들을 자기 식으로 변형했기 때문에 ‘호모우시오스’가 효과적으로 방어선(防禦線)을 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교회는 이런 고백으로 하나님의 비밀을 벗겨버리거나 본질을 정의한 것이 아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이 진짜로 오셨고 성령으로 하나님이 직접 교회에 임재하신다는 성경적 교훈을 고수하려고 했다.
(5) 초기 에큐메니칼 회의들—별도 자료 참고
C. 재림교회 내 논의
Jerry A. Moon은 재림교회 내 삼위일체 논의는 다음 몇 국면으로 구분하고 있다.
1. 반삼위일체론 지배기 1846-1888
2. 반삼위일체론에 대한 異議기 1888-1898
3. 패러다임시프트기 1898-1913
1898년이 패러다임 천이의 분수령이 된 것은 동 년에 <시대의 소망>이 출판되었는 바 동 서 530쪽에 그리스도 안에 빌려오거나 파생되지 않은 본래의 생명이 있으며, 동서 785쪽에는 구주께서는 자기 안에 있는 생명으로 무덤에서부터 나오셨다는 너무 분명한 진술들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4. 반삼위일체론 쇠퇴기 1913-1946
5. 삼위일체론 지배기 1946-1980
6. 삼위일체론 긴장 재현기 1980-현재
초기 재림교회 주도적인 지도자들 대부분은 삼위일체 교리를 배척하였다. 그들이 심위일체 교리를 배척한 이유들은 다음과 같다.
1. 그들은 한 하나님 안에 세 인격이 존재한다는 성경적 증거를 찾지 못하였다.
2. 삼위일체 교리는 아버지와 아들을 동일한 분으로 보게 한다. 그들은 성자 하나님이 성 부 하나님처럼 전능하신 하나님이 된다는 시각을 양태론으로 보는 착시(錯視)를 하였 다. 성령의 인격적 존재를 배척한다.
3. 삼위일체교리는 삼신론적 사상으로 유일신론에 맞지 않다.
4. 속죄 교리에 있어서 성자의 속죄 희생으로 죽음은 죽을 수 없는 신성의 죽음으로 이어 진다. 그리스도의 인성만 죽었다면 이는 완전한 제물이 되지 못한 죽음이다.
5.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창조의 근본(시작)”(계 3:14)이다. 창조의 근본은 첫 피조물이라는 의미가 잠재되어 있다.
6. 성령 하나님이 인격이 아니라는 점을 함축한 성경본문들이 있다(롬 5:5; 욜 2:28).
그러나 엘렌 화잇은 “삼위일체적 유일신관(a trinitarian monotheist)" 을 옹호하였다. 재림교회 내 삼위일체 논의는 Gane의 연구 범주와 근본적으로 궤를 같이 하였다. 1969년 Russell Holt는 Gane의 논문을 더 확장하여 James White, J. N. Andrews, A. C. Bourdeau, D. T. Bourdeau, R. F. Cottrell, A. T. Jones, W. W. Prescott, J. Edson White, and M. L. Andreasen으로부터 반 삼위일체적 진술 증거를 제시하면서 1890년대부터 1900년대에 이르기 까지 목회 일선에 반 삼위일체 기류가 강하게 부각된 점을 지적하였다. 그는 이어서 대부분의 주도적인 반삼위일체론자들이 세상을 떠난 190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는 엘렌 화잇의 진술을 토대로 삼위일체론이 부상하게 되었다는 점도 지적하였다. 그리하여 1931년에는 삼위일체 교리가 재림교회의 공식 입장으로 천명되었다.
L. E. Froom 는 Movement of Destiny에서 재림교회 내 삼위일체론자와 반 삼위일체론자들을 더욱 상세하게 논술하고 있다. 1996년 Merlin Burt는 20세기 전반부에 나타난 교리적 이해를 심도 있게 다루었다. Woodrow Whidden은 1888-1898년까지의 삼위일체 논의를 구원론적 시각에서 분석하였다.
2003년 삼위일체론의 역사적 조명과 더불어 재림교회가 이단 분파 이미지 탈피와 에큐메니즘 음모 일환으로 선구자들의 반삼위일체론 진리를 버렸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엘렌 화잇의 저술 중에 나타난 신관에 관한 진술에는 반대하는 것도 있고 지지하는 것도 있는 두 가지 대조적인 진술이 나온다. 그 하나는 하나님을 멀리서 계신 비인격적이며 신비하여 궁극적으로 실재하지 않는다(비존재)는 영해파적 해석을 하는 신관으로 엘렌 화잇은 이를 반대하였다. 1844년 대 실망 후 밀러파 중에는 이런 시각에서 그리스도가 영적으로 오셨다고 주장한 무리가 있었다.
다른 하나로 엘렌 화잇이 지지하는 신관은 인격적이고 문자적이며, 접촉할 수 있는 하나님으로 묘사하는 신관이다. 화잇은 “하나님은 영이시니”(요 4:24)라고 한 사실을 신봉하였지만 영으로서의 하나님은 실재하시고 문자적으로 존재하시며 접촉 가능하신 분이시다. 1904년 화잇은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나 그분은 인격적인 존재(personal being)이시다. 사람이 그분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8증언, 263)고 하였다. “나는 한 보좌를 보았는데 그 위에는 아버지와 아들이 앉아 계셨다. 나는 예수님의 용모를 바라보고 그분의 자애로운 모습에 감탄했다. 아버지의 형상은 뵐 수 없었는데 그것은 영광으로 번쩍이는 구름이 그분을 덮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예수님께 아버지께서도 그분과 같은 모습인지를 물었다. 그분은 아버지께서도 당신과 같은 형상을 하고 계시다고 하셨다. 그러나 내가 볼 수 없는 것은 “만일 네가 그분의 영광을 한번 바라본다면 너는 살아남지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다”(초기, 54). “이 구주는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분의 본체의 형상이시다. 그분은 거룩한 위엄을 지녔고 완전하고 빼어난 분이시다. 그분은 하나님과 동등하셨다.”(2증언, 200).
엘렌 화잇은 아버지, 아들, 성령 하나님이 각각 개별적으로 존재한다는 진술들을 자주 하였다. “하늘에는 이와 같이 살아계신 세 분(heavenly Trio of three living Persons)이 있는데, 위대한 능력을 가진 세 분, 곧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리스도를 산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이 침례를 받게 되며, 그 능력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애를 살고자 노력하고 있는 양순한 하나님의 자녀들과 협력하게 될 것이다.― 특별증언 B, No. 7. 62, 63 (1905)”(전도, 615). 이 외에 “eternal heavenly Dignitaries” (Ev 616), pledge of three Persons(6BC 1074), three Dignitaries and Powers of heaven (6BC 1075), three great Agencies (1BC 1120), three great personal Dignitaries of heaven(7BC 959), three great Powers of (in) heaven(6BC 1074), three holy Dignitaries of heaven(5BC 1120), three infinite and omniscient Powers ((6BC 1075) 등의 표현을 사용하여 삼위일체관을 확실히 천명하였다. 이러한 세분(threeness)은 각각 의지를 발동하고, 생각하고, 느끼면서 사회적 관계를 맺는 일을 하신다. 그러나 삼위는 인격적(person)으로는 다르지만 그 본질, 품성, 목적에 있어서는 하나이시다(oneness). 각위는 “ 목적과 마음과 품성에 있어서는 하나”(치료, 422)가 되신다.
혹자는 “죄는 신성의 제 삼위의 강력한 작용을 통하여만 물리칠 수 있고 이겨낼 수 있으며, 그분은 제한된 능력을 가지고 오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충만한 가운데(in the fulness of the divine power) 오실 것이었다”(소망, 671)에 나오는 “하나님의 능력의 충만” 표현에 집착하여 성령의 독자적 인격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즉, 영문에서 “divine power"가 소문자 표기로 된 점에 비추어 성령을 성부와 성자의 신적 권능으로 이해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Ellen G. White의 다른 유사한 여러 표현들을 참고하여 보면 성부와 성자에 대하여서도 같은 표현을 사용하였으며, 성령의 ”distinct personality"(MS 93, 1893)을 분명하게 언급하였으며, “하늘에는 이와 같이 살아계신 세 분이 있는데, 위대한 능력을 가진 세 분, 곧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이 있는데 (There are three living persons of the heavenly trio; in the name of these three great powers-the Father, the Son, and the Holy Spirit)”(전도, 615)라고 하여 삼위일체 신관을 신봉하고 있다.
III. 삼위일체 교리의 성경적 증거
위에서 이미 성경에는 삼위일체라는 말이 나오지 않으나 그 사상은 나온다고 지적하였다.
발전적 계시 사건들의 전개 과정에서 삼위일체 교리가 확립되었지만 그 뿌리는 구약성경에 나온다.
A. 구약의 증거
1. 구약성경은 유일신론(monotheism)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복수적 유일신론이라고 보아야 한다. 하나님에게는 1위 이상이 있다고 말하는 구절들이 많이 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Elohim)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4-5). El/Elohah의 복수적 표현인 엘로힘이 “하나(echad)"가 된다는 것이다. “하나(echad)" 역시 복수적 하나를 의미한다. 아담과 하와를 결합시키면서 사용된 단어인 ”한“ 몸에서 사용되어 있는 점이 이를 증거하고 있다 (창 2:24 참고). 단일한 수적 하나인 고독한 yachid로 표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하나 되심 안에서 복수적 echad를 사용하고 있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 echad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토대를 둔 독특성, 이방 신이나 어느 인간도 비교될 수 없는 배타성, 삼위의 하나 되심의 통일성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태초에 하나님(Elohim)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창 1:1-2).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1-3).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 1:26).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창 3:22).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창 11:7).
위에 열거한 성경 본문들은 세 인격의 하나님이 계신 것을 증거하고 있다. 그러나 다신론적 의미가 내재된 것이 아니다.
2. 여호와의 사자(Mal'akh YHWH) 구절들
구약성경에는 “여호와의 사자(Mal'akh YHWH)” 구절들이 나온다. “여호와의 사자,” 어떤 경우는 “사자(angel),”는 하나님처럼 행동하고 말씀하고 있다. 그 정체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구별되는 하나님으로 판명이 나 있다.
(1) 여호와의 사자-->여호와, 감찰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 곁 곧 술 길 샘물 곁에서 그를 만나 8 가로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가로되 나는 나의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9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10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자손으로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11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잉태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12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같이 되리니 그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살리라 하니라 13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여기서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창 16:7-13).
위 본문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감찰하시는 하나님”으로 규명되어 있다.
(2) 여호와의 사자-->여호와, 아브라함 축복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16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창 22:15-17).
위 본문 15절에 나오는 여호와의 사자는 16절에서 그 정체를 여호와로 설명하고 있다. 22장 전체 맥락에서 보면 더욱 분명하다. 1, 3, 8, 9, 12 절에서 5회나 엘로힘이 나오고 있다.
(3) 하나님의 사자-->벧엘의 하나님
“꿈에 하나님의 사자가 내게 말씀하시기를 야곱아 하기로 내가 대답하기를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 가라사대 네 눈을 들어 보라 양 떼를 탄 수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 것, 점 있는 것, 아롱진 것이니라 라반이 네게 행한 모든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나는 벧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 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 ”(창 31:11-13).
(4) 여호와의 사자-->여호와, 하나님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3 이에 가로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는 동시에 4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5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2-5).
여호와의 사자 또는 하나님의 사자의 특별한 용례는 언약의 사자로서의 하나님을 나타내지만 일반적으로 통상적인 천사를 지칭하는 경우도 있다(왕상 19:5-7 등). 여호와의 사자는 피조된 보통 천사보다 큰 권능을 지녔다. Augustine 이전 교부들은 여호와의 사자를 로고스의 신적 현현(theophany)으로 해석하여 왔다.
3. 하나님의 복수적 대명사 “우리(We)” 사용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내가(I)”라는 현식으로 말씀하신다(출 20:2; 사 41:10, 13). 그러나 5번씩이나 당신 자신을 “우리”라는 대명사로 말씀하시고 있다.
(1) 창 1:26 “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 창 3:22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3) 창 11:7 “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4) 사 6:8 “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위의 복수 대명사적 표현에는 상호 권유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도 하고 전치사 “of”나 “for”와 결합되어 나오기도 한다. 이 “우리가”라는 복수적 표현의 의미를 두고 Johann P. Gabler는 고대 이교도들의 신화 회상적 표현, 초기 교부시대 바나바의 서신이나 순교자 저스틴의 글에서는 그리스도에 관한 표현, 아버지와 성령의 교류 형식의 표현으로 보는 각각의 견해들이 있어 왔으며 위엄의 복수로 보는 시각 및 하나님이 하늘 궁정에 한 진술이라는 도 나타났다. 그러나 이 복수 대명사는 창조주의 자체 내적 협의란 점에서 삼위일체 신격 상호간의 친교적 관계를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대표적 견해로 자리를 굳혀 왔다.
4. 성육신 이전의 그리스도의 현현
구약성경에는 “여호와의 사자” 이외에도 그리스도의 현현을 나타내는 여러 본문들이 나온다.
(1) 신적 현현(Theophanies)
신적현현이란 그리스도 성육신 이전에 하나님께서 임시적으로 인간의 몸을 지닌 분으로 인간에게 나타난 현상이다.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세 사람(1-3절) 중 한 사람이 아브라함에게 아들 약속을 하였다. 그를 두고서 13절과 22절은 여호와로 해설하고 있다. 얍복 나루에서 야곱이 만난 한 사람은 32:23_32). 여호수아가 만난 한사람(수 5:13-15)은 시실상 다니엘 8:11에 나오는 군대장관과 같은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었다. 여호수아는 모세에게 나타나 신발을 벗으라고 한 같은 명령을 받고 순종하고 그에게 경배하였다. 여기 “여호와의 군대 장관”은 성육신 이전의 그리스도이었다. 다니엘이 계시 중 보았던 세마포 옷을 입은 사람 역시 그리스도의 현현이었다(단 10:5-6).
(2) 하나님의 아들
느부갓네살 왕이 풀무불 가운데서 본 “하나님의 아들”은 성육신 전 그리스도이었다(단 3:25).
(3) 여호와의 종(Ebed YHWH)
이사야 41:1-9; 49:1-7; 50:4-9; 52:13-53:12에 나오는 여호와의 고난 받는 종의 노래는 메시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을 지적하고 있다(행 8:30-39).
(4) 다윗왕 메시야
평화와 정의의 영원한 왕국을 세울 메시야가 다윗와으로 묘사되어 나온다(사 11:1-16; 겔 34:23-24; 37:24-26).
(5) 하나님의 말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적이고 능동적이고 권능이 있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시 33:6).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사 55:11). 요한복음 1:1-3은 이 말씀이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고 있다.
(6) 하나님의 지혜
잠언 8장에 나오는 의인화 된 하나님의 지혜는 세상 창조 전부터 존재하셨으며, 영원 전부터 세움을 입었으며(23절), 공동 창조자로 기뻐하시며(27-31절), 하나님과 창조된 것들 사이에서 중보자와 소통자가 되셨다. 이 지혜는 신적 신분을 지니신 분으로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7) 미가엘
다니엘서에 나오는 미가엘의 음성은(단 10:13, 21; 12:10)은 모세를 부활시킨 천사장이란 점(유 1:9), 사단을 패퇴시킨 점(계 12:7), 및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로 오시는 주님(살전 4:16-18)에 비추어 부활의 날 에수의 음성인 것이다.
5. 성령하나님에 관한 진술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창 1: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창 6:3)
“너희는 내게 가까이 나아와 이 말을 들으라 내가 처음부터 그것을 비밀히 말하지 아니하였나니 그 말이 있을 때부터 내가 거기 있었노라 하셨느니라 이제는 주 여호와께서 나와 그 신을 보내셨느니라”(사 48:16).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신을 근심케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사 63:10)(참조, 엡 4:30).
성령은 지식과 지혜의 신((용 32:8; 사 11:2), 통치의 신(민 11:17, 25; 삼상 16:13)이 되시고, 거룩한과 성화의 신이 되신다(시 51:12; 사 63:10).
6. 신격(神格) 내 둘 및 셋의 복수 위격 함축한 성경 본문들
구약성경 내에는 신격 내에 인격의 복수성이 함축된 성경 본문들이 많다.
(1) 두 위격 본문들
a. 창 19:24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에게로서 유황과 불을 비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사”
이 본문에는 여호와(YHWH)가 두 번 나오는 바, 첫 번째 나오는 여호와는 성육신 이전의 예수 그리스도가 지상에서 두 번째 나오는 하늘에 계신 여호와 아버지께로부터 유황불을 소돔 고모라에 내리게 하신다.
b. 출 23:23
“나의 사자가 네 앞서 가서 너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에게로 인도하고 나는 그들을 끊으리니”
위 본문은 하나님의 선언으로 “나의 사자” 즉 여호와의 사자가 약속의 땅 정복에 앞서 행하시게 하는 의미를 담고 있어 두 위격이 나온다.
c. 시 45:6-7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 왕이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시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왕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으로 왕에게 부어 왕의 동류보다 승하게 하셨나이다.”
히브리서 1:8-9은 위 본문을 하늘 왕의 기름부음을 받은 성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호칭하고 있다.
d. 시 110: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사도들은 메시야 시인 110편을 자주 인용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하고 있다(마 22:43-45; 막 12:36-37; 눅 20:42-44; 행 2:34-36; 7:55-56; 롬 8:34; 히 1:13; 5:6-10; 7:11-28; 8:1; 10:12-13; 12:2). 위 본문은 하늘 아버지 여호와께서 왕, 제사장, 및 심판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Adonay)에게 말씀하시고 있다.
e. 잠 8:30-31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었느니라.”
이미 위에서 언급한 대로 의인화된 지혜가 되는 그리스도께서 공동 창조자와 함께 즐거워하고 있다.
f. 잠 30:4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자가 누구인지, 바람을 그 장중에 모은 자가 누구인지, 물을 옷에 싼 자가 누구인지, 땅의 모든 끝을 정한 자가 누구인지, 그 이름이 무엇인지, 그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
본문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묘사한 후에 “그의 아들”을 언급하면서 그를 아느냐고 묻는다..
g. 단 7:13-14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분명하게 구별되는 두 신적 존재, 즉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와 “인자 같은 이”가 나오는 본문에서 재림 전 하늘 심판정의 주체들로 등장한다. 다니엘서의 이 본문에 나오는 “인자” 사상은 예수께서 당신 자신을 위하여 채택하신 칭호가 된다.
h. 호 1:7
“그러나 내가 유다 족속을 긍휼히 여겨 저희 하나님 여호와로 구원하겠고 활과 칼이나 전쟁이나 말과 마병으로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본문은 성부 하나님(“내가”)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궁원의 구주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하나님 여호와)”를 약속하신다.
I. 슥 3:2
“여호와께서(예수 그리스도)사단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여호와가(성부 여호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위 본문의 구조적 특징은 여호와께서 사단을 책망하실 여호와를 언급하고 있는 점에 있다.
j. 말 3: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침례 요한)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메시야)구하는 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예수 그리스도가 임할 것이라”
(2) 세 위격 본문들
a. 창 1:1-3
창 1:1-3에는 Elohim(성부 하나님), 하나님의 신(ruach Elohim), 및 “하나님이 가라사대(yayomer Elohim)”가 나온다. 요 1:1-3에 비추어 첫 창조기사에 10회 나오는 “하나님이 가라사대(yayomer Elohim)”는 하나님의 말씀(the Word of God)에 해당된다.
b. 사 11:1-2
“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사 11:1-2)
본 문에는 메시야의 오심을 예고한 이 예언에서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은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를, 지혜와 총명의 신인 성령 하나님 그리고 성부하나님 여호와가 나온다.
c. 사 42:1
“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본문의 “내가”는 성부 하나님을,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은 Ebed Yahweh로 이어지는 문맥에 비추어 성자 하나님을, 그리고 “나의 신”은 성령 하나님을 각각 지칭한다.
d. 사 48:16
“나는 그니 나는 처음이요 또 마지막이라 13 과연 내 손이 땅의 기초를 정하였고 내 오른손이 하늘에 폈나니 내가 부르면 천지가 일제히 서느니라...16 너희는 내게 가까이 나아와 이 말을 들으라 내가 처음부터 그것을 비밀히 말하지 아니하였나니 그 말이 있을 때부터 내가 거기 있었노라 하셨느니라 이제는 주 여호와께서 나와 그 신을 보내셨느니라 17 너희의 구속자시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이신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는 네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너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사 48:12-17).
16절의 “주 여호와께서 나와 그 신을 보내셨느니라”에는 구약성경 중에서 삼위일체에 관한 가장 분명한 본문 중 하나가 된다. 즉, 주 여호와, 나(여호와의 고난 받는 종 예수 그리스도), 및 신 이 이 삼위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다.
e. 사 59:20-2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야곱 중에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
21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내가 그들과 세운 나의 언약이 이러하니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신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영토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f. 사 61:1-3 (참고 눅 4:16-21)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2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3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g. 사 63:8-10
“ 여호와(성부)께서 말씀하시되 그들은 실로 나의 백성이요 거짓을 행치 아니하는 자녀라 하시고 그들의 구원자가 되사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the angel of His presence-예수 그리스도)로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 사랑과 그 긍휼로 그들을 구속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신을 근심케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
위 본문에도 삼위 신격의 분명한 지적이 나온다. 자기 백성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성신께서 “근심케 하였으므로”에서 이 “근심하다”라는 동사는 항상 인격적 주어를 전제로 한 표현이다. 어떤 비인격적 힘이나 무생물을 두고 사용되는 단어가 아니다.
h. 학 2:4b-7
“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땅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신이 오히려 너희 중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또한 만국을 진동시킬 것이며 만국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영광으로 이 전에 충만케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학개는 재건된 성전에 “만국의 보배(the Desire of all nations),” 곧 메시야가 방문할 것을 예언하고 있다. 만국의 보내는 여호와, 및 나의 신으로 묘사된 삼위 신격이 우주적 사건을 유도하고 있다.
I. 삼위가 함축된 반복 칭호들
아론의 축도-“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민 6:24-26).-->아론의 축도 (참고 고후 13:14의 사도의 축도).
“대저 여호와는 우리 재판장이시요 여호와는 우리에게 율법을 세우신 자시요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니 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이니라”(사 33:22).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들으시고 행하소서 지체치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단 9:19).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시 33:6).
三聖頌-“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사 6:3).
B. 신약의 증거
신약의 증거는 구약의 증거보다 더 명확하고 충만하다. 그것은 구속사의 중심적 사건인 성자의 성육신과 오순절 성령의 강림을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삼위가 명백히 언급된 구절들이 여러 군데 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수침 시 (마 3;13-17)
2. 선교 대위임과 시침 명령 (마 28:16-20)
3. 사도의 축도 (고후 13:13)
4. 예수 잉태와 탄생 예고 (마 1:18-20)
5. 로고스 (요 1:1-2, 14)
6. 예수 신성과 아버지와 하나 되심과 동등성 (요 1:30-33)
7. 성령의 신적 인격성 (요 14-16장; 요 14:16-19; 14:26; 15:26; 16:7; 16:13-16)
8. 성령이 하나님 되심 (행 5:3-4)
9. 성령의 통찰력: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11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 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 니라”(고전 2:10-11).
10. 요한계시록 서두 축복: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 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계 1:4-5).
11. 일반적인 텍스트들
고전 12:3-6 성령, 주, 하나님
엡 4:4-6 성령, 주, 하나님
벧전 1:1-2 아버지 하나님, 성령, 주 예수 그리스도
유 20-21 “성령으로 기도하며 21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 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유 1:20-21).
요일 5:7 (KJV) 아버지, 말씀, 성령
8.
행 28:25-28과 사 6:9-10 비교
IV. 삼위 속성과 사역 비교—별도 자료 참고
V. 존재론적 본문과 기능적 본문(Ontological Texts & Functional Texts)
A. 존재론적 본문(Ontological Texts)
(1) 나와 아버지와 하나니(요 10:30)
(2)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 고』(빌 2:6) 등등
B. 기능적 본문(Functional Texts—주로 Arian texts)
(1) 이 부류의 성경절들은 구속의 경륜을 이루시기 위해 맡으신 역할이 다른 것임을 증 거하고 있다.
(2) 존재론적으로는 동등하고, 기능적(구속의 경륜적)으로는 차이가 있다.
VI. 이해의 한계
Tertullianus를 비롯하여 삼위일체 교리를 강조하는 인사들은 여러 가지 사물의 현상을 유추시켜 심위일체 논증을 시도하여 왔다. 그러나 삼위일체는 특별계시에 토대를 두고 있다. 따라서 일반계시의 여러 유추를 사용하여 삼위일체론을 지원하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삼위일체 교리를 계시된 진리를 통하여 이해하여야 한다.
구약성경에서는 삼위일체 교리가 신약성경에서만큼 발전하지는 못하였지만, 그 나름대로 이해의 틀이 내재된 메시지들이 많다. 신성 안에서 복수적 표현이나 어구들이 있다고 해도 그 모두는 통일성과 연합성을 바탕으로 나오고 있다. 하나님께서 하나 되시지만 복수적 위격을 지니신 사랑의 공동체라는 점이 창조와 구속 사업의 지반이 되고 있다.
하나님을 설명하고자 하는 수많은 이론들과 그분의 존재에 대한 수많은 찬반 논리들이 있지만 인간의 지혜로는 신성을 꿰뚫어 볼 수 없다. 인간의 지혜만을 의지하여 하나님에 관해 알고자 하는 것은 별자리를 연구하기 위하여 확대경을 사용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수많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지혜는 "감취었던 것"(고전 2:7)이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비밀이다. 바울은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2:8)고 기록했다.
성경의 가장 기본적인 계명 중 하나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다(마 22:37; 신 6:5, 참조), 우리는 아는 바가 전혀 없는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가 찾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깊은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욥 11:7).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창조주를 알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는가?
하나님은 사랑과 동정으로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알리셨다. "기독교는 인간이 하나님을 탐구한 것에 관한 기록이 아니라, 당신 자신과 당신의 목적들을 인간에게 나타내신 하나님의 계시의 산물"이라는 점을 성경은 밝혀준다. 이러한 자기계시는 반역적인 세상과 돌보시며 염려하시는 하나님 사이의 구렁 위로 다리를 놓기 위해 계획된 것이다.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사랑은 그의 최고의 계시인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표현되었다. 예수를 통하여 우리는 아버지를 알 수 있다. 요한의 말처럼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하"(요일 5:20)셨다.
또한 예수님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 17:3)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좋은 소식이다. 비록 하나님을 완전하게 아는 것이 불가능하긴 하나, 성경은 우리가 그분과 더불어 구원의 관계속으로 들어가기에 충분한 그분에 관한 실제적 지식을 제공해 준다. 여기에 부가하여 이른바 “더 큰 빛”인 성경을 반사하고 있는 “더 작은 빛”이 분명하게 제시한 계시적 정보를 인간의 추론으로 왜곡하지 말고 그대로 수용할 필요가 있다.
다른 지식과는 달리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두뇌에 관계된 것인 만큼 마음과도 관계된 일이다. 이것은 지성만이 아닌 전 인격을 포함하고 있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얻는 데에는 당므과 같은 자세가 필요하다.
(1) 성령께 마음을 열어 놓아야 하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요 7:17; 마 11:27, 참조). 예수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마 5:8)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불신자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 바울은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상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0, 21).
(2)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탐구할 때에 우리는 그분의 자기 계시인 성경의 권위에 복종해야만 한다. 우리는 하나님 위에 우리 자신을 세워 놓을 수 없으며, 하나님을 분석하거나 측량할 수 있는 것처럼 취급할 수 없다. 성경은 그 자체가 해석자가 되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이 제시하는 원칙들과 방법들에 대해 우리 자신을 굴복시켜야 한다. 이러한 성경의 지침이 없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예수님 시대의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파악하는 일에 실패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은 성경을 통한 성령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굴복시키기를 거절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별을 그릇되게 해석하고 그들의 구주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들의 문제는 지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지성을 어둡게 만들고 영원한 멸망을 초래한 것은 그들의 닫힌 마음 때문이었다.
(3) 믿음의 선행 조건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히 11:6)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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