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의 종교, 산자의 종교
I. 죽은 자의 종교(이집트 죽음의 문명)
이집트 문화 문명 유적지를 둘러보고(1982년 5월 11-6월 1일까지) 한마디로 평가한다면 신전문화이며, 죽은 자들의 문명이라는 느낌이 번득 들었다. 삶은 오로지 죽음을 준비하는 단계에 불과한 것인가.
카이로 박물관을 보고 죽음 이후의 삶을 위한 파라오 왕조의 열망을 보았다. 박물관 자체가 흡사 장의사 집 같아 보였다. 여러 종류의 크고 작은 관들이 꽉 차 있고 그 관 안에는 미라들이 들어 있다. 주변에는 관 속 미라의 주인공의 석상, 그들이 사용한 도구들이나 장식품들, 죽음 이후에 사용할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다. 더러는 미라 얼굴 위에 생전의 아름다운 모습을 그린 초상화가 덥혀 있기도 한다. 새와 짐승의 신의 형상들이 끝없이 널려 있기도 하다. 2560-2540 BC에 세워진 Giza에 있는 제4왕조 Cheop(Khufu) 피라미드는 고대 세계의 7대 경이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1.5~3톤 석회암 및 화강암 바위를 250만개씩이나 10여 만 명이 20여년에 걸쳐서 48층 높이로 3에이커에 걸쳐 세운 왕/왕비의 무덤용이다. 그들이 사용한 바위들은 대부분 800km 상거한 아스완에서 채석한 것들이라는 보고가 있다. 통치자들의 무덤을 준비하는 것이 국가 기본시책이 되었던 모양이다. 소수 통치자들의 죽음 이후의 거처를 마련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민중들이 고혈을 흘려야 했던가. 사후의 세계에 대한 신념체계가 통치철학이며 그 방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죽음 이후 세계에 집착한 것은 산자들을 통치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것이다.
Saqqara에 있는 세계 최고(最古) 피리미드와 신전과 그 폐허를 둘러 본 후 황소 무덤에 갔던 일이 있다. Strabo(24 BC)의 기록에서 단서를 잡은 프랑스인 Mariette가 평지 사장(沙場) 아래 잠겨 있는 황소 신(Apis) 대리석관 무덤 회랑을 발굴한 일이 있었다. 3,700년 전의 황소신 종교 상황을 말해 주는 현장이었다. 하나의 중량이 65톤이나 되는 25개의 석관이 안장된 곳이다. 혹시 그 안에 보물이라도 있는가 싶어 폭파된 석관도 있었다. 검은 몽둥이에 이마엔 흰 무늬가 있고 등에 독수리상이 있는 송아지는 하늘의 빛이 황소에 전수되었다고 보아 성별, 신격화 된 것이다. 왕의 아들은 사제가 되어 인간의 어떤 관보다 양질의 관에 미라가 된 황소 관을 돌보았던 것이다. 시내산 아래에서 송아지 신을 섬긴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황소 종교에 골수 깊이 감염된 맥락을 상상할 수 있는 무덤이며 죽은 자의 기념 건조물이었다. 이집트의 무덤들은 인간의 우맹과 저능한 종교상황을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5월 27일 카이로에서 룩소르(Luxor)행 비행기에 탑승, 나일 강 상류로 향하였다. 광활한 사막의 나라에서 나일 강 유역만 푸르렀다. 나일 강은 이집트의 젖줄이며 생명선이 되어 보였다. 룩소르(고대 Thebes)는 이집트의 남부에 있는 도시로, 고대 이집트 시대부터 존재해 왔으며 룩소르신전, 카르낙 신전, 멤논의 거상 등을 포함한 유적들이 위치해 있고, 서안지역에는 유명한 왕가의 계곡과 왕비의 계곡이 있다. 우리 일행은 먼저 나일강을 건너 왕의 골짜기로 갔다. 900여개의 무덤 굴들, 특히 18왕조 이후의 무덤들이 집결해 있는 풀 한포기를 볼 수 없는 황량한 산악지역이다. 산기슭 바위에 굴들을 기하학적으로 파 들어가며, 석실들, 회랑들, 그리고 거기에는 온갖 기예가 동원 되어 지금도 선명하게 볼 수 있는 상형(그림)문자들, 뱀, 태양, 갖가지 곤충들, 황소, 포로 행렬들 등으로 장식되어 있는 지하 무덤들이 끝없다. Ramseses II 의 무덤은 그 입구를 감추기 위하여 진짜 입구의 산허리를 잘라 버려 낭떠러지가 되게 해 놓고 위장 출구를 여러 곳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산 근처 주민들은 대를 이은 도굴업으로 생계를 지탱하여 왔었다고 한다. 극성스런 도굴로 인하여 오늘날은 무덤의 실상을 알기 어렵다고 한다.
고대 이집트인들의 사후 세계에 대한 확신은 놀라웁다. 더 놀라운 것은 무덤 벽화에 나온 그림들에서 보여 준 것 처럼 뱀이 파라오와 그 신하들을 사후 불멸의 세계로 인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뱀이 불멸의 세계로 인도할 뿐만 아니라 왕에게 생기를 불어넣고 보호하고 있다. 이는 창세기 3:1에서 뱀이 하와에게 불멸을 가르치고 있는 점을 빼 닮은 복사 문화이다. 하나님은 뱀-사단이 영혼 불멸 사상으로 백성 전체, 특히 왕까지도 휘여 잡고 있는 반신적인 문화 속에서 자기 백성을 탈출 시킨 것이다.
카르낙 신전과 1400 BC에 건립된 룩소르 신전을 보고서 그 웅장하고 거대한 규모에 압도당하였다. 사제 계층은 신전의 신을 앞장 세워 권력과 결탁하여 통치권을 발동하였으며, 죽은 자들을 관리하였다.
고대 근동에서는 신전은 통치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인간이 어떤 곳에서 신을 만난 경우 그 장소를 거룩한 곳으로 성별하였다. 성모 마리아의 발현한 곳을 성별하여 성전을 세우는 일은 이런 고대 근동 종교 문화의 맥락이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II. 산자의 하나님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은 한 곳에 정착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 분은 인간이 지은 신전이나 성전에 구금당하여 지내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어떤 장소에 국한 되어 섬김을 받는 그런 분이 아니다. 특별한 장소에 국한 된 신전 종교는 권력과 밀착되어 부패하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헤롯 성전이 보여 주었듯이 신전은 ‘장사군의 소굴’이나 ‘강도의 굴혈’로 전락된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어느 특정 신전이나 장소에 묶여 있는 신이 아니라, 인간 속에 내려와서 구원의 새 역사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이시고, 역사의 과정을 통하여 사람들과 사귐을 나누며 함께 이동하는 하나님이다. 그래서 성경 기자들은 엘로힘(하나님들)이란 복수적 표현을 사용하였다. 그것은 한 분 하나님이시지만, 자기 백성들이 사는 곳 은 어디에나 계신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데반은 장소에 집착한 당대의 성전신학 문제점을 예리하게 지적하였다.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의 말한 바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행 7:48-49).
이는 오래 전 시인의 고백과 맥을 함께한다.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시 139:8-10).
스데반은 하나님의 정의의 거울에 지나간 날의 이스라엘의 반역의 역사를 비추어 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에 하나님께서 좌정하고 계시느냐고 물었다. 우상숭배 하는 자세로 성전에 집착하는 당대의 광신주의를 들추어냈다. 그는 고대 이집트 성전 집착주의에 감염된 성전 안에 있으면 로마 군대가 감히 처들어 올 수 없는 안전지대로 삼았다가 멸망당한 AD 70년의 멸망을 내다보았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지상 성전 휘장은 찢어졌다. 스데반의 신학은 이 땅의 성전이 아닌 하늘성소 신앙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는 재림교회의 천상성소의 신학의 원조격이 되는 사람이다. 스데반이 거룩한 곳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 것이 돌에 맞은 하나의 이유가 된다.
모형이었던 지상성전의 역할이 끝난지 오래 된다. 이제 하늘 성소로 그 관심이 옮겨 가야했다. 십자가의 희생은 이제 하늘 성소에서의 중보 사업으로 이어져 있다. 희생과 중보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올바로 이해하는 관건이 된다. 에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은 하늘성소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로 이어져야 한다. 이런 연관성이 결여된 십자가 강조는 불완전할 뿐만 아니라 위험하다. 십자가 아래에서 성령을 달라고 하는 신자들에게 마귀가 악령을 넣어 주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은 성전신학 개념을 확장시키고 있다. 장소 중심에서 살아 있는 사람 중심으로, 땅의 성전에서 하늘 성전으로 바뀌었다. 하나님을 모신 사람이 중요하다. 후에 바울은 성령을 모신 사람이 성전이 된다는 사상으로 발전시켰다(고전 3:16; 6:19). 어느 장소만이 거룩한 성전이라는 사상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유대인들은 여자의 뜰, 이방인의 뜰까지 만들어 거룩한 장소에 담을 만들어 냈다. 성전을 신분을 나누는 방편으로 변질시킨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여자들을 강단에 못 서게 한 것은 무리다. 더구나 하와의 범죄를 빌미로 여인들을 차별화 시킨 일은 복음의 정신에서 빗나갔다. 강단이 거룩하기에 강단 독점자가 거룩하다는 논리는 잘못된 성경 해석이다. 어디든지 주님 모신 곳이면 거룩하다. 어느 목사는 90%가 동의하여도 10%가 반대하면 양 때에 상처를 줄 것이 염려된다고 건물을 10%밖에 안되는 신자들에게 넘겨주라고 하면서 건물은 또 지으면 된다고 양보하게 하였다.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비결이다. 양보한 그 교회가 신앙에 있어서 훨씬 강하다. 강한 만큼 더 급속하게 발전한다. 눈에 보이는 건물은 수단 일 뿐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영혼 성전이 이어져 지어가는 일이다(엡 2:22).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에 최대의 가치를 두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역사 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교회란 이런 교회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역사 하실 것이다. 그리고 축복하실 것이다.
제도에 집착 하면서 그리스도와 참 성전을 산산조각 내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고대 유대교 성전신학을 그대로 전수 받은 듯한 착각이 유령처럼 교회 행정에 난무하고 있다. 고대 이집트 신전주의에서 탈출(exodus)해야 한다. 이동하는 40년 동안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엄호하고 늘 함께 방랑하셨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마 22:32; 참고, 막 12:27; 눅 20:38).
산자의 하나님! 강을 건넜다는 뜻을 지닌 히브리인(창 14:13) 아브라함의 하나님, 그리고 같은 심정을 가지고 살아간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시다. 이 신앙의 부조들은 무덥거나 추운 이 땅에서 여기 저기 옮겨 다니는 나그네 생활을 하였다. 하나님은 특정 장소에 안주하거나 얽매여 있는 분이 아니라 인간이 가는 곳이면 그 어디서나 함께 동행 하시며 고생과 고통을 함께 나누시는 분이다. 임마누엘! 살아 있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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