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원리에 나타난 두 면(수정)

 

하나님의 인간 구원의 사건에는 먼저 객관적, 임시적, 비인격적, 집합적, 법정적 선언이라는 국면(universal legal justification)이 있다. 그리고 주관적, 특수적, 항구적, 인격적, 개인적, 참여적 국면의 구원 사건이 있다. 전자는 후자의 뿌리가 된다. 후자는 전자로부터 나온다. 이런 시안적 구분은 아놀드 왈렌캄프의 <칭의의 핵심> 서론에서 지적한 것을 확장시켜 본 것이다.

그리스도의 삶과 십자가상의 죽음과 부활은 모든 사람을 위한 객관적인 구원 사건이다. 특히 人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自己 목숨을 많은 사람의 代贖物로 주려 함이니라”(10:45)는 객관적 국면을 말하고 있다. 메시야는 인류의 죄를 짊어진 대속제물이 되셨다. 하나님의 구원은 이사야 53장의 예언대로 인자로 오신 분의 대신적이고 대속적인 죽음으로 인하여 인간에게 구원의 소망이 가능하게 되었다.

 

객관적 구원사건의 그림 언어

성경은 이 사건을 여러 그림언어(metaphor)로 설명하고 있다. 먼저 제사언어인 hilasmos 어족이 로마서 3:25; 히브리서 2:17; 요한일서 2:2; 요한일서 4;10에 나오고 있다. Hilasmos 어족에 관한 영어성경의 번역은 “propitiation,” “expiation," "atoning sacrifice" 등 다양하다. 한글 개역개정판에는 화목제물(3:25; 요일 2:2; 요일 4;10)),” “속량”(2:17), 표준 새 번역에서는 속죄제물”(3:25)로 번역되어 있다. Expiation은 사망 선고를 받아야 할 죄책을 덮어 제거하는 것에 그 포인트가 있다. 이에 비하여 propitiation은 하나님께 도전한 죄악에 대한 그분의 거룩한 진노를 그 분의 방식으로 풀어버린다는 것에 그 역점이 있다. 그 통속적인 의미는 적절한 선물이나 희생제물을 수단으로 신의 진노를 유화시키는 것이었지만, 신약성경에서 이 뜻은 상실되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진노를 달래는 이교도 신에 드리는 제물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이 propitiation 개념을 호되게 비평하여 왔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는 사랑의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어서 거룩한 진노와 사랑을 대립 개념들로 보지 않는다. 성경 도처에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메시지가 나오고 있다(2:2, 5; 살전 1:10 ). 하나님께서는 진노를 풀 수 있는 은혜로운 대책을 미리 강구하시어 놓았으므로, 진노를 통한 그분의 거룩성 및 도덕적 통치와 아버지의 사랑 사이의 양립성을 축복으로 받을 수 있다. 이를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 된다(Leon Moris, The Apostolic preaching of the cross, 129-136). 인간의 분노는 감정의 제어력이 상실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는 인간의 분노와는 달리 사랑으로 제어되는 정의를 향한 불타는 열심의 발로이고 악에 대한 적개심의 발로이다. 하나님의 진노 대상이 곧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인 것이다. 화목제물 되신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오로지 진노 대상만 되게 하지 않게 하셨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그 큰 사랑으로 인하여 矜恤豊盛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恩惠救援을 받은 것이라)”(2:3-5). 사랑과 증오가 대립되는 것이지 사랑과 진노가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진노를 부인하면 진노의 자녀에 향한 그의 사랑도 부인하게 되어 결과적으로 그의 구속도 부인하게 된다. 칼 바르트가 아들의 개입으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다는 소위 Umstimmung Gottes 같은 방식으로 설명하는 것을 G. C. Berkower는 성경을 오도하는 것으로 날카롭게 비판하였다(p. 260-262).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자기를 제물로 드리시는 자기희생이 토대가 되어 장차 제사장이 되시어 죄인들을 위한 중보활동을 하실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사건의 또 다른 그림언어를 말하고 있다. 그것은 죄의 속박에서 해방 시킬 시장 언어 “lutro" 어족인 구속과 속전(redemption, ransom)으로 나타나 있다. 구속은 속전(ransom)을 지불하므로 노예의 속박으로부터 해방 시키는 것에 빗대어, 인간을 죄의 속박과 사망, 그리고 마귀의 속박으로부터 자유해방을 시키는 것을 말하고 있다. , 이 구속은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라는 속전을 통하여 인간을 죄의 속박, 사망의 속박, 마귀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키는 행위이다.

人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自己 목숨을 많은 사람의 代贖物(λύτρον)로 주려 함이니라”(20:28).

뤼트론(lutron)은 석방금 (price of release), 대속물 (ransom), 속전 (ransom price)을 뜻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ἀπολύτρωσις)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3:24).

 

이 시장 언어에는 예수께서 오셔서 자기 생명을 주신 사역은 속전으로 그 특성은 구속의 경륜에서 대속적이라는 점에 그 강조점이 내포되어 있다.

 

제사언어 및 시장 언어로 나타난 이 구원사건은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으로 이루어진 객관적 실재에 속한다. 바울이 말한 대로 이 객관적 구원사건 모든 국면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은혜로부터 온 것이다. 이 객관적인 구원사건은 인간의 동의나 믿음이라는 조건이 있을 수 없는 인간 밖에서 일어난 것들이다. 이 객관적 측면은 주관적 측면을 필요로 하고 있다. 객관적인 측면에 역점을 둔 칭의를 중요시한 것은 맞긴 하지만 이야기가 더 계속되어야 한다.

십자가에서 이루신 객관적 구원사건의 무지개 색 같은 여러 가지의 의미를 포괄하고 있다. 이 칼라에는 주관적 측면도 내포되어 있어야 한다.

 

주관적 구원사건의 그림 언어

다음으로 칭의에는 주관적, 개인적, 인격적, 항구적, 체험적(참여적)인 국면(subjective justification)이 있다. 2천 년 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구원 사건이 어떻게 오늘 각 신자들에게 효력을 발생할 수 있는가? 이는 주관적 구원 사건에 해당한다. 구원의 길은 회개와 자복 및 역동적 믿음을 통하여 신자들에게 발생한다. 그리스도의 의의 은혜를 선물을 받아들이는 믿음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객관적인 구원사건이 각 사람들에게 효력을 발생한다. 이런 점에서 믿음의 수단은 구원의 조건이 된다. 이 믿음은 각 개인 편의 업적이 아닌 하나님의 선물이다.

믿음의 요소로 지적 요소, 의지적 요소, 순종적 요소 등이 거론되어 왔지만, 선포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에 그 본질이 있다. , 예수께서 내 죄를 대신 죽으셨고, 그의 부활은 나의 부활의 원천이 되며, 그가 나의 중보자로 현재 활동 중이시고, 그가 장차 나를 데리러 오실 것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다. 객관적인 구원사건의 근간이 되는 실재에 이미 내포되어 있지만 개인적인 참여가 없다면 그것이 어떻게 활성화되어 효력을 발생할 수 있겠는가?

 

성경은 주관적인 구원 사건 역시 그림 언어인 은유(메타포)로 묘사하고 있다. 곧 의인 됨(justification), 화해(reconciliation), 하나님의 아들 됨(adoption), 새로운 피조물(new creation) 같은 메타포가 여기에 속한다.

화해(katallage)는 인간관계에서 온 그림언어에 속한다. 하나님과 인간은 원수관계이었는데 이제 하나님과 인간은 친구관계로 회복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 버린 결과로 오는 적대관계(소외된 관계)를 제거하므로 더 이상 불화가 없고 평화(샬롬)가 있게 된다. 이렇게 화해에는 이 주관적인 특성이 들어 있다.

하나님의 아들로 입양하는 일(9:4; 8:15; 4:5; 1:5)은 가족관계에서 오는 그림언어이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로 선택 받은 이스라엘이 불순종으로 인하여 언약이 파기되어 마귀 백성으로 전락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대속물로 속죄하시므로 새언약의 자녀 곧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아버지의 무한한 자원을 글어 쓸 수 있는 자녀 되는 특권을 누릴 축복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이 아들됨은 진노의 자녀가 하나님의 친 아들과 영생의 후사로 받아들여지는 신분관계 회복이다. , 하나님과 적대적 관계에 놓여 있는 인간을 진노적 신분으로부터 호의와 축복을 받는 친자의 언약관계의 상태로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새 피조물(고후 5:17) 그림언어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에 대하여 죽고 새로운 삶으로 부활하여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하는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주관적 구원사건의 그림언어인 의인됨에 관하여 더 살펴보기로 한다. 의인 됨(稱義)이란 법정의 그림에서 온 표현이다. 법정 언어인 율법의 저주와 정죄로부터 해방시키고자 대가를 지불한 결과 각 사람이 장차 의롭게 (justification) 된다는 것이다. 재판관이 무죄 석방하는 것이 곧 의인 됨이다. 의인됨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시키는 과거의 죄로부터 용서를 받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진입이란 곧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분의 말씀에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 바울은 이 원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3:24).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4:5).

예수는 우리가 犯罪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4:25).

신자에게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회복시키시는 실재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사람이 받아들이면, 그 사람은 예수님 안에 내포되어 하나님께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이 자기의 순종이 된다. 예수께서 죄를 짊어지고 율법의 저주로 정죄를 받으신 것이 곧 자기의 죄 짊어짐과 그 정죄 받음이 된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 모두 자기가 한 일이 된다. 내가 예수를 진실된 마음으로 믿는다면 율법의 정죄를 이미 받은 것이 되어 더 이상 형벌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和平을 누리자”(5: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에게는 定罪함이 없나니”(8:1).

더러운 죄악의 옷을 벗기고 아름다운 옷을 입히는 스가랴서 3장에 나오는 대제사장 여호수아 사건은 이 의인 됨의 좋은 예가 된다. 멜랑히톤은 루터의 칭의 사상을 법정적 칭의 시각에서 보았지만, 루터의 작품을 면밀하게 살펴보면 그는 사실상 주관적 칭의를 강조하였다. 1888년 이래 믿음의 의인됨에 관한 운동을 전개하는 선구자들은 이 주관적인 칭의에 역점을 두고 복음을 설파하여 신앙의 대 부흥을 일으켰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아브라함

모리아 산상에서 아들 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燔祭할 어린 은 어디 있나이까”(22:7).하고 물었다. 이에 대하여 아브라함은 내 아들아 燔祭할 어린 은 하나님이 自己하여 準備하시리라”(22:8)고 예언적 대답을 하였다. 신약성경에서 최초로 구약의 이삭의 질문에 대한 응답의 메아리는 침례 요한의 보라 世上 罪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이로다”(1:29)에서 찾을 수 있다. 모리아 산정의 부자의 질문-대답에 나오는 어린양은 신약의 메아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어린양 곧 독자 예수 그리스도 표상이 되는 것을 읽어 낼 수 있다. 그리고 그 어린양 되는 예수 그리스도에 향한 참된 의인의 믿음이 무엇인지를 읽어낼 수 있다.

야고보는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건을 창세기 15:622장에 나오는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제물로 드리는 사건을 다음과 같이 결합시켜 참된 믿음의 의가 무엇인지 규명하고 있다. 구원의 원리에서 믿음을 온전케 하는 주관적, 개인적, 체험적, 참여적 국면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 祖上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祭壇에 바칠 때에 함으로 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함과 함께 일하고 함으로 믿음이 穩全하게 되었느니라 23 이에 聖經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함을 받았나니 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함으로 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2;21-24).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었다. “믿으니(he'emin)”라는 동사는 아만 (aman)의 능동 사역형으로 확실케 하다” “세운다는 뜻으로 흔히 이 동사는 전치사 베트 (안에서)와 함께 결합되어 나온다. 아브라함이 여호와 안에 확고하게 세워둠을 뜻한다. 믿으니에는 여호와의 약속에 향한 강한 내적 신뢰가 함축되어 있다.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이 믿으니이를 의(tsedaqah)로 여기셨다. 여기서 는 하나님의 신적 자질로 인간에게 선물로 주어질 때만 인간의 의가 된다. 인간이 하나님과의 언약공동체적 관계 안에서 책임을 다하는 것이 믿음이다. 이 믿음을 의로 여기신 것이다. ”여기시고(chashab)“각하다,” “간주하다,” “판단을 내리다,” “계산하다의 뜻을 지녔다. 아브라함에게는 의로운 점이 없었지만, 하나님은 그의 신뢰를 의로 여기신 것이다. 이 믿음은 감성적이거나 지적인 것 이상이다. 믿음은 신경 또는 신조에 대한 동의를 하는 것을 넘어서 역사적이고 관계적인 차원에서 여호와를 확고하게 의지하고 신뢰한 것을 말한다. “여기시는주체는 아브라함이 아니고 하나님이시다.

야고보가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한 것은 생명력이 있는 믿음에 반드시 수반되어야 할 순종 테스트에 합격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 아브라함이 아들을 죽여 번제로 바치는 행위가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칭하신 그 믿음의 진실성을 입증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야고보는 바울이 강조한 궤도에 따라(참조 롬 4:1~25; 11:4~39), 믿음을 칭의 속에 두고 의롭게 된 사람에게 기대되는 행위를 인용함으로 아브라함의 믿음이 생명력이 있는 믿음으로 완성된(온전하게 된) 것을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아고보는 믿음이 그의 함과 함께 일하고 함으로 믿음이 穩全하게 되었느니라에서 객관적인 구원사건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일에 협력하는 (sunergeo)” 생명력 있는 믿음의 순종을 암시하고 있다. 그는 믿음의 단순한 고백만으로 사람이 의롭게 될 수 있다는 것은 부인한다. 믿음에는 선한 행실이 수반되며 사람이 의롭다고 칭함 받은 그 믿음의 생명력을 강조하고 있다. 아브라함의 레크 레카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의 발걸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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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AHN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