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의 두 날개

구원 : 2018. 12. 17. 11:58

언약의 두 날개

아브라람 순례 스케치5

사랑의 두 면

청춘 남녀가 서로 사랑을 할 경우 상대방의 동의나 승낙 없이 일방적으로 사랑이 가능한가? 아무리 강력한 사랑이라고 할지라도 상대방의 응답이 없다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래서 신뢰에 토대를 둔 친밀한 마음을 얻기 위하여 상대방에게 온갖 노력을 다 동원해 나가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사랑은 모든 능력 가운데서 가장 강력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가장 무력하기도 하다. 이렇게 본다면 사랑은 일방적이 아닌 쌍방적인 일이 아닌가! 서로 사이에 신뢰감, 친밀감, 열정, 및 헌신의 원리가 맞아 떨어져야 성립되는 것이 완전한 사랑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사랑은 어떨까? 인간 사이의 사랑의 원리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부적합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이 먼저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의 사랑을 기다리고 계신 분으로 나타나 있다. 사랑의 주도권이 하나님 편에 있다. “내가 너를 사랑하니 내게 와서 내 사랑가운데 살라고 호소하는 음성이 성경 갈피갈피에 배어 있다.

그러나 인간은 호세아의 아내처럼 반복적으로 그 사랑을 거절 내지 반역하는 죄악적 모습으로 비쳐지고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어 메시야의 백성을 창조하시는 자기의 사랑을 보여 주셨다. 다니엘의 계시 가운데 (7:13) 하나님의 나타나심의 현상인 구름을 타고 그 사람의 아들을 함축하고 있는 인자로 오시어(10:45) 삶과 대속적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의 구원의 길을 나타내셨다. 이는 인간 밖에서 일어난 구원사건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이 객관적인 구원 사건은 인간편의 믿음을 통하여 그 효력이 발생된다. 따라서 객관적인 구원 사건이 인간에게 효력을 발생하게 하는 수단인 이 믿음은 구원의 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고 믿음이 하나님의 구원을 얻어내기 위한 인간 편의 종교적 업적(행위)으로서의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이루신 구원을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믿음은 구원(그리스도의 공로)을 붙잡는 손이 된다"(6BC 1073).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 편의 믿음은 쌍무적인 것이라야 진정한 구원을 이루는 사랑의 관계라고 볼 수 있다.

 

쌍무계약, 편무계약

인간은 현재 계약 사회 안에서 살고 있다. 인간의 삶은 계약이라는 제도 안의 존재인 것이다. 인간의 역사는 신분사회에서 시민사회로 발전하여 왔다. 이런 현상을 두고 영국의 법사학자 메인(H. Maine)신분에서 계약으로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시민사회에서 민법상 인간의 계약이란 2인 이상의 당사자가 서로 어떤 일을 두고 자유스러운 의사표시의 합의에 의하여 성립시키는 법률행위를 말한다. 14종의 계약의 종류가 민법상 나와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시일 뿐이다. 자유민주주의 시민사회에서는 얼마든지 다양한 계약을 체결 해 나갈 수 있는 자유가 있다. 이 사적 계약 자유의 원칙은 근대 자본주의 사회를 발전시킨 기간적 요인이 되어 왔다. 그러나 약자 보호 등 공정한 사회가 되는 일에 어긋나는 사항들에 대하여는 계약 자유가 남용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계약 자유의 원칙은 사회적 상황에 따라 그 내용이이나 방식에 있어서 제한되어 가는 추세에 있다.

계약은 두 당사자 사이의 의사의 합치로 성립된다. 따라서 두 당사자가 각각 채무나 책무를 지는 雙務계약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두 당사자 중 어느 일방만이 책무를 지는 유증과도 같은 片務계약도 있다. 쌍무계약과 편무계약은 계약의 효과로 본 구분이다.

 

성경에 나오는 언약을 두고 신학자들은 흔히 계약이라고 명명한다. ‘언약으로 번역되는 히브리어는 베리트(berîṯ, covenant)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어떤 결속관계를 두고 사용된 말이다. 신약에서는 헬라어 diathēkē(언약, 유언)를 베리트의 역어로 사용하고 있다. 성경이 강조하는 언약은 언약 당사자는 주권적으로 발의하신 하나님과 부조들이나 이스라엘 사이에 대등한 쌍무적 관계를 넘어서는 주권적 종속관계 형태로 결속되어 있다는 특성이 있다. 언약은 하나님에 의하여 주도되어 왔다는 점에서 편무성과 함께 불평등성을 지닌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언약은 일정한 형식의 서약을 통하여 언약 당사자들 사이의 결속을 확정하는 엄숙한 약속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서 역할을 하시면서, 동시에 언약 당사자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야 한다는 책무를 진다. 이런 점에서 성경상의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언약관계는 서로가 상대방에게 책임적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쌍무적인 특성도 지니고 있다.

 

아브라함 언약은 편무계약인가, 아니면 쌍무계약인가? 먼저 세속 법 체제에 나오는 계약 모델들을 하나님의 주도로 일어나는 성경의 언약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다만 신학적으로 언약에 조건성이 수반되느냐 여부를 중심으로 일방적인 편무계약적인가, 아니면 쌍방적인 쌍무계약적 요인은 없는가 하는 점을 살펴보아야 한다.

아브라함 언약을 두고 하젤(Gerhard F. Hasel) 박사의 쌍무계약론적 시각과 두칸(Jacques B. Doukhan) 박사의 편무계약론적 시각의 편차를 보여주고 있어 이를 집어 보고자 한다. 하젤 박사는 앤드루스대학교 신학대학원 원장으로 여러 해 동안 일하다가 잠들었다. 두칸 박사는 하젤 박사와 함께 같은 학교에서 같이 일하여 왔으며 현재도 교수 일을 계속하고 있다. 두 분 모두 구약성경 학자들이다.

 

<피의 언약 (Covenant in Blood)>에 나타난 하젤의 조건성 시각

아브라함의 언약은 3단계로 나오고 있다. 첫 단계는 창 12:1-3, 둘째 단계는 창 15:1-21, 그리고 셋째 단계는 창 17:1-14에 각각 나오고 있다. 참 하나님을 경배한 아브람은 계약의 파트너로 선택 받았다. 그와의 일련의 계약 과정에서 하나님께서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라는 뜻을 지닌 아브라함으로 개명까지 해 주시므로 새 언약관계를 확인시켜 주셨다(17:5).

하젤은 아브라함의 언약을 두고 무조건적인 언약이라고 주장하는 세대주의신학적 주장에 동조하는 일에 치명적 문제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 예로 엘렌 화잇 여사가 부조와 선지자들 138 쪽에서 할례 의식을 행함으로 그들은 그들 편에서 아브라함과 세우신 언약의 조건들을 성취할 것으로 서약하였다는 지적을 들고 있다.

하젤은 아브라함 언약의 조건성 근거를 이어서 본문 풀이를 통하여서도 밝히고 있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言約을 지키고 네 後孫代代로 지키라“(17:9).

위 본문에 나오는 지키라(shamar)”는 신명기에 30회 이상 나오는 단어로 이른바 조건적 언약의 전형적인 모세와의 시내산에서 체결한 언약에서 사용되고 있다(4:2; 29:9 ). 안식일을 지키라는 본문에도 나온다(31:13, 14, 16). 이 아브라함 언약은 배반할 (parar, 깨트리다) 수도 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언약이 지닌 지킴과 깨트림의 두 가지가 언약의 조건성을 말해주고 있다(hasel, p. 39).

더 나아가 아브라함 언약은 하나님께 충성하는 자와 체결되었다는 점(18:18, 19)은 이미 조건성을 전제로 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모리아 산으로 이삭을 대려가 바치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반응은 하나님께 향한 그의 순종으로 이어지고 있다. 구약성경에서 믿음의 칭의의 전형적인 모델이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로 여기시고”(15:6)라는 본문이다. 이 아브라함의 믿음의 칭의는 항상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순종을 수반하고 있다(22:5). 이런 점에 비추어 하젤은 언약 체결에 있어서 인간 편의 책무에 역점을 둔 설명을 하고 있다.

 

<창세기 (Genesis)>에 나타난 두칸의 무조건성 시각

두칸은 창 12:1의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을 가라(Lek leka)"고 하는 아브라함에게 내린 명령에 종속시킨 것으로 문장 분석을 하고 있다(p. 198). 그러나 창 15:6 본문을 풀이하면서 의를 생성시키는 일은 인간의 노력이나 행함이 아니라고 한다. (tsedaqah)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아브라함을 의롭게 한 것은 아브라함의 행함의 총화가 아닌, 자기를 위한 하나님의 행위에 자진해서 의지하는 것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봉신의 굴복이라는 행위 조건 아래에서 체결된 통상적인 고대 근동 종주조약에서와는 달리, 15장에 나오는 언약은 편무적이고 하나님의 주도적인 제안(move)에만 의존된 언약이다. 이 언약은 시내언약과는 달리 제단도 안 나오고, 시내 언약에서와 같은 희생 제물에 관련된 의식도 안 나오다(Genesis, p. 224). 그러나 아브라함이 제물을 쪼개어 배열해 놓고 쪼갠 사이를 경건하게 지나감으로(PP 137) 순종을 엄숙하게 서약한다. 이런 일련의 의식에 있어서 봉신보다는 하나님의 주도성에 강조점을 두고, 제물을 쪼개는 일에서는 하나님이 친히 대리적인 죽으심을 표상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의식적인 희생을 드리던 날, 아브라함은 한 놀라운 현상, 즉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을 비준(문자적으로 자르는”)하는 의미로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는 것을 목도하였다(15:17-18). 이 의식에서는 하나님만이 행동하고 계시며, 아브라함은 수동적으로 있었을 뿐이었다(15:12). 이제부터 심지어 희생 자체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아무런 설명을 듣지 못할 때에라도 희생은 언약의 중심이 되었다.

이 언약 의식의 의미는, 짐승의 희생적 죽음이 상징하는 바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그의 약속을 성취시키려는 자기의 계획의 무조건적 확실성을 스스로에게 서약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언약의 책임을 스스로 지신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런 개념에서 모타이어(J. A. Motyer)창세기 15장에는 갈보리의 날이 암시되어 있다. 그 때에 그는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셨다고 하였다. 이런 점에서 두칸의 창세기 15장의 편무계약적 특성은 하나님 편에서의 책무를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마치는 말

아브라함 언약에 관한 재림교회 내 두 시각의 편차는 상호 배타적인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 언약의 두 날개 중 한편의 당사자가 담당한 책무를 각각 부각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 언약 전체를 놓고 하젤은 12:1이나 17:10, 14(할례 의식)에 나타난 본문을 통하여 인간 편의 조건성 책무를 탐색, 부각하고 있다. 이를 위하여 그는 화잇의 조건성 메시지를 인용하고 있다. 반면에 두칸은 창 15장의 신적 임재와 그의 쪼개어진 제물로서의 하나님 편의 주도적 책무를 보여주고 있다. 두칸의 역점은 화잇(E. G. White)이 제시한 것에 나타난 것처럼 위대한 희생 제물이신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분께서 영광 가운데 오시는 모습을 통해 여기서 구속의 경륜이 그에게 제시되었다”(PP 137)고 한 지적에 역점을 두고 있다. 그는 인간 편에서 수용 여부에 상관없이 골고다에서의 무조건적인 영원한 사랑의 제물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언약의 조건성과 무조건성은 구원의 양 날개처럼 작동하게 되어 있다. 하나는 믿음의 순종이라는 날개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자기희생적 사랑의 날개이다.

Posted by KAHN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