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와 영
“그가 또한 우리를 새 言約의 일꾼 되기에 滿足하게 하셨으니 律法 條文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靈으로 함이니 律法 條文은 죽이는 것이요 靈은 살리는 것이니라 7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律法 條文의 職分도 榮光이 있어 이스라엘 子孫들은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榮光 때문에도 그 얼굴을 注目하지 못하였거든 8 하물며 靈의 職分은 더욱 榮光이 있지 아니하겠느냐”(고후 3:6-8).
“律法 條文(γράμμα, gramma)은 죽이는 것이요 靈(πνεῦμα)은 살리는 것”이란 무슨 뜻인가? 문자와 형식에 집착하면 생명을 살리지 못한다. 그렇다면 문자 배후에 있는 살리는 영만이 본질적인 것이란 말인가?
“律法 條文(γράμμα)”은 “문자,” “글자,” “문서”를 뜻하는 말이다. 개역판에서는 “의문”으로 번역하였다. 이 “그람마”를 딤후 3:15에서는 거룩한 '기록'을 의미하며, “성경”에 적용하고 있다. “율법조문”이 성경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른바 옛 언약이라고 칭해지고 있는 시내언약에서는 죽이는 문자를 주셨고, 이와는 대조적으로 새 언약에는 생명을 주었는가? 그러나 바울은 본문에서 새 언약과 옛 언약을 이런 식으로 비교하고 있지 않다. 바울이 말하고자 한 진정한 의도는 시내언약 두 돌판에 기록된 율법의 문자(조문)에 대한 외적관계가 아닌, 생명을 주시는 율법시여자(입법자)와의 내적 마음의 관계를 부각 확인하고자 하는데 있다. 그는 구원 받기 위하여 율법을 준수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옛 언약 배후에 깔려 있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하여 주시는 구원을 강조하고 아울러서 그에 대한 반응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내 회심자들이 그저 돌판에 새겨진 문자에 집착만 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유대적 율법주의라는 화석을 뚫고 나온 자들이다. 그런 그들의 심령에 율법이 성령으로 기록되어 그리스도와 살아 있는 관계를 갖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바울이 이 본문에서 시내산 두 돌판의 중요성을 거부하거나 부인하고자 하는 율법폐기론적 의도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율법 준행이 성령으로 분여된 생명을 축출하는 것이 된다면, 그 것은 문자가 율법을 죽이는 것이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시내산에서 그리스도의 오심까지 전 기간 동안 이른바 제사장 국가로 선택 받은 백성들은 외적, 형식적 관계로 인하여 율법의 조문의 죽이는 직분 아래 들어가 있었다. 물론 개별적으로나 어느 한 때에는 진정한 하나님과의 내적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대세는 선민으로서의 사명에 서 일탈한 상황으로 전락된 것이다. 요시야나 히스기야 시대라 할지라도 마찬가지로 실패의 시대이었다.
그러면 선민들은 어떻게 해서 이렇게 실패하게 되었는가? 먼저, 이스라엘은 성소봉사 의식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이라는 복음을 분별치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희생 제도에서 그리스도를 보지 못한 채 자기의 죄 가운데서 죽게 될 것이었다. 그 다음으로, 그들은 율법을 자기들의 마음판에 기록하는 일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10계명에 단지 외적, 형식적 관계를 유지하는 정도에서 더 나가지 못하므로, 돌판의 십계명 문자가 그들을 정죄하고 죽이는 상태로 전락시켜 구원을 받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요컨대, 유대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는 관계를 갖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처형시켜 배척하고 만 것이다.
바울이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통한 십계명의 기능을 다음과 같이 바로 가르치고 있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者에게는 決코 定罪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生命의 聖靈의 法이 罪와 死亡의 法에서 너를 解放하였음이라 3 律法이 肉身으로 말미암아 軟弱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罪로 말미암아 自己 아들을 罪 있는 肉身의 貌樣으로 보내어 肉身에 罪를 定하사 4 肉身을 따르지 않고 그 靈을 따라 行하는 우리에게 律法의 要求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1-4).
바울이 지적한 이 메시지는 원래 옛 언약 시대에도 적용되는 것 이었다. 그 단적인 예로 히브리서 11장이 옛 언약 기간 동안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살았던 선구자들의 삶에 내재되어 있었던 것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본래 율법은 “生命에 이르게 할 그 誡命”(롬 7:10)이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 점을 “이로 보건대 律法은 거룩하고 誡命도 거룩하고 義로우며 善하도다”(롬 7:12)라는 메시지로 확인하고 있다.
바울은 율법을 통한 구원을 강하게 반대하였다. 십계명의 문자는 인간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로지 그리스도만이 구원하실 수 있다. 베드로는 이 점을 분명하게 유대 지도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확인 선포하였다.
“이 예수는 너희 建築者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 다른 이로써는 救援을 받을 수 없나니 天下 사람 中에 救援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1-12).
바울은 기록된 십계명 문자를 반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이전에 친히 두 돌판에 기록하셨기 때문이다(출 31:18; 34;28; 신 5;22; 10:2, 4). 그는 구원 얻는 방편으로서 의식이 되었던지 도덕이 되었던지 간에 행위에 토대를 둔 체계를 반대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영원한 도덕법과의 참된 관계를 무너뜨리는 유대주의자들을 경계, 배척한다. 그래서 그는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 유대주의자들을 반대하면서 동시에 입법자의 본래의 취지와 목적을 살려 내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영적인 열매가 풍성하기를 추구하고 있다. 문자는 죽이는 것이다. 영은 살려 낸다. 바울은 문자와 영, 이 둘 중에 문자를 배척하고 영을 선택, 강조하고자 한 의도가 아니다. 죽이는 문자에 집착하여 구원을 주장하는 형식주의와 의식주의, 인간의 행위를 통한 구원을 배척하고 있다. 그는 문자를 제 자리에 복원시켜 살리는 영과 조화를 시키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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