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 언약 -할례의식
.아브라함 언약 -할례의식
창 17:1-27
아브람이 99세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이스마엘이 13세의 일이다.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에 도착한지 24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아브람이 나이 들어가고 사래를 통한 약속의 후손 성취가 늦어져 감에 따라 더 이상 그 약속을 기대할 수 없다는 심정이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것이다.
A. 언약의 당사자
1. 언약의 하나님--여호와, 전능하신 하나님 Almighty God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셨다”(17:1). 전에도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자신을 “나는...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I am the LORD)"로 소개하신 바 있다(창 15:7). “여호와(LORD)”는 창조주 하나님의 개인적인 이름이다(창 2:4; 4:26). 출애굽기 3:14의 “나는 나다(I AM WHO I AM)가 여호와 이름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여호와는 그 어떤 것도 제어할 수 없는 자존적(自存的) 존재이시며 과거, 현재 및 미래에 대한 주권을 지니신 분이다. 그는 창조와 구원을 창발하시고 과거, 현재 및 미래를 궁극적으로 통어하시는 분이시다.
이 여호와께서는 아브람에게 자기의 정체를 밝히신다. 그 분께서는 약속을 이루시기에 모두 능하시다는 의미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EL Shaddai)”(창 17:1)고 자기의 정체성을 선포 하신 것이다. 창 17:1에는 엘 샤다이가 성경 처음으로 나오는 사례가 된다. 이 하나님의 이름은 주로 창세기와 욥기에 나온다. 구약성경에서 EL은 야훼와 동의어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민 23:8, 19, 22, 23; 24:4, 8, 16, 23; 시 16:1; 17:6; 85:8; 사 40:18; 42:5 등). “솨다이”의 의미는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지만, 탄생, 축복, 번성의 문맥에 나타난다. “전능한”(사 13:6; 욜 1:15)을, 인간의 연약함에 대한 보증으로 하나님의 “힘,” “강함,” 갓난아이를 양육하는 어머니의 “젖가슴(shad, 아 4:5; 7:3)”과 “풍성함”의 뜻으로 보아 이 칭호는 미래 하나님의 풍성하신 축복을 예기케 한다. 이 하나님의 칭호는 낯선 땅에서 방랑하는 순례자 아브라함이나 곤경에 처한 욥의 체험에 적합한 하나님의 상(像)이다(욥기에 31회 나옴). 엘 샤다이는 연약한 인간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충만하고 풍성한 미래를 열어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소망 부재 상황에서 미래 약속의 성취를 지향케 한다.
이 전능한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되었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창 17:7)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에 참여하며 또 너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오늘날 네게 향하여 하시는 맹세에 참여하여 13 여호와께서 이왕에 네게 말씀하신 대로 또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대로 오늘날 너를 세워 자기 백성을 삼으시고 자기는 친히 네 하나님이 되시려 함이니라”(신 29:12-13).
2. 언약의 상대자--아브람과 그의 후손
아브람은 우상 숭배가 만연한 우르지방에서 확고하게 하나님을 경배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자기의 뜻을 전달하시고, 거룩한 율법의 요구와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될 구원에 관한 명확한 지식을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과 사래에게 새로운 이름을 줌으로써 새로운 백성으로서의 의식을 공고히 하신다(창 17:3-5),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개명하도록 지시하신다(17:5). ‘아브람’은 '고귀한(high) 아버지,' ‘높으신 아버지,’ ‘높임을 받은 아버지’라는 뜻이다. 아브라함의 어미에 나오는 단어 hamon은 “많은‘” “무리”라는 뜻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많은 무리의 아버지 또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라는 뜻이다. 이것은 그들의 혈통을 아브람에게까지 소급함으로 찾을 수 있는 수많은 족속들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스마엘 계통의 아랍 족속, 미디안 족속, 그두라 계통인 다른 아랍 종족들(참조 25:1~4), 에돔 족속 등-물론 이스라엘 족속도 포함하여-모두가 아브람의 후손이었다. 하지만 넓은 의미에서 이 약속은 아브람을 조상으로 주장할 무수한 영적 후손을 가리킨 것이다(갈 3:29).
아브라함의 후손에는 오늘의 그리스도인들도 포함된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믿음의 자녀가 된 자들은 모두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계수될 것이었으며 그들은 언약의 약속들의 후사였다”(PP 476). 더 나아가 열국은 이 언약의 상대자로 포괄되고 있다(PK 368).
‘사래’는 ‘나의 공주 또는 왕비’이어서 오로지 아브라함에게만 국한되는 이름이지만, 개명된 ‘사라’는 만인을 위한 ‘왕비(the priness)'가 된다.
새 이름은 “너로 甚히 蕃盛하게 하리니”라는 축복을 함유하고 있는 셈이다.
이 후손의 약속에는 소망스런 미래가 담겨 있다.
3. 안약 체결 단계
1차 -- 창세기 12:1-3
하나님의 은혜의 선택을 받은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란을 떠났다. 전 인류 구원의 준비가 되는 단계이다. 여기서 여호와의 말씀은 명령으로 시작하여 약속으로 계속되며 축복으로 끝난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창 11:31)에 살 때에 처음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이 그에게 임하였고, 그것에 순종하여 하란으로 옮겨갔다. 그의 아버지의 가족은 이곳까지 그와 동행하였는데, 이는 그들이 우상을 숭배하는 동시에 참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도 연합하였기 때문이었다. 이곳에서 아브라함은 데라가 죽기까지 머물렀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은 그에게 그의 아버지의 무덤으로부터 앞으로 나아가라고 명령하였다. 그의 형제 나홀과 그의 가족은 그들의 고향과 우상을 버리지 않았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 외에, 오래 전에 죽은 하란의 아들 롯만이 부조(父祖)의 순례 생활에 동참하기로 선택하였다”(PK 127).
2차 -- 창세기 15:1-21
이 단계에서는 제안(7절), 지시(9절), 하나님의 주도권과 사랑의 순종(13-15절), 언약의 비준 의식((17절)이 나온다.
아브라함은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창 15:1-5 참고)라고 하여 자기 질문에 대한 답까지 내놓았다. 그는 신임하는 종 엘리에셀을 양자로 삼아 그의 소유를 상속시키자고 하나님께 제의한 것이다. 엘리에셀은 “경건하고 경험이 많으며 판단력이 건실하고 오랫동안 그를 충실히 섬긴 사람”이었다(PP 172).
아브라함은 아직도 자신의 믿음을 확증해 주며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목적이 성취되리라는 사실을 후세대들에게 증거해 줄 눈에 보이는 어떤 표징을 간구하였다. 주께서는 자신을 낮추시어 당신의 종과 언약을 맺기로 하시고 엄숙한 계약의 비준(批准)을 위하여 사람들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행하여지던 형식을 채택하셨다. 하나님의 지시대로, 아브라함은 각각 3년 된 암소와 암염소와 숫양을 희생으로 드리고, 그것들을 쪼개어 그 조각들을 조금씩 떼어 놓았다.
아브라함은 자기의 아들이 후사가 되리라는 보증을 받았다. 그 때 그는 장막 밖으로 인도되어 하늘에서 반짝이는 무수한 별들을 쳐다보라는 지시를 받았다.
3차 -- 창세기 17:1-14, 23-27 할례예식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유한 지 거의 25년 되었을 때에 주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1-16 참고)고 말씀하셨다. 창세기 17장에는 언약이란 단어가 10회 이상 나온다.
아브람은 언약의 마지막 단계에서 새 이름 아브라함을 받았다(창 17:1-14). 이는 하나님 앞에서 아브라함의 품성의 변화와 관계의 변화 신분을 보여준다.
C. 창 17장 언약의 약속
1. 후손 약속
“내가 내 言約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蕃盛하게 하리라 하시니(17:2). 여기에 나오는 ”크게“를 6절에서는 ”심히“라는 단어로 확장된 후손 약속으로 반복하여 나온다.
아브라함 언약의 후손 약속은 1:28의 명령의 연속선상에 있다. 이 약속은 노아에게 반복되었으며 지금은 아브라함에게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최초의 목적을 아브라함 안에서 성취하실 것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아브람이 기도하며 예배하는 자세로 엎드린다(17:3). 그러자 하나님은 이 언약의 후손 약속은 단순히 아브라함 자신에게만 아니라, 열국, 열왕, 후손과 더불어 주어진 하나님과 백성과의 관계로 구체적 확장시키시는 미래 약속을 하신다.“내가 너를 여러 民族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17:4).
“내가 내 言約을 나와 너 및 네 代代 後孫 사이에 세워서 永遠한 言約을 삼고 너와 네 後孫의 하나님이 되리라”(17:7). 이 약속은 3:15절의 어투로 메시야 약속으로까지 확대된다(17:7). 단순히 열국의 약속을 넘어 온 세상의 영적 구원의 약속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 안약은 메시아의 씨가 되는 그리스도의 희생 제물을 통한 영생의 약속을 담고 있다(롬 6:23; 딛 1;2). 모든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아브라함의 영적인 씨-은 영광스런 언약의 후사이므로(갈 3:7, 27~29), “영원한 언약”은 구속의 경륜이 시행되는 한 계속 효력을 유지해야만 한다. 따라서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의 규정은 세세토록 유용한 것이다.
이렇게 사라를 통한 엄청난 후손 약속에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願하나이다”(17:18)고 간청하였다. 그는 100살이 된 자기와 90살이 된 사라에게 남아가 탄생한다는 약속에 대하여 웃으면서 아브라함이 예배드리면서 웃으며 회의심이 담긴 질문을 연거푸 하는 반응을 보인 것이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言約을 세우리니 그의 後孫에게 永遠한 言約이 되리라”(17:19)고 하신다. 이어서 이스마엘이 생육, 번성할 뿐만 아니라 큰 나라가 되게 하겠다고 하신다.(17:20).
하나님께서는 내년 이맘 때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과 그 이름을 이삭으로 특정하신다. 이삭은 ‘그가 웃는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웃음에 대한 언급으로, 의심으로 연약했던 순간을 계속 상기시켜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마도 이것은 약속된 아들의 탄생으로 아브라함이 경험했을 기쁨을 반영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지금은 의심 중에 웃었을지 몰라도, 믿음이 사실로 구현될 때에는 진실로 기뻐할 것이었다(참조 창 21:6, 7; 사 54:1; 갈 4:27).
이삭 이름이 이스마엘(하나님이 들으신다)과 대칭되는 점에 비추어 ‘하나님이 웃으신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어 보인다.
2. 땅의 약속(17:8)
후손에 관한 약속 다음에 땅에 관한 약속이 주어진다. 땅의 약속은 후손 약속과 더불어 15장과 17장의 연결점 중의 하나가 된다.
“내가 너와 네 後孫에게 네가 居留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永遠한 基業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17:8).
땅의 약속은 아브람 생전에 브엘세바 우물(21:25)과 막벨라 굴 정도에 국한되어 있어 부분적이어서 그 후손에게 거류하는 땅을 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의 후손들이 가나안을 역사적으로 한 때 소유할 것이긴 하지만, 진정한 땅의 선물은 3:15의 구원사적 투시에 비추어 보아 에덴동산에서의 영원성을 회복하시겠다고 보아야 “영원한 기업”이 될 것이다. 그래야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는 약속이 성취될 것이다.
아브라함의 언약에 나오는 엘 샤다이의 약속들은 보존, 보호, 후손, 소유, 번영 등 지상적, 물질적인 면과 메시야, 복음 등 영적인 면이 담겨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들 중에 메시아적 약속은 그 절정을 이루고 있다.
E. 언약의 준수--언약의 조건성
1. 무조건적 언약 논리들
어떤 역자들은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 12:3)는 구절을 “스스로 축복하리라”로 번역한다. 그렇게 되면 이 구절에서 메시아적 축복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신약의 기자들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에서 메시아적 약속을 이해하였다.
아브라함의 언약이 조건적인지 무조건적인지에 대한 질문은 세대주의 신학과 언약 신학 사이의 논쟁의 요점이 되어 왔다. 세대주의자들은 아브라함의 언약을 무조건적이고 영원하며 변경할 수 없는 하나님의 계획으로 믿고 있다. 그것의 문자적인 성취는 개인이나 혹은 국가의 순종에 기초하지 않는다.
Walvoord는 아브라함 언약의 무조건적인 특성을 지지하는 열한 가지 이유를 제안한다. (1) 모세 언약을 제외한 모든 이스라엘의 언약은 영원하다. 그러한 영원한 언약들이기에 논리적으로 무조건적이다. (2) 이 약속에서 조건들이 진술되지 않았다. Walvoord는 아브라함의 언약에서 조건적인 요소 즉 순종의 첫 번째 행위를 인식한다(창 12:1). 그러나 그는 이것을 오히려 하나님의 예언적 선언이라고 말한다. “하나의 조건이 만났다. 더 이상의 조건은 아브라함에게 놓여지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님은 변개할 수 없는 무조건적 계획을 제정하셨다. Ryrie은 “너의 땅으로부터 나가라”는 이 명령을 하나님의 명령이기보다는 의도로서 해석한다. (3) 이 언약에서 되풀이되고 확대된 반복에서 인간의 충성에 의존된 조건적인 약속은 어디에도 없다. (4) 이 언약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의식을 통하여 확고해졌다. (5) 할례는 조건이 아니라 언약 관계의 표징이다. 약속의 땅은 그 의식이 소개되기 전에 주어졌다. (6) 동일한 약속과 관련해서 이삭과 야곱에게 조건들이 요구되지 않았다. (7) 그 언약은 부조들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확립되었다. (8) 국가적 배교까지도 그 언약을 파괴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을 영원히 계속될 국가로 보았기 때문이다(렘 31:36). (9) 신약은 아브라함의 언약을 불변한 것으로 선언했다(히 6:13-18 참고; 창 15:8-21). (10) 이스라엘과 그의 미래에 관한 성경적 계시는 그것을 확실하게 한다. (11) 아브라함에 대해 하나님의 약속이 가지는 이러한 무조건적인 특성은 기타 다른 무조건적인 언약들 속에서 반영된다.
세대주의자들은 땅에 대한 약속의 종말론적 중요성을 강조한다. 과거나 현재에 그 예언의 문자적 성취는 없었다. 그 성취는 미래 천년왕국 시대에 있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2. 아브라함 언약의 조건성
(1) 아브라함의 언약적 삶은 명령과 법도의 우산아래에 있어 조건성이 존재한다.
“너는 내 앞에서 行하여 完全하라”(17:1).
“내 앞에서 행하여(halak)” “할라크”는 "가다," "오다," "걷다"의 뜻을 지녔다. 에녹과 노아가 자기 세대에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날마다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면서 친근히 하며 살았다는 것이 동행하였다는 뜻이다(5:24; 6:9). 이 동행이 ‘완전하라’의 의미를 밝혀주고 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으며 그 분의 뜻을 따라 순종하는 삶이 완전한 것이다.
아브람은 에녹과 노아의 모범을 따라 자신의 부족함을 자각하고 관찰을 피하려는 듯이 하나님 뒤에 서 있지 말고, 바로 하나님 면전에 서 있는 듯이 신성한 살피심을 의식하고 그 분의 인정을 갈구하며 행해야 했다. 에녹이나 노아는 이런 명령 없이도 완전한 삶을 살았지만, 몇 차례 실족을 거듭한 아브람에게는 분명한 말씀으로 명령하신 것이다.
엘 샤다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tamim]”(창 17:1)고 명령하신 것은 “율법” 개념을 언약의 중심에 도입하면서 아브라함을 그분의 계시하신 뜻대로 살아야 할 의무 아래 두셨음을 의미한다.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창 18:19). 이 본문에는 어떻게 은혜와 율법이 관련되어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아브라함과의 언약은 하나님의 율법의 권위도 보존하였다”(PP 370).
“아브라함과의 언약은 하나님의 율법의 권위도 보존하였다”(PP 370). 하나님의 율법은 “아브라함과 세우신 하나님의 언약의 조건”이 되었다”(PP 178).
아브라함 인격 안에는 하나님의 율법이 입력되어 있었다. 그는 이 여호와의 율법에 따라 전적으로 전능하신 분에게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했다. 후에 하나님은 이삭에게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니라”(창 26:5)가 이를 확인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의 메시지가 시사하듯이 아브라함은 하나님 안에 거하여 열매 맺는 삶을 살았다.
아브라함의 언약에 관해서는 두 국면, 즉 약속과 할례 명령이 내포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베풀도록 명령하셨다.
(2)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에게 언약을 “지키라”고 명하셨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창 17:9). 이 본문은 창 3:15절에 나오는 메시아 예언(“너와 여자의 후손 사이”)을 추억케 한 본문 원어의 유사성을 나타내고 있다. ‘대대로 지킬 영원한 언약’(17:9)언약을 체결하신 분의 불변적인 영원한 보증을 시사하고 있다. 메시아의 약속이 담긴 이 언약이 영생을 확증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지키라”는 명령은 무조건성을 내 세울 수 없는 반증이 된다. 신명기에 30회나 나오는 “지키라”는 용례에 비추어 보면 조건성을 함축하고 있다(신 29:9; 4:2; 등) 할례 “의식을 행함으로 그들은 그들 편에서 아브라함과 세우신 언약의 조건들을 성취할 것을 서약하였다”(부조, 138).
또한 아브라함 언약은 배반될 수 있었다는 점이 조건성을 시사하고 있다.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창 17:14). “배반(pārar, broken)"이란 단어는 언약 파기를 지칭한다. 이 단어 역시 그 용례에 비추어 조건성을 함축하고 있다(fp 26:15; 신 31:16, 20; 사 24:5).
(3) 아브라함의 순종의 시험
아브라함의 믿음의 반응은 순종으로 입증되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좀 더 충만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또한 창세기 22장에 기록된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아브라함의 자발적인 순종을 고려하여야 한다. 진정한 예배의 중심에는 믿음과 순종이 결합되어 있다.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묘사되어 있다. 당시에 그 약속의 성취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아브람과 그의 아내는 자녀를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려 하셨는가?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시험이 그의 믿음과 하나님 경배에 대한 참된 성격을 드러내었다. 그의 믿음은 하나님이 나타내신 뜻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헌신이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그의 아들 이삭을 기꺼이 희생으로 드리고자 하였을 때, 하나님은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고 하시고,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다”는 거룩한 선언과 함께 이전의 약속들을 새롭게 하셨다(15-18절).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시험을 견디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본질은 신뢰하는 믿음에 따라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자발성에 있었다(히 11:17). 이런 활동적인 믿음이 야훼를 두려워 하는 일의 중심에 있었다. 그런 믿음이야말로 반역적인 마음을 자원하는 마음으로 변화시킨다. 그 결과 마음은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에 전적으로 굴복하게 된다.
“야훼를 두려워한다(‘yir’at Yahweh)”는 히브리어 구절은 하나님의 계명을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것, 즉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고, 그를 섬기는 등(신 10:10, 12; 전 12:14; 사 1:19-20 등)에 표현된 하나님께 향한 떨리는 존경을 묘사한다. 웬햄(Gordon Wenham)은 창세기 22장에 나타난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 “여기에 완전한 신뢰와 완전한 순종 속에 나타난 믿음의 예증이 있다”고 언급하였다.
아브라함은 그의 의롭게 하는 믿음은 위기의 때에 충성에 대한 시험을 견딜 수 있는 것임을 보여주었다. 그의 믿음은 교리적 믿음 이상의 것임이 입증되었다. 그것은 약속을 믿고, 하나님의 계명을 믿으며 순종하는 믿음이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믿는 믿음이 아브라함의 믿음의 본질이었다.
고향을 등지고 강을 건넌 아브라함은 외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을 받았다. 살던 둥지가 있는 과거를 등지고 자기의 미래가 되는 이삭을 바치라는 것은 미래까지도 포기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는 현재라는 광야를 묵묵히 걸어가야 했다. 광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미드바르'다. 이는 '말씀'을 의미하는 '다바르'와 어원이 같다. '광야'와 '말씀'의 컴비네이션을 시사하고 있는 파생 어원이다. 광야에서 살아야 하는 양은 목자가 필요하다. 특히 목자의 '말씀'이야말로 광야를 살아가는 생명선이 된다. 양들을 부르는 목소리를 비롯하여, 눈짓과 손짓 등 목자가 양들을 위하여 취하는 일체의 행동이 곧 '말씀'이다. 그렇듯이 오늘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말씀도 다양한 방법으로 주어질 수 있다. 히브리서에서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히 1:1)을 소개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말씀'과 '광야'가 같은 어원에서 파생된 것은 '말씀'의 가치가 '광야'에서 제대로 발휘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광야'는 인간이 극소화되는 곳이다. 그곳은 인간이 자력을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목자를 잃어버린 양들은 생존 자체를 보장받을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반면에 광야는 목자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극대화되시는 곳이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이 곧 생존의 근거요 방향이다. 그래서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시 119:105)이 되신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의 양식으로 삼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리들의 삶의 배경이 광야임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광야의 양들처럼 자신의 무능함을 깨우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광야 인식의 첫걸음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우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함으로 중생을 경험하는 것이다. 중생은 그동안 삶의 중심을 차지하였던 자신을 내려놓고, 그 대신 하나님을 자신의 참 주인으로 영접하는 것이다. 그것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고백 속에 담긴 의미이다.
아브라함은 그저 몇몇 순종의 행위를 더한 추상적인 믿음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창 15:6) 이후에 역사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웬햄이 그것을 잘 설명하였다.
구약에서 믿음은 약속을 믿는 것과 계명을 순종하는 것 둘 다를 포함한다. 히브리서 11:8-19과 야고보서 2:18-24이 아브라함의 생애에 대한 설명에서 “믿음으로 아브라함이 순종했다”(히 11:8) 하고, “믿음이 행함으로 온전해졌다”(약 2:22)고 강조한 것은 두 번째 국면에 대한 것이었다. 히브리서는 신앙의 두 측면 즉 믿음과 순종은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즉, 아브라함의 믿음은 창세기 15:6에 나오는 의의 기초가 되는 믿음과 창세기 22:12에 나오는 순종적 믿음이 포괄되어 있다. 이 순종적 믿음에는 부활신앙이 내재되어 있다.
F. 언약의 징표--할례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항구적인 기억 장치가 되는 표징은 할례이었다. 할례는 아브라함 자손이 이방인들과 구별된다는 표징이 된다.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창 17:9-10, 13-14).
출애굽 사건에서 유월절 양의 피가 그 표징이 되는 것처럼 할례에서 피는 아브라함 언약의 표징이 된다. 할례의식과 유월절 양은 출애굽으로 확립되어 제물을 먹는 모든 남자들에게 할례를 의무사항으로 세운 의식이 되었다.
할례 일자는 탄생 8일째이다. 포피를 베서 피를 흘리는 것은 희생제물 의식의 범주로 이해된다. 동 의식 그 자체는 직접적으로 구원적인 효과를 지닌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들에게 할례를 거행하는 부모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신앙의 표출이며 온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경륜에 동참하는 파트너로 헌신하는 일이라는 신학적 의미를 지녔다.
심지어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창 17:13) 종들도 그들이 아브라함의 가족 중에 속한 것으로 간주되어 할례를 받아야만 하였다. 할례는 아브라함 언약의 표징으로서 몇 가지 기능을 하였다.
1. 이방인으로부터 아브라함 자손을 구별케 한다(엡 2:11).
2. 여호와의 언약을 영구히 기념케 한다(창 17:11).
3. 도덕적 순결을 계발 시킨다(신 10:16).
4.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표상한다(롬 4:11).
5. 마음의 할례를 상징한다(롬 2:29).
6. 그리스도인들의 침례 예식을 예표한다(골 2:11-12). 할례는 영적인 의미에서만 침례의 전영(前影)이 되고 제도로서 모형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영적인 이스라엘에게는 침례가 언약의 표징이듯이 육적인 이스라엘에는 할례가 언약의 표징이었다(참조 창 17:11; 골 2:11, 12; 딛 3:4; 벧전 3:21). 후자는 육적인 탄생과 관련 있었고, 전자는 영적인 재탄생에 수반된다.
아브라함 당시 고대 이집트 등 셈족 나라들에도 널리 할례의식이 거행되었다. 따라서 단순히 육적 표피를 잘라내는 일만으로는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구별하는 표징으로 삼을 수 없다. 아브라함 언약의 표징이 되는 할례는 이방 나라의 할례와는 다른 의미가 들어 있는 것이다. 언약 백성의 할례는 물질적, 영적 축복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하는데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육체적 징표는 마음의 영적 변화를 수반하는 것이어야 했다.
“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신 30:6).
초기교회 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런 깊은 의미를 망각하였다. 스데반이 이를 잘 들어내고 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행 7:51).
할례는 아브라함의 가계로부터 약속된 메시아가 탄생한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시켜 주는 역할을 했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탄생하고 십자가 달리신 이후에는 하나님께서는 육적 할례의식의 기능을 폐기하셨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 5:6; 고전 7:19 비교)고 하였다. 바울에 따르면, 육체의 할례는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영적인 마음의 할례의 상징이요 표상이었다. 그리스도의 피가 영원한 기업을 위하여 모든 사람을 “샀다”(고전 7:23).
그리스도교 신자는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이며, “침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골 2:11-12)다. 기독교 전통에서는 침례가 할례를 “대체하였다”고 말하는 것이 관례적이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 할례는 신자들이 그들의 심령에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손으로 받는 영적 할례로 성취되었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29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롬 2:28-29).
바울은 하나님의 할례 명령은 아브라함이 이미 믿음으로 의롭게 된 이후에 주어졌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아브람은 “무할례 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롬 4:11)으로 할례를 받았다. 바울은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롬 4:13)고 설명하였다. 그는 심지어 아브라함을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라고 부르며, 이렇게 한 것은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다(11절).
“십자가 후에 할례는 아무 가치가 없다(롬 2:24-29; 갈 5:6; 엡 2:14-16; 골 2:14-17; 딛 1:9-11)―(딛 1:9-11, 13,14 인용). 바울의 시대에는 계속 할례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할례를 받을 의무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성경에서 많은 증거를 댈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은 별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죽으셨고 따라서 육체의 할례는 더 이상 가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화잇주석, 행 15:1,5).
그리하여 외적 할례의식 보다 내적 심령의 변화 체험이 중요하게 되었다. 구원은 구약성경 시대의 할례에 토대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신약성경은 할례 대신 침례를 새언약의 표징으로 삼고 있다. “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12 너희가 침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 2: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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