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38장 유다와 다말 이야기
창 38장 유다와 다말 이야기
부끄러운 이야기가 성경에
어느 분이 불경을 연구하다가 어떤 계기가 되어 성경을 읽었다. 그런데 창세기에 나오는 부녀 사이에 일어난 성관계, 그리고 며느리와 시아버지 사이의 성관계 같은 음담패설을 읽고 이것도 종교 경전이냐는 의구심을 오래 동안 버리지 못하였다고 한다. 심오한 진리를 고담준론으로 논의하며 학문적 탐구에 정진하는 것만이 종교의 진수 전부가 아니다. 성경은 인간 본성의 죄악적 실상을 있는 그대로 적나라하게 들추어 내 그 진상을 보여 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성경은 생명의 책이다. 성경은 참 생명을 소개하고 있다. 그것을 어떻게 얻는지 그 길을 밝히고 있다. 성경은 인간의 죄악상을 적나라하게 밝히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잃어버린 생명을 되찾게 하는 메시지로 차있다. 이 점이 다른 종교 경전과의 근본적인 차이라고 볼 수 있다.
다소 불균형적 구조
창세기 38장은 앞뒤 문맥에서 크게 벗어나는 이야기다.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가는 이야기가 37장에 나오다가 38장에서는 그 요셉 이야기는 흔적도 없이 무대에서 사라진다. 그리고는 시아버지 유다와 며느리 다말 사이에 일어나는 이야기가 뜬금없이 나오고 있다. 37장의 요셉 이야기는 39장에서 다시 이어지고 있다. 즉, 창세기 38장에서 갑자기 장면과 화제가 바뀐다. 요셉의 형들 중에서 유다가 갑자기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무대의 장소도 완전히 다른 곳이며 배경도 다르다.
유다는 아버지의 집을 떠나 혼자서 가나안 땅 아둘람 지역으로 이주하여 거기서 가나안 이방 여인과 혼인한다. 38장의 다말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다시 이야기는 요셉의 주제로 돌아간다. 39장에서 유다는 아버지의 집에서 형제들과 더불어 양을 치는 목동으로 돌아가 있다. 더구나 다말에 대한 언급도 다시 나오지 않는다.
창 39장에서 유다-다말 이야기가 나오는 신학적 의미나 이유가 무엇일까?
혹자는 38장의 다말 이야기는 야곱의 형제들이 요셉과 관련하여 애굽으로 내려가게 되는 이야기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이 별도로 전해져 내려온 전승이 끼어들었었다고 추정하는 자들도 있다. 과연 그럴까?
유다의 가나안 여인과 결혼
유다는 동생 요셉을 노예로 팔아버린 사건으로 양심의 가책을 받는 중 형제들과 교류를 끊고 분리의 길을 선택하였다. 유다의 제안에 따라 동생 요셉을 죽이지 말고 팔자고 제안했다는 경위를 후에 들은 맏형 르우벤이 유다를 책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자기 제안을 두고 양심의 고통을 받은 유다의 그 때 심정이 훗날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있는 요셉 앞에서 자기 아우 베냐민을 위하여 개진한 연설에 묻어 있다(창 44;17-34). 유다는 형제들로부터 “내려갔다”(38:1). “내려가”는 것은 슬픔과 고통의 상징어가 된다. 이런 의미는 요셉이 애굽으로 내려가고(37:25), 야곱이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에 “스올에 내려가 아들에게 가리라‘(38:35)는 본문들에 배어있다.
이 때 유다는 가족이 위기를 극복하고 헌신한 벧엘을 찾아야 했다. 그러나 그는 벧엘을 찾지 않고 거룩한 백성들로부터 분리하는 길을 걸었다.
유다는 아둘람에서 가나안인 히라와 위태로운 친교를 맺다가 그의 사교적 관계가 넓어져 가나안 사람 수아의 딸과 혼인까지 하였다. 야곱의 아들들은 아버지처럼 하란으로 가서 결혼할 대상을 찾고자 하지 않았다. 라반의 집에서 도망치듯 나와 적대적 간극이 벌어진 터이었기 때문에, 각각 알아서 가나안의 주민들과 혼인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고나 할까.
하나님을 잘 믿는 이상적인 배우자감이 없는 상황에 처하여 있을 경우 묵묵히 하나님의 섭리적 지도와 개입을 기도할 수밖에 없는 경우들이 나온다.
모세는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딸 십보라를 아내로 맞았다. 그두라를 통한 아브라함의 자손 미디안 족은(창 25:1, 2) 한동안 참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들로 남아 있었을 수도 있다. 이드로는 자기 딸의 곤경을 해결해 준 믿음직스러운 모세에게 먼저 혼인을 청했으리라 짐작된다. 이드로(르우엘 2:18, 21)는 참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다(18:12, 23; PP 247). 그래서 모세는 자신의 현재 처지를 고려하여 곧장 그 제안을 승낙한 것으로 보인다.
요셉(사브낫바네아)는 태양 신 숭배의 신전 도시 온(Heliopolis)의 애굽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을 아내로 맞았다. 요셉이 애굽 여자와 결혼함으로 인하여 조상들의 하나님께 대한 그의 충성심이 약해진 것 같지는 않다. 그는 자기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이스라엘 두 지파의 두령이 되리만큼 잘 양육했다.
삼촌 무르드개의 슬하에서 신앙으로 양육 받은 에스더는 아하수에로 왕후가 되었지만, 자기 동족의 멸망을 막는 위대한 신앙적 여성이었다.
이런 이방인 배우자와 혼인 사례들을 통하여 이들은 성공적인 신앙 가정을 이룩한 점이 돋보인다. 그러나 가나안인 수아의 딸과 혼인한 유다의 경우는 다르게 보인다. 그가 결혼하여 낳은 자녀들의 악한 특성들은 가나안 수아 가문의 영향권에 몰입된 상황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유다가 가나안 친구와 교제하면서 도움 받아 창녀들 찾은 것으로 볼 때 그의 신앙은 형식뿐이었고 사실상 가나안 사람들에 동화되어 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형사취수(兄死妻嫂) 거절과 하나님의 사형
신명기 25:5-10에는 형사 취수제 또는 수혼제(嫂婚制, levirate marriage)가 나온다. 구약성경에서 단 두 경우에만 이 사례가 나온다. 그것은 창 38장의 다말과 룻기 2-4장에 나오는 룻이다. 구약성경은 친척이나 인척간의 혼인을 금하고 있어 홑몸이 된 자와 그 인척간의 혼인 및 성관계는 근친상간으로 간주된다(레 18:14). 이 형사취수제는 남편이 자식이 없이 죽은 경우 과부는 가까운 친족과 결혼하여 죽은 남자의 가문을 이어가게 하는 경우에만 국한되었다. 이런 이유 외에도 약자인 여자를 보호하여야 한다는 점과 남편이 남긴 토지 등 재산을 가지고 다른 족속과 재혼하는 것으로 인하여 토지와 재산이 분산되는 것을 막아 공동체를 보호 하자는데 그 목적이 있을 것이다.
히브리어 yabam은 ‘시동생(시숙)“을 뜻한다. 이 단어에 대한 라틴어 역어 levir에서 levirate marriage가 유래되었다. 헷 족속과 같은 다른 고대 국가들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수혼제도가 존재했다.
창 38장에는 하나님께서 유다의 악한 아들들을 처형하는 두 건의 사건들이 나온다.
유다는 맏아들 에르(Er)가 장성하자 며느리 다말을 보았다. 그러나 “유다의 장자 엘(Er)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셨다(창 38:8). 이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죽이신 첫 사례가 된다. 에르가 어떤 악을 행하였는지 그 상세한 설명이 나오지 않고 있다. 앞 절에 결혼 기사가 나와 있고, 같은 표현이(10절) 오난의 결혼에 사용된 것으로 보아, 아마도 맏아들은 가나안 사람들의 성적(性的) 문란 죄악을 범하였던 것 같다.
동생 오난은 아버지의 명에 따라 형수에게 씨를 이어주어야 했다.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그의 형에게 씨를 주지 아니하려고 땅에 설정하매 10 그 일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38:9-10). 에르나 오난 모두 하나님의 즉결처분을 당한 것이다.
오난이 땅에 설정하는 것이 왜 악한 행동이었는가? 여기에서 오나니즘이라는 말이 나왔다. '설정하매'라고 번역한 동사 '샥하트 (shachath)‘는 ’멸망시키다,‘ ’파멸하다,‘ ’부패하다‘는 뜻이다. 노아홍수기에서 일곱 차례 언급되어 부패한 인간과 땅을 서술하며, 소돔성의 성민들이 부패한 것을 묘사하여 아홉 차례 사용되었다(창 13:10; 18:28, 28, 31, 32; 19:13, 13, 14, 29). 그렇다면 오난이 땅으로 '샥하트'하였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오난이 땅을 부패하게 하였다는 뜻이다. 그는 소돔 도성의 성민들처럼 폭력을 행사했다는 것이다. 씨를 주지 않았던 행위가 폭력이다. 오난이 이기심으로 악하게 행하여 그의 형을 위하여 씨를 주지 않았다는 말이다. 형수를 위하여 사랑하는 마음으로 따뜻하게 대하여 자식을 갖도록 배려하지 않고 상속받을 재산이 탐이 나서 씨를 주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래서 '땅에 설정하다'라고 옮긴 것이다.
더 나아가서 ‘땅에 설정“하는 것은 여인의 후손 즉, 메시아의 씨를 땅에 쏟은 것이 된다.
다말은 남편도 죽고 두 아들이 다 죽어 청상과부가 되었다. “유다가 그의 며느리 다말에게 이르되 수절하고 네 아버지 집에 있어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 하니 셀라도 그 형들 같이 죽을까 염려함이라 다말이 가서 그의 아버지 집에 있으니라”(38:11)
며느리에게 수절할 것을 요구하고 친정으로 돌아가 막내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고 지시한 유다의 속셈은 다말이 집안에 불운을 몰고 온 장본인인 것으로 보고 영영 내 칠 속셈이었다. 그래서 막내아들 셀라가 장성하였으나 유다는 약속을 어기고 다말을 소외시킨다. 설상가상 유다의 아내 수아의 딸마저도 죽고 말았다.
다말의 진정한 의도
다말은 “종려나무”라는 뜻을 지녔다. 다말(Tamar)의 인종 배경에 대하여는 나와 있지 않지만, 가나안 여자가 아닐 수도 있다. 유다의 아내 이름은 안 나오는데 며느리 이름이 나온다는 사실은 무엇인가 함축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유대 전승은 본래 이방인이었으나, 룻처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의 여인으로 개종한 것으로 보고 있다(Doukhan, Genesis, 422).
다말은 유다 가문의 메시아 소망 신앙을 가지고 “여자의 후손”을 기대하는 여성일 가능성이 많다. 그것은 경건한 여인들의 소망이었다. 시아버지는 하나님 백성 같은데, 실상은 가나안 사람으로 살고 있을을 때, 며느리는 살아 있는 소망을 마음을 간직하면서 그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며 수절하고 있었다.
징조를 구하지 않겠다는 아하스 왕처럼 겉과 속이 다른 외식적 신앙을 지닌 시아버지 유다와는 대조적으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는 메시아의 신앙을 견지하고 있었던 것이 다말의 신앙이었다.
다말의 성전 창녀 변장과 유혹
알마누트 (almanuth) '알마나'는 '과부'란 뜻의 명사로서 창세기에서는 이곳에 단 한 번 나온다. 이사야서에도 모두 '과부'라고 번역하였다. 철자를 알레프로 쓰는 '알마나'는 철자를 아인으로 쓰는 '알마'와 발음상 혼동하기 쉽다. '사 7:14에서 알마(almah)는 임마누엘 동정녀 탄생을 예고하는데 '처녀'라고 번역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알마나'는 남편을 잃고 홀로 된 과부를 가리킨다.
다말은 셀라가 성년이 되어도 자기에게 수혼의 의무를 다 하도록 주지 않는 유다의 약속 위반의 속셈을 알아차렸다.
“얼마 후에 유다의 아내 수아의 딸이 죽은지라 유다가 위로를 받은 후에 그의 친구 아둘람 사람 히라와 함께 딤나로 올라가서 자기의 양털 깎는 자에게 이르렀더니”(창 38:12).
유다의 가나안 여인 아내도 일찍 죽었다. 유다의 가정은 무척 불행한 상황으로 전락하였다. 맏아들과 둘째 아들이 요절하고 아내도 따라 죽었다. 많은 경우 불행한 가정생활의 배경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불순종이 깔려 있다.
다말은 시아버지가 외로운 중에 다니는 동선을 사전에 탐지하였음직하다. 시아버지의 동선에는 창녀 집도 들어 있었다. 유다가 딤나로 양털을 깎으러 온다는 정보를 얻고서는(38:13)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한다. 다말은 비지너스 형 여인이었다. 다말의 사고의 폭과 정보력은 시아버지보다 한 수 위이었다.
다말은 과부의 옷을 벗고 성전 창녀가 사용하는 사치스러운 너울로 얼굴과 몸을 가리고 시부(媤父) 유다를 유혹하기 위해 에나임 문에 나가 앉았다. “이는 셀라가 장성함을 보았어도 자기를 그의 아내로 주지 않음으로 말미암음이라”(38:14). 다말의 이런 행위는 물론 단순한 정욕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이는 남편의 ‘씨’를 남겨 한 가문의 여자로서 떳떳이 자신의 권리를 유지하려는 무서운 집념의 발로이었고 또한 형사취수 결혼 규약을 준수하지 않은데 대한 당대의 합법적 자구책이었다.
오래 전 S. 혼(Horn) 박사 강의실에서 당대 형사취수 관행과 법제를 들었던 적이 있다. 시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며느리에게 제공해야할 의무를 등한이 할 경우 자기 몸이라도 주어야 한다는 법규가 있었다는 것이다.
신전 종교 창녀로 위장한 유혹은 물론 오늘날 관행과는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윤리적으로 동의하기 어려운 행각이다.
“그가 얼굴을 가리었으므로 유다가 그를 보고 창녀로 여겼다”(38:15). 이는 유다가 가나안 종교 풍습 속에 어울려 사는 빗나간 자태를 보여 준다. 거래는 이루어졌다. 다말은 에라본(담보물)으로 염소 새끼 화대를 당장 지불키 어려운 것을 감안, 미래 위기를 예측하는 신중성을 발휘하여 유다의 도장, 도장을 매다는 끈, 및 지팡이를 확보하고 성관계를 맺었다. 다말은 고도의 책략을 구사한 비지너스 여인이었다. 유다는 음욕 때문에 여인을 가까이 하였으나 다말은 메시야 가문을 이을 자녀들 얻고자 당대의 합법적 장치를 활용한 것이다.
유다는 다말을 보았으나 알아보지 못한다. 그녀가 얼굴도 가리고 몸도 '차이프'를 둘러 써서 가리었기 때문이다. 유다가 첫눈에 신전 창녀로 간주했다는 점으로 미루어(21절) 다말이 입고 있는 '차이프' 복장이 창녀의 복장이었다는 짐작을 할 수 있다. 유다는 아내 수아의 딸이 죽어 홀아비가 되었기 때문에 평소에 자주 창녀와 동침하곤 하였다는 암시를 이 구절은 주고 있다. 시아버지의 이러한 생활 습관에 대한 정보를 며느리 다말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 경우에도 유다는 창녀에게 들어가면서 정중한 어투로 들어가기를 요청한다. 다말은 한 번의 성관계로 임신할 수 있는 기회까지 만들었다.
다말은 “일어나 떠나가서 그 너울을 벗고 과부의 의복을 도로 입으니라”(창 38:19). 다말의 미션은 성공했다. 유다로부터 받은 담보물을 감추어 두고 지낸다.
유다는 아둘람 친구를 통하여 염소새끼 화대를 전하고 담보물을 되찾아 오려 했으나, 창녀를 찾지 못한다. 거기에는 신전 창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사실이 밝혀진다. 그래서 유다는 소문나면 부끄럽게 될 것을 염려하여 입 단속시키고 자기의 비행을 덮어버리려고 한다(38:23).
“그는 나보다 옳도다”
“석 달쯤 후에 어떤 사람이 유다에게 일러 말하되 네 며느리 다말이 행음하였고 그 행음함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느니라 유다가 이르되 그를 끌어내어 불사르라”(창 38:24).
다말이 유다와 동침하여 임신한 지 석 달이 지났다. 소문이 유다에게 들렸다. '음행하다/창녀 짓을 하다'라는 동사 '자나'가 다말에게 적용되었다. 유다는 '불태우다'란 동사 '사라프'를 사용하여 다말에게 화형을 구형하였다. 이전에 유다는 며느리를 포기하고 버려두었다. 약속도 헌신짝처럼 버렸다. 더구나 그는 가나안 신전 창녀를 기웃거리는 사람이었다. 유다는 아내를 잃고 창녀와 동침하는 나쁜 습관에 빠져 들었다. 게다가 신전 창녀와 동침하여 다산을 기원하는 다신교 우상숭배를 저질렀던 것이다. 그런 그가 이제는 며느리의 임신 소문을 듣고 진노하였다. 며느리가 음란한 창녀 짓을 하여 임신했다고 하니 가문의 수치가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약자를 보호하지는 못할망정 유다는 약자의 권리를 짓밟고 더 나아가 사형시켜 제거하려고 했다. 여성으로서 다말의 인권은 철저히 짓밟혔다. 유다는 자신이 창녀와 동침한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고 며느리의 간음에 대해서는 분노가 치밀었다. 음란한 간음죄를 저지른 며느리를 유다는 화형에 처할 작정이다. 이 시대에는 가족 성원에 대한 사법권이 가장에게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 간음을 행한 자는 돌로 쳐 죽이거나 화형에 처해야 한다(레 21:9; 신 22:22).
유다는 그 가문의 수장의 권위로 이 명령을 내렸다. 더욱이 이 사건은 며느리에게 남편을 마련해 주어야 하는 자기의 의무로부터 벗어나게 해줄 수 있는 행운의 기회로 보였을 것이다. 다말은 셀라의 신부로 여겨졌으며, 따라서 그녀는 정조를 어긴 것으로 인해 징벌을 받아야 하였다. 모세의 법은 그러한 경우에 돌을 던지도록 규정하고 있다(신 22:20~24). 단지 제사장의 딸이 관련된 경우나 어떤 형태의 근친상간의 경우에는 불에 태울 것을 명하였다(레 21:9; 20:14). 그러므로 유다의 명령은 후대의 이스라엘의 법이 요구하는 것보다 더 가혹한 것이었다.
다말에게 선고를 내리면서, 유다는 부지중에 자신을 정죄하였다. 하지만 그의 죄는 육욕에 길을 내어준 것뿐만 아니라, 다말에게 한 그의 약속(11절)을 어긴 것에도 있었다. 이 때문에 그는 그녀가 자신에게 행한 기만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책임을 지게 되었다. 그의 첫 번째 실수는 그 자신이 원칙을 공개적으로 위반하면서 가나안 사람과 결혼한 것이다(참조 24:3; 28:1; 34:14). 더군다나, 그는 분명히 자기 아들들의 사악함을 알았다. 그런데도, 그는 그들의 갑작스런 죽음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인정하기보다는 그것에 대한 책임을 다말에게 추궁하여 그녀를 영원히 자식 없는 과부로 두기로 결심했던 것이 아닌가.
그러나 자기가 건넨 화대 담보물을 받아보고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38:26)고 고백할 수 밖에 없었다. 다말은 화대로 받은 약조물을 들어서 유다가 아기의 아버지임을 밝힌 것이다. 다말의 행각은 당대에 합법적인 것이어서 그는 나보다 의롭다고 실토한 것이다. 유다 자손의 계속성은 유다의 행위보다는 다말의 의로운 행동으로 이어진다. ”의(체다카)“는 관계를 나타내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유다 자손의 계속성은 유다의 행위보다는 다말의 의로운 행동과 관계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 다말은 의로웠다/~옳았다/~하나님의 뜻에 맞았다'란 뜻이다.
당대 형사취수 법제를 보면 시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며느리에게 제공해야할 의무를 등한이 할 경우 자기 몸이라도 주어야 한다는 법규도 포함되어 있었다.
유다는 자기의 죄를 인정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수치스럽기까지 한 그의 행실이었지만, “그는 나보다 옳도다”는 고백을 하므로 그는 공정한 태도와 진실한 정신을 나타내었다. 그의 솔직한 고백, 그 후에 다말에게 한 그의 처우, 그녀에게서 낳은 아들들에 대한 성공적인 양육, 그리고 그들 중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선조의 계보에 오르는 영예를 얻은 사실, 이 모든 것은 그의 편에서 이루어진 철저한 개혁을 명백히 가리킨다. 그의 형들보다 훨씬 탁월한 성격이 그에게 그 가족의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부여했으며, 그의 후손들에게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의 자격을 부여했다(참조 49:3, 4, 8~10).
시부(媤父)를 속여 잉태한 다말의 행위는 오늘날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유다의 처신에 비해 더 낫다는 뜻으로도 풀이할 수 있다. 즉 유다는 하나 남은 셀라의 생명만을 보존하기 위하여, 그를 통하여 후손을 낳아 주기로 했던 다말과의 약조(11절)를 일방적으로 무시한 자신의 실책을 솔직히 고백한 것이다. 따라서 유다는 다말의 행위가 단순한 욕정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잘못과 메시아 후손에 대한 갈망에서 행해졌음을 인정하고 다말을 용서해 주었다. 유다가 며느리를 임신시킨 것은 어디까지나 다말이 창녀인 줄 오인하고 동침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녀가 며느리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더 이상 동침하지 않았다. '내가 그녀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일 이었다
창 38장의 이중주
복음서에서 누룩은 두 가지 상반된 의미를 지녔다. 그 하나는 복음의 신속한 확산력이라는 긍정적 의미이다. 다른 하나는 죄를 상징하는 부정적 의미이다. 마찬가지로 창 38장에도 긍정적인 신학적인 의미와 부정적인 신학적 의미가 담겨 있다.
(1) 메시아 가계의 반열에 들어간 다말
“해산할 때에 보니 쌍태라” (창 38:27).
쌍태에서 먼저 나오던 자가 뒤로 처지고 늦게 나오는 자가 앞지른다. 어느 면 야곱과 에서의 쌍태 탄생과 유사한 이야기가 전개된 것이다. 먼저 나오던 아기를 뒤에서 잡아당기고 자기가 먼저 나왔다. 이 때 어머니의 자궁을 터뜨리고 나왔다는 의미로 이름을 베레스라고 지었다고 한다. 이 일화는 후일 애굽으로 내려가는 야곱의 가족들의 명단에서 다시 회고된다(창 46:12). 유다는 부끄러움을 당하였는데, 그에게서 베레스와 세라가 나온다. 베레스는 다윗의 아버지 이새의 가문에 위대한 선조가 된 것이다. 다말은 유다 가문의 메시아 소망을 이어지게 한 여성이었다. 다말의 꿈과 사명은 성공했다. 다말 이야기가 구원사의 한 중요한 고리로 예수의 족보 속에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은 참으로 신비한 일이다. 다말은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들어가는 영광을 차지하였다.
(2) 므두셀라 버섯처럼 퍼져간 악습
남 유다 왕국이 하나님의 율법 저버리고 우상숭배로 멸망한 일의 기원을 유다의 범죄로 보는 시각이 있다. 이는 무드셀라버섯을 연상케 하는 해석이다. 유다의 범죄로 인해서 나중에 남 왕국 유다가 그 죄의 업보를 감당해야 했다. 남유다 왕국이 율법을 저버리고 우상숭배에 빠져서 마침내 멸망을 당한 까닭은 그 역사적 원인이 유다의 범죄에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창세기 38장은 남유다왕국 멸망의 기원론으로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곧 창 38장은 유다왕국의 멸망을 설명하는 기원론적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 이야기는 망국의 원인을 유다의 범죄에서 찾던 기원론으로 저술되었을 가능성이 짙다.
성경은 부도덕을 거대 버섯 같은 것으로 가르치고 있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8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고전 5:6-8).
삶의 현장에서 작은 죄는 온 덩어리를 변질시키는 누룩(이스트) 또는 거대 버섯의 작은 포자 같은 역할을 하여 전 인격 또는 전 사회라는 덩어리를 감염시키는 확산력을 지니고 있다. 그런 죄의 감염을 일으키는 포자는 현미경 없이 볼 수 없다. 그러나 점점 자라나 거대 괴물 버섯으로 자라난다. 죄의 감염으로부터 예방하는 최선책은 첫 포자 같은 작은 것을 제거하는 것에 있다. 우리 마음을 성령께 굴복시키면 성령께서 죄를 깨닫게 하고 우리 삶으로부터 제거하시며 우리 삶을 의로운 것으로 교체하여 주신다.
에스라 10:44에는 귀환 유대인 28,774명 중 이방 연인 처를 둔 수 113명(0.3%)을 골라 내 다시는 유다의 죄에 빠지지 않도록 엄하게 다루는 내용이 나온다. 느헤미야 역시 이방 여인을 아내로 삼은 자들을 엄하게 다스렸다(느 13:23-25). 새 나라를 재건하는 일에 이들 지도자들은 지난날 역사에서 나라가 망한 원인을 제거하고자 혼신의 힘을 경주하였던 것이다.
(한 작은 교회 금요저녁 예배 소수의 신도들 앞에서 이어가는 창세기 강론에서 제38장의 강론 순서가 되어 한 주일 내내 본문을 읽으며 기도하며 명상하다가 강론한 요지를 여기에 게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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