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시간대, 인간의 시간대

 

시편 90:1-12

 

백척간두(百尺竿頭)의 해를 보내며앞으로 연말까지 기다리면 금년 기해년 사자성어가 분명해질 것이다. 교수신문은 공명지조(共命之鳥)라는 사자성어를 택했다. 목숨을 함께하는 새는 아미타경(阿彌陀經)을 비롯한 많은 불교경전에 나오는한 몸에 두 개의 머리를 가진 새이다. 글자 그대로 목숨을 함께 하는 새라는 뜻이다. 서로가 어느 한 쪽이 없어지면 자기만 살 것 같이 생각하지만, 실상은 공멸하게 되는 운명공동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새는 한 머리는 낮에 일어나고, 다른 머리는 밤에 일어난다. 한 머리는 몸을 위해 항상 좋은 열매를 챙겨 먹었는데, 다른 머리는 그러지 못해 질투심을 가졌다. 이 다른 머리는 화가 난 나머지 어느 날 독이든 열매를 몰래 먹어버렸고, 결국 두 머리가 모두 죽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 사자성어는 요즘 세태를 의식해서 택한 것이다. , “한국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좌우 대립이며 진정한 보수와 진보를 새롭게 정립할 필요가 있다”, “정치가 좌우로 나뉜 것은 그렇다고 치고 왜 국민들까지 이들과 함께 나뉘어서 편싸움에 동조하고 있는지 안타깝다는 시대적 상황을 비판하고 있다. 이런 시각은 이른바 좌파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내걸고 자유민주주의 무너뜨리는 것을 보수 측이 사생결단의 자세로 막아내는 것을 무시한 양비론적 비판에 불과하다.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 혁명이 대한민국을 허물고 그 대신 인민주권체제를 세워 주한미군 철수-한미동맹 해체-국가보안법 철폐-남북 연방제-반미친중(反美親中)으로 질주하려는 작태를 외면하고 있는 무책임한 교수들의 얌체 같은 구호에 불과하다.사자성어 2위는 어목혼주(魚目混珠)라고 한다. 어목’(물고기 눈)이 진주로 혼동을 일으켜 무엇이 어목이고 진주인지 분간하기 어렵다는 뜻으로, 가짜와 진짜가 마구 뒤섞여 있는 상태를 비유하는 것으로 역시 다분히 양비론적이다.

2018년의 사자성어는 임중도원’(任重道遠)이었다. 그 뜻은 짐은 무겁고 갈 길은 멀다는 뜻이다. 2017년은 파사현정(破邪顯正)이었다. 이런 것들은 피상적 관찰에 불과한 것들이다. 오히려 중소기업 중앙회가 내건 사자성어 중석몰촉(中石沒鏃)이 더 적합하다. 돌에 깊이 박힌 화살촉, , 너무 이질적인 것이 너무 깊게 박혀 위태롭다는 뜻이리라. 내가 선택한다면 백척간두(百尺竿頭)가 어떨까 한다. 백 자나 되는 높은 장대 위에 선 것 같은 극도의 위태로운 시대이기 때문이다. 또는 첩첩산중(疊疊山中)의 사자성어도 더 어울린다. 그것은 '여러 산이 겹치고 겹친 산속.'이라는 뜻이다. 차라리 2013년 사자성어인 `순리를 거슬러 행동한다`는 뜻의 `도행역시(倒行逆施)`가 금년의 사자성어로도 알맞을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2019새해 첫 해돋이를 동해의 상서로움을 바란다는 望祥 백사장 해변에서 맞았다, 바람은 세찼고, 파도는 쉼 없이 넘실거리는 해안에는 새해 상서로움을 바라는 수많은 사람들이 멀리 수평선 저쪽에서 힘차게 떠오를 해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둠을 가르고 휘몰아오는 먹구름 저편에서 희망이 솟구쳐 오르는 것이 보고 싶었다. 이렇게 시작하였던 세초가 가중된 위기의 절망으로 끝나는 씁쓸한 세말이 아닌가 싶다. 어느 하나도 희망적이거나 교훈적인 것 없이 그저 암담하고 답답할 뿐이다.

 

12월 중순을 넘어선 이 시점에 한 해가 사라져 가고 있다. 나의 한 해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고 있다. 핵 문제에 압도당하여 이끌려 살아 온 한 해이다. 하늘은 어두컴컴하고, 거의 날마다 미세 먼지 공기 속에서 몸은 움츠러든다. 몰락이라고 해야 할까, 멸망이라고 해야 할까. 종말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끝이 성큼 다가오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은 확실해 보이는데, 탈출구가 안 보인다. 이것은 단지 기분 문제만은 아니다. ()이라는 말에는 몰락과 멸망이 음습하게 따라 붙는다. 섬뜩한 몰락과 불이 꺼지 듯이 티끌로 돌아가는”(90:3) 멸망을 이고도 사람들은 정말 태평스런 삶을 살고 있다고 느끼며 살까. 세모를 당하여 믿음에 굳게 서지 못하고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고 위태롭게 살지 않았나 생각하며 보낸 시간, 오는 시간을 가늠해보는 일을 피할 수 없다. 오늘 본문은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12)라고 하고 있다. 우리가 맞는 날들은 어떤 시간대인가? 모세의 기도에서 그 답을 얻고자 한다.

 

하나님의 시간대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니이다”(90:2).

하나님은 시간에 초월하신 분이다. 그는 시간에 제한을 받지 않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온 우주를 창조하시기 전부터 영원하신 분이다.

성경이 말하는 시간은 불자들이나 힌두교도들이 말하는 전생(轉生)의 원운동 반복이 아니다. 인생과 역사의 시간은 직선이다. 역사는 하나님 안에서 시작 시작이 있다. 그리고 그 끝이 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시간의 창조자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시간을 초월하신 분이었으나 성육신하시어 역사의 시간 속으로 내려 오셨다. 그리고 오스카 쿨만이 지적한 대로 그는 시간의 중심이 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시간의 제약을 받으면서 수고와 슬픔을 짊어 지셨다. 하나님이 친히 인간의 시간 세계로 오신 것이다. 그리하여 죄악과 싸움으로 비틀거린 인간의 시간대에 주의 은혜의 해”(4:19)라는 메시아 나라 시간대를 겹쳐서 투입시키신다고 선포하신 것이다. 그 분께서는 이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었다. 그리하여 주의 종들에게 불쌍하게 여기는 인자와 용서가 있게 되고, 그들의 일생을 기쁘게 하는 은총이 있다(13-17). 인간의 시간(chronos)과 하나님의 은혜로운 구속의 시간(kairos)이 겹치기로 이중주가 울려 퍼지고 있다.

 

인간의 시간대

인생은 티끌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았다(3). 인생은 아침에 돋는 풀과 꽃(5)처럼 한 때 아름답고 젊어 보이나 순식간에 지나간다. “사람은 겨우 생을 시작하자마자 죽기 시작한다”(실물 342).

인간은 끝 날을 바라보면서 사는 종말에의 존재이다. 인간의 시간은 은밀한 죄로 물들여졌다(8). 그래서 인간의 시간은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가 되어 있다. 인간의 시간은 홍수처럼 쓸어가며 풀처럼, 아침 꽃처럼 곧 시들어버리는 무상성과 불확실성이 중심이 되어 있다. 그래서 주의 분노 앞에 소멸되어 간다.

모든 피조물은 엔트로피 법칙 아래 놓여 있다. 인간은 시간 속에서 낡아가고 해체되어가는 존재들이다. 인간의 시간은 한숨과 눈물로, 그리고 거품처럼 사라져 가는 것으로 끝난다. 70년 내지 80년이라도 인간은 죽음에의 존재로 전락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만들어 준 이 허무한 시간의 틀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 죄로 인하여 이 피조된 인간은 수고와 슬픔을 살다가 언제인가는 죽어야 한다.

인간은 시간의 제약을 받는 존재가 되어 있다. 주어진 시간대 속에 갇혀서 산다. 밤의 한 순간(4)을 통과하는 유한성이 인간의 시간이다. 천년이란 시간대도 지나간 어제 밤의 한 경점(a watch, ashmurah), 한 순간에 불과하다. 구약성경에서는 야간을 4시간 단위로 3경으로 나눈다. 평생이 일식 간에 다한다(9). 일식간은 한번 숨 쉬는 사이라는 말이다. 숨 한번 쉬니까 한 평생이 지나갔다는 말이다.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9). 인생은 눈 깜작할 사이에 지나간다. 인생은 쏜 살같이 지나간다. 전도서는 헛되다고 반복하여 이야기 한다. 인생은 앞으로 보면 길어 보이지만 되돌아 뒤 쪽을 보면 짧기만 하다. 그 년 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다(9). 120년을 살아가면서 내린 모세의 인생 실존의 결론은 이것이다.

사람들은 100세 시대라고 호기 부리지만 아직도 멀었다. 어느 통계에 따르면 오늘날 한국 남자의 평균 나이가 74.4세에 이르렀다. 여자들의 평균 나이는 이보다 2-3년 많다. 남자들의 건강수명은 64.4세이다. 그러니까 10년쯤은 앓다가 죽는다는 것이다.

요컨대, 인간은 죄와 질고로 점철된 삶을 살다가 마침내 죽어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유한성, 연약성, 무상성을 지닌 존재로 전락되어 있다.

 

심판의 시간대

살아 온 삶을 셈하는 날이 있다. 인간은 영원한 분 앞에서 벌거벗은 존재에 불과하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8). 마지막 심판대 앞에 서 있는 존재로 셈하여야 하는 존재이다.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간 지난 1년이 아니었는지반추하여야 한다. 도덕적 아노미 생활 현상에는 심판이 따르기 마련이다. “일분 일초에는 영원한 결과가 내포되어 있다”(실물 343).

연말은 자기 평가의 시간이 되어야 한다. 셈하는 일을 므나의 비유를 대입하여 살펴보자(19:11-27). 1 므나=100세겔이고 그것은 3개월 노임=100데나리온에 해당된다. 각각 1 므나 씩 나누어 주었다는 것은 각 사람에게 하루 24시간 씩 배당되었다는 것으로 풀이할 수 말할 수 있다. 금화 달란트 비유에서처럼 각각 다른 분량의 달란트를 맡긴 것과는 달리 여기 은화 므나의 비유에서는 동일 분량을 종들에게 각각 맡겼다. 누구나 가진 것이기에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고 평하기 쉬운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많이 주고 어떤 이에게는 조금  나눠 주었다는 것이 아니다그리고 달란트비유는 맡기고  경제적 가치가 매우 크다는 것이다. 그러나 므나 비유는 작은 단위의 화폐를 맡기고 갔다중량으로 말하면 1 므나는 달란트의 60분의 1 해당된다

그러나 그것을 계산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그 때는 왕이 오실 때이다. 므나 비유는 보잘  없는 사소한 대수롭지 않은 것을 맡은 자라면 그것이 소중한  알고 일하라는 뜻의 말씀이다이런 작고 작은 일은 내가  일이 아니라고 외면하지 말고내게 맡기신 일이 아니라고 외면하지 말라는 것이다작고 작은 므나에 해당하는 일을 가지고 칭찬 받거나 책망 받을 때가 온다는 것이다열 므나 비유의 핵심은 예수께서 심판주로 다시 오셔서 복음을 증거한 자들에게는 상을 주시고 그렇게 하지 않은 자들에게는 준엄한 책망이 있을 것을 선포하신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 있는 존재이다. 심판할 때가 이르렀다. 셈할 시간이 이르렀다는 말이다. 재림신도는 이 셈하는 시간대를 조사심판으로 명명하였다.

 

구속의 시간대

주의 종들을 긍휼히 여기소서”(13).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임하게 하사”(17).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시간대에 메시아의 시간대를 포개 주셨다. 죄 많은 인간 세상에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라는 구속의 시간을 침투시키셨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 구속의 시간대, 이어지는 은혜의 시간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아침에 주의 인자로 우리를 만족케 하사 우리 평생에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우리를 곤고케 하신 날수대로와 우리의 화를 당한 연수대로 기쁘게 하소서 주의 행사를 주의 종들에게 나타내시며 주의 영광을 저희 자손에게 나타내소서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임하게 하사 우리 손의 행사를 우리에게 견고케 하소서 우리 손의 행사를 견고케 하소서”(90:14-17)

우리는 지나간 날 실패하였지만, 다시 은혜를 베풀어 주시어 새롭게 하시는 은혜에 감격하면서 다시금 하나님의 용서의 품안에 안겨야 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대 앞에 서 있다. 인간은 누구나 죄스러운 존재다. 그러나 하나님은 너그러이 자비를 베푸시고 은혜를 거듭 베푸시어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자 기다리고 계신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 보다 더 너그럽고 은혜로우시다. 성경의 요점이 바로 이 점에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이 죄악의 역사는 이 사랑의 승리를 증명하는 것으로 끝난다. 대쟁투 총서의 시작하는 말과 끝나는 말이 하나님은 사랑이다라는 메시지이다. 하나님께서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성경 갈피갈피에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싶다, 너의 구주가 되고 싶다. 너의 주가 되 원한다라는 사랑의 메시지 호소로 차 있다.

시편 90편 모세의 기도는 바로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슬기로운 사람은 자기시간을 계수하는 사람이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지혜를 얻는다면 그 시간을 살려 낸다.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시간에 민감한 사람은 더하기법과 곱하기 법으로 인생을 산다. 가치 있는 삶을 더하고 곱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된다. 그러면 하루를 1000년처럼 사는 것이 된다.

 

미완성 시간대

시편 90편 모세의 기도를 읽으면 민수기 전체가 물씬 풍긴다. 목적지 가나안에 이르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어간 비극적 사건들을 시로 옮겨 놓은 듯하다. 이 시의 저자 모세는 광야 생활을 이 기도로 압축한 듯하다. 자기도 풀잎처럼 사라져야 했다.

우리 손의 행사를 견고케 하소서”(17) -- 이 말이 반복되어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비전을 따라 나섰지만 다 이루지 못하는 한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의 삶이다. 다니엘은 자기 개인적 신앙의 절정기에 있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coram deo) “아름다운 빛이 변하여 썩은 듯하였다”(10:8). 하나님 앞에 서면 우리의 믿음, 소망, 사랑이 항상 부족하고 견고하지 못하다.

그리고 경건과 완전--이 것이야 말로 성도(chasid)의 목표이자 비전이다. 그러나 우리의 모습은 아직도 거기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신년 벽두에 세운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 것을 자책하기 쉽다. 그러나 세상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만델라는 이 점을 분명하게 의식하고 할 수 있는 일 즉 흑백 화해에 열중하고, 경제 문제는 다음 대통령에게 맡기고 물러나 우리 시대에 가장 존경 받는 사람이 되었다.

달아보니 부족하다고 하시는 주님께서 미완성된 아직도 변화 될 것이 많은 우리를 감싸 앉으시는 하나님을 믿고 연말을 보내야 한다.

歲月을 아끼라 때가 하니라”(5:16). 여기서 세월kairos이다. ‘아끼라exagorazo구속하다,’ ‘속량하다 redeem’뜻이다. 그래서 본문은 자기를 위하여 시간의 기회를 사라.” 즉 기회를 활용하라는 뜻이다(4:5). 위대하고 고상한 목적을 위해 매 순간을 활용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의무요 특권이다. 신자는 선한 일을 할 기회를 적극적으로 찾아야 한다.

우리의 시간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매 순간이 하나님의 것이므로 우리는 그것을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해야 할 엄숙한 의무가 있다.”

시간의 가치는 헤아릴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매 분 초의 시간을 귀히 여기셨으므로 우리도 시간을 그와 같이 귀하게 여겨야 한다. 인생은 헛되이 보내기에는 너무도 짧다. 우리가 영생을 위하여 준비할 은혜의 기간은 불과 며칠밖에 없다”(실물, 342)

미 프로야구의 전설요기 베라는 이와 관련된 최고의 명언을 남겼다. 미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위대한 포수이자 외야수, 감독으로 꼽히는 그는 평소 야구와 인생을 비유하는 주옥 같은 명언을 많이 남겼는데 그중 가장 회자되는 말이 이것이다.

 “(경기 또는 인생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It ain’t over till it’s over)."

승리 확률 99.9퍼센트의 경기도 마지막 순간에 역전패할 수 있듯이 모든 일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방심이나 좌절은 금물이라는 뜻이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1858년 후쿠자와 유키치는 <학문을 권한다>라는 제목의 책을 한 권 펴내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일본인들에게 다음 7가지를 권고하였다.

1. 이 세상에서 가장 즐겁고 훌륭한 것은 한평생 할 만한 일을 갖고 있는 것이다.

2.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것은 인간으로서의 교양이 없는 것이다.

3. 이 세상에서 가장 처량한 일은 할 일이 없다는 것이다.

4. 이 세상에서 가장 추악한 것은 남의 살림을 부러워하는 것이다.

5. 이 세상에서 가장 존중해야할 일은 남을 위해 봉사하고 결코 은혜를 끼쳤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6.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모든 것에 대해 애정을 품는 것이다.

7.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것은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다.

                                     (김동길 교수의 '석양에 홀로서서'에서 인용)

인생은 미완성 속에 살다가 가는 존재라는 점을 피할 수 없다. 삶의 미완성도 수용할 줄 알아야 한다. 미완성도 아름다울 수 있다. 슈베르트의 전체가 4악장으로 구도가 짜여진 미완성 교향학 No 8번처럼 2악장만 끝내고 3악장 쓰다 그만 둔 곡이지만 얼마나 유명한 곡이 되었는가! 미완성을 완성으로 채워주시는 날이 온다.

 

인생은 미완성/쓰다가 마는 편지/그래도 우리는 곱게 써 가야 해

사랑은 미완성/부르다 멎는 노래/그래도 우리는 아름답게 불러야 해

사람아 사람아 우린 모두 타향인걸/외로운 가슴끼리/사슴처럼 기대고 살자.

인생은 미완성/그리다 마는 그림//그래도 우리는 아름답게 그려야 해

친구야 친구야 우린 모두 나그넨 걸/그리운 사람끼리 모닥불을 지피고 살자.

인생은 미완성/새기다 마는 조각/그래도 우리는 곱게 새겨야 해/그래도 우리는 곱게 새겨야 해 (김지평 작사, 이진관 작곡)

내 삶의 미완성을 하나님의 은혜에 비끄러매야 한다. 내 삶의 본질적인 것에 주의 은혜 로 채워야 한다. 하나님이 내 삶을 통하여 이루시고자 한 목적을 이 은혜의 권능으로 이루어 가야 한다. 그리고 아직 이루지 못한 그 일을 향하여 권능의 은혜를 붙잡고 나가야 한다.

 

항해하는 사람은 북극성을 표준으로 하고 항해하여 간다. 그러나 그 북극성에 도달할 수는 없다. 하늘처럼 높은 목표는 우리를 그곳으로 이끄는 역할을 하나 그 목표에 도달하기는 어렵다.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고전 3:13-15).

경건의 모양은 어떤 사람도 구원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은 깊고 생생한 경험을 가져야 한다. 오직 이것만이 환란의 때에 그들을 구원할 것이다. 그 때 그들의 공력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시험을 받게 될 것인데, 만일 그것이 금, , 보석일 것 같으면, 그들은 주님의 장막의 은밀한 곳에 숨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들의 공력이 나무, , 짚이면, 어떤 것도 그들을 여호와의 맹렬한 진노에서 가리워 줄 수 없을 것이다”(1보감 24).

영광의 시간대

주의 영광을 나타내소서.”(17). 역사는 구속의 완성을 향하여 진행되어 가고 있다. 역사의 절정은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오심에 있다. 그 영광의 편린이 내 발걸음을 통하여 세상에 나타나야하겠지만, 끝에 있을 그 장엄한 파루시아의 영광의 날, 영광스러움으로 바뀌어 질 그 날을 응시하고 기다리며 살아간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 은혜의 나라 시민으로 역사의 마지막 시간, 영광의 나라를 맞이하여야 한다.

 

그리스도교의 시간은 처음과 끝이 분명하다. 처음에(태초에) 창조가 있었고,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끝이 완성된다. 시작과 완성은 상호간 연계되어 있다. 시작이 불분명하다면 끝도 불분명해 진다. 시작의 기념일이 안식일이고 완성의 끝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진다. 안식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갖지만 재림이 없다면 진정한 안식은 없다.

시간의 끝에 이어질 시간은 이전 시간과는 다르다. 각 시대의 대쟁투에 나오는 마지막 진술을 살펴보자.

 

그리고 영원한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더욱 풍성하고 더욱 영광스러운 계시가 나타난다. 또한 지식이 발전되어 감에 따라 사랑과 존경과 행복도 증가될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배우면 배울수록 그분의 품성에 대한 그들의 감탄은 더욱 커질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속죄의 풍성한 부와 사단과의 대쟁투에 있어서의 놀라운 결과를 제시해 주실 때 구속받은 자들의 마음은 더욱 열렬한 헌신의 마음으로 감동되고, 그들은 더욱 충만한 기쁨으로 금거문고를 탄다. 그리하여 천천만만의 무리는 음성을 합하여 찬양의 대합창을 한다.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5:13).

대쟁투는 끝났다. 죄와 죄인들은 없어졌다. 온 우주는 깨끗해졌다. 오직 조화와 기쁨의 맥박만이 온 우주의 만물을 통하여 고동(鼓動)한다. 생명과 빛과 환희가 만물을 창조하신 분에게서 끝없이 넓은 우주로 퍼져나간다. 가장 작은 원자(原子)로부터 가장 큰 세계에 이르기까지, 만물은 생물계와 무생물계를 막론하고 조금도 흠이 없는 아름다움과 완전한 기쁨으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선포한다”(쟁투 678).

Posted by KAHN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