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돔성 심판이야기

19; 17:28-36

과거와의 단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하실 때 곧 그것은 우르의 우상, 죄악적 문명과 문화로부터 얽혀진 지난 과거를 버리고 떠나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과거는 늘 우리를 옭죄는 굴레 역할을 한다. 과거와 단절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용기가 필요하다. 여기서 필요로 한 용기는 창조적 용기이다. 어느 해인가 탐임지 표제에 과거를 잊지 말라. 그러나 매이지 말라이었다. 쟁기를 잡은 자는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 세상 끝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도 절대로 뒤를 돌아다보면 안 된다.

 

며느리 바위 전설

장흥은 철쭉 명산이 많은 고장이다. 그중에 장흥읍을 굽어보고 있는 명산 중 하나가 억불산이다. 장흥읍 동남쪽에 위치하여 시가지를 굽어보고 있는 억불산은 높이가 518m로 불암산과 비슷하다. 능선이 길고 부드러워 마치 고운 여인이 치마 자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걷는 것과 같은 형상이다. 옛날 봉수대가 있던 정상부에는 기암괴석이 알맞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이 억불산은 도시를 관통해 흐르고 있는 탐진강과 함께 장흥을 상징하는 대명사가 되었다. 이 산에 있는 며느리바위에는 롯의 처와 유사한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며느리 바위는 어린애를 업은 여자의 형상을 하고 있는데 실제로 가까이 가보면 그 웅장함이 하늘을 찌를 듯 하고 20만평의 편백나무 숲은 어머니 품속과도 같다.

전설의 내용은 이렇다. 마을에 부자가 있는데 인색한 인물로 소문이 났었다. 옛날(백제시대) 어느 스님이 마을로 시주를 하러 왔다. 어느 부자 집에 들르니 주인은 시주는 하지 않고 쇠똥으로 시주를 주고 밖으로 쫓아냈다. 이를 지켜 본 마음씨 착한 며느리가 오물을 닦아주고 시아버지 몰래 곡식을 가져다주었다. 스님은 그 며느리의 착한 마음에 감동되어 며칠 후면 이곳이 물바다가 될 터이니 누가 불러도 뒤돌아보지 말고 몸을 피하라고 일러주고 사라졌다.

그날이 오자 과연 맑던 날씨가 갑자기 어두워지면서 천둥이 치고 폭우가 쏟아지고 마을은 삽시간에 물에 잠기는 것이었다. 며느리는 시아버지에게 피신하자고 졸랐으나 욕심꾸러기 시아버지는 막무가내였다. 할 수 없이 며느리는 애기를 업고 길을 떠났다. 그런데 뒤에서 시아버지가 애절하게 불렀다. 며느리는 스님이 일러준 말을 깜박 잊고 뒤를 돌아본 순간 돌로 굳어져 바위가 되었다고 하는데 그 바위를 두고 며느리바위라고 한다. 며느리가 살던 곳이 현재 창랑정 아래에 시퍼런 박림소인데 박씨와 임씨가 살았던 곳이라고 전해진다. 그때 며느리가 던진 수건이 날아가 巾山리 뒷산이 되었다고 전해 오고 있다. 그 건산리가 내 고향집이 있던 마을이고 나는 여기서 자랐다. 소돔고모라의 이야기가 이렇게 변형되어 전해져 온 것이다. 우리나라 여러 지역에 이런 변형된 전설들이 내려오고 있다.

 

19814월 사해 남쪽 여행하던 때 회상

요르단 암만에서 영어가 안 통하는 아랍인 운전사에게 지도를 보여주면서 손짓 발짓해 가면서 설명, 드디어 요르단 남부, 북부, 그리고 사해 관광을 했다. 소금바다, 사해 동편에 가서 쭉 남단으로 달렸다. 그러나 도시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소돔성이 망하던 때 도시가 있던 지역이 (사해 남단) 침몰하여 도시가 가라앉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사해 깊이는 지중해 바다보다 약 400m(표면), 800M(깊이)가 낮다. 여기 저기 작은 조무래기 소금 기둥들이 보이긴 하지만 사람 크기에는 턱 없이 모자라 보인다. 그 지역이 혀 같이 보인다고 하여 리산반도(혀 반도)라고 한다. 우리 일행은 리산 반도를 지나 사해 아래 끝까지 달렸다. 그리고 더 나아가 사피(소안)까지 갔다. 운전기사가 건너편 산등성이 큰 바위를 가리키면서 저것이라고 하는데 사람 모양이라고 볼 수 없었다. 차라리 며느리바위가 롯의 처를 훨씬 더 닮지 않았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저녁 때 성문에서 만나 대접한 천사들(19:1-3)

아브라함의 융숭한 대접을 받은 두 천사는 급속하게 소돔으로 향하였다. 아브라함은 여호와(그리스도)와 협상 중이었다. 두 천사들이 헤브론 북쪽 마므레로부터 소돔성 까지는 약 40마일로 성인의 발걸음으로 이틀이 걸리는 거리이었다.

롯은 성문에 앉아 있었다. 성문에 앉아 있었다는 표현은 롯이 그 곳 소돔성의 관직, 아마도 재판관이 되어 있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19:9; 21:19; 22;15; 4;1; 5:4). 아브라함의 유목민 생활과 롯의 정착 생활은 대비된다.

18:5에서 천사들은 아브라함의 환대를 받아들였으나 롯의 나그네 접대 강권을 수용치 않고, “우리가 거리에서 밤을 새우리라고 한다. 롯의 간청 (patsar, "밀치다," "강요하다")에 천사들은 응한다. 그러나 소돔성 사람들이 patsar(밀치다) 하는 경우에도 사용된 같은 단어가 사용된 점에 비추어 롯의 간청은 해악을 초래케 한 것으로 보인다.

롯이 대접한 저녁 무교병 식탁은 아브라함의 융숭한 환대와 비교해 볼 때 빈약하다. 그래도 천사들은 먹었다.

 

밤중에 일어난 사건 (19:4-14)

소돔성 사람들은 천사들이 잠자리에 들기 까지 기다렸다. 소돔성 주민들 모두가 롯의 손님들을 위협적인 행태를 보여주고 있다. 주민들 전체를 가르치는 표현이 다섯 번씩이나 나오고 있는 점, 노소를 막론하고, 원근에서 모두 모여든 점은 소돔성 전체가 유황불 심판 대상이 되는 근거가 된다. 롯을 불렀다는 것은 큰 소리로 행패를 가해 왔다는 의미이다. 그들의 내방 행패 목적은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yada)에 잘 나타나 있다. “야다는 성관계를 함축하고 있는 표현이다(4:1). 이는 분명히 소돔성 사람들이 롯의 손님들과 동성 간 성관계를 맺겠다는 것이다(7). 소돔성의 사악성은 격언이 되리만큼 알려져 왔다(3:9;4:6; 벧후 2:7-10; 7). 소돔성의 죄악상은 파멸을 자초하는 이유에서 더 살펴보기로 한다.

롯이 무도한 소돔 사람들의 요청을 거부하는 과정에 보여 준 반응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반응은 나그네 보호 차원에서 그가 문을 뒤로 닫고 그들과 버틴 것이다. 그러나 롯의 이런 행동이 역작용을 불러왔다. 군중들이 문을 부수려고 하면서 롯을 해코지 하려는 행동으로 나온다(19:9). 소돔성 사람들은 롯을 자기들의 법관으로 인정 못하겠다고 대든다. 이것은 결국 롯이 소돔성 부족 일원으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증거가 된다. 위기에 처한 롯을 손님들이 손으로 롯을 문안으로 끌어들이고 악당들 모두를 맹인이 되게 하여 어느 곳에 문이 있는지 찾지 못하게 한다.

둘째 반응은 롯이 두 손님들 대신 자기 두 딸들을 성적 대상으로 내 주겠다고 제의한 것이다. 롯이 이 때 사용한 어휘는 “‘내 형제들아”(19:7)이었다. 이는 소돔성 사람들을 더 화나게 하였다. 이 협상 제의는 롯이 자기 딸들을 희생 제물로 삼는 것이 되어 롯 자신의 도덕성 수준이 소돔성 주민들의 수준과 차이가 없게 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딸들도 아버지의 이런 저하된 수준에 영향을 받아 아버지의 대를 잇는 방법으로 아버지와 성관계를 맺어 두 민족의 조상들을 탄생시키는 결과를 빚어냈다.

하늘의 사자들은 소돔성 온 주민들의 사악한 현장을 직접 체험한 후에 롯에게 소돔성 파멸 심판을 선포하고 네게 속한 자가 도 있느냐고 묻는다. 그리고 가족들 모두를 성 밖으로 이끌어 내라고 명하였다(19:12-13). 하늘 사자들은 공의의 심판을 하기 전에 자비의 기회를 먼저 준 것이다. 자비가 공의에 선행한다.

롯은 결혼할 사위들을 구원하고자 찾아 가 임박한 심판 박두를 알리고 탈출을 호소하였지만 소돔성 사람들 같은 의식구조를 가진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다(19:14). 두칸은 19:8에 나오는 아직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않은 두 딸이라는 표현에 비추어 사위들은 아직 결혼하지 않은 신분이었다고 한다.

 

동틀 녘

틀 때에 天使가 롯을 재촉하여 이르되 일어나 여기 있는 네 아내와 두 딸을 이끌어 내라 이 罪惡 中에 함께 滅亡할까 하노라 16 그러나 롯이 遲滯하매 그 사람들이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引導하여 밖에 두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慈悲를 더하심이었더라 17 그 사람들이 그들을 밖으로 이끌어 낸 에 이르되 逃亡하여 生命保存하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물지 말고 으로 逃亡하여 滅亡함을 하라 18 롯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 여 그리 마옵소서 19 의 종이 恩惠를 입었고 께서 큰 仁慈를 내게 베푸사 내 生命救援하시오나 내가 逃亡하여 에까지 갈 수 없나이다 두렵건대 災殃을 만나 죽을까 하나이다 20 보소서 저 城邑逃亡하기에 가깝고 작기도 하오니 나를 그 곳으로 逃亡하게 하소서 이는 작은 城邑이 아니니이까 내 生命保存되리이다 21 그가 그에게 이르되 내가 이 일에도 네 所願을 들었은즉 네가 말하는 그 城邑하지 아니하리니 22 그리로 逃亡하라 네가 거기 이르기까지는 내가 아무 일도 할 수 없노라 하였더라 그러므로 그 城邑 이름을 소알이라 불렀더라” (19:15-22).

동틀 때 급박한 시간대에 서둘라고 한 하늘 사자들이 사용한 재촉하라(uts)는 단어는 애굽 감독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배정된 벽돌 수를 채우도록 재촉할 때 단어와 같다(5:13). 천사가 일어나라고 한 명령에 비추어 롯은 아직도 침상에 자고 있었다는 뜻이다.

롯 가족이 살던 곳을 떠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머뭇거리며 지체하는 롯과 아내 그리고 딸들의 손을 잡아 이끌어 내신 하나님이시다(19:16). 산으로 도망가라는데 황망한 중에 정신을 못 차린 그리고 힘이 부쳐 못가겠다고 핑계를 댔다. 작은 고을로 가게 해 달라고 요청한다. 하나님은 이 청원까지도 들어주신다. 이는 불쌍하게 여기는 하나님의 자비를 더하신 결과이다.

 

소돔-고모라가 멸망한 이유

성경은 소돔성은 여호와의 동산 같은 곳이기도 한다(13:10). 풍요가 있고, 물이 넉넉하며, 기후는 온화한 살기 좋은 곳이었다. 이곳에 롯이 정착키로 선택한 도성이었다. 소돔성이 망한 것은 죄악 때문이었다.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이유 때문에 망한 것이 아니다. 죄는 항상 자멸적이다. 이들 죄악상은 풍족, 태평, 거만, 가난한 자 무시, 가증한 일(동성애 포함)(16:49-50),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이다(벧후 2:7).

Sodomites(소돔사람들)라는 영어 단어가 男色, 獸姦, 음란한자를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이 시대 온 세계가 동성간의 결합도 결혼이라고 보자는 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나고 있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영향을 받아 사회적 문화적 혁명을 추진하는 마르쿠스주의자들은 성적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정당화시키려는 오늘날 이 세상의 죄파들이 이런 소돔식 동성연애나 결혼을 응원하고 있다. 소돔성 사람들은 이런 죄의 발원지 내지 온상이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본문에 나오는 설명으로 보아 소돔성은 실제적으로는 의인 10명이 없어서 망하였다. 그 배경에는 그리스도의 현장 조사와 조사심판이라고 볼 수 있는 창 18장 아브라함의 중보와 탄원, , 50-> 45-> 40-> 30->20->10, “내가 10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18:32. 소돔-고모라에 의인 10명이 없어서 망하였다.

그런데 그 의인에 들어가는 롯과 그 가족을 보면 우리와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롯은 엄밀한 의미에서 의인의 반열에 들지 못한다. 그는 양보가 없는 욕심꾸러기이었다. 죄악의 소돔성 안에 살면서 저들의 음란한 행실을 보고 듣는 죄의 오염을 받으며 상처투성이 의인으로 살았다.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을 당하던 의로운 롯의 심령은 날마다 상하였다.(벧후 2:7-8). 소돔성 폭도들을 보고 내 형제들이라고 한다(19:7). 그리고 자기 두 딸을 내줄 터이니 손님들에게 손대지 말라고 제안했다. 이것은 소돔성 죄악에 젖어 양보한 발상이다.

그러나 롯에게도 작은 의를 찾아 볼 수 있다. 곧 아브라함에게 배운 손님을 대접하는 일, 그리고 소돔성이 망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그대로 받아들인 점, 도시를 떠나라는 명령에 순종한 점에서 의인 냄새가 난다. 그러나 그 이후 보니까 술을 마시고 인사불성이 되어 딸들과 관계를 맺는 점에 비추어서 비틀거리는 무늬만 의인이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탄원을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절뚝거리는 의인 조카를 살리신 것이다.

한 사회가 망한 주된 이유는 의인이 없어서다. 예레미야는 의인 한 사람이 있으면 이 성을 용서하겠다고 한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萬一 正義하며 眞理하는 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城邑容恕하리라.”(5:1). 이는 의인이 희소하기 때문이라는 메시지 일 것이다. 의인이 용기를 가지고 사회를 지키면 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이사 앞에 서야 할 의인 바울 한 사람 때문에 승객 276명이 살았다(27:37). 사회제도 때문에 망한다고 하지 말라. 이 교회 10분이 믿음으로 확실하게 서 있다면 이나라는 망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의인 10명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살리신다.

 

롯의 처를 기억하라

1. 뒤를 돌아보지 말라.

그 사람들이 그들을 밖으로 이끌어 낸 에 이르되 逃亡하여 生命保存하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물지 말고 으로 逃亡하여 滅亡함을 하라”(19:17).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도망하여(malat)”피하다, 구출(구원)하다의 뜻을 지녔다. 도망의 긍정적인 뜻은 구원과, 부정적인 뜻은 멸망과 연계되어 나오는 본문 구조이다. 도망하여는 롯이라는 이름이 담긴 형태이다. 롯의 가족은 돌아보거나 머뭇거리지 말아야 했다. 예수께서는 이 대목을 인용하면서 롯의 처를 기억하라고 하셨다(17:28-36). 롯이 하마터면 돌아 볼뻔하는 상황을 연상시킨다.

전에는 가장 살기 좋고 아름다운 곳이 지금은 가장 위험한 곳으로 변해 버렸다. 하나님께서는 롯의 아내에게 뒤를 돌아보지 말도록 강력한 메시지를 주었다. 롯은 애석하게도 혼인한 사위와 딸들을 설득하는 일에 실패하고 집에 돌아와 아내와 출가하지 않은 두 딸들을 데리고 떠나야 했다. 이것들을 그대로 떠나기에는 그에게는 너무 큰 것들이었다. 그래서 롯은 지체하고 그의 아내도 지체하다가 뒤를 돌아다보게 된다. 신앙을 하는 사람에게는 확고한 자세가 필요하다. 지난날을 돌아다보면 시험에 넘어가기 쉽다. 어머니로써 롯의 처는 소돔성에 남아 있으며 임박한 심판의 메시지를 거부한 결혼한 딸들과 사위들, 호화스럽고 아름다운 집, 그토록 평생토록 모아둔 막대한 재산, 이 모든 것들에 얽어매졌다. “딸들은 남편들의 감화를 받았다”(PP 161). 미련이 남아 있는 롯의 처는 무엇을 가지고 가야겠다고 생각하여 머뭇거리며 지체하다가 뒤를 돌아다보다가 소금기둥이 되고 만 것이다(19:26). 롯의 처는 자신을 소돔성 주민 일원으로 여기면서 그들처럼 살았다. 소돔성의 문화적 삶을 좋아했다. 그 녀는 과거 삶에 굳어버려 화석이 되었다.

우리나라는 과거에 볼모로 잡혀 있는 듯하다. 과거를 캐내고 정죄하는 일이 이 나라를 혼미하게 만들고 있다. 이런 식으로 나가면 5년 후에는 저들이 또 당할 것이다. 과거에 집착한다는 것은 오늘의 나를 과거에 일어난 일의 희생자로 만든다. 과거의 희생자가 아닌, 현실을 선택하고 미래를 만들어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과거의 실수나 실패에 얽매이는 일은 시간을 낭비할 뿐 만 아니라 더 이상 발전할 수도 없게 한다.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이 된 롯의 아내는 말세를 사는 오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큰 귀감이 된다. 하나님께서 자기 생명을 보호하시는 일에 초점을 못 맞추고 나가야 한다. 그런데 그는 지금 강제로 이끌어 낸 호의조차도 감사하거나 반갑지 않았다.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자비를 경시하였다.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라.

2. 롯의 처는 세상에 미련을 둔 사람의 표본이 된다.

자기가 사는 시대를 분별치 못하고 세상일에 지나치게 몰두하여 망한 인간의 표본이 되었다(17:27-29). 롯의 처는 때를 분별 못하고 살았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먹고 마시는 일상적인 일이 나쁜 것이 아니다. 흥청망청 살아가는 삶, 세상이 망할 것이라는 메시지에 귀를 막고 살아가는 삶이다. 오늘 우리 사회는 노아 홍수 시대 직전 같은 모습을 방불케 한다.

오늘 이 시대 신문, 방송, TV 방영을 믿을 수 없는 세상이다. 그런 것으로 세상 돌아가는 것을 판단하는 것은 어리석은 방식이다. 술수와 기만, 그리고 폭력으로 세상을 휘여잡고 있는 세상에서 저들이 내 놓은 보도를 얼마나 믿을 수 있겠는가?

그러면 무엇을 기준으로 때를 판별할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서 이 시대에 되어가는 것을 분별해야 한다. 위기를 내다보며 살고 있다. 우리나라에 다가오는 위기 보다 더 큰 위기 세상 마지막 환난이 밀려오고 있다. 한 주일 내내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무엇을 찾고 있는가? 그 대표적인 예가 에녹이다. 에녹 시대 세상은 부패하고 타락하였다. 그러나 에녹은 그 모든 것들에 휩쓸려가지 않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에 따랐다. 하나님과 동행한 것이다. 홍수를 앞 둔 급박한 재난이 몰려오는 때 그는 승천하였다.

3. 지붕위에 있을 때 세간을 가지러 들어가지 말라. 17:31. 물건 몇 가지에 귀중한 생명을 빼앗기지 말라. 배틀크릭병원에 화재가 났을 때 그토록 많은 환자들은 모두 피하였는데 딱 한 사람만 죽었다. 그는 부자로 은행을 못 믿고 늘 돈 가방을 가지고 다니던 사람이었는데 급히 불길을 피하여 도망 나왔는데 돈 가방 없는 것을 알게 되어 말리는데도 그것 가지러 들어갔다가 불길에 죽어버린 사람이 있었다. 가장 귀한 것은 영원한 생명이다. 이것을 살려야 한다.

4. 남편의 머뭇거리는 신앙은 아내를 위기로부터 구원 못한다. 17:34

나이가 들어가면 남편은 아내 말을 듣는데 아내는 남편 말을 잘 안 듣는다. 남편은 아내의 말과 행동을 잘 살피면서 확고부동하게 정로를 걸어야 한다. 롯의 아내는 흔들거리는 신앙을 하는 남편의 권고나 호소를 가볍게 생각하기 마련이다. 아내는 자녀들에게 너무 집착한다. 세상에 젖어서 사는 자녀에게 왜 그리 미련을 두고 머뭇거렸는가. 자녀들은 자기들 판단에 따라서 사는 것이다. 부모가 간곡하게 권고하였으면 나머지는 자녀 몫이다. 부모 신앙이 자녀 못 구원한다. 어머니는 자녀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정에 이끌리면 안 된다.

1T 707 아내의 판단을 따르는 D형제에게 보내는 권고- 하나님은 우리가 들려오는 모든 것, 보이는 모든 것을 듣고 보기를 원치 않는다. 귀를 가리고 듣지 않고 눈을 감고 보지 않는 것이 축복이다. 성화된 눈과 성화된 귀를 가져야 된다.

 

롯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리 마옵소서 19 의 종이 恩惠를 입었고 께서 큰 仁慈를 내게 베푸사 내 生命救援하시오나 내가 逃亡하여 에까지 갈 수 없나이다 두렵건대 災殃을 만나 죽을까 하나이다 20 보소서 저 城邑逃亡하기에 가깝고 작기도 하오니 나를 그 곳으로 逃亡하게 하소서 이는 작은 城邑이 아니니이까 내 生命保存되리이다“(19:18-19).

롯은 정신이 번쩍 들어 탄원한다. 탄원 대상이 복수로 나오나, 이어지는 표현에는 단수형 주께탄원한 것이다. 이런 문법 특성은 18:2-3에서 아브라함의 간청에서도 엿볼 수 있다. 롯은 이 탄원에서 밀려오는 재앙을 두고 하나님을 비난하는 음조를 담겨 넣은 것이다. 롯이 하나님께 은혜를 구히는 언사는 외교적 언사 비슷하다. 아직 오염되지 않은 지역은 산 뿐인데 사람들이 살고 있는 오염지대를 피난처로 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믿음 없는 롯이 멀리 있지도 않는 지역의 산지로 향하는 노력도 하지 않고 작은 성읍 소알로 도망가도록 협상하는 것을 허락하였다(19:20-22). 작은 성읍이라는 점을 이유로 든 것은 작은 성읍에 팽배한 불의에 눈감고 의를 추구하는 일을 포기해 버린 행태인 것이다. 주께서는 롯의 이 요청을 받고 속히 그 곳으로 도망하라고 하셨다.

 

해 뜬 후 심판

소돔 사람들은 하나님의 참으심과 진노 사이에 감추어진 경계선을 넘어버렸다. 오랫동안 멸시 당한 자비는 마침내 중단된다. 이사야는 당대 백성들에게 소돔성 같이 될 위험성을 지적하면서 경계하였다(1:9).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께로부터 硫黃과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같이 내리사 25 들과 온 들과 居住하는 모든 百姓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하셨더라“(19:23-24)

왜 유황불 심판인가? 노아 때는 홍수로, 롯의 때는 유황불로 각각 멸망당하였다. 하나님은 긴 시간 동안 자기 종들을 통하여서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고 동정심을 발휘하는 것 이상으로 동정심을 가지고 사랑의 경고와 용서하실 것이라는 탄원의 메시지를 전하신다. 내게로 돌아오라고 호소하신다. 그러나 말을 듣지 않고 부도덕한 죄악에 파묻혀 사는 인간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형상이 사라져 본래 인간의 모습이 아니다. 그런 인간들은 동물들과 차이가 없다. 아니 동물들보다 더 악질적이다. 소돔성은 에덴동산의 정반대 현상으로 타락한 것이다. 이들에게 물 심판, 유황심판이 내린 것이다. 베푸신 은혜에 더 이상 감각이 사라진 인간들은 하나님의 긍휼을 멸시한다. 이들에 대하여 심판이 임한다. “자신의 선택으로 자신의 운명이 결정될 때가 올 것이다.”(PP166). 심판은 새 창조를 지향하는 방편이 된다.

 

아브라함을 기억하신 하나님

아브라함이 그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 앞에 서 있던 곳에 이르러 28 소돔과 고모라와 그 온 地域하여 눈을 들어 煙氣甕器 가마의 煙氣같이 치솟음을 보았더라 29 하나님이 그 地域하실 때 곧 롯이 居住하는 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에서 내보내셨더라“(19:27-29).

아브라함은 창세기 18장에서 소돔성의 의인들을 위하여 중보 탄원하였다. 롯이 구출 받은 것은 자기 공로 때문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탄원을 기억하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다. 아브라함은 멀리 옹기점 연기같이 솟아 오르는 연기를 묵묵히 바라보며 잠잠하였다.

 

산으로 도망간 롯과 딸들 이야기(19:31-38)

롯은 몇 시간 전에 산이 멀다고 도피하는 것을 기피하였다. 그러나 유황 불비 심판을 받는 광경 앞에서 이제는 소알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공포에 떨면서 두 딸과 함께 소알에서 나와 산으로 가서 거주하였다.

큰 딸이 작은 딸에게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늙으셨고 온 世上道理를 따라 우리의 配匹 될 사람이 이 땅에는 없으니 32 우리가 우리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同寢하여 우리 아버지로 말미암아 後孫을 이어가자“(19:31).

위 본문을 보면 큰 딸은 믿음이 결여된 자기중심적인 판단을 한다. 소돔성에 유행한 근친상간의 영향을 받아 아버지와 근친상간하여 후손을 이어가자는 계획을 세워 이를 실행하자고 제의한다. 우리가 ~하자는 어투는 바벨탑 건축자들의 어투를 닮았다(11:3).

더 나가서 이들은 이 땅에는 우리의 배필될 사람이 없다는 판단을 하였다. 이들은 아브라함의 권속과 하란에 다른 친척들이 있다는 것을 몰랐을까? 딸들의 머리속에는 소돔성 밖에 없었던 탓일 것이다. 아버지의 명예에 큰 오점을 남기는 양심 마비적인 선택을 통하여 자기들의 처녀성까지도 희생시켜 버렸다. 큰 딸이 낳은 아들의 이름은 모압으로 아버지로부터라는 뜻을 지녀 근친상간적 기원을 시사하고 있다. 둘째 딸의 아들 이름은 벤암미내 백성의 아들이라는 뜻이어서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한 가계임을 표현했다.

롯과 그 가족 이야기는 비극적이다. 모든 세대에 걸쳐 그에 관한 기억에 오명이 남겨진 것이다. 그의 죄는 용서되었겠지만, 쾌락과 돈벌이에 전념했던 세월의 악함은 그의 뒤를 이어 여러 세대에 걸쳐 지속되었다(PP 168).

 

Posted by KAHN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