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때 까지리이까?”

하박국, 하박쿠크(חֲבַקּוּק Chabaqquq)오늘 연구할 책은 하박국이다. 호박국이 아니다.


I. 하박국 신원

1. 이름의 뜻 - ‘하박쿠크'포옹'을 의미한다. 껴안는 자, 포옹하는 자, 백성들을 달랜 사람, 시대의 아픔을 끌어안고 고통을 당하면서 그 이유를 제기한 선지자, 제롬은 매어 달리는 자로 보았다. 아마도 신앙적 문제를 가지고 매어 달린 자란 의미가 함축되어 있을 것이다. 성경에는 그에 관하여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2. 선지자- 자기를 선지자로 제시한다(1:1, 3:1). 소선지자들 중에 학개와 스가랴, 하박국만 자기들을 선지자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이들 중 하박국은 예루살렘 멸망 전 마지막 때 유다의 선지자로 보인다(3:1). 하박국은 선지자 나훔의 뒤를 이어 봉사했을 가능성이 높다. 히브리어와 헬라어 정경(正經)에 나타난 그 책의 배열순서가 이런 견해를 지지한다.

3. 레위지파에 속하며, 성전악사(성가대원)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3:19), 그는 망해가는 시대, 격동의 시대에 곤궁한 삶을 오히려 즐기는 노래로 예언서를 끝맺고 있다. 安貧樂道, 悠悠自適의 흔적을 본다. 이는 격동의 종말을 살아가는 성도의 삶의 길도 된다.

4. 랍비 전승-하박국은 엘리사가 다시 살려낸 수넴여인의 아들이라고 한다(왕하4:16).

5. 하박국은 바벨론인들이 유다에 쳐들어올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 침공은 B.C 606/605, 또한 B.C 597, 그리고 B.C 586에 일어났다. “너희의 날들에”(1:5“너희 생전에”)는 그가 첫 번째 침략이 있기까지 거의 한 세대가 지나기 전에 예언했다는 점을 시사한다. 6. 하박국은 그의 예언에서 하나님의 강한 포옹을 의미하는 자기 이름에 충실했다. 왜냐하면 마치 어떤 사람이 울고 있는 어린아이를 그 눈물이 마를 때까지 안고 있는 것처럼 백성을 포옹하고 위로했기 때문이다. 하박국은 불의한 시대를 끌어안고 살아가야 하는 예언자이었다.II. 의문을 토설한 선지자


A. 그의 의문은 神正論的이다.

예언자는 악이 판치는 세상을 두고 과연 하나님은 정의로우신 분인가라는 의문을 품고 토설한다. 루스벨이 제기한 이래 악이 기승하는 시대에 하나님의 정당성을 두고 많은 논의가 이어져 왔다. 대쟁투사관도 이 하나님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것으로 부각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은 자기의 의로움을 나타내는 것을 지향하고 있다(3:25).

 

하박국은 어찌하여(Why) 포악한 자들이 세상을 검어 쥐고 통치하느냐고 질문한다(1:3). 그리고 더나가서는 무고한 백성들이 더 악한 자에게 고난당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다(13). 만세전부터 계신 하나님이 아닙니까?라고도 항변한다(12). 17절에서도 하나님이 옳습니까?하고 변박하듯이 묻는다.

현실적으로 전개되는 악한 정치나 상황을 방치하는 것이 의로운 처사인가?

하박국서에 많은 의문이 표출된 점에 비추어 하박국은 구약의 도마로 일컬어지기도 하였다.

의문을 많이 가진 선지자는 ?”어떻게?”를 반복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하나님의 대답이 그에게 주어졌다. 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그토록 잔인하고 부정한 손에 의해 멸망하도록 허락하시는가? 선지자는 참을성 있게 응답을 기다렸으며, 응답이 왔다. 불경건한 자들은 사라질 것이요, 하박국은 어떤 종류의 懷疑의 인물인가?

 

B.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 한계

그러나 하박국은 데까르트식 방법론적 회의(methodological skepticism, Cartesian skepticism)같은 회의를 표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데카르트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믿음들 중 무엇이 참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지에 관한 문제를 탐구하여 나가는 방법으로 방법론적 회의를 고안해 냈다. 이 방식이 근세의 인본론적 사고의 키워드가 되어 인본주의, 회의주의 시대를 열었다.

방법론적 회의는 근원적(근본적) 회의와 다르다. 근원적 회의는 순수한 지식의 존재 가능성 자체를 의문시하지만, 방법론적 회의는 본래 의문 여지가 없는 참된 지식의 존재를 상정하며 그것을 찾아내기 위한 방법으로서 제안 된 것이다.  새로운 과학적 발견과 발명의 인해 기존의 교권적 제어가 무너지는 아노미 시대로 접어들게 되자 모든 게 결국 모든 것을 의심의 대상으로 삼는 일이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갔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는 모든 믿음, 사상, 사고, 물질을 회의와 의심의 대상으로 삼아 돌아 올 수 없는 지점을 넘어섰다. 그러다 보니 모든 것을 의심하게 되어 목욕물을 버린다는 것이 어린 아이까지 버리는 일로 전개되는 길을 열었다.

 

C. 두 종류의 의문

1. 의심을 위한 의심-전적으로 믿지 못하겠다는 의문이다. 이는 신앙을 의문으로 시작하여 의문으로 마치는 인간들이 하는 의심이다, 이런 의심은 부정을 위한 의문일 뿐이다.

2. 신뢰하면서 발하는 의문 - 이는 신뢰하기 때문에 주저 없이 토로하는 의문이고, 해답을 찾고자 하는 의문이다. 하박국의 의문은 이런 의문이다. 그래서 이 의문은 그에게 경고(burden, )가 되었다(1:1)

하박국 히브리어 원문 첫 머리에 나오는 경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맛사(מַשָּׂא)를 예언서를 시작하는 단어로 내건 것은 심판의 엄중성을 나타낸다. 맛사는 ’(burden), ‘예언’(prophecy). ‘신탁’(oracle)의 메시지를 선포해야 하는 것을 강조 함축하고 있다.

 

자기 마음속에 의심이 있지만 숨겨 두었다가 장차 배도하는 기회로 삼는 자들이 있다. 거짓 경건으로 포장하여 의문이 없는 것처럼 꾸미고 사는 의문이나 형식적으로 따르면서도 딴 마음을 품고 있는 의문을 지닌 사람은 신앙 양심을 저버린 것이다. 그들은 경건의 가장 행렬에 속한 사람이다. 그들은 거짓 신도일 뿐이다. 어떤 목사는 재림교 교리에 의문을 품고 지내다가 퇴직금까지 두둑하게 받아 챙긴 후에 자기가 섬긴 교회를 돌아서서 헐뜯고 배역하며 다른 교회를 세워 교인들을 빼내가는 일을 하고 있다. 그는 의심의 성에 갇혀 있는 자” D.M. Canright 같은 사람이다. 그는 재림교회를 비판하면서 또 마지막 곤궁하여 죽을 때까지 재림교회의 자비적 지원을 받으면서 살아가지만 교회를 비판한 사람이다.

이런 의심은 자기 파멸적이다.

 

II. 하박국의 두 가지 질문

하박국의 질문은 두 가지로 모아진다. 이 두 가지 의문은 항의성 질문이기도 하다.

하박국은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항의 토설한다. 하나님은 하박국 개인에게 국한시키지 않고 백성들에게 대답하는 복수적 문법체를 사용하고 있다.

1. 2절에서 How long? (1:2)을 제기한다. 이는 하박국의 첫째 키워드 의문이다.

원어-"어느 때까지리이까עַד־אָנָה ן אָנָה (an, 아나 anah) 얼마동안 How long? ‘ad’”~까지, ~ 하는 동안을 뜻한다. 대관절 불의한 시대가 얼마나 오랫동안 계속되겠습니까?

 

(1) “어느 때까지리이까는 의인이 고통당하는 시간대이다.

<질문1> - 공의의 하나님께서 왜 악인들을 징계하지 않으시기를 어느 때까지리이까?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여호와여 살려 달라고 울부짖는 이 소리/ 언제 들어주시렵니까?

호소하는 이 억울한 일, / 언제 풀어주시렵니까?

어인 일로 이렇듯이 애매한 일을 당하게 하시고

이 고생살이를 못 본 체 하십니까?

보이느니 약탈과 억압뿐이요./ 터지느니 시비와 말다툼뿐입니다.

법은 땅에 떨어지고 / 정의는 끝내 무너졌습니다.

못된 자들이 세상을 등쳐먹는 세상/ 정의가 짓밟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1:2-4).

                                                (아브라함 헤셀, 예언자들에 나온 번역)

 

<하나님의 설상가상의 응답> - “보고Look רָאָה 또 보고see נָבַט 놀라고Be astonished תָּמַהּ 타마흐 또 놀랄지어다wonder. 너희 생전에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할 것이라 누가 너희에게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리라”(1:5).

보다라는 단어가 레우(라아)’하비투(나바트)’로 나오는데 주로 함께 사용되었고(대상 21:21, 10:14), 여기서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기이한 일을 보게 될 것을 가리킨다. 놀라고 또 놀랄지어다.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히타메후 테마후는 칼 동사와 히트파엘 동사가 합쳐져서 매우 강조되어 놀라움의 최고 절정을 의미한다. 놀라운 광경이나 두려운 광경을 보거나(48:5 [H6], 29:9, 1:5, 5:8 [H7], 4:9, 집회서 11:13), 두려운 소리를 들음으로 인하여(26:11) 두려운 감정과 '깜짝 놀라다'(be astouded, dumbfounded)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많은 알람(alarm)을 반복적으로 주었어도 돌아보기나 했느냐? 여러 국가 가운데 보라 또는 너희가 불충하게 넘긴 것을 보라.

 

<하나님의 극약처방> - 바벨론의 침공을 맹렬하게 침공하는 독수리와 사자의 강포한 심판으로 묘사한다. 강포를 일삼고 있는 악당들이 그 보다 더한 강포로 심판받는다는 것이다.

 

성서시대 어느 때까지이리이까질문을 한 선자자는 하박국만이 아니다.

고난당한 다윗도 기도 중에 물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13:1).

아삽도 같은 질문을 토하고 있다(“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79:5) “어찌하여”(10).

제단 아래 있는 영혼들이 큰 소리로 울부짖는다. “거룩하고 참되신 大主宰여 땅에 하는 들을 審判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6:10)

언제까지는 고통당하는 시간대이다. 불법의 비밀이 작동하고 있는 동안 하나님의 백성들은 고통에서 구출 받기를 갈급할 것이다.

 

(2) “어느 때까지이리이까는 하나님이 고통당하는 시간대이다.

그러나 이런 질문은 인간이 먼저 해야 하는 질문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하박국과 유다 사람들에게 해야 하는 질문이다. 예수께서 유다에게 하는 질문이다.

다음 성경 절은 이 점을 증거하고 있다.

<16:28> 여호와께서 불평하는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주었지만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을 두고 모세에게 이르시되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 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려느냐?

<14:11> 정탐꾼들의 부정적 보고를 듣고 백성들이 통곡 반역하는 것을 두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고 믿지 아니하겠느냐?

<17:17>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로 인하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하였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았으리요? 어느 때는 예수께서 고통당해 온 시간대이다.

불의가 세상을 억압하는 긴 시간대에는 하나님도 그리고 의인들도 고통당하는 시간대이다.

 

2. 둘째 키워드 의문 - 이유 따지기: 3어찌하여

3절과 13절에서 어찌하여’(Why? mah 무엇?, 어떤?, 어떤 것, ?)를 제기한다. 오늘 이 회의는 오늘 우리의 것도 된다. 3절은 패역한 세상을 방치하는 것이 정의로운가? 13절 더 악한 무리들을 통하여 의인 박해가 정의로운 일인가? 많은 무신론자들은 이 의심으로 무너져 내린 사람들이다.

<시대의 죄악상> (1) 1;2 강포 חָמָס chamas은 죄에 가득찬 폭력, 난폭, 부당행위, 불법, 악이다. 6:11, 13에서는 포악(강포חָמָס)이 노아 홍수의 원인이 되었다. 학대, 탈취, 해침, 강도, 살인, 약탈, 강간 등과 같은 악으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자연 질서를 파괴하는 것을 뜻하는데 곧 그러한 온갖 무법 현상이 노아 시대에 횡행하였다.

(2) 1:3 죄악(אָוֶן, awen, 거짓, 헛됨, 사악)과 패역(עָמָל, amal, 고생, 재난, 해악)

(3) 1:4 율법 해이와 정의 실종

통치 계급이 공정이나 정의라는 말을 타락시켜, 불법하고 불의한 자들의 강포를 옹호하며 백성들을 무자비하게 압제한 당시의 암울한 현실이었다. 유다 왕 여호야김은 종주국 바벨론에 반역, 예레미야의 권고를 무시, 폭정을 하다가 비참하게 죽는다. 하박국 시대는 오늘 우리 시대를 읽는 거울이 된다. 하박국은 백성의 고통을 아파하며, 끊임없이 하나님께 간구하였으나 하박국이 원하는 만큼 하나님의 응답이 없었다.

 

<질문2 (1:12-17)>

“13께서는 눈이 淨潔하시므로 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悖逆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어찌하여 거짓된 들을 傍觀하시며 惡人自己보다 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潛潛하시나이까...17 그가 그물을 떨고는 繼續하여 여러 나라를 無慈悲하게 滅亡시키는 것이 옳으니이까“(1:13-17).

하나님의 설상가상식 대답- 남 유다의 죄악을 결코 묵과하지 않겠다. 바벨론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겠다(1:5-11). 왜 바벨론을 통하여 세상을 질풍처럼 휩쓸게 하는지를 해명하지 않는다.

13- 순결하신 하나님의 눈은 악을 참아 보지 못하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겠거늘 어찌하여 거짓들을 방관하시며 의로운 사람들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하박국은 유다 징벌을 이해 못하다. 왜 남 유다보다 더 패역한 나라 갈대아를 동원하여 심판하십니까? 이것이 정의가 세상을 다스리게 하는 길입니까? 제 힘을 하나님처럼 믿는 포악한 죄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펴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이것이 정의의 길입니까? 악한 자들을 파멸시키기 위하여 무고한 자들이 무수히 파멸을 당하는 이것이 과연 정의로운 일입니까?(1:13).

 

III. 자기 백성에 향한 하나님의 영적 응답

이 영적 응답은 종말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도 하시는 응답도 될 것이다.

2:1 하박국은 성루에서 파수꾼의 심정으로 하나님의 대답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하박국 선지자가 파수대에 서 있는 외적인 행동과 대비되는 것으로 잠잠히 내적인 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태도를 보여준다. 이사야도 파수꾼의 심정을 토로하였다. 21:11-파수꾼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냐“ ”아침이 오나니 밤도 오리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창조의 희망의 원리가 역순이 되어 절망으로 끝나는 인간 세상이다.

하박국에 향한 하나님의 응답에는 절망 속에서 희망을 보게 하는 미래의 비전을 창출하신 응답이 담겨 있다.

 

A. 묵시(chazon)를 기록하여 판에 새겨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2:2). chazon 은 덮개를 벗기다.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하는 것이 비전이다.

하박국은 묵시의 말씀을 판에 기록하여 누구나 볼 수 있게 하고 달리면서도 이 말씀을 읽히게 하라고 한다(2). 성경은 묵시의 말씀이다. 묵시는 계시라고도 번역되는데 이것은 볼 수 없던 것을 보이게 한다는 의미이다. 즉 하나님의 뜻을 인생이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공적으로 선포된 말씀이 묵시, 계시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묵시의 말씀을 읽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의 기본이다

판에 기록하라는 분부는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건네주신 하나님의 작품이며 필사본인 돌판에 새겨진 10계명 언약을 상기시킨다. 거짓 예언과는 전혀 다른 참 예언을 깨끗하게 씻은 돌에 새겨진 언약판처럼 미래까지 전달 보존되게 하라. 하나님의 비전 메시지를 가지고 그것을 패역한 세대에 선포하며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기록된 말씀을 달려가며 선포하라.

1:3 삼중축복, 말씀을 듣고 읽는 것, 지키는 것이 행복이다. 부담되는 것이 아니다.

거룩한 묵시의 말씀을 읽어야 한다. 텍스트를 음미하며 묵상하여야 한다. 11장에서는 저작하여야 정결한 짐승이 되는 조건으로 나와 있다.

 

B. 이 묵시는 정한 때(moed)가 있으니(2:3) 더딜지라도 그를 기다리라.

1. 정해 진 시간에 예언이 성취 된다(4;4).

2. 더딜지라도 그를 믿음으로 기다리라. 70인역에는 그가 더딜지라도 그를 기다리라 이는 그가 확실히 올 것이며 더디지 않을 것임이라로 되어 있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있다.

 

묵시의 말씀은 다른 말로 예언의 말씀이다. 예언이란 단순히 앞으로 일어날 사건을 예측할 뿐 아니라 우리가 나아갈 미래의 방향을 제시하는 광범위한 의미를 지녔다. 그러나 모든 예언은 성취되기까지 시간이 필요로 하며 우리는 그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다만 이 기다림은 아무 것도 안하는 기다림이 아니다.

벧후 1;19-21 예언의 말씀은 인생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모든 예언은 성취되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

히브리어 본문의 독법에 따르면 갈대아 정복자들이 올 것에 관한 이상의 성취가 지연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정한 때가 되면 그것은 성취될 것이라는 뜻이다. (70인역의 독법에 따르면 그 개념은 원수가 지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가 확실히 예언한 대로 올 것이라는 의미이다. 70인역의 독법은 히 10:37에 암시되어 있다.) 그 말은 70인역 사 26:20에서 인용한 어구와 함께 우리 주()의 재림에 적용되었다. 바벨론이 온다고 해도 그 것이 끝날 때가 온다. 악한 권세가 역사를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그것이 끝날 때가 온다.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면서 기다린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아 더디게 보일지라도 기다리라.

말씀을 붙들고 기다리는 믿음이 필요하다. 말씀의 성취를 기다려야 합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망루에 올라 파수군의 사명을 감당한 것처럼 우리도 할 일을 찾아하면서 기다려야 한다.

종말론적 성취의 때가 정한 때 끝이 있다. 사라에게도 아들을 얻을 수 있는 정해 진 때가 있었다(18:14). 다니엘 8:19에는 정한 때(moed)2300주야와 연계되어 있다. 재림신도들은 정한 때 끝에 등장할 예언의 백성들로 마지막 메시지를 지녔다. 1:14계절(מֹעֵד)로 번역되어 있다. 하나님이 정해 놓은 계절을 반드시 도래하고 바꿀 수 없듯이 묵시적 예언에 담긴 정한 때도 반드시 도래하고 바꿀 수 없다.

지체치 않으신다는 응답(2:1~4)의 예언은 밀러주의자들 초기 재림신도들에게 크나큰 용기와 위로의 원천이었다. 처음에 기대했던 대로 1844년 봄에 주께서 나타나지 않자 밀러주의자들은 깊은 혼란에 빠졌다. 처음 실망이 있은 직후 그들은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는 선지자의 글 속에서 특별한 의미를 발견했다. 그들은 선지자의 말을 신뢰하였고(교회증언, I, 52)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는 밤중 소리를 선포하기 위해 나아갔다(25:6; 참조, GC 392).

 

알콜 중독 남편을 위하여 기도한지 24년이나 되었다는 한 여인의 믿음의 고백, 하나님이 정한 시간대에 이루어질 것이다. 어는 날 자기 남편이 교회 가겠다고 말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C. 이 묵시는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2:3). 종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케츠는 어떤 목적, 행위 또는 시기의 끝을 의미한다(4:18, 7:2,3, 21:25,29). 본 절에서 묵시의 직접적인 내용은 바벨론 압제의 종식을 가리킨다(4-20). 기록된 묵시는 현재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미래 종말론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시간의 최종적인 순간까지 계속될 것임을 보여준다. 종말은 오고야 만다.

너희에게 忍耐必要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約束하신 것을 받기 함이라

37 暫時 잠깐 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遲滯하지 아니하시리라 (10:36-37).

 

D. 義人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보라 그의 마음은 驕慢하며 그 속에서 正直하지 못하나 義人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2:4; 1;17; 3:11; 10:38

1. 책망적 대비 - 바벨론의 교만함과 나의 의인; 세상의 악당과 하나님의 의인

교만한 마음은 제1차적으로 바벨론의 지도자 마음이다. 접미사 그의1:2-2:1의 관계에서 살펴볼 때 갈대아(바벨론)를 가리키고 있다. 교만함은 부풀어 오름을 의미하며 무례와 뻔뻔스러움을 나타낸다(14:44).

2. 의인의 성실함 요구- 의인. 히브리어 차디크(saddiq), “의로운또는 올바른사람이다. 후대에 여기 의인을 법정적, 언약적 개념으로 보고 있다. 언약의 하나님께서 매달리고 포옹하는 믿음은 하나님 백성들에게 죽고 사는 이슈가 된다.

믿음(에무나 אֱמוּנָה , אֱמֻנָה emunah)은 성실함(faithfulness)이다. 에무나는 신실, 성실, 견고, 확고부동한 신뢰, 불변성”, “신빙성의 뜻을 지녔다.

재림신도들은 하나님이 친히 정한 시간대에 예언을 성취하실 것을 확고하게 믿어야 한다. 믿음은 의를 신뢰하려는 내적 결단의 태도가 확고한 것을 의미한다. 악인들이 설쳐도 의인은 성실함으로, 불변적 견고한 믿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거짓이 판치는 세상에서 의인은 애무나를 간직한자들이다. 애무나는 진실, 진리와 동족어이다. 진리 편에서 확고부동하게 기다리며 사는 자들은 더 이상 언제 까지리이까?’어찌하여를 물으며 떼를 쓰는 미성숙한 철없는 자들이 아니다. 아침은 오며 밤이 오는 것처럼 새 날의 아침과 영원한 파멸의 밤을 내다보면서 묵묵히 걷는 자가 재림신도들이다. 의인은 아브라함처럼 인간의 이성으로는 불가능한 일이 일어날 것을 믿으며 의의 조상이 된 것을 본받고 나아가야 한다(15:6).

에무나를 간직한 자들은

<119:29> 거짓 행위를 떠난 자이다

<12:17> 진리를 말하는 자이다.

페이크 뉴스가 세상을 지배하는 시대이다. 우리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내가 언제 그랬느냐가 오히려 박수 받고 권세를 장악하는 시대로 진입한 것을 목도하고 있다.

참 믿음은 철판을 까는 교만을 벗어 던진 자이다. 믿음의 성실성과 확고부동성은 선한 일을 생산하는 은혜가 된다. 그래서 이 에무나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AD 1세기가 끝나고 2000년을 기다려야 하는 시간대를 내다보면서 바울은 이 합 2:4을 신학의 기조로 삼아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선포하였다.

바울의 이신득의 선포 롬 1:17; 3:11

暫時 잠깐 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遲滯하지 아니하시리라 38 나의 義人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滅亡가 아니요 오직 靈魂救援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니라“(10:37-39).

중세 암흑시대를 건너면서 마르틴 루터 역시 이 이신득의를 선포 sola fide하였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용서를 확신하고 믿음만을 가지고서 앞으로 전진하는 백성들이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가는 방향을 내다보고 그 날을 소망으로 삼고 있다.

 

IV. 호소

어느 때까지리이까?” “어찌하여” - 이 의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묵시의 예언이 이루어질 정한 때가 있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들이다.”로 요약된다.


영국의 웨스터민스터 대성당 지하묘지에 있는 어느 성공회 주교의 무덤 앞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다. '내가 젊고 자유로워서 상상력에 한계가 없을 때, 나는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꿈을 꾸었다. 조금 더 나이가 들고 지혜를 얻게 되자 나는 세상이 변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시야를 좁혀서 내가 살고 있는 나라를 변화시키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그것 역시 불가능했다. 황혼의 나이가 되었을 때, 나는 마지막 시도로 나와 가장 가까운 가족을 변화시키기로 마음을 정했다. 그러나 아무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서 자리에 누운 나는 문득 깨달았다. 만일 내가 내 자신을 먼저 속이 찬 믿음으로 변화되었다면, 그것을 보고 내 가족이 변화되었을 것이다. 또 그것에 용기를 얻어서 내 나라를 더 좋은 곳으로 바꿀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누가 아는가, 세상이 변화되었을는지도.'

 

우리는 어둠의 세력을 생명공동체나 운명공동체로 여기면서 언제까지 이 세상을 장악하여 나갈지 모른다. 무신론 세력들이 권력을 철통같이 장악하여 악이 설쳐대는 일은 더욱 기승을 부려 설상가상 현상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의인은 메시아의 오심이 더디고 지체되어갈지라도 믿음으로 기다려야 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11:23]

백기현 교수(국립공주대학교 음악학과 교수)-서울대 음대 학부 및 대학원 졸업, 오스트리아 비인 국립대와 이탈리아 아르츠 아카데미 성악 수학, 1 때 목소리가 좋으니 성악 권고, 대학진학, 몸이 너무 아파 휴학, 척추마디마디에 화농균, 24시간 수술, 수혈로 B, C형 간염 감염, 온 몸 석고, 죽음의 순간, 27세에 대학교수, 이순신 오페라단 조직 활동, 문화훈장 수령, 어느 날 교회 부흥회 참석, ‘앞을 바라보세요. 십자가를 보세요. 예수의 피로 죄사함 받았다 외치라고 하는 부흥사의 요청을 따라하였더니 옆구리에 감각적 징상이 오고, 지난 50년 동안 시리고 저리고 불쾌한 등줄기가 시원해지는 체험을 하였다. ‘두려워 말라 내가 굽은 등을 폈다.’는 소리도 들었다. ‘네 간염도 고쳤다는 음성을 들었다. 50년 동안 언제까지를 수없이 반복하면서 살았던 그에게 드디어 환희의 치유가 일어났다.

의인은 말씀을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아무리 칠흑 같은 어둠이 길다할지라도, 강포가 판치고 있다할지라도, 의인은 갈대아인의 폭력과 잔인함을 견디어 내면서 오직 하나님의 에무나를 구현하는 신실한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고난 중에 약속의 말씀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약속의 말씀을 믿고 고난을 버티며 날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일이다. 이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오직 믿음으로 주님만 바라보고 의지하며 나아가자.


Posted by KAHN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