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제(難題) 문장에 관한 이해 방향

(칼 헨리 자료 전재)

 

성경 안에 있는 이른바 난제 문장(難題文章)을 이해하는 일에 도움이 되는 몇 가지의 고려 사항들을 여기에 제시한다.

 

1. 성경에 가설적으로 있다고 생각하는 오류의 범위에 비하면, 고등 비평의 허구적으로 만든 오류의 범위와 그 수효는 가히 경이적이다. 예컨대, 비평학자들이 성경의 오류를 입증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여러 다양한 이론에 들어있는 오류의 개략적인 범위에서 그것들을 하나하나 놓고 비교하여 보면 매우 무책임스럽다. 특히 비평학자들이 오류라고 추정 비판을 하는 성경 본문을 하나하나 검토하여 보면 그렇다.

헷 족속에 관한 기사들은 꾸며낸 이야기이며, 모세 시대에는 문자가 없었으며, 성경의 시편들의 대부분은 마카비 시대의 것이고, 솔로몬 왕국의 영광에 관한 성경적 기술이 과장되어 있다는 비평학자들의 주장은 잘못된 것으로 판명이 났다. 비평학자들은 성경의 지혜 문학 연대를 포로 시대 또는 포로 이후 시대의 것으로 상정하고, 여호와 신앙이 주전 7세기의 예언자와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며, 히브리 사람의 포로가 상상의 산물이라고 하는 등의 과오를 저질렀다. 비평적 주장들은 세월이 지나면서 빛바랜 허구로 밝혀져 왔다. 20세기 고고학적 발견에는 시리아에서 발견한 에블라(Ebla) 석판이 포함되는데, 거기에는 족장들이 전설이 아닌 실재의 인물로 언급되어 있다. 또한 그 석판에는 지금까지 많은 비평학자들이 모두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 소돔과 고모라 및 그 밖의 장소들도 나온다. 사우디 아라비아(Saudi Arabia) 지역에 관한 고고학적 발굴가들은 오랫동안 망실된 그리고 오랫동안 의심하여 온 솔로몬 시대부터의 오빌동광(銅鑛)의 위치를 찾아냈다.

부정적 비평의 기본적 특색은 역사적 자료에 근거하지 않고, 막연히 성경 기사가 믿을 만한 가치가 없다고 하는 전제에 토대를 두어 왔다. 상황적인 증거가 있는데도 이를 부정하는 일과 상황적인 증거가 없는데도 자기의 철학적인 편견에 사로잡혀 평가하는 것 사이에는 천지 차이가 있다. 비평학자들은 훗날 정당한 것으로 인정된 성경 기사를 포괄적으로 부정하는 과오를 범하였다. 요컨대, 비평적 이론은 역사적 사실에 아무런 근거가 없어 스스로 넘어지고 말았다.

 

2. 가설적인 성경의 오류의 리스트가 해가 거듭할수록 줄어지고 있는 반면에, 비평적 과오의 리스트는 해마다 늘어가고 있다. 로져 니콜(Roger Nicole)은 성경의 영감에 관한 듀이 비이글(Dewey Beegle)의 성경 오류의 목록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그들 중의 상당수가 실증할 수 있는 과오가 아닌 순전히 난해(難解)한 문장일 뿐이다.” 더구나 이 난해한 이론의 발전은 그 어는 것도 허구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The Inspiration of Scripture: B.B. Warfield and Dr. Dewey M. Beegle”, p.103). 비이글(Beegle)이 제시하는 모든 본문들은 이미 교회 안에서 수십, 수백 년간논의된 것들이며, “극히 희소한 경우에 이 책 안에는 그들이 취급한 것과 관련이 있는 근자에 발견된 자료가 약간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무오의 변호를 위하여 조금도 난처해야 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성경 안에 오류가 있다고 하는 입장은 스미드(H.P. Smith, 1895)의 시대 이후 심지어 클레리커스(Clericus, 1657-1736) 이후에 별로 변한 것이 없다라고 니콜(Nicole)은 논평하였다(“Inspiration of Scripture,” pp.103-104).

제임스 바아르(James Barr)장기간의 인내로써 하나로 엮어 놓은 수백 개의 모순에 관한 비판적 관찰과 또한 공관복음 사이의 몇 가지의 변화너무나 크므로, “조화를 감행해야 할 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복음주의적 성경관은 외부로부터는 비난과 조소가 그리고 믿는 자의 대열 안에서부터는 깊은 모순의 때달음이 일고 있다"는 것이다(Fundamentalism, pp. 47, 60-61). 만일 누가 형식과 어휘로 인한 문학상의 차이가 논리적으로 모순이라고 주장한다면 그 엄청난 과장은 가능한 것이다. 그의 이론 전개(理論展開)에 따르면, 언어학자는 일 점, 일획에 몰두하여야만 하게 되어 있어, 나무는 보고 숲은 보지 못하는 일이 야기 될 것이다.

 

죤 워윅크 몽고메리(John Warwick Montgomery)는 다음과 같이 시각은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가 망실한 원본(autographs)의 방향으로 소급하여 올라갈 때 본문의 오류의 수()는 계속 줄어든다. 그리하여 원본과 우리의 가장 오래된 본문과 단편 사이의 간격 (신약의 파피루스 사본 중에는 1세기까지 소급하여 올라가는 사본들도 있다)을 전폭적으로 채워줄 수 있다고 하는 가정을 고무시켜줌으로써 모든 명백한 오류가 사라질 것이다”(“Biblical Inerrancy: What is at Stake?" p. 36). 몽고메리가 여기에서 그렇게 할 것을 등한히 하는 것처럼 비록 우리가, 몇몇 이단들은 지극히 오래된 본문의 사본을 변경시켜 놓았으며 또한 사본은 무의식적인 오류를 간직한다는 것을 고려한다 할지라도 본문 비평의 학문은 본문의 차질을 분명하게 그리고 놀라울 만큼 축소시켜 놓았다. 그러므로 성경 안에 있는 것으로 가정된 모순의 목록은 성경의 오류를 자신있게 고창(高唱)하는 비평학자들이 무리하게 거론한 오류의 목록과 비교되어야 할 것이다. 비평적인 편견이나 부정에 중요성을 둔다고 할지라도, 권위 있는 의학적 탐구에 의하여 성취된 성공(成功)보다는 긍정적인 성경의 회복(回復)의 기록이 더 괄목할 만하다. 신학 비평인(神學批評人)의 사회가 감행하고 있는 것 이상으로 성경의 진리에 관한 회의를 덮어씌우는 전문직은 없다. 대조적으로 현대의 의사는 난치 병에 대한 치료는 연구대상이 되어 있어 시간이 지나면 발전될 사항이라는 자신에 차있다. 성경은 비평적 학자들의 내적 편견(內的 遍見) 때문에 있었던 가벼운 질병으로부터 하나하나 회복되고 있다. 성경은 기정사실로 여겨 온 오류로부터 계속해서 그리고 점차적으로 감염(感染)에서 치유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성경의 오류 문제가 난치(難治)의 문제라고 확신하는 학자들은 회의주의의 희생자로 전락 되고 만다.

 

3. 비평학자들은 이미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부정론(否定論)을 제외시킨 최근의 간행물에서 비평의 근거들을 취한다. 그들은 외적 종교적 그리고 역사적 사실에 입각한 지식보다도 철학적 가정(철학적 가정)으로부터 오는 현대 비평적 정신에 감염받았다. 그러나 고고학적 고증과 언어학적 발견은 성경에 대한 부정적 비판으로 야기된 많은 오류론(誤謬論)의 근거를 없애 버렸다. 그러나 비평 학자들은 현대 비평학의 오류에 대해 일부러 우리에게 설명을 하지 않는다. 대체적으로 과학의 이론은 종합과 연속의 구현이며, 따라서 과학사(科學史)에서 발견할 수 있는 바는 질서 있는 발전으로 이루어진 변화의 국면이라고 하는 사실이다. 성경 비평학자들은 십년이 지날 때마다 자기들의 이론을 개정, 재천명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자기들의 주장에 분명한 변화가 있었던 점, 즉 과거의 잘못을 공표하기를 꺼려하고 천명하기를 주저하여 왔다. 그러면서도 최근까지 대다수의 비평학자들은 깊은 사려(思慮)없이 성경의 내용과 성경적 자료에 관한 진실한 진리를 말하여 주는 것으로 자처(自處)하여 왔다. 비평학에 침투되어 있는 역사학적 내지는 해석학적인 회의주의로 인하여 성경의 진리에 관한 관심이 식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성경의 신뢰성을 강조하는 복음주의 학자들과는 대조적으로, 바아르(Barr)는 기사(記事)를 조화시키는 가능성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또한 성경의 진리나 성경의 보류에 똑같이 관심을 갖는 비평주의의 과거의 관심마저 부정한다(Fundamentalism, p.55). 보수적 복음주의에게 소중한 것에서 발견된다고 하는 모순된 균형의 결여에 대한 바아르의 논평은(p.61) 온실에 투석을 하는 옛 격언(格言)을 생각나게 한다. 만일 비평적 검토가 진리와 비평적 혜지의 대가(代價)인 사실에 관한 관심을 상대화한다면 우리는 성경이 거짓임이 드러났다고 하는 비평가들의 주장조차도 간단하게 무시하여야 한다. 비평가들은 여러 세기의 간격을 두고 모세와 이사야과 바울을 더욱 열심히 헐뜯어 왔다.

 

두 세대 이전에, 모세 시대에는 기록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오경에 대한 모세의 저자권을 부인하는 것이라고 비평학자들은 말하였다. 그러나 40여 년간 모세가 이스라엘 사람들을 인도한 시내 반도의 사막에서 고고학자들은 모세보다 수 세기 이전의 것으로 추정된 서판과 비문들을 발굴하였다. 열왕기하15:2916:7-10에는 분명 디글랏 빌레셀이 앗수르의 왕이었으며, 북왕국 이스라엘의 정복자였고,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노예로 잡아간 왕이었다고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비평학자들은 그가 실존한 인물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제임스 프리챠드(James B. Pritchard)구약과 관련된 고대 근동의 본문”(Ancient Near Eastern Texts Relating to Old Testament)에서 우리에게 일러 주는 것과 같이, 니느웨의 수도를 탐사하던 고고학자들이 여러 장의 벽돌을 발굴하였는데 거기에 , 디글랏 빌레셀, 서쪽 땅의 왕, 세상의 왕, 영토는 대해에까지 이른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요컨대, 성서비평학은 외적 종교적 그리고 역사적 사실에 입각한 지식보다도 철학적 가정(철학적 가정)으로부터 오는 비평적 견해에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현대의 비평학의 대두와 함께 대조적인 견해가 철학적 근거에 감염되었다.

 

4. 과거에는 성경의 단편에 관한 비평 학자들의 수용과 거부에 있어서 다양한 견해차를 보여 왔으나, 지금에 와서는 진리와 성경의 신뢰성에 관한 훨씬 포관적인 강한 부정론이 적대적 철학 이론에 근거하여 대담하게 제시되고 있다. 성경은 신화(神話)의 옷을 입고 있다고 하는 불트만주의자의 주장이 바로 문제거리이다. 바아르는 (비록 불트만의 타당성을 변호는 하지만) 불트만주의자를 배척하며 간단하게 성경을 총체적으로 오류가 들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이 과학이건, 역사이건, 윤리이건, 신학이건 개의하지 않는다. 바아르는 기독교 신자들이 하나님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불완전한 사실을 말씀하실 수 없다라고 하는 고정 관념과 하나님은 불변이라고 하는 그들의 통념적 신앙으로부터 구제되어야 한다고 제창한다(The Bible in the Modern World, p.179). 그는 이러한 특정적 신관의 붕괴는 여러 가지 면에서 기독교 신앙에 도움을 준다라고 주장한다(ibid). 바아르의 항변과 같이 하나님이 과정신론자들 주장처럼 가변(可變)적이며 성장(成長)하고 또한 전지(全知)도 전능(全能)도 아니라고 하면, 이는 하나님께서 선정하신 인간 예언자와 사도들의 무오를 변호할 수 없게 한다. 바아르가 여기에서 대담하게 정통주의 신관이 여하한 현대적 범주에서나 성경에 대한 올바른 평가에 크나큰 장애이다라고 말한 점은 주목을 요한다(ibid., n.11). 마치 역사적 기독교 유신론이 무오적 영감론을 불변적 주권적 하나님께 연결된 것으로 자리매김시킨 후, 바아르는 오류가 있는 성경을 가변적이며 성장(成長)하는 신론(神論)과 연관시키는 논법을 구사하고 있다.

 

별도로 확인되지 않는 한 영감을 입은 예언자와 사도들의 말은 진리가 아니라고 하는 가정에서 본문의 신뢰성을 결정하기 위하여 외적 자료들의 뒤 바침이 있어야 한다는 논리구사는 동 외적 증거를 찾아야 한다고 하는 무리한 부담을 만들어 내는 무리를 범한다.

 

녹스(W.L.Knox)에 의하면, 지난 세기의 과학적 발전은 우리가 확신을 가지고 신앙과 생활에 관한 불오적 지침으로 호소할 수 있는 축자적으로 영감된 책인 성경에 대한 일체의 개념을 의미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Essays Catholic and Critical, p.99). 그러나 이 주장은, 자기들의 방법론이 신앙과 생활에 관한 문제를 해결할 만한 능력이 없다고 공개적으로 인정한 대등한 과학자들의 입장과 크게 모순된다. 놀라운 사실은 많은 경우에 실용적인 과학이라고 자처하는 비평적 주장들이 사실은 과학이 아니라는 것이다. 비평주의는 재삼 재사 성경의 신뢰성에 대하여 아무런 증거도 없이 전혀 증거가 결여된 철학적 편견에 근거하여 교의적으로 부정적 평가를 내린다. 제임스 보이스(James Boice)심지어 불트만의 지지자들까지도, 그의 저서 신약 신학(Theology of the New Testament)이 예수님의 교훈에 대하여는 다만 30페이지만을 할애하고 있으나 우리가 전혀 알지도 못하는 소위 헬라주의 공동체에 대해서는 100여 페이지나 할애하고 있다는 불일치를 직시하여야 한다라고 하는 평에는 주목할 만한 이유가 있다고 본다(God the Creator, p.113).

 

성경의 오류를 강력히 주장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자주 실재적 불신을 포괄적으로 일반화한다. 그러나 무엇이 믿을 수 없는 것인지 세밀한 설명이 거의 없으며, 혹 그 설명이 있는 경우에도 비 복음주의의 주변에 대두하는 너무나 광범한 차이는 보기에도 민망하다. 클라크 피낙크(Clark Pinnock), 그 믿을 수 없는 곳이 어디인가를 분명히 지적하여 줄 것을 요구할 때 성경에 있는 것으로 가정한 오류론이 얼마나 파악할 수 없는 것인지를 지적한 바 있다(Set Forth Your Case, pp.71-72).

 

랭돈 길케이(Langdon Gilkey), 소위 현대 과학이 창세기의 기사 즉 주전 약 4004년에 6일간에 걸쳐 이 땅이 지어졌다고 하는 제임스 어셔(James Ussher)의 주장을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고 하면서 성경 오류의 가상적인 사례를 인용함으로써 성경의 무오적 영감의 거부를 정당화하였다(Naming the Whirlwind, p.74). 길케이는 영원한 불변과 변경 불가능한 타당성을 지닌 진술에서, 각기 그 시대에 알맞은 상대적 기독교의 진리로 그리고 각기 그 시대의 문화적 상황과 필요를 반영하는 진술로기독교 교리의 성격이 불가피하게 변하여 왔다고 생각한다(p.77).

 

의식하건 못하건 태연하게 성경의 오류를 주장하는 이론은 성경의 정전성을 해칠 수밖에 없는 이질적인 철학적 가정 위에 서 있다. 파급적인 잘못된 계시에 관한 견해는 하나님의 명시와 자기 계시를 하신 하나님의 실재에 대하여 회의에 빠지게 한다. 최근 현대 신학의 방황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가 초자연적 실재들을 뒷받침하는 자족적인 주장이 아님을 입증한다. 물론 이 미결의 여로를 출발한 모든 학자들이 하룻밤에 도달할 종착지로서 반드시 불가지론에 도달했다는 것이 아니며 또한 반드시 그 불가지론에 도착하여야만 된다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 사실은 그들이 이러한 빈약하고 또한 믿을 수 없는 무료 고속도로를 따라 여기 저기 자기가 임의로 정한 위치에 유하여야 할 이류를 설득력있게 제시하지 못한다.

 

5. 가설적이 오류에 관한 실제 논의의 범위를 잘못 이해하는 것은 교정되어야 한다. 이 논의의 중심이 지금은 다양한 본문 판독의 영역에만 놓여 있다고 하는 견해는 이 문제를 지나치게 간단히 보는 경향이 있다. 예언적 사도적 원본이 어떤 언어의 하나만의 시제와 형식을 사용할 수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여러 가지로 판독하게 될 복사 과정에서 일어난 서기관의 오류는 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필사에 있어서의 사본의 차이는 교리적으로나 또 다른 입장에서 본질적인 성경 교훈을 위험에 처하게 하거나 의심스럽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본문의 무오 문제에 관한 심각한 논쟁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고려되는 문장과 한 저자가 다른 저자의 것들과 충돌되는 특별한 것을 인정하는 문선에 집중적으로 초점을 맞춘다. 구약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역대기서와 열왕기서 혹은 사무엘서와 역대기서 사이의 통계 수치의 차이이며, 신약에서는 공관복음이 문제이다. 그 외에는 현대의 역사, 과학, 윤리 또는 신학적 이론과의 본문상의 갈등이 있으며, 그것들은 자주 비평적 반대론의 기초가 되고 있다.

 

문제가 되는 문장을 대할 때, 복음주의자들은 즉각 그리고 언제나 무오적 원본으로 도피해서는 안된다. 최선의 고전 사본이 문제가 있는 것처럼 가장하는 공인된 본문을 전달하는 곳에서는 그 문제를 인정함이 최선이다. 물론 우리가 현재 소장하는 최선의 본문이라도 원본과 오래 되고 우수한 사본과 비교하였을 때 어떤 점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부분적으로, 이러한 경우는 그때까지 우리가 소장하고 있던 구약의 두루마리보다 훨씬 더 오래 된 구약의 두루마리가 사해의 동굴에서 발견되었을 때 야기되었다. 그러나 또한 에세네파의 두루마리가 너무나 마소라 본문과 일치하고 있어서, 자유주의적으로 편견이 있는 학자는 그 사해 두루마리가 본문 비평을 위하여 무가치하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무오설에 관한 논쟁에 있어서의 복음주의의 행동 원칙은 오류의 증명이-바아르의 표현을 사용하여-“방법론적으로 불가능한 작업”(Fundamentalism, p.268)이 된다는 것을 내세워서는 안 된다.

 

바아르(Barr), 역대기서가 비록 어느 정도의 진실로 오래되고 독자적인 전통을 소유하고 있으나 원칙적으로는 역사적 성격이나 원문의 구성에 있어서 열왕기서보다 열등한 자료에서 온 것이며, 그리하여 사건들이나 그 사건의 선택에 있어서 새로운 신학적 착색을 하고 있다"라고 주장한다(The Bible in the Modern World, p.81). 이러한 결정은 너무나 광범위하게 일반화되어 논란의 여지가 없도록 뒤섞어 버렸다. 최근에 이르기까지 이와 유사한 결정이 공관복음과는 대조적으로 종종 요한복음에 적용되었다.

 

역대기서의 심각한 문제는 수치를 언급하는 여라 가지 경우에서 발견된다. 엘리슨(H.L.Ellison)은 다음과 같이 고찰하였다. “헤아릴 수 없이 큰 수자이다. 어떤 것들은 사무엘서와 열왕기서에 일치하지 않고, 다른 것들은 고고학적 발견과 상반된다. 그러나···다른 수자의 제시는···우리가 간단한 과장법으로 취급하고 있는 일반적인 암시의 뜻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예를 들어 역대하 14:9에 나오는 병거 300승은 백만명의 보병과 대조된다. 여기서의 가장 명확한 해결은, 우리가 자료에서나 역대기의 전승에 있어서나 본문이 부정확한 것을 취급하고 있다는 것이다”(역대상하”, p.370 b).

 

에드워드 죤 카넬(Edward John Carnell)은 구약의 역사서 안에 있는 중요한 통계적 차이를 취급하려고 시도하였다(, 삼하 8:4과 대상 18:4, 삼하 10:18과 대상 19:18, 삼하 24:9과 대상 21:5, 삼하 24:24과 대상 21:35, 왕상 4:26과 대하 9:25, 왕상 7:26과 대하 4:5). 여기에서는 무오적 원문에 대한 문제가 거론되지 않았다. 사본의 복사자에 의한 과실에 대한 호소는 일견 매력적이나, 이들 귀절에는 우리가 입수할 수 있는 본문에 차이가 있다고 하는 사실은 아직까지 그대로 숙제로 남는다. 카넬(Carnell)의 해석적 방법에 의하면, 구약의 역사서 안에 있는 통계적 불일치는 공문서 보관상 있을 수 있는 착오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이러한 공문서 보관소에서 영감을 받은 성경 저자들이 잘못된 자료에 근거하여 지식을 수집하였기 때문이라고 카넬은 주장한다(The Case for Orthodox Theology, pp.102 이하)-이를테면, 이 해결의 내용이란 하나님의 영감에 의한 본문 안에 오류가 들어왔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잘못된 진술을 영감으로 인정하셨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문절의 경우에서는 오류를 거론하지 않아도 표면상의 차이를 조정할 수가 있다. 사무엘하 24:9에 나오는 수자보다 역대상 21:5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의 수자가 20만이나 감소된 이유는 레의 지파와 베냐민 지파가 제외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참조, 대상 21:6). 렌윅(A.M. Renwick)는 사무엘하 24:9과 역대상 21:5의 수자의 차이, 즉 이스라엘의 인구 조사는 30만 더 많게 하고 유다의 인구 조사는 3만명 적게 한 것은 두 가지 방법에 의한 산정, 즉 하나는 비공식적인 명부이며 또 하나는 공식적인 명부에서 기인되었다고 한다(“사무엘상하” p.292, 삼하 24:9에 관한 주해).

 

그러나 어떤 주해자들은 성급하게 구전의 오류나 본문의 오류일 것으로 생각하며, 반면에 다른 주해자들은 역대서의 문장에 나오는 수자의 가산은 다윗 왕의 승리(, 대상 19:18)를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변경한 것으로 본다(, 대상 21:25). 또는 다윗 왕의 도량의 크기를 말한다고 보는 주해자들도 있다(, 대상 21:25). 그러나 본문의 보존이 미흡하여 발생한 변질이라고 보는 학자들이 늘고 있다. 왜냐하면 병거 7,000승과 40,000명의 보병의 상실은(대상 19:18) 병거 700승의 상실보다 적을 수도 있으며(삼하 10:18), 그러나 보병”(대상 19:18)이라는 낱말은 4만명의 마병이라는 낱말보다 더 낫다는(삼하 10:18) 사실에 의하여 본문 왜곡의 가능성이 증대되기 때문이다.

 

린드셀(Lindsell)은 사무엘하 8:4과 역대상 18:4 사이에서 발견되는 차이를 가리켜서 부분적으로 분명하지 않은 원문(original text)을 당초에 잘못 복사하였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Haper Study Bible에 수록된 삼하 8:4에 대한 주해, p.451). 린드셀은 사무엘하 10:18과 역대상 19:18 사이에 있는 차이에 관하여는 사본 복사자의 오류로 돌린다. 그는 대부분의 모든 서기관의 오류는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낡은 사본이나 훼손된 사본 때문이며, 부정확한 복사는 피곤이나 경솔 때문이라고 부연하여 설명한다(p.454). 첫눈에 이러한 귀추는 역사적 국면만이 아닌 교리와 윤리적 국면에 대한 의혹을 던져 준다. 그러나 예문은 단순한 단어나 수자와 관련된 경우이며, 진술이나 문절과는 관련이 없다. 린드셀은 사무엘하 24:9과 역대상 21:5이 만일 수자상의 차이가 상비군의 인원을 포함한 것이거나 뺀 것이 원인이 아닌 한 사본 복사자의 오류를 포함한다고 생각한다(p.479). 열왕기상 4:26에 관해서는 사본 복사자가 히브리어의 440으로 잘 못 읽었다고 믿고 있으며, 그리하여 역대하 9:25에서 4,000과 대조가 되는 40,000이라는 수자를 인용하였다는 것이다(p.491). 그러나 뒤에 나온 문절에 관한 견해를 피력할 때에는(왕상 4:26과 대조적으로), “이렇게 보거나 저렇게 보거나 사본 복사자의 오류이다”(p.267)라고 그는 말한다. 그는 복사자의 오류가 그것에 관여해 있음을 증명하여 줄 뒷받침이 될 본문을 한 곳도 제시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복음주의자들은 병행적 본문이 통계적으로 오류를 간직하거나 혹은 일견하여 복사의 과정에서 오류를 암시하여 주는 모순을 포함 하고 있을 때에만 사본 전승 중에 오류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강조한다.

 

구약의 역사서는 통계의 수자와 함께 연대에 관한 문제도 제기한다. 오래 동안 비평학자들은 열왕기서 내의 연대 측정이 형편없이 잘못 되었다고 주장하여 왔다(Marcus DodsThe Bible: Its Origin and Nature, p.186A.H.Sayce를 인용하고 있으며, 그를 가리켜 Marcus Dods생존하는 자 중에서 가장 보수주의적인 비평학자라고 부른다). 많은 비평학자들은 성경이 제시하는 히브리 왕이 순서가 심각하게 잘못되었으며, 건전한 히브리 역사의 윤곽을 세우기에는 극히 신뢰할 수 없는 것이라고 역설한 바 있었다. 심지어는 알브라이트(Albright)와 같은 정도의 조심성있는 학자까지도 이렇게 많은 수자가 아무런 변질이 없이 그 많은 편집자와 복사자를 통하여 전승되었다고 한다면 믿을 수 없는 이야기다···대부분의 동시성은 후기에 속하는 편집자의 손에 의한 계산이다. 그러므로 원초적인 자료처럼 사용될 수 없다라고 저술한 바 있다(“The Chronology of the Divided Monarchy of Israel," pp.17이하). 1948년 판의 Encyclopaedia Britannica에 수록된 성경의 구약의 역사 시간을 기고한 평론가는 모든 연대순에 있어서 오류가 번지고 있다···그 연대순에 기초한 어떠한 연대 연구의 기획도 무시되어야 한다···앗수르나 바벨론의 기록이 이스라엘과 유다의 연대를 취급하지 않는 한 확실성은 불가능하다······성경에 있는 계수에 오류가 있다고 하는 사실은 명백한 사실이다”(3:511-512)라고 언명한다.

 

듀이 비이글(Dewey Beegle)열왕기하 15:27에 보면 베가가 이스라엘 왕이 된 후에 20년간 사마리아를 통치하였다고 단적으로 진술하고 있으나 실제적으로는 이런 일이 없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Scripture, Tradition, and Infallibility, p.182).

그러나 유다의 통치자와 이스라엘의 통치자의 동시성과 기간을 기술적으로 연구한 후, 에드윈 틸리(Edwin R. Thiele)는 오랜 동안 기정사실로 인정되어 온 열왕기서가 연대순에 관하여 명백한 부실과 부정확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불평에 대하여 힘 있게 도전적인 반론을 폈다. (틸리 박사는 재림교회의 학자이다.) 틸리(Thiele)의 저서 히브리 왕들의 신비한 수”(The Mysterious Numbers of the Hebrew Kings, 1977)와 최근의 히브리 왕들의 연대기 (A Chronology of the Hebrew Kings, 1977)는 히브리 왕의 명단에 오류가 있다고 하는 비난이 근거가 없다고 언명한다.

틸리(Thiele)는 상관있는 병행절을 취급하는 글에서 그 문제에 대한 훌륭한 고찰을 제시한다(, 왕상 15:25과 왕상 15:33, 왕상 16:23과 왕상 16:29, 왕하 3:1과 왕하 1:17, 왕하 8:25 왕하 9:29, 왕하 1:17과 왕하 8:16)(“A Solution to the Chronological Problems of the Hebrew kings," pp.22-26). 그는 유다와 이스라엘 통치자들의 통치 기간이 히브리 기록자들이 사용한 기본적인 연대 시간의 원리에 대한 면밀한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동시화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지배 연한을 계산하는데 사용한 방법은 다양하였다. 예를 들어 즉위 연대 계산법은 통치가 시작한 그 연대를 원년이라고 부르며, 첫 번째의 공식 연대는 다음 신년 이후부터라고 보았다. 비즉위 연대 계산법은 왕이 그의 통치를 시작한 그해를 제1년으로 본다. 다시 말하여 그 다음의 신년은 제2년의 시작이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통치자들의 통치 기간을 비교함으로써, 나라마다 어떤 계산법을 사용하였는가를 알아낼 수가 있다. 중앙 집권의 원리와 분산 집권의 원리도 연대를 복잡하게 한다. 히브리 사람의 연대 기록을 이끌어 준 기본적인 규칙을 연구한 틸리(Thiele)열왕들의 집정에 관한 자료가 지극히 신뢰도가 높고 여러 관점에서 그 시대의 연대기와 일치하는 내적 조화의 양식으로 엮을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하여 내적인 정확한 접촉이 설정된다”(ibid., p.22)라고 하는 자신을 갖게 되었다. 열왕기하 15:27에 나오는 베가의 통치에 관한 기록에 있어서 비이글(Beegle)을 당혹하게 만든 난해를 해결하기 위하여, 어떻게 이중적 시간 측정과 중첩된 통치의 양식을 풀어야 할 것인가를 틸리는 명확하게 보여준다(“Coregencies and Overlapping Reigns among the Hebrew Kings," pp.195이하).

 

성경의 무오론을 무오인 원본(autographs)과 본문의 상이점에 논쟁을 집중시키는 것은 이 논쟁을 지나치게 단순하게 하는 것이다. 동시에 이 논쟁에의 적응을 피하기 위한 성경 비평의 영합은 순조로울 수가 없다. 성경의 신뢰성이라고 하는 전통적 전제를 기초로 한 탐구의 지지를 얻은 탐구는 단지 비성경적 자료에만 근거한 비평적 경향보다 더 유익한 조명을 해주는 경우를 자주 본다.

 

복음주의의 결정은 완전히 정당화되는 것처럼 보인다. 즉 성경의 내용을 진실한 것과 거짓된 것으로 세분하는 학자들은, 그들 자신이 그와 같이 진실한 내용과 거짓된 내용을 분류할 수 있었다고 하는 객관적인 기준을 만들어 내지를 못하였다. 그러한 분류를 결정할 어떤 성경적, 철학적 내지는 신학적 기준도 설득력있게 펴내지 못하였다. 그 대신에 이러한 분류법은 성경을 평가하는 일에 있어서 잘못된 본질을 도입하였으며, 그리하여 성경 자료의 내용과 구조에 관한 학문적인 검토는 점점 더 서서 집필자들의 진실성과 허위성에 관한 문제를 보류한다. 이러한 불안정은 현대의 진리에 대한 회의관의 침투를 반영하여 준다. 그리고 모든 진술에 (현대 비평학이 서 있는 원리를 제외하고) 대한 대규모의 고려가 시간과 문화에 매여 있다는 것을 반영한다. 만일 누가 감히 이러한 예언적 판단을 할 수 있다면 그들이 성경적 진리에 대한 관심을 되찾지 않는 한, 그들이 각별히 성경에 대하여 내거는 비평적 관심 그 자체는 한 세대가 지나기 이전에 허물어지고 말것이다.

 

6. 성경 비평주의의 곤경이 어떻든지 복음주의자는 성경 안에 나오는 문제가 제기될 문장에 관한 관심을 버려서는 안 된다. 이들 문장들은 타협을 모색하거나 어떤 복음주의의 주변에 일치하기 위하여 연구할 것이 아니라, 학문적 일치성의 문제를 두고 그것을 위하여 성경의 말씀을 탐구하여야 할 것이다.

풀러 신학교의 오랜 동료 교수인 에드워드 죤 카넬(Edward John Carnell)과 해롤드 린드셀(Harold Lindsell)의 방법에는 두드러지게 차이가 있다. 린드셀은 그의 저서 성경에 관한 논쟁에서 자주 동료 복음주의자들 중 양보적인 위치를 염두에 두고 문제가 되는 문장들을 논의하는데, 그와는 대조적으로 카넬은 무오에 대한 비복음주의의 비평 학자들의 문헌들을 연구한다. 예를 들어, 카넬은 사무엘서와 역대기 사이 그리고 열왕기서와 역대기 사이에 있는 불일치를 들어 어떻게 헨리 프리저비드 스미드(Henry Preseved Smith)가 워필드(Warfield)에게 도전하였는가를 지적한다.

 

린드셀의 성경 내의 불일치에 관한 논의는 약간의 문제 문장을 사례로 들고 있으며(22:42과 눅20:41, 2:26과 삼삼21:1, 14:30과 마26:34-36과 눅22:34-39), 해결이 가능하다고 암시한다.

제임스 바아르(James Barr)가 인용한 성경의 오류모순의 목록은 린드셀의 목록과 큰 차이가 있다. 바아르가 무오를 맹렬히 반대하는 견해 속에는 그가 거론하고 있는 특정 문장들에 특수한 중요성을 결부시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 창세기 12:10-21,20, 26:6-16에 보면 이스라엘 밖에서(애굽이나 블레셋) 거주한 족장의 이야기가 기록되었는데, (아브라함이 2, 이삭이 1), 그 때에 자기의 아름다운 아내가 남의 이목을 끌자 자기의 누이라고 속여 목숨을 건졌다. 스파이서(E.A Speiser, Genesis, p.xi)는 이 기사들을 재구성하면서, 그 기사들을 누지 문서(Nuzi documents)(기원 전 15세기에서 14세기의 것으로 추정)에 나타난 사회의 풍습과 일치하는 것으로 본다. 이러한 재구성은 그 나름대로의 여러 가지 난제들을 새로 제기하는 반면에, 또한 쉽게 풀리지 않는 지극히 복잡한 요소가 이미 거기에 내포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스파이서의 제언을 차치하고라도 우리는 한 지도자가 외래인의 아름다운 아내를 탐할 수 있는지, 또한 그 아들이 이러한 상황에서는 어떻게 대처하여야 할 것인지를 그의 아버지로부터 배워 알고 있었는지에 관하여 질문하여야 한다.

 

(2) 창세기 21:4은 하갈의 아들이 10대의 소년임을 말하며, 한편 창세기 17:25은 이스마엘이 더 어렸다는 것을 암시한다. 자료 비평학에서는 이 두 기사가 상충하는 것으로 말하나, 반면에 복음주의 주석가들은 저친 광야의 생활에 익숙한 모친이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을 때까지 17세 소년을 품 안에 안고 걸었다고 해석을 한다.

 

(3) 민수기 1:46에 보면 603,550명의 장정들이 애굽에서 가나안까지 행군하였다고 하였다. 회의를 품는 학자 중에는 이만한 수자가 행군을 하였다면 선두가 약속지에 도착을 하였을 때에는 후미부대는 아직 애룹 땅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톰슨(J.A. Thompson)개정판 신성경 주석”(The New Bible Commentary Revised)에서 그 숫자의 의미는 각기 부대를 인솔하는 603명의 대장이라는 뜻이거나 아니면 가솔을 거느린 603 가정이라는 뜻이라고 풀이하였다(“Numbers" p.169). 이러한 해석은 알려진 이 본문의 모든 번역과 모순된다고 바아르는 말한다(Fundamentalism, p.212). 유사한 난해는 요한계시록 9:16에 나오는 기사로서, 유브라데에서 건너온 2억의 마병대가 메뚜기와 같이 침공하여 올 것이라고 한 예언의 언급의 언저리에 있다. 로버트 문스(Rovert Mounce)는 믿을 수 없을 만큼의 많은 수를 암시하는 문학적인 표현으로 그 낱말을 생각하는 대신에 만의 만의 두곱“(2×10000×10000)이라는 표현을 전하고 있으나 그렇게 하면 문절의 요점을 잃게 된다. (참조, 68:17)(The Book of Revelation, p. 201). 민수기에 나오는 내용은 지금까지 만족할 만한 해결이 없는 것으로 보이는 다른 종류의 문제가 있음이 분명하다.

 

(4) 여호수아 10:12-13(참조, 38:2, 왕하 20:11)은 긴 하루에 관한 언급 때문에 문제가 남아 있다. 바아르는 이 기사를 전설이라고 여겨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며, 성경적 이적을 회피하여 그 기사를 시적(詩的)이며 또 상징적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을 공격한다.(Fundamentalism, pp. 243-244). 화이트 2(W.White, Jr.)성경의 기사는 마땅히 초자연적이고 이적적 사건이라는 뜻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라고 평하고 있다.(Day, Joshua's Long" 3:46). 다른 학자들은 그것이 천문학적 혼란이며 그리하여 해가 운행을 정지하였다고 생각하여,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크나큰 이적을 행하실 능력이 있음을 배제하지 않고 있으나 이같은 이변에 필히 수반하여야 할 현상이 결여(缺如)되어 이적이 의도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므로 많은 주석자들은 이 문장을 시적 표현으로 생각한다. 출애굽의 역사적 행위와는 달리, 태양이 운행을 정지했었다고 하는 사실을 히브리 사람들은 크신 하나님의 행위로 회상하지 않았다.

 

(5) 사무엘상 17장과 사무엘하 21:19은 골리앗을 쓰러뜨린 용사가 각각 다윗과 엘하난 두 사람임을 암시한다고 할 수도 있다. 더욱이 역대상 20:5은 엘하난이 골리앗의 아우 라흐미를 죽였다고 진술한다. 대부분의 복음주의자들은 사무엘하에 나오는 본문이 변질되었다고 봄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한다. 그러나 현존하는 본문들은 이러한 판단에 대하여 아무런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린드셀(Lindsell)은 그의 저서 성경에 관한 논쟁에서 성경의 무오를 주장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Harper Study Bible, p.474) 사무엘상 17:421:9에 나오는 전승이 사무엘하 21:19의 전승보다 더 우수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또 하나의 가능성은 엘하난이 다윗의 별명이라고 생각 할 수 있다는 것인데, 그럴 경우에는 다윗이 골리앗과 그의 아우 라흐미 둘 모두가 살해되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그 난해한 구절을 조화시키기 위하여 다윗이 그 거인의 아우까지 살해하였다고 하는 것은 기발한 생각일 뿐이다. 명백하게 무엇인가가 빠져 있다. 그러므로 그 문장의 이해를 위한 더 많은 조명을 얻을 수 있을 때까지는 판단을 유보함이 현명할 것이다.

(6) 마태복음 21:10-13과 마가복음 11:15-19, 누가복음 19:45-48의 내용에 나오는 성전 청결 사건을 수난 주간 시초에 있었다. 그러나 요한은 그 성전 청결 사건을 예수님의 공생에 초에 두고 있다(2:13-16) . 예수님이 그의 공생애 기간 중 다른 시간에 다 번 성전을 청결하게 하셨다는 이론이 자주 거론되었다. 바아르는 성경의 무오를 변호하기 위하여 이 사건이 여러 번 있었다고 주장하는 데 대해 불만을 갖는다. 그러나 성경의 무오를 용납하지 않는 많은 주석가들은 이 두 번의 청결 사건 이론을 상충하는 자료라고 가정하는 것을 해결하는 것보다 더 그럴 듯하다고 생각한다. 두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봉사의 초기와 후기의 사건으로 각각 이해가 가능하다.

 

(7) 누가복음 24:51은 부활직후에 예수님이 승천하신 것으로 되어 있고 반면에 사도행전 1장은 그 중간에 40일의 기간이 있었다고 말한다. 대부분의 복음주의자들은 누가복음의 기술을 가리켜 망원경적(望遠鏡的) 이라고 생각하며 아마도 그럴지도 모른다. “하늘로 들려 올라가시니라는 표현 어구에 대한 사본상의 증거는 약하다. 개정 표준역(Revised Standard Version)은 그것을 서기관이 보완한 것으로 짐작하여 생략한다.

 

(8) 마가복음 10:17-22과 마태복음 19:16-22 그리고 누가복음18:18-26의 부유한 청년 관원과의 대화에 대한 기록은 동일하지 않다. 대부분의 복음주의자들은 예수님과 청년과의 대화가 희랍어가 아니라 아람어였기 때문에 복음서 저자 중에는 문자 그대로의 축어적 내용을 제시하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9) 고린도전서 3:19은 사도 바울이 구약의 본문이 지닌 권위에 순복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인용한 문절에 의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축복받는 욥의 말이 아니라 엘리바스가 욥을 비난하여 한 말이며(5:13) 그 엘리바스를 하나님은 책망하신다(42:7)는 것이다. 바울은 그 다음 절에서 시편94:11을 자유롭게 풀어서 인용하고 있는 것과 같이 여기서도 자유롭게 풀어 인용하고 있다. 바울이 영감에 의해 집필했다 하더라고 그가 자료의 선별에 매이지 않고 그의 직접적인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자유롭게 진리의 어느 한 부분을 인용하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라고 무오주의자는 말한다(그 자료가 고대 시편 기자이든, 어떤 고대 논쟁자이든 또는 바울과 동시대의 시인이든 구별할 필요가 없이. 참조. 17:28).

 

(10) 마태복음 5:17-20에 있는 구약 율법의 영원한 가치에 대한 강조는 예수 그리스도가 모세의 율법을 성취하였음을 신약이 시인하고 있기 때문에 상충된다고 바아르는 말한다. 그러나 성경학자들은 오랫동안 예수 그리스도가 죄인들을 위하여 모세의 율법을 전체적으로 성취한 것이 사실이라고 강조하면서, 그 율법 자체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도덕성의 표현으로서 계속 타당하다고 주장한다. 바아르는 예수가 구약을 비평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라고 강조한다(Fundamentalism, p. 82). 극히 일부의 학자들만이 예수가 모세의 교훈에 이의를 제기했다고 하는 바아르의 견해에 대한 확고한 근거를 산상설교에 대한 대조법에서 어떤 수단으로써든 꼭 발견해 낸다. 바아르의 견해로 본 신구약의 갈등은 그가 신구약의 차이를 과장하기 때문이다. 바아르의 이해에 따르면, 예언자의 하나님은 ……예수가 언급한 아버지와 상당한 차이가 있는 인격이라는 것이다(p.80). 그러나 어디를 보아도 예수께서 구약의 하나님에 대하여 비난하는 듯이 말한 곳은 없다.

 

상술한 대부분의 문절들은 그간 직접 간접적으로 복음주의 연구에서 탐구되어 왔다. 바아르는 자료가 다수라는 것과 기사가 잘못 되었다고 하는 이론보다 다양한 기사를 조화시키려고 하는 노력은 설득력이 적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제시된 복음적인 해결이 비록 학자 중에는 공감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지만 논리적으로는 가능한 것이다. 복음주의 학자들은, 역사적 사실들이 조화를 위한 그들의 모든 제안에 순응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주장은, 명백하게 다양하게 보이는 기사를 화해시키는 일에 있어서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전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바아르는 모든 상황에 대하여 다수의 자료와 기사의 오류를 덧붙이며 성경 무오에 관한 복음주의자의 결의가 오직 조화론 하나에만 국한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복음주의자는 무오적 조화를 주장하지 않는다. 복수적, 동류적 사건들을 과다하게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이론이나 또는 영감을 입은 집필자들이 어떤 때는 자료들을 연대적인 순서보다는 제목별로 배열한다고 하는 이론은, 그 어느 것도 사전에 미리 복수 자료설이나 기사에 잘못이 있다고 하는 설 이상으로 경멸되어서는 안된다. 사실, 비평학자들이 오류에 무관심하다고 하는 이론은-이 이론은 바아르 자신이 표시한 바 있다- 조화론이나 비조화론 전체를 비평적 무관계에 빠지게 만든다.

 

7. 무오의 문제와 관련하여서만 성경에 대한 교리에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은 신학적인 혼란 속에 교회를 서게 만드는 것이다. 20세기 후반에 와서, 어떤 복음주의자는 모든 하나님의 계시론을 오로지 무오론에만 집중하여 거론한다. 심지어 어떤 저자들은 성경 무오론이야말로 진정한 복음주의자와 거짓 복음주의자를 구분 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이라고 선언한다.

 

무오에 관한 균형없는 편집(偏執)은 지나치게 값비싼 복음주의의 변환일 수 있다. 어떤 복음주의자는 지나치게 성경 변호에 집착하는 나머지 심각한 신학적 해결을 등한히 한다. 사자의 울음소리를 세상에 들려주기 위하여 사자를 우리에서 풀어 주는 일대신에 그들은 사자의 조련사(調練師)가 되어 벼렸다. 심지어 성경 무오는 재정적 뒷받침을 끌어들이는 방안이 되기도 하며, 또한 중재적 성경관을 견지하면서 복음의 신학적, 변증적, 사회적 문제와의 씨름에 있어서 주도적 역할을 감당하도록 방임해 두면서 그러한 위치에 서 있는 경쟁적 신학 기관들을 비난하는 논쟁적인 도구로 전락하고 있다. 포괄적인 기독교 계시의 해석을 등한히 여기며 또한 세상을 향하여 힘있는 변증적 언명에 대한 포괄적 이해를 등한히 여기는 결과로 무오에 대한 불안정한 편견이 복음주의 기관의 정열을 낭비할 때에는, 이러한 상태에서 야기된 신학적 진공 상태를 유사 복음주의와 비복음주의의 대변자들이 점유하고 그리고 부당하게 채우기 마련이다. 기독교 신앙의 결의 속에 있는 본래의 학구적인 의무와 성경에 의해 기독교 공동체에 부과된 지적인 과업에 대하여 책임을 돌리는 일은 복움주의 신앙과 생명과 가치를 모두 회의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성경에 대한 경건한 자세는 복음주의 기독교로 하여금 모범적이며 우수한 신학 활동과 생산성에 박차를 가하여야 한다.

 

신약은 성경의 무오를 케리그마적 정점으로 이끌어 올릴 아무런 근거도 제공하지 않는다. 사도적인 핵심이 되는 메시지는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부활의 선포의 모든 부분에 무오를 주입(注入)하지 않는다. 또한 성경의 제시가 회개 또는 심판에 무오를 주입하지 않는다. 더구나 첫 조항으로 무오를 삽입함으로써 사도신경을 개정하여야 할 이유란 더구나 있을 수 없다. 신약의 진정성의 표는 첫째로 그리고 무엇보다 우선하여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예수께서 불가결하고 불가항력적인 기독교의 메시지의 심장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심장에서 결코 멀지 않은 곳에 하나님의 권위의 말씀과 예언자와 사도들의 하나님의 영감된 메시지가 자리를 함께 한다. 교의나 사도적 선포를 재정의하려고 하는 그 어떤 노력도 그것이 결과적으로 성경의 영감과 충족적 권위를 말살하는 일이 있을 경우, 그 노력은 신학적으로 편견적인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온전한 뜻 전체(“the whole counsel of God")를 선포하였으며(20:27), 성경의 진리를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한 말이 그 무엇이건 성경 무오의 성격이나 의미의 증명이 중요함을 영락(零落)시키지는 않는다. 불충분한 성경관은 오래 가지 않아 스스로 무너질 것이다. 다시 말하여, 우리가 진리를 말하기 위하여 복음서와 서간서를 의존하지 않는다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거의 아무 것도 말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성경 무오가 최우선적으로 선포되어야 할 사항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그 무오론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 무오론은 복음주의 신학을 전체로 제시하는 기독교 변증론에 필요 불가결한 것이다. 오류를 수용하는 성경의 권위의 탐구는 비극적으로 신학적 활동력을 잠식하고 결실이 없으며, 오히려 무오론에 완고하게 편집성을 갖는 일보다 못하다.

 

린드셀(Lindsell), “무오에 대한 신념이그것을 인정하는 사람들의 신앙 속에 오점이 없는 연속을 가능하게 만드는 한편”(The Battle for the Bible, p.143) 오류를 용납하는 것은 불가피하게 배교로 이끌어 간다고 진술한다. 물론 성경 무오를 포기한 많은 학자는 그와 함께 다른 많은 중요한 교리도 포기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성경 무오의 확신은-린드셀은 이 점을 동의한다-다른 교리적 주장을 버리거나 변질되지 않도록 하여 주는 보장이 아니다. 로마 교회와 여호와의 증인 그리고 다른 해석학적 흐름의 대변자들이 그 점을 예증하여 준다. 그들의 언명은 역사적 복음적인 기독교와 부분적으로 의견을 같이하는 많은 현대인들이 복음주의라는 용어를 전용하는 데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데 충분한 이유가 된다. 그러나 그들의 무오론의 기초에 참이든 거짓이든 복음주의와 관련짓는 것은 별도의 문제이다. 물론 복음적인 기독교의 적()은 성경 무오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예를 들어 린드셀은 전문적 견지에서 오류설을 포기하며 즉시 그가 복음주의의 배지를 달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ibid., p.210)라고 하였으며, “누가 복음주의자인가?”(Who Are the Evangelicals?")라는 제명이 붙은 초기의 논문(1964)에서 말한 일이 있거니와, 그는 좀 더 온건한 어조로 복음주의의 성경관이 항상 무오를 포함시키는 것은 아니나 일반적으로 무오가 규범적이라는 동의가 확실하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라고 진술한 일이 있다. 역사적으로 사용한 복음주의라는 용어는 믿음으로 의롭게 함을 얻는다는 것과 성경만이 소유하는 권위에 대한 결의라고 설명된다.

 

어떤 복음주의자들은 한정적 오류가 무오보다는 타락한 역사에서 행사하는 하나님의 전반적 구속 행위와 잘 조화(調和)된다고 변론한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영감을 입은 인간 예언자와 사도들의 사역 중의 특수한 국면의 예외를 설정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로 실현된 하나님의 성육신에 호소해서는 안된다고 한다. 특히 그들은 공관복음 문제에 의하여 제시된 몇몇 본문 현상과 예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동일하게 포함하지 않는 본문 현상이 성경을 확신하는 사람을 오류론으로 이끌어 간다고 믿고 있다. 확실히, 철학적 가능성이 아닌 성경 그 자체가 종국적으로 결정을 내려야 한다. 그러나 문제가 되고 있는 본문 자료는 성경의 교훈과 성경 자체의 내용에 있는 영감성의 주장과 더욱 일치하는 견해, 곧 다른 대안적 견해로 해명될 수 있다. 영감을 통제하는 원리로서 오류를 도입하는 학자들은 예수님의 교훈과 성경 집필자의 교훈을 화해시키기 곤란한 불안정한 종교적 인식론에 빠지게 된다. 오류론은 기독교의 계시에 관한 권위있는 내용을 일치하게 제시할 수가 없다. 다시 말하여, 그들 중 어떤 학자가 주장하는 것을 다른 학자는 거부한다는 것이다.

 

무오를 지지하지는 않지만 또한 유오를 지지하지도 않고 태도가 애매한 자들 사이에는 몇 가지 구분이 지어져야 한다. 1966년에 열린 벤함 성경 대회(Wenham Conference Scripture)의 참석자 중 성경의 오류를 인정하였거나 또는 성경의 오류가 역사적인 교회의 견해라고 주장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다시 말해서, 성경 무오를 옹호하지 않는 자들은 그것 때문에 자동적으로 오류론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단순히 성경의 무오에 관한 명확한 태도가 없을 뿐이다. 무오론에 관한 명확한 태도가 없는 복음주의자는 종종 성경이 분명하게 교훈하고 있지 않은 것에 관하여는 더 이상 자기의 입장을 밝히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소견은 무오론이 성경 영감론의 한 교리에서 비롯한 것이며 그 이상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종종 성경 집필자에게 의심스로운 점을 유리하게 해석해주고 싶어한다. 즉 집필자가 그와 같이 말하는 사실은 언급된 것의 가정적인 진리의 설정이라고 보며 그러한 자기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를 도처에서 찾는다. 그리고 그러한 이유로 이러한 증거가 결핍되어 있는 곳에 서 오류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이 입장의 약점은 다원적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러한 유동적인 학자들을 성경 오류에 결의를 갖는 학자들과 자동적으로 하나로 취급하고, 거짓 또는 비진정의 복음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여서 최후적 배교(背敎)로 논쟁적인 귀결을 내려 포기하는 일은 삼가야 한다. 그대신에, 합리적인 고찰이라는 수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무오에 대한 결의를 내리도록 자극을 주어야 할 책임이 있다. 성경 무오는 복음주의자의 유산이며, 그것은 기독교 교회의 역사적결의(歷史的決意)이다. 이 사실은 무오를 가리켜서 17세기의 루터주의나 또는 소위 프린스톤 학파의 장로교 신학자 핫지(Hodge)와 워필드(Warfield)가 교회사 부분에 끼친 착오라고 생각을 하려고 하는 도날드 데이톤(Donald W. Dayton, Discovering an Evangelical Heritage)과 에네스트 샌딘(Ernest R. Sandeen, The Roots of Fundamentalism: British and American Millenariansim, 1800-1930)과 같은 젊은 복음주의적 행동파의 기질(氣質)을 감안하여 강조되어야 한다. 린드셀(Lindsell)이 다음과 같이 한 말은 너무나 정당하다. “성경 무오론은 사도 시대부터 줄곧 기준(基準)이었다. 무오에 대한 반대자들은 150년 어간에 이르러서야 기독교의 지배적 세력이 되었다”(The Battle for the Bible, p.141).

 

자료 출처:

칼 헨리(Carl Henry), , 啓示, 權威 (God, Revelation, and Authority: God Speaks and Shows), 이상훈 역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86), 4: 453-472. 원본: (Waco, TX: Word Inc., 1979).


Posted by KAHN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