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을 보내면서

단상 : 2020. 12. 21. 20:09

2020년을 보내면서

재미없는 한 해, 재수 없는 한 해

2020년 새해를 맞이하였을 때 어떤 사람들은 하얀 쥐의 해(경자년), 즉 다산과 풍요의 경사스러운 해라고 설쳐댔다. 그렇게 시작한 한 해가 박쥐를 매체로 하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박살나는 재난의 해가 되어 저물어가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몰려 옴짝 달싹 못하고 잔뜩 경계하며 지낸 2020년이 되기 때문이다. 새 희망을 가지고 출발했던 정초에 벌써 먹구름이 중국 쪽에서 막 피어오르고 있는 것도 모르고 맞이한 한 해가 이제 그 먹구름이 세계를 감싸 숱한 생명들이 신음하며 죽어가고 있는 세상으로 변했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먹구름처럼 번져 가고 있다.

 

2020년은 인간이 살아온 지나간 다른 해보다 아주 재미없는 한 해로 낙인을 찍을 수밖에 없다. 재미없을 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의 비즈니스 하시는 분들에게 재수 없는 한 해였다. K 방역 자화자찬에 방심하다가 독버섯처럼 급속하게 번져 가는 바이러스 앞에서 기약없는 백신에 마음을 쫄면서 새해를 맞이하여야 한다 오늘 5인 이상 모이면 안 된다고 하는 보도를 접하고 탄식이 나온다. 미국 재림교회에서는 교단 본부에서  <> 어카운트를 한꺼번에 구입하여 지교회들이 사용케 하여 교회에 영적 양식이 동나지 않게 하고 있다는 소식이 부럽다. 

 

가라. 재앙을 몰고 온 2020년은 속히 가라. 그리고 다시는 오지 마라. 어디 한 곳 여행도 못하고 집에 웅크리고 지내야 했으며, 어딘가 갈 때는 손 소독제를 휴대하고 장갑을 끼고, 누군지 분별도 잘 못하게 하는 마스크로 중무장하고 사람들이 가까이 오는 것을 피하면서 사람 손이 닿는 곳을 만졌다하면 손 소독을 하거나 손을 씻으며 살아온 2020년이다. 2020년은 좋은 관계 맺기를 거부하는 것 같은 사회적 거리두기 속에 보낸 불행한 시간대 이었다. 지금도 마음 아픈 것은 이사 예배를 요청해 온 것을 거두도록 권고한 일이다.

 

20201년 내내 사회는 두 쪽으로 쪼개졌고 갈등과 대립은 일상적인 것이 되었다. 적폐 청산이 아닌 새로운 적폐들이 산더미처럼 쌓여가고 있다. 미친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것은, 시중 어느 큰 교회 유명 설교가가 지적한 것처럼, 특히 정치꾼들 행태에서 보게 된다. 오만과 독선적인 정치가들 같은 자에 속하지 않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로 유명한 홍세화 씨는 586 민주건달들이 판치는 세상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근년에 우리는 미쳐 날뛰는 자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한숨만 쉬어 왔다. 교수들은 2020년 사자성어를 아시타비(我是他非)로 선정했다. '나는 옳고 당신은 틀려'라는 뜻인 아시타비는 내로남불을 한문으로 옮긴 것이라고 한다. 후안무치(厚顔無恥)2위로, 코로나 팬데믹의 유포 확산 공포를 반영한 첩첩신중(疊疊山中)4위란다. 이런 사자성어들은 탈 도덕주의 흐름을 잘 나타내고 있다.

 

생명공학 무기

생명과학의 발달로 인간 유전자에 대한 변형, 삽입, 치환 등 편집 기술을 이용하여 바이오 전쟁을 할 수 있는 시대로 진입하였다. DNA 분자구조를 파헤친 인간은 유전자 씨퀀스 차트를 만들어 내고 그 각 염색체 요소들을 분리, 합성하는 위험한 실험을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생명의 신성성과 위엄성을 무시하면서 마구 파헤쳐 왔다. 인종간의 유전자 특성을 파악하여 상대방을 제압할 수 있는 생물무기의 개발이 눈앞에 다가왔다. 중공이 이일에 앞장서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이 게놈 프로젝트는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망가트리는 것을 넘어서 이제는 파멸을 초래하는 재앙의 도구로 전락되었다. 우한시 화난(華南)수산물시장에서 바이러스가 처음 퍼진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정부기관 바이러스 연구소에서 실험동물 박쥐 또는 천갑산이 시장으로 유출된 것으로 알려졌다. 실험동물들의 유전자나 리보핵산(RNA) 추출과 배열을 위해 조직 샘플을 채취했고, 이 샘플과 폐기물이 바이러스의 원천 통로가 된 것이란다. 옌리멍 등 학자들은 코로나19의 유전자 염기서열이 쥐터우 박쥐의 코로나바이러스와 8996% 일치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자연계에서 우연히 발생했다는 주장은 힘을 잃고 있다. 인공적으로 만든 것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WHO는 이 문제를 파악하고자 조사단을 중공에 파견한다고 말만 요란하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는 보시기에 좋았다. 그러나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세계를 지금까지 훼손하여 오다가 급기야 생명 창조의 비밀을 가지고 어떤 공작을 하다가 새나간 것이 재앙으로 둔갑하여 공룡처럼 온 인류를 위협하고 있다. 이것은 일종의 자해극이다. 무자격자가 자격이 있는 자처럼 설치다가 당한 꼴이다. 인간이 피하여야 할 생명체의 비밀을 손댔다가 화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피할 백신도 mRNA 백신이란다. mRNA는 유전자의 비밀을 이용한 방패로 보여 일종의 이이제이(以夷制夷) 같아 보인.

 

삶의 길을 되 살펴본 전도자의 고백

환멸감이 드는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전도서를 다시 본다. 전도서(Qoheleth)는 인생의 헛됨을 노래하는 가을 낙엽의 노래로 알려졌다. 또한 그것은 아벨의 비가라는 딱지도 붙어 있다. ‘아벨은 히브리어로 헤벨(הָבֶל, Hebel)로 전도서 서두에 나오는 단어와 같다. 책 첫 머리에서 이렇게 선포한다. “헛되고 헛되며(הֲבֵל הֲבָלִים)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1;2). ‘헛되고의 히브리어 ‘hebel’ ‘헤벨’, ‘증기’, ‘공허함’, ‘속이 텅빔을 뜻한다. 그리고 하벨 하벨림’(헛되고 헛되며)은 문자적으로 헛된 것들 중의 헛된 것’(vanity of vanities)으로 헛됨을 최상급으로 강조하는 히브리인들의 관용구적인 표현이다. 이 관용구는 책 서두(전 1:2)와 마지막 부분(전 12:8)에 나온다. 이 단어는 성경에 64회 나오는데 그 중에 30회가 전도서에 나온다. 이는 비극의 주인공 아벨이 무참하게 살해된 것을 연상케 한다. 하벨의 번역 사례를 보면, 쓸대 없는(useless) (Good News Bible), 텅빔(emptiness) (NEB), 무의미(meaningless) (NIV), 헛됨(vanity) (NKJV)으로 나온다. 전도서는 인생이란 미쳐서 날뛰는 무의미함(우매함)과 지성의 한계를 꿰뚫어보는 메시지를 품고 있다.

 

왜 인생은 무의미 한가? 그 이유는 인생이 산다는 것, 활동한다는 것, 그 모든 것이 죽음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전도서는 제행무상이 연상되는 비관적 인생을 논하고 있다. 더 나가서 죽음 그 자체도 무의미하다. 세상 시각으로 보면 선한 자나 악한 자 모두가 같은 죽음으로 끝나기 때문이다(2:14-16; 9:1-6). “모든 사람의 결국은 일반이라 이것은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 중의 한 것이니 곧 人生의 마음에는 이 가득하여 그들의 平生에 미친 마음을 품고 있다가 에는 죽은 자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9:3).

의인이나 악인이나 모두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된다. 심지어 죽음까지도 불공정하다. 천하고 경멸의 대상인 개를 두고 산개가 백수의 왕인 죽은 사자보다 낫다(9:4)고 한다.

 

인간의 지혜로는 존재의 의미를 풀 수 없다. 인간의 유한한 지혜를 총동원하여 연구하면 할수록 괴로움과 수고뿐이다(2:13).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지상에서 이룬 성취까지도)은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일 뿐이다(2:14). 아담의 맏아들 가인(קַיִן, Cain)'소유하다, 얻다, 창조하다'를 뜻한다. 전도서 제2장에 나오는 인간의 여러 생산 활동들에는 가인의 이름의 뜻이 함축되어 있다. 이런 점에 비추어 전도서는 가인은 아벨이다라는 명제 같은 것이 비친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지만, 인간은 그와는 상관없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다(5:2). 하나님과 그가 주신 계시를 무시하고 살아가는 인생길은 헛된 것, 무의미한 것, 부조리한 것으로 가득할 뿐이다.

 

삶의 부조리 이슈를 가지고 문학작품을 저술한 대표적 작가는 프랑스 무신론 철학자 알베르 카뮈이다. 1957년도 철학시간에 배운 흘러간 유행가 같은 그를 꺼낸 것은 그가 삶을 부조리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부조리를 무의미로 보았다. 인간은 아무리 애를 써도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완전히 알 수 없고, 모든 일을 완전히 해낼 수도 없으며, 반드시 죽기 마련이다. 인간은 죽음이라는 분명한 한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영원'에 대한 환상을 품는다거나, 다가올 내일에 대해서 희망을 품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미래를 위해 아무리 열심히 노력한다 해도, 결국 미래는 인간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가는 죽음을 가져다 줄 뿐이기 때문이다. 카뮈는 전체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하여 명쾌하게 반대하는 반란과 반역에 관한 철학적 분석의 내용을 다룬 <반항하는 인간>을 발표했다. 이로 인해 그는 당대 프랑스 지식인들의 비판의 포화를 받았다.

 

카뮈가 1942년에 발표한 시지프스 신화(Le mythe de Sisyphe, The Myth of Sisyphus)는 부조리에 관한 일종의 시론이다. 카뮈는 이 작품에서 부조리 사상을 다루고 있다. 그리스 신화에서 시지프스는 코린토스의 왕으로 인간 중에서 가장 현명하고 신중한 자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는 신들을 우습게 여기거나 신들의 일에 개입한 결과 정죄를 받아 크고 무거운 돌을 뾰족한 산 정상으로 반복해서 밀어 올려놓아야 하는 신들의 형벌을 받는다. 그러나 큰 돌을 꼭대기에 세워 둘 수 없다. 곧 굴러 떨어지기 때문이다. 힘겨운 과정을 거쳐 바위를 산 정상으로 밀어 올리면, 바위는 다시 아래(낮은 세계)로 굴러 떨어져버린다. 이 끝이 보이지 않는 무의미한 노동을 반복해야 하는 것은 가혹한 형벌이었다. 다시 바위를 옮기기 위해 산 아래로 걸어 내려가는 시지프스의 모습은, 오늘날 인간의 성취란 곧 무의미로 전락해 버리는 상황을 빗댄 것이다. 카뮈는 시지프스의 모습에서 무의미하게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는 신 없는 실존철학의 프레임에 걸린 현대인의 삶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 실존은 깨어있는 자의식을 통해 자각하는 부조리의 상태에서 살아가야 한다. 내세의 삶 등을 말하는 종교적 희망은 상상적인 비약일 뿐이다. 그렇다고 자살을 선택하는 것은 도피책에 불과하다. 카뮈는 인간이 부조리에 굴하지 않을 때 의미를 갖게 된다고 본 것이다. 만일 종교적 희망이나 자살이란 해결책을 추구한다면 부조리는 그 빛을 잃게 된다. 카뮈는 여기서 부조리와 투쟁하는 의식의 공간을 사막 한 가운데로 비유하며 집요함과 통찰력을 가지고 사막에서 살아남아 버텨야 한다고 말한다.

 

시지프스 신화의 본질적인 주제는 삶에 의미가 있는 것인가를 파고 든 점에 있다. 이 책은 허무주의의 한계 안에서도 허무주의의 탈피를 위한 의미를 찾는 것이 가능하다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카뮈는 이 무의미한 ,  부조리한 일에 굴하지 않고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일에 대하여 의미를 찾아내면서 살아가야 한다고 본 것이다. 제우스가 죽음보다  큰 형벌로 시지프스를 파멸시키려 하였다그러나 그에 굴하지 않고  부조리한 운명에 반항하며 돌을 굴림으로다시금 자신이 삶의 주인이 되면서 제우스의 의도까지 이겨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도자의 시각은 다르다. 전도자는 안간힘을 다하여 싸우고 반항하는 일들을 두고 부정적인 답을 유도하는 역설적인 질문을 한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1:3). 전도자는 해 아래서라는 말을 전제 조건으로 삼고 있다. 하나님 중심주의라는 삶의 가치를 이탈한 모든 수고의 무익함, 부조리함을 암시한다. 본래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노동의 사명을 받아 기쁨 가운데 일하게 되었으나, 아담의 범죄 이후에 노동의 참의미가 왜곡되었다(3:17-19).

 

그러면 어떻게 살 것인가? 전도자는 삶의 좌절과 무의미함, 그리고 수고함에도 불구하고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라고 권고한다(2;24-26).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13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膳物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3:12-13; 참고 전 5:18-20; 8:15; 9:7-10). 그러나 전도자는 청년들에게 마음에 기뻐하는 대로 살며 행하라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줄 알라고 못 박는다(11:9).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현재 모습은 장차 우리가 이루게 될 모습의 확실한 그림자이다”(교육, 307).

 

전도자는 허무와 부조리 무의미로 이어지는 인생을 살려내는 해결책을 책의 결론으로 삼고 있다. 일의 結局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敬畏하고 그의 命令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本分이니라 14 하나님은 모든 行爲와 모든 隱密한 일을 善惡 間審判하시리라”(12:13-14). 카뮈가 인간을 우주의 중심으로 본 것은 빗나갔다. 자기중심으로 살아가는 자세 속에 허무가 있다. 삶의 부조리라는 수수께끼를 혼자서 풀려는 현대판 시지프스의 길은 본질을 무시한 실존에 역점을 철학에 불과하다.

참고서: George R. Knight. Exploring Ecclesiastes and Songs of Solomon. Review and Herald Publ. Assn.,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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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AHN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