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철없는 변호사입니다> 읽고

 

이 책은 이강오 박사-하남주 박사의 여식인 이지연 변호사가 두 달 전 펴낸 책입니다.

캘리포니아와 워싱턴 DC의 변호사인 저자의 어린 시절, 학창시절, 특히 로스쿨 시절, 꽃길인 줄 알았던 변호사로서의 고뇌와 성장통을 리얼리스틱하게 그린 자전적 고백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책 전반을 흐르고 있는 줄거리에 배어있는 특징은 행복 찾아 나선 순례자의 깨달음이 녹아 있다는 점에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목차를 일별하면 읽고 싶은 흡인력을 지닌 제목들이 즐비합니다. 무엇보다도 독자들의 흥미와 관심을 유발하기에 충분한 저널리스트 자질이 엿보여 문필가들의 귀한 참고서로서의 가치를 풍기고 있다고 봅니다.

 

<나는 철없는 변호사입니다>는 탐스럽게 익어가는 가을 열매처럼 철들어가는 과정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자는 목표로 선택한 꿈이 이루어지면 행복이 보장되는 것처럼 여겼는데 요즘 대장동 사건에 달라붙어 봉이 김선달이 기절할 것 같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천문학적인 이득을 추구한 인간들을 위하여 달라붙은 변호사 거머리들의 현실을 깨달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유전 무죄를 마술을 추구하는 자기 세계의 현상에 고뇌하는 변호사의 티 없는 양심이 보입니다.

 

읽어가면서 자기 내면의 상황을 어쩌면 그토록 잘 묘사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순진한 낭만의 시대에 사랑을 그리워하는 pathos와 그 사랑의 진정성에 확신을 갖지 못하는 logos 사이에서 몸부림치며, 신뢰가 가는 ethos를 찾고 있는 젊은 여인의 고뇌 같은 것이 물씬 풍겼습니다. 헤어진 연인과 다시 만나는 에토스는 자기의 서투른 사랑의 기교라는 다리를 건너면서 모든 사랑에는 이해, 배려, 연민, 용서라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고백을 합니다.

 

죽을 만큼 공부해서 변호사가 된 거 같았는데, 나 같은 사람은 남아나고 넘쳐나는 직업군이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눈알에 핏줄이 터지도록 영혼 없이 모니터 속의 활자만 뚫어지게 쳐다보는 삶이 피눈물이 날 만큼 지겨웠다. 실업자일 땐 그렇게 일이란 걸 하고 싶었는데, 막상 일을 시작한 후 하고 있는 일이 즐겨지지 않으니 도대체 어디로 도망가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177-178).

 

애처롭게 행복의 길이 무엇인가 찾는 중 다이어 박사의 책을 읽고 행복은 의무이지 권리가 아니라고 여겨 자기의 삶을 바꿀 수 있는 일을 하며 다른 이에게 감동을 주는 삶의 설계를 하고 희열감을 느낍니다. 그리고 종교학이나 정신건강의 길을 연구하여 한 줄기 빛을 여러 가지 생으로 바꾸는 프리즘 같은 행복전도사가 되겠노라고 엄마에게 결심을 피력합니다. 그러나 부모님의 완강한 반대(방해)에 직면하였습니다.

 

그런 얼마 후 딸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도전할 용기와 자유를 찾은 듯 했습니다. 그러나 엄마는 딸의 행복을 인정할 수 없었다.” 저자는 어느 날 새로운 도전을 합니다. “당장 남들의 생각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할지라도, 내 생각을 바꾸는 것이 가능하다는 돌파구를 엽니다. 그렇다고 부모님의 이해의 한계를 수용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한 작가의 논픽션 창작론 책을 읽고 성공한 작가들은 수많은 내면의 악마들과 사투를 벌여야 하는지를 읽고 영감을 얻어 신문사에 제의하여 칼럼니스트 길을 갑니다. 이 시점에 부모님이 저자의 선택을 이해하고 지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어느 한 때는 400여명의 변호사들을 만나 그 중 370명에게 변호사로 사는 것이 행복하냐고 물었는데 20% 정도가 하는 일에 만족한다고 하였지만, 그들 중에도 행복해 하는 사람은 15명도 안 된 것을 확인했던 일을 여담으로 수록하고 있습니다. 변호사들 대부분이 행복하지 못하다는 것과 그들이 그동안 공들인 일이 아깝거나, 돈을 벌 수 있는 다른 방법을 모른다는 것 때문에 자기 직업에서 떠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285).

 

 

저자는 이런 통찰을 합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내일 당장 죽는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을 걱정들에 발목이 잡혀 갈팡질팡하며 매일을 보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절박한 마음가짐으로, 살아있는 매순간 자체를 감사하고 주어진 시간을 소중하게 받아들이는 이들이 내 주위에 과연 몇이나 있을지 궁금해지고는 한다.

 

꿈도, 돈도, 사랑도 왔다 갔다 하기를 반복한다. 하지만 한번 왔던 시간은 기다려주지도 멈춰주지도 돌아가주지도 않는다. 그리고 삶에 는, 분명히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신성한 시간의 조율이 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깨어있는 순간을 최대한 소중히 여기면서 인내심을 가지고 순리를 따르며 살아가는 것뿐이다. 물론 말이 쉽지, 실천은 쉽지 않다.“(290).

 

저자의 행복 찾는 여정을 느끼면서 고등학교 시절 독일어 교과서에 실린 Karl Busse<저 산 너머에 행복이 있다기에(Über den Bergen>가 생각났습니다.

 

Über den Bergen, weit zu wandern,

Sagen die Leute, wohnt das Glück,

Ach und ich ging im Schwarme der andern,

Kam mit verweinten Augen zurück.

Über den Bergen, weit, weit drüben,

Sagen die Leute, wohnt das Glück...

 

(저 산 너머 저쪽 하늘 멀리

행복이 있다고 사람들은 말하기에

! 나는 다른 사람들과 찾아갔다가

눈물지으며 돌아왔네

산 너머 저쪽 더 멀리

행복이 있다고 사람들은 말하네)

 

행복이란 상대적이고 추구하는 과정에 있다는 고백은 아리스토텔레스 철인의 수준으로 성숙해 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각박한 살기다툼 속에서 너그럽고 관대함을 아쉬워하는 모습과 나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 “사랑은 모든 곳에 있었다는 대목에서 부모의 신앙 우산이 크다는 것을 감지합니다.

 

결국 아직도 산 너머를 찾아가고자 하는 자기의 모습에 인생의 긴 여정을 걸으신 부모님의 안정을 바라는 심정에 안기지 못하며 울타리를 뛰어 넘는 자기를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삶의 모든 순간이 깨달음이고 배움이라는 법열 같은 것에 젖으면서 나 다움을 추구하면서도 하나님이 주신 내게 주신 삶의 목적에 순응해 가는 집을 구축하여 가고 있는 순례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저자는 엄마가 병원에 입원 생과 사의 경계선에서 고통당할 때 그동안 자기 진로 문제로 일어난 여러 가지 것들이 눈 녹듯이 사라집니다. 나폴레옹을 연상시킬 만큼 단단하다고 생각한 엄마의 몸에 온갖 바늘과 튜브들이 꽂혀있는 모습을 보고 태어나서 했던 모든 선택을 후회합니다. “숨 쉬는 모든 순간에 나는 엄마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인생은 한정되어 있지만 사랑은 영원하다는 확신을 깨닫습니다. 응급실 문밖에서 아빠를 보고 눈물이 핑 돕니다. 슈퍼맨처럼 든든한 아버지를 봅니다. 병원은 가족이 사랑으로 재연합하는 곳이 된 것입니다.

 

저자는 부모님을 옆에서 모시고 살겠다는 강한 의식 중에 한국으로 나가는 문제를 놓고 수년을 부모님과 티격태격하였던 일들을 이야기합니다. 아름다운 장면으로 다가 옵니다. 저자는 안정적 직업을 바라는 것을 두고 더 긴 인생의 여정을 보낸 부모의 깊은 뜻을 헤아리는 날이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어느 길을 택할 것인지 인생은 결국 신중한 선택을 용기 있게 하는 것이라는 저자의 결론에 행복의 답이 있을 것입니다.

                                   (2021년 9월 26일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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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AHN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