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마의 통곡 너머 들리는 소리
라마의 통곡 너머 들리는 소리
역사적으로 독재자들의 등장은 늘 라마의 통곡소리를 일으켜 왔다. 그러나 그 통곡소리를 소망으로 바꾸시는 새 역사의 여명이 뒤 따른다. 마태복음 제2장은 그 극명한 현상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마태복음 제2장을 읽으면서 하나님 백성을 격동시키는 위로와 소망의 빛줄기 서광이 365일을 이끄는 힘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그리스도교에 대한 제국의 통치자 스타일에는 잔인무도한 네로 型도 있고, 자기의 정치적 발판으로 삼는 콘스탄티누스 형도 있다. 여기서는 잘 해주는 척하는 회유 형이면서도 잔인한 헤롯 형을 살펴보기로 한다.
헤롯 대왕(BC 37~BC 4 재위)은 33년 동안 유대인들을 다스리다가 마지막으로 베들레헴의 어린이들을 죽이는 만행을 저지르고 예수께서 태어나던 바로 그 해에 죽었다. 그는 에서의 후손인 이두매 사람이었다. 그의 아버지인 안티파테르는 이두매의 실력자로 유대 마지막 왕조인 하스몬 왕조의 혼란기를 틈타 로마의 권력을 힘입어 유대의 행정 장관이 되었다. 그는 아버지의 권세 후광으로 25살의 젊은 나이에 갈릴리의 총독으로 군림하였다. 헤롯(B.C. 47)은 틈을 엿보다가 마침내 예루살렘을 무력으로 공략하여 이스라엘의 이른바 헤롯 대왕이 되었다(B.C. 37). 그러나 비유대인 왕에 대한 백성들의 거부반응은 만만치 않았다.
이어지는 로마 정권의 교체에 적응하는 자금 확보 차원에서 그는 백성들에게 중세 정책을 펼치고, 극장. 원형 경기장, 기념비, 우상 제단, 성채 등 각종 건축사업 추진을 위한 강제 노역 동원으로 백성들의 원성이 컸다. 그래서 헤롯은 유대인들의 환심을 가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 일환으로 들 수 있는 것이 바로 예루살렘 성전 재건(제3성전) 사업이었다. 이른바 헤롯 성전 중수 사업은 B.C. 20년에 시작하여 그가 죽은 뒤인 A.D. 68년에 완성시켰다. 그러나 그의 유화책이란 것은 무자비한 철권정치에 비하면 새발에 피라고나 할 것이다.
헤롯은 첫 부인을 버리고 유대 하스몬 왕조의 히르카누스(Hyrcanus) Ⅱ세의 손녀인 마리암네(Mariamne) 공주와 정략결혼을 하였다. 그러나 후일에 음모에 휘말려 마리암네와 두 아들들, 및 장모를 죽인 패륜아가 되었다. 그리고 8명이나 되는 여인들을 더 얻어 자녀들을 두는 행태를 보여 주었다. 그는 로마의 지지가 끊어질 때를 대비하여 천혜의 요새 마사다(Masada)를 건축하여 유사시에 피신하려고 했으나, 그것을 사용해 보지도 못하고 죽었다. 특히 그가 피할 수 있는 깎아지른 절벽 쪽에 있는 작은 궁도 소용없었다.
권력 집착력이 강했던 헤롯은 동방박사들로부터 유대인의 왕이 탄생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자기 내심을 감추고 동방박사들의 보고를 기다리다가 속은 것을 알고, 베들레헴의 두 살 아래 모든 아이들을 죽이라고 한 영을 내린 사건은 잔혹하기 짝이 없다. 그는 나이 70세에 내장이 썩고 벌레가 나며 악취와 경련이 끊이지 않다가 죽어가면서도, 각 지방의 귀족들을 경기장에 감금해 놓고 그가 죽는 순간에 그 귀족들을 모두 살해하여 전국적인 애도가 일어나도록 하라고 명령할 만큼 정신에 병이 든 사람이었다. 그는 끝까지 폭력과 살육으로 얼룩진 치세를 한 것이다.
헤롯은 당대 사회에 이질적인 자이었다. 동족이 아닌 피지배층이어서인지 무지비한 독재자로 군림하였다. 그는 내린 베들레헴과 그 지경 안에 있는 두 살 아래 아이들을 모두 학살하라는 영에서 두 살이라는 표현은 그의 철저한 잔인성이 엿보이게 한다. 이때 학살당한 아이들 수가 베들레헴의 도시 규모와 당시 주민 수가 1-2천 명 정도이었을 것에 비추어 약 20-30명 정도가 될 것으로 추산된다. 전승은 14,000명으로 추산하고 있으나 이는 터무니없어 보인다.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甚히 怒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17 이에 先知者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18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痛哭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子息을 위하여 哀哭하는 것이라 그가 子息이 없으므로 慰勞 받기를 拒絶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마 2:16-18).
마태가 인용한 예레미야의 예언 문맥은 이렇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痛哭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子息 때문에 哀哭하는 것이라 그가 子息이 없어져서 慰勞 받기를 拒絶하는도다 16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네 울음 소리와 네 눈물을 멈추어라 네 일에 삯을 받을 것인즉 그들이 그의 對敵의 땅에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7 너의 將來에 所望이 있을 것이라 너의 子女가 自己들의 地境으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 31:15-17)
본문에서 라헬이 북이스라엘의 주도적인 지파였던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 지파의 선조가 되어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유대인의 어머니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이들 지파는 북쪽 이스라엘 영토 중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라헬의 자식들이란 북 왕국 이스라엘 사람을 뜻한다. 라헬의 통곡 탄식은 주전 722년 북 왕국의 완전한 파멸을 두고 표현한 뜻이 함축되어 있다(왕하 17장).
삼상 10:2, 3에 따르면 라헬의 무덤이 ‘라마(Ramah)’ 근처에 있었다. 라마는 이스라엘과 유다 국경지대의 베냐민지파의 성읍이다(수 18:25). 이곳은 예루살렘 북쪽 약 8km 떨어진 오늘날의 엘-람(er-Ram)인 것으로 확인된 벧엘로 가는 도중에 있다. 바로 이 부근에 라헬의 무덤이 있는 셀사(Zelzah)가 있었다(삼상 10:2).
마태는 라헬이 자기 자녀로 인해 통곡한다는 내용을 마 2:16-18에서 헤롯이 베들레헴의 어린아이들을 살해시킨 사건에 적용하였다. 왜 마태가 여기에서 라헬의 통곡을 베들레헴 어미들의 통곡에 적용하였는가?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수를 바라보며 라헬이 그녀의 무덤 속에서 자기들의 범죄로 인해 포로가 된 자손들, 즉 ‘그 자식’들이 끌려가는 모습(렘 40:1, 2)을 바라보면서 통곡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즉 이 구절은 옛날 이스라엘의 조상 야곱이 가나안에 정착할 당시 라마에서 에브라다(베들레헴)로 가는 도중에 자식이 없어 슬퍼했었던 라헬이 베냐민을 낳다가 산고(産苦)로 인해 죽은 사실(창 35:19,20)을 포로된 것에 비유하여 예레미야가 시적(詩的)으로 표현하였다. 그리고 다시 이것을 마태가 베들레헴 유아 학살 사건에다 연결시킨 것이다.
바벨론 유수 때에는 다윗의 혈통에서 이어지던 왕권이 물러나고 이방의 속박으로 인하여 흘리던 탄식의 ‘눈물’이, 또 다른 이방인(헤롯은 에돔인이었음)의 학정으로 살해된 베들레헴 아이들이 어머니가 흘리는 ‘눈물’로 그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그가 子息이 없어져서 慰勞 받기를 拒絶하는도다”(렘 31:15).
그러나 하나님 백성들에게는 절망이 없다. 이 절망은 곧 그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레미야는 장래에 있는 기쁨과 소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너의 將來에 所望이 있을 것이라 너의 子女가 自己들의 地境으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17). 왜냐하면 다윗의 후손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다스림으로 오랜 포로 생활이 끝나고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언약해 주신 새 언약(26:28, 렘 31:31-34)이 온 이스라엘에 선포될 것이기 때문이다.
독재자의 손에 의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베들레헴 어린이들이 학살되었다 할지라도, 이제 메시아의 탄생으로 인한 구원의 문이 열리고 있다. 절망은 없다. 탄식과 통곡 너머에 소망이 있다. 하나님 백성들이 자기들 잘못으로 겪는 괴로움 가운데서 울부짖는 소리조차 놓치지 않고 들으시고, 위로하시며 결국에는 도우신다. 아무리 코로나 바이러스가 우리를 에워싸고 권력자의 독주가 겁박한다고 해도, 메시아를 통한 소망의 문이 열려 있다. 그리스도가 임마누엘로 우리와 함께하는 새 역사가 밝아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한 해 더 앞당겨지는 새해 벽두에 우리는 구원사의 전말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 마음으로 벅차고 있다. 우리는 세계 역사가 어떻게 끝날 것인지 알고 있다.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Emmanuel.)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 1:23)
“임마누엘”은 신약성경 첫 장인 마 1:23에 한번 나온다. 그러나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말씀으로 복음서를 끝맺고 있다. “내가 世上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말씀은 이제 본서의 마지막에 다시 강조되고 있다. 이 약속은 성도들에 대한 넘치는 위로와 힘이 아닐 수 없다. 진정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지니신 그분이 ‘함께’ 하신다는 것은 모든 지식과 권능과 사랑을 가지고 언제라도 돕고 위로해 주실 것이라는 초월한 약속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딸 엘리사벳 탈 봇(Elizabeth Viera Talbot)이 재림교회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 활동해 온 자기 아버지가 더 이상 현대 의학적 치료가 안 되는 상황으로 나가자, 큰 글씨로 이사야 41:10 말씀을 크게 써가지고 아버지가 바라볼 수 있는 병실 벽에다가 붙였다. 이는 아버지가 생명의 불꽃이 꺼질 때까지 그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확신할 수 있도록 배려한 조치이었다. 이것은 자녀들이 부모에게 드릴 수 있는 훌륭한 효도로 비쳐진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義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그 아버지는 이 성경 말씀에 힘을 얻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믿으면서 눈을 감았다. 이 얼마나 소중한 경험인가!
하나님의 임재는 지상에서 살아가는 순례 길에 격려하는 약속이 된다. 새 해의 소원은 역사의 무서운 격랑 속에서도 하나님의 함께하시는 축복이 기다리고 있다. 앞날이 꼭 좋은 날이 아닐 때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마 28:20에 번역에서 “모든 날 동안(πασας τας ημερας, all the days)이 빠져 있다. 그러나 헬라어 성경에는 이 말이 나온다. 그것도 바로 문장 중앙에 강조되어 나온다. 행복하던지, 병들던지, 건강하던지-이 모든 날에 영원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보증이 1년 내내, 아니 세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된다는 확실한 보증이 담겨 있다. 이 약속은 출애굽이라는 어마어마한 사명을 완수해야 하는 모세에게도 주어졌다(출 3:11-12). 모세의 지도권을 이어 받은 여호수아에게도 주어졌다(수 1:5). 마태는 복음서 첫 장에서 그 약속의 실체로 오신 임마누엘을 소개하였다. 그리고 복음서 결론으로 사망을 정복하고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제어하시는 권능을 가지신 예수께서 12사도들에게 이 약속을 하셨다. 그리고 2021년 (신축년) 새 해를 맞는 우리들에게도 이 약속이 주어졌다. 이 약속은 코로나 역사 속에서 들리는 통곡 소리 너머로부터 오는 위로와 소망을 담은 메시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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