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집으로
슬픔의 집으로
(베다니에서 베다니로)
◉ 주변지역으로
예수께서는 침례 요한이 침례를 베풀었던 요단 동편에 있는 베다니 지역에서 지내시다가 감람산 동쪽 기슭의 촌락 베다니로 향하셨다. 베다니는 여리고로를 지나간다. 그 곳은 예루살렘의 교외지대에 있다. 예수께서는 중앙 무대를 바로 찾지 않으셨다. 성 밖 한 참 지난 곳이야 말로 그의 안식처가 되신다. 반면에 중앙무대에는 사명을 따라 가셨고 예언에 따라 죽으실 곳이다.
나는 어린 시절 성 밖에서 줄곧 살았다. 세월이 지나 지금은 중심부에 들어가지만, 어린 시절에는 성 밖에서도 변두리 한적한 곳이었다. 방문을 열면 한들 평야의 황금물결이 한눈에 들어오고 그 너머에 우뚝 솟아 있는 억불산 위용이 보인다. 창문을 열면 두 물이 하나로 만나는 보(洑)가 있었고 거기로부터는 약 20미터 쯤 낙하하는 물소리가 1년 내내 들린다. 이런 겨울철에는 낙하 물방울들이 엉켜 붙어 만든 갖가지 기묘한 얼음조각품들이 만들어지곤 한다.
나는 변두리 인간인 셈이다. 주변인이다. 나는 주변인간(marginal people)에 속하였다. 그것이 내 소속이고 배지가 되었다. 사람들은 안전한 곳, 북적거리는 곳을 찾는다. 그 곳은 문화의 중심이고, 권력의 중심이다. 반면에 주변 지역은 대개 내 팽개쳐진 곳이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내 어렸을 때 살았던 그 내 팽개쳐진 곳이야 말로 참으로 이상적인 곳이었다. 예수께서 선호하신 곳도 이런 주변지역이었다. 주변지역은 복음의 옥토지대이다.
예루살렘은 중앙이고 성벽으로 에워 쌓인 안전한 곳, 거대한 성전이 있는 곳이다. 사람들은 그곳에 살고 싶어 하고, 가고 싶어 한다. 베다니는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지역이다. 국외자(outsider)와 주변인들이 사는 곳이다. 많은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살고 싶어 한다.
예수께서는 베다니에서 결정적인 표적을 보여 주셨다.
공관복음서에서는 기적이나 이적이란 말이 나오지만, 요한복음은 표적이란 단어를 선호한다. 요한복음은 가나 혼인잔치에서의 표적을 비롯하여 7대 표적(σημειόν signs)들을 보여주고 있다. 가나의 표적과 베다니에서의 죽은 나사로 살린 표적은 요한복음에만 나온다. 나사로를 살린 표적은 이적 중의 최대의 이적에 속한다(DA 524). 그러면서도 이 표적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매우 위태롭게 하는 표적이 된다.
표적은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주는 징조, 표시, 사람들이 그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게 하려는 것이라는 것에 그 초점이 있다. 그리고 표적을 보고 예수 믿고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라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
<참고: 공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기사’ 또는 ‘이적’이라는 말로 놀라운 일, 보통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역사 등을 소개하고 있다. ‘기사’라는 말은 ‘테라스’(Teras)라는 말을 번역한 말로 그 뜻은 깜짝 놀랄만한 일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의 기적을 본 사람들이 기절초풍을 할 정도로 놀라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이적’이라는 말은 ‘뒤나미스’(Dunamis)라는 말을 번역한 것으로 그 뜻은 인간의 고통과 어려움을 해결해 주는 능력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의 기적을 본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인간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놀라운 능력을 보았기 때문이다.>
베다니(Βηθανία)란 말은 가난하고 고통받은 자들의 집, 슬픔의 집, 비참한 자들의 집이란 뜻이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직선거리로 약 3-4km(약 십리길), 감람산의 동쪽 경사면에 자리 잡고 있다. 병자들이 모여 사는 지역이었다. 당시 병자들은 당대에 하나님의 저주로 여겼다. 거기에는 그의 도움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살았다. 그러나 이 곳이야 말로 예수님이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곳이 되었다. 예수께서는 화려한 곳이 아닌 아픔이 있는 곳, 눈물이 있는 곳을 찾아 생명을 불어넣어 다시 일어서게 하였다.
◉ 등장인물들
거기 많은 병자들 중 어떤 병자가 있었다. 그 이름은 나사로이었다. 나사로는 하나님이 도우시는 자,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 살 수 없는 사람이었다. 나사로 가정은 그리스도를 믿는 가난한 가정을 대표한다. 나사로(Λάζαρος)는 엘르아살(El'azer) 단축형이다.
나사로는 날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아간 사람이다. 나사로는 이중적 고통의 희생이 되었다. 먼저 베다니 병자들의 마을에 살았고, 그 다음엔 자신에게 갑자기 몰아닥친 병마에 신음하는 이중적 고통을 당하였다. 마리아는 행실이 안 좋은 여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요한복음은 그런 부정적 이미지가 없는 표현 채택, 향유를 부은 여인으로 나온다. 마르다는 마리아 언니로 집안 살림의 책임을 진 여인으로 비쳐진다.
가장 나사로가 중병으로 인사불성이었다.
요 11:3 “사랑하시는 者(φιλεις)가 病들었나이다.” 예전에도 늘 아팠던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위중한 병으로 도졌다. 가장이 병들어 쓰러지면 온 가정에 먹구름이 낀다. “사랑하시는 者(φιλεις)에 나오는 필레오 (φιλέω) 동사가 중성 목적어와 함께 사용될 경우에 '좋아하다, 중히 여기다'를 의미한다. 이 동사는 인간적 정이 함축된 단어이다. 요 11:3외에 요 11:36에서도 나사로와의 예수님의 사랑의 결속을 언급한다. 여기서 친구에 대한 사랑이 언급되지만, 나사로는 특별히 선택된 사람이며, '그는 나의 친구'가 아닌 '우리의 친구'라고 불린다(요 11:11).
“예수께서는 때때로 나사로의 가정에서 휴식을 얻으셨다. 구주께서는 집이 없으셨기 때문에 친구들과 제자들의 후한 대접에 의존하셨으며, 가끔 피로하고 인간의 우정이 갈급될 때에는 분노한 바리새인들의 의심과 질투에서 벗어나 이 평화스러운 가족에게로 피하기를 즐기셨다. 이 곳에서 그는 진심어린 환영과 순결하고 거룩한 우정을 발견하셨다. 그의 말씀이 이해되고 소중히 간직 될 것을 아셨기 때문에 그는 여기서는 단순하고도 완전히 자유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말씀하실 수 있었다.
우리 구주께서는 조용한 가정과 흥미를 가지고 듣는 사람들을 높이 평가하셨다. 예수께서는 인간의 상냥한 마음, 예의와 애정을 사모하셨다. 하늘에서 주신 교훈을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그는 언제나 큰 축복을 나누어 주시려고 하셨다”(소망, 524).
이렇게 인간적인 정을 나눈 가정의 자매들이 예수께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이 메시지에는 도와달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즉, 누이들이 오라버니의 중병을 알리는 기별에는 부탁이 들어 있지 않다. 이런 청원의 문맥에는 자매들의 고상한 성격이 배어 있다(Bengel). 어쩌면 이는 짧은 기도 같이 들린다. 우리는 길게 기도할 수 있다. 그러나 짧게라도 진실한 믿음으로 우리의 근심거리를 주님에게 고하면, 주님은 그것을 들어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그의 사랑하시는 자들의 기도를 들어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청원이 빠진 이 전갈은 친교를 나누는 사이에 신뢰하면서 사용하는 어법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위중한 나사로에 향한 예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있었다.
◉ 그러면 속히 와 달라는 간청의 메시지가 나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은 성전에서 돌을 든 유대인들의 예수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요단 동편 베다니로 향하신 것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전언에는 당시 시국의 위중함 속으로 예수님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으려는 배려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자기들 오라버니가 질병의 고통 속에 살다가 죽음에 이를 사람이었지만, 그 때문에 예수님에게 위중한 상황 속으로 차마 와 달라고 말 못하는 자매들이었다.
◉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병 11:4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병이다. 영광이란 무엇인가?
요 9장에도 같은 표현이 나온다. 나사로는 연약하였다. 에수께서는 연약한 인간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구하였다.
당대에는 영광이란 흔히 월계관을 뜻하였다. 月桂冠은 월계수로 만든 관으로서 명예, 영광의 상징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경기의 승리자에게 아폴론 신과 연고가 있는 월계수의 가지와 잎으로 둥근 테를 만들어 명예의 관으로 씌워준 데서 비롯되며 종려나무의 잎으로도 대신하여 쓰였다. 고대 올림픽에서는 승자에게 월계관을 씌워줬다. 월계수로 만든 영광이었다.
’영광’의 헬라어 δόξα(doxa)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임재(겔 1:28, 11:23)를 나타내며, 신약에서 하나님의 속성 전체를 의미한다(마 16:27, 행7 :2, 55, 롬1:23, 3:23, 5:2, 딤전 1:11). 하나님의 영광이란 그분의 신비스러운 본질을 인간에게 나타내는 빛이다(출 24:16 참조).
특히 요한복음이 말하는 영광은 어떤 영광인가?
(1)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완수할 때 오는 영광
(2) 돌아가는 영광, 죽는 영광 - 십자가 처형의 영광의 예고
생명의 주께서 사명 완수와 처형을 내포한 암시, 나사로 부활의 이적의 결과는 예수의 체포와 고난과 죽음으로 연결되었다. 12:23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 왔도다. 이는 십자가 고난이다. 예수께 십자가는 지상의 영광이다.
“그리스도를 爲하여 너희에게 恩惠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爲하여 苦難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빌 1;29).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은 은혜의 선물이다. 그런데 그 은혜는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것과 고난을 받는 영광을 내포한다.
◉ 필레오 사랑을 넘어서 아가파오 사랑으로(11:5-7)
“사랑하시더니 (ηγαπα)”는 아가파오(ἀγαπάω)의 미완료 시제로 지속적인 사랑을 함축하고 있다. 필레오의 사랑을 넘어선 거룩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예수께서는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고 사랑하신다. 그런데 정말로 지속적으로 사랑하였다면 병들었다는 메시지 받고 즉시 달려가야 하는데 이틀을 더 머물렀다. 왜?
◉ 예수께서 지체하신 이유
예수께서는 이틀씩이나 지체하시다가 ‘유대로 다시 가자“고 하셨다.
1. 예수께서는 당신의 때를 기다리고 계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앞뒤를 가리지 않고 위험을 초래하여 목숨을 버리는 일을 하지 않으신다. 최후의 결전을 앞두고 조용한 곳에서 준비하고 싶으셨다. 요단강 저편으로 가신 이유가 이것이다. 그러다가 침례 요한에게서 침례 받았던 때 결단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란 선포를 하신 곳으로 가셨다. 그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는 길을 묵고하신 것이다. 인생에 중대한 결단을 내릴 때 지난날 헌신했던 곳을 찾는다. 야곱은 위기를 맞이하여 지난날 헌신했던 벧엘을 찾았다(창 36장).
제자들은 예수께서 지체하신 이유를 알 수 없었다(DA 526). 침례 요한이 참혹하게 죽임을 당하도록 예수께서 방치하신 일을 두고 그들은 의심에 빠졌다. 원수들은 그런 예수님의 태도를 이용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고 파고들었다(DA 527). 제자들은 안식처를 제공하고 환대한 나사로 집에 먹구름이 일고 있는데도 무정하게 보이는 침묵을 지키시는 주님의 태도를 이해 못했다. 주의 시간과 인간제자들의 시간은 다르다. 우리가 다급하게 기도하는데 주께서는 며칠 동안이나 또는 더 오래 침묵으로 보이실 수 있다. 인간의 시간은 곧 성취되기를 바라지만, 하나님의 시간은 인간의 시간과는 다르다. 두 시간 사이에 긴 기간이 필요한 경우도 있고 두 시간 사이가 어긋나는 때가 많다. 그러나 내가 살아가는 시간에 하나님이 나를 이끄시는 시간대가 많다.
2. 또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지시가 없이는 아무 일도 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야 할 결정적 시간이 이르면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실 것이다.
“때(χρόνος)와 時期(καιρός)는 아버지께서 自己의 權限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행 1:7). 크로노스는 '시간의 기간 period of time'을 나타내는 반면, 카이로스는 자주 '결정적인 순간이나 시간(때), 종말론적으로 찬 때'을 가리키며(Baumgarten 187), 따라서 '위기의 시간(때), 적합한 시간(때), 좋은 기회'라는 의미도 지닌다. 카이로스는 결정적인 순간, 사람이 결단해야하는 중대한 상황, 사람이 숙명적으로 이끌려 들어갈 수 있는 상황의 시간 또는 좋은 기회의 순간을 나타낸다. 끝없이 흘러내려가는 물리적 시간인 '크로노스'의 시간 속에서 '카이로스'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역사(役事) 하나 하나의 합(合)이 '구속사'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카이로스의 경우 카이로스의 선택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행하신다. 크로노스의 시간 속에서 예수님은 전적으로‘하나님의 카이로스’에 의해서만 사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삶의 일체는 곧‘구속사’였다.
이미 예수는 자신도 그의 재림의 날과 시를 알지 못하며 오직 하나님만 그 때(카이로스)를 알고 계신다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막 13:32-33).
3. “나사로에게 가는 것을 지체하심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영접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려고 하셨다. 예수께서 지체하심은 나사로를 죽음에서 부활시킴으로 말미암아 완고하고 불신하는 백성들에게 그가 과연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또 다른 증거를 보이시기 위함이었다. 그는 이스라엘 집의 방황하는 가련한 양들의 모든 희망을 좌절 시키기를 원하지 않으셨다.”(DA 528-529).
4. 그리고 예수께서는 죽음의 사지로 가는 일을 망설일 수도 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면해 달라고 간청을 드리신 주님이셨다. 주님께서도 유대 땅에서 몰려올 폭력을 예상하면서 망설이이다가 마침내 ‘다시 가자’고 용기를 내신 주님이셨다.
망설이고 번민하면서 이틀을 지내다가 하나님의 때가 이르러 유대로 가자고 하셨다.
제자들은 나사로의 죽음이 기정사실이고, 얼마 전에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고 했던 그 사지로 다시 들어가야 하느냐고 의아해 하였다(11:8).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재촉하는 사건이다.
◉ 예수의 대답 (11:9-10) - 빛의 시간대와 어둠의 시간대
낮이 12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걸으면 실족하지 않으나 밤에 걸으면 실족한다. “ 나는 내 날의 마지막 남은 부분에 이르렀으나 이 나머지 부분이 있을 동안은 내 생명은 안전하다.”(소망, 527)
1. 태양이 있는 동안 일해야 한다. 그러나 어둠이 덮으면 일하는 것도 외출하는 시간도 끝난다. 일이 끝나면 밤이 온다. 낮에는 본질적인 일을 하는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
2. 낮은 복음의 빛이 지배하는 시간대이다. 밤은 어둠이 지배하는 시간, 악이 지배하는 시간이다. 밤은 그리스도를 등진 마귀가 지배하는 시간이다.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요 13:30).
3. 내면에 빛이 있는 사람은 넘어지지 않는다. 인간은 어둠의 밤 같은 난감한 어두운 일을 당하면 눈앞이 캄캄해 진다. 밖에는 빛이 있지만, 그러나 내 마음 속은 캄캄하다. 나를 괴롭히는 문제가 성큼 다가모면 눈앞이 캄캄해 진다. 그러나 하루쯤 지나면 큰 맥락 속에서 문제를 볼 여유가 생긴다. 우리 속에 빛이 있으면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낮의 빛 속에 사는 사람은 아직 실족할 시간이 아니다. 절망의 시간도 무기력하며 두려워해야 할 시간이 아니다.
유한한 인간이 하나님의 빛의 역사를 제한할 수 없다.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영의 빛은 그의 의무에 대한 분명한 깨달음을 줄 것이며 그의 사업이 마칠 때까지 바른길로 인도하실 것이다.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고로 실족하느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지 않으신 곳 즉 자기 자신이 선택한 길로 행하는 자는 실족하게 될 것이다. 그에게는 낮이 밤으로 변했으므로 어느 곳에 있든지 그는 안전하지 못할 것이다”(DA 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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