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단 건너 베다니로
요단 건너 베다니로
◉ 빛의 축제와 돌팔매
복음서에 단 한 차례 수전절 이야기가 나온다(요 10:22). 유대인들은 오늘날까지 이 수전절을 하누카(Hanukkah)라는 이름으로 지키고 있다. 알렉산더 대왕은 동방정복 과정에서 이스라엘을 헬라(그리스)의 통치 아래 편입시켰다. 그의 사후 시리아 셀루커스왕조는 이 지역을 분활 통치하면서 종교와 문화의 헬라화를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셀루커스왕조의 제8대 왕 안티오커스 4세 에피파네스(175-164 B.C.)가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세워 섬기게 하고 돼지 제물을 드리게 해서 성전을 더럽혔다.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는 안식일 준수를 금지시키고 돼지고기 먹는 것까지 강요했다. 마치 일재시대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듯이 돼지 제물을 강제로 바치게 하는 신성모독을 보고 이에 격분한 모디인(예루살렘 북서쪽 25km 지점 작은 마을) 지역 제사장 마타티아스는 아들들과 함께 셀루커스 왕국에 대한 저항 및 독립전쟁을 시작했다. 마타티아스 아들 마카비가 이 독립 운동을 주도했다. 이 독립 전쟁을 마카비 전쟁이라고 부른다.
드디어 유대인들은 164 BC에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이방신 경배로 더렵혀진 돼지피로 더럽혀진 옛 제단을 새 제단으로 바꾸고 예루살렘성전을 보수, 재성별하여 봉헌하였다. 봉헌을 하누카라고 한다(마카비1서 4:36-61). 개정개역판 성경에서 修殿節(Feast of Dedication)이라는 이름은 성전 정결과 봉헌을 기념한 이름이다. 유대인들은 이 절기를 오늘날 11/12월에 해당되는 키스레브(Kislev) 월 25일 시작하여 8일 동안 지켰다. 수전절 기간이 8일인 이유는 독립전쟁을 하는 동안 광야 동굴에서 야생 동물처럼 지냈기 때문에 지키지 못한 초막절을 겸하여 지켰기 때문이다(마카비 상 4:56-59). 이 때는 12월경으로 비가 오는 겨울철이다. 마카비2서는 이 수전절 하누카를 장막절 축제와 연계시켰다(마카비2서 1:9, 18). 그리하여 하누카 축제 때 초막절 의식을 행하였다. 이 하누카 축제에서는 시편 113-118의 할렐(Hallel)의 감사 찬양을 올렸다. 그리고 하누카 때 중요한 행사 일환으로 빛의 행사를 하였다(마카비1서 4:49-50).
요세푸스는 그의 저서 「유대고대사」(Ant 12.7.7 §319)에서 수전절을 '빛의 축제'라고 명시하였다. 이 빛의 축제 시에는 마카비 시대부터 수전절 8일 동안 매일 하나씩 추가하여 8개의 등잔에 불을 밝히는 의식을 거행했다. 하누카는 아홉 개의 촛대를 밝히는데 성전의 기적을 기념하며 저녁마다 하루에 하나씩 불을 켜며 팔 일째에는 8개를 다 켠다. 아홉 개 중 나머지 한 촛대는 다른 촛대를 켜는데 사용하기 위한 것이다.
오늘날 '빛의 축제'라고도 부르는 하누카 때는 가정이나 관저에서 매일 하나씩 촛불을 켜는 의식을 한다. 첫째 날에는 중앙과 그 옆에 있는 2개의 초에 불을 붙이고, 다음날은 그 초에서 불을 옮겨 점화하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한다. 집집마다 켜놓는 촛불이 하누카의 상징 '하누키야'이다.
예수께서 하누카 때 성전에 가신 것은 정화된 성전의 참 빛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예수께서는 수전절 전에도 자기 자신이 세상의 빛이 되고(요 8:12), 그 후에도 빛을 믿는 자마다 빛의 아들이 된다고 가르치셨다(요 12:36).
예수 시대 유대인들에게는 수전절이 외국의 압제에서 유대인을 해방시킨 것을 경축하는 절기로서의 의미가 높았다. 당시 민중들은 이 절기를 당하여 당대 로마의 압제에서 구출하는 정치적 메시아를 기대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그리하여 이 수전절 기간 유대인들이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신 때 자기들 마음에 언제까지 의혹을 일으키느냐고 하는 힐난을 던졌다(요 10:24). 이 때 유대인들 내심에는 예수님더러 그의 메시아이신 여부를 “밝히 말하라”고 압박하는 동기가 들어 있었다. 이에 예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行하는 일들이 나를 證據하는 것이거늘 26 너희가 내 羊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요 10:25-26). 예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10:30)라고 하여 하나님과 동등하다는 예수님의 주장에 적대자들은 돌멩이를 들었다. 이에 예수께서는 그들의 돌팔매를 피하여 요단 건너 베다니로 가셨다. 이 때는 AD 30 가을-AD 31 겨울철로 유월절 어린양으로 수난당하기 3~4개월 전이었다.
◉ 적대적 시선을 피하여
예수께서 베레아 지역으로 가셨다. 가신 곳은 침례 요한이 침례를 베풀었던 곳이었다.
“다시 요단 江 저便 요한이 처음으로 浸禮 베풀던 곳에 가사 거기 居하시니 41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表蹟도 行하지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42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요 10:40-42).
그런데 요한은 그의 복음서 첫 장에서 침례 요한이 침례를 주던 곳을 베다니라고 못 박았다(요 1:28). 이를 통하여 예루살렘 남동쪽 3km에 있는 베다니 말고도 요단 동편에도 베다니가 하나 더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NKJV은 요단 동편 베다니를 베다바라(Bethabara, ‘건너는 집’)로 표기하고 있다. 오리게네스가(AD 250년경) 당시 요단강 건너편에서 베다니라는 마을을 찾아보았으나 찾을 수 없고 그 대신 베다바라(Bethabara)라고 알려진 마을을 찾았기 때문에 베다니 대신에 베다바라라고 표기하였다. 이것이 기화가 되어 영어 NKJV 사본에는 베다바라로 표기되었으나, 거의 대부분의 사본들은 베다니라는 표기를 지지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왜 요단 건너편 베다니로 가셨는가?
첫째로, 예수께서는 적대적 곳을 피하여 베다니로 가셨다.
누구나 죽이려고 달려드는 사람을 피하게 마련이다. 예수께서는 위험지대를 피하여 안전지대로 가셨다.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도망하는 일이 겨울이나 안식일이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마 24:20)고 안전지대를 찾도록 권고하셨다.
1960년대 초 신학생 시절 부산 동대신동에서 문서 전도할 때 어느 집에 들어가니 큰 개가 달려들었을 때 나는 물러나지 않는 태세를 취했다가 개에게 물린 낭패를 당한 다음부터는 개가 지키는 집들을 피하였다. 인간은 깔보는 차별적 언사나 행동 등을 피하고 싶다. 위험에 빠지거나 주눅 들기 쉬운 지역을 떠나고 싶다. 적대자들이 없는 곳으로 발걸음으로 향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예수께서는 2개월 전에도 유대인들이 장막절 행사시에 돌고 위협을 당하셨다. 예수께서는 이에 적대적인 곳에서 물러서셨다. 이는 우리처럼 그냥 피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자기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영적(靈的)인 삶은 비행기 여행과 닮았다. 기상 환경이 악화될 때, 에어 포켓에 빠져 들어간 지점에서 가던 항로를 수정해야 한다. 난기류를 만날 때 그곳을 벗어나야 한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는 곳을 찾았다.
지상에서 어디가 가장 안전한가? 지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있기를 원하는 곳이다. 그곳은 비행기, 배, 차 안, 또는 도보 등 그 어디에 있다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에 자신이 굴복할 때 있었던 곳이다. 그 원하는 곳을 판별하는 기준 중 하나는 처음 침례 받았을 때 결심했던 곳이다. 예수께서는 공생애 출발 지점으로 향하시었다. 그는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했던 곳,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던 곳을 찾아 가신 것이다. 그는 거기에 가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헌신 결심했던 일을 되살려 내고자 하셨다.
“그리스도와 협력하는 사람들은 안전한 지대(safe ground) 위에 서 있는 사람들이다.”(1기별, 172).
"우리의 유일한 안전책은 우리 모든 것을 그 분에게 굴복할 때이다"(SL 95).
자녀들이 세겜 성에서 자행한 일을 두고 야곱은 가던 항로를 수정코자 벧엘로 가자고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위기를 당하여 고민할 때, 예전에 헌신 결심을 하고 하나님을 만났던 벧엘를 찾아 제단을 쌓으라고 하셨기 때문이다(창 35:1). 특히 환난을 당할 때는 야곱처럼 벧엘을 찾아 올라가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여 모든 가족이 마음에 간직한 이방인들이 하는 짓들을 모두 내려놓고(창 35:4) 참회하면서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려야 한다. 우리는 인생 여정에서 천국여정 계획에서 자주 이탈하기도 한다. 이 때 곧 항로를 수정해야 한다.
셋째로,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때가 아직 아니었기 때문에 베다니로 피하였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 사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되어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구속사에 따라 하나님의 뜻과 시간표에 맞추어 원수들의 돌팔매질을 피하는 궤도수정을 하셨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시간표에 순응하면서 사셨다.
그분의 생애에서 사건마다 정해진 때가 있었다(소망, 451).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마리아는 다른 사람들과 같은 생각을 하면서 요청을 하였다. 이 요청을 받고 예수께서는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요 2:4; 참조 7:6, 8, 30; 8:20)고 응답하셨다. 이 “말씀은 지상 생애 시에 하신 그리스도의 모든 행위는 영세 전부터 수립되어 있었던 계획을 성취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가리킨다. 예수께서 지상에 오시기 전에 그 모든 내용의 완전한 계획이 그 앞에 제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람들 가운데서 행하실 때에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한걸음 한걸음씩 인도함을 받았다. 그는 정한 시기에 행동하시는 것을 주저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그와 같이 순복하심으로 때가 올 때까지 기다리셨다.” (소망, 147).
예수께서는 배반당한 밤이 되어서야 “내 때가 가까웠으니”라고 말씀했다(마 26:18; 요 12:23; 13:1; 17:1). 이는 십자가의 죽음을 알리는 말씀이다. 여기서 ‘때’라는 말은 ‘정해진 때’ 곧 하나님께서 미리 정해놓으신 때를 의미한다(엡 1:9). 그는 결코 서두르시거나 회피하지 않으시고 작정된 때에 작정된 하나님의 일을 하나하나 완벽하게 이루어 나가셨다.예수께서는 자기 봉사의 마지막이 되기까지는 메시야임을 공공연히 주장하지 않았으며(마 21:1, 2), 그러나 메시야라는 주장 때문에 그는 십자가에 달렸다(마 26:63~65; 눅 23:2; 요 19:7; 참조 마 27:63~66).
마지막으로, 예수께서는 메시지를 수용하는 곳을 찾으셨다.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表蹟도 行하지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42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요 10:41-42).
요단 동편 베다니 사람들이 예수를 영접한 것은 의심할 바 없이 요한의 사역에 힘입은 바가 컸다. 그들은 침례 요한이 전파하는 메시지를 수용하였다. 그리고 이제는 베다니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삶과 봉사를 통하여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 지역 사람들은 앞서 봉사한 요한의 기별을 기억하고 있었으며 그가 증거한 메시아의 실체를 보면서 환영하고 믿었다.
예루살렘 성전 사람들은 모든 것을 예루살렘 중심으로 보며 판단한다. 그러나 여기 요단 동편 베다니 사람들은 메시아 신앙을 중심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더라,” 그들은 참 믿음을 가졌다. 중앙이 아닌 요단 근처 궁벽한 시골에 사는 사람들이 더 진실한 신앙적 반응을 보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예수님의 수침 시 그 분을 주로 믿을 수 있는 하늘의 음성과 표적을 이미 보여주셨다. 이 베다니는 첫 제자들을 만났던 곳이다. 그리고 그 첫 제자들의 “와 보라‘는 순수한 전도 구호가 메아리쳤던 곳이다. 베다니야 말로 참 빛의 축제의 장소가 되었다.
(2020. 11.30. 강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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