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성서의 의인들
구약 성서의 의인들
“불가능한 가능성”
세상에 의인은 있는가? 이에 관하여 구약 성서는 부정과 긍 정으로 답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부정하고 (시편 14편 1~3절, 53편 1~3절; 로마서 3장 10~12절 참조), 다른 한편으로는 의인의 사례와 그 특성을 열거하고 있기 때문이다(창세기 6장 9절, 17장 1절; 욥기 1장 1절 참조).
세상의 허다한 군상이 부정의 길을 걷고 있다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은 긍정의 도상에서 삶을 추구하고 있다. 세상은 하나님의 의에 역행하고 있지만 언약 백성에게는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의가 투영되어 왔다. 물론 사회적, 심리적, 도덕적, 윤리적 측면에서 볼 때 의인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구약 성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의인이 되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의인의 길은 불가능한 가능성이라 볼 수 있다. 만일 “불가능한 가능성”에서 불가능성을 따른다면 학식, 신분, 명망, 재산 등을 불문하고 그는 악인에 속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가능성을 추구하는 자는 의인이 된다.
인간 창조의 원자태
창조 기사가 보여 주고 있는 인간의 원자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이다(창세기 1장 27, 28절 참조). 루터는 이 하나님의 형상을 원의(原義)로 보고 타락으로 인하여 이것은 완전히 상실되었다고 보고 있다. 칼빈은 영적인 이 원의 즉, 참지식, 의, 거룩함 외에 자연적 은사도 포함시켜 이해하고 범죄로 인하여 전자는 완전히 상실되었으나, 후자는 심히 왜곡된 형태이긴 하지만 잔존하여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인간이 범죄로 말미암아 의를 상실하였다는 점에는 두 개혁자가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이 하나님의 형상은 원의 관점에서 뿐만 아니라 관계라는 측면에서 고찰할 때 그 의미가 바로 드러난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기 형상으로 지은 이유가 인간을 관계적 존재가 되도록 하는 데 있었다. 이러한 관계적 존재란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형상은 “아담이 130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창세기 5장 3절)란 구절에 비추어 볼 때 바로 드러난다. 스콜라 철학에서는 형상(image)과 모양(likeness)이 각기 다른 의미를 지닌 것처럼 보았으나 여기 이 구절에서는 두 말을 동의어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아담이 자기 형상 곧, 자기 모양의 아들 셋을 두었다. 그리하여 아담과 셋이 부자(父子) 관계인 점을 형상이란 말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창세기 기자가 형상과 모양이란 단어에서 관계 차원을 함축하는 것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은 창세기 1장 26, 27절의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의 의미를 관계에의 존재로 가늠케 한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 타인과의 관계, 천연계와의 관계에의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이다. 타인과의 관계에는 사랑함으로, 천연계와의 관계는 다스림으로 나타난다. 그러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다. 그러나 인간 신체적 부자간의 관계와는 상이한 창조주와 창조된 인격적 존재 사이의 영적 관계다. 피조된 아담은 창조주 아버지께 의존적 관계, 본받는 관계(imitatiodei), 사랑의 관계, 교제의 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이 소망스런 관계는 인간이 타락함으로 인하여 단절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단절을 넘어 재연합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셨다. 이로 인하여 인간이 의인이 되는 길이 열렸다. 아들이 아버지를 따르듯이 인간은 하나님을 따르고 섬기는 존재로 부름을 받았다. 이러한 일은 각 개인뿐만 아니라 “내 아들 내 장자”(출애굽기 4장 22절)로 부름받은 이스라엘 선민에게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소에서의 예배를 통하여 동행하고 완전한 친교(communication)를 맺기 원하고(출애굽기 25장 8절, 29장 46절 참조), 계시된 계명에 완전한 순종을 요청하였다(신명기 27장 9, 10절, 30장 2, 6절 참조).
의로운 인간 사례 1-노아
세상 사람의 생각이 항상 악하고 그 행위가 패덕하여 하나님까지도 한탄하시던 시대에 살았지만, 노아는 흙탕물 속에 핀 한 송이 연꽃과 같았다. 성경은 그의 인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창세기 6장 9절). 이 구절에서 의인(saddiq)의 개념과 완전한 자(tamim)의 개념은 평행법적으로 동의어 관계라고 볼 수 있으며, 마지막 행(行)인 하나님과의 동행이 앞의 의인, 또는 완전한 자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밝혀 주고 있다. 그러니까 의인은 완전한 자이며 완전한 자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라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 나오는 의나 완전은 노아 자신 안에 있는 것이 아닌 하나님과의 친교와 의존 관계에서의 완전이며 의라는 것이다. 노아는 불법의 늪지대에서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총안에서 경건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관계인 신앙을 가졌기에 의인이 되었다. 이것이야말로 천지 격변의 대홍수에서 살아남는 길이었다.
의로운 인간 사례 2-아브라함
야훼께서 자손의 탄생과 자손의 번성을 예고하셨을 때에 아브라함이 야훼를 믿으니 야훼께서 이를 의로 여기셨다(창세기 15장 6절 참조). 믿음의 의가 구약 성서의 첫 책에서 이렇게 분명하게 나와 있다. 야훼의 약속이 사람의 눈에는 아무리 가능성이 없게 보일지라도 야훼를 믿을때 의롭다고 하신다. 이리하여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열국의 아비”인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거주한 지 25년이 되었던 99세에 다음과 같은 명령이 임하였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세기 17장 1절). 전능하신 하나님(‘el sadday)께서 아브라함에게 의와 동의어인 완전을 명하셨다. 완전의 설명적 보충어는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행한다는 것은 마치 하나님 앞에 있는 것처럼 사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친근한 교제와 연합에 대한 시적 언어라고 볼 수 있다.따라서 여기서도 무죄한 완전을 예상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하나님과 이러한 친근 관계에 있던 아브라함에게 언약 중에서도 어머니 언약이라 할 소위 “아브라함 언약”의 약속을 허락하신 것이다.
의로운 인간 사례 3-욥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선을 넘나드는 비애, 질병, 고통, 죽음 등 고난의 풀무불에서 살아남은 욥의 인간상이 “순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여 악에서 떠난 자”라고 묘사되어 있다. 욥이 지닌 순전(tam)의 의미와 정직(yasar)의 뜻은 상호간 대부분 겹쳐진 것으로 동의어적 어휘들이다. 이것은 tam의 사전적 의미가 “똑바른”, “정한”, “결백한”, “온화한”, “경건한”, “명백한”으로 풀이되는 것으로 보아서도 그렇다.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였다. 야훼에 대한 경외(the fear of Yahweh)란 진술이 구약 성경에 자주 나오고 있다. 이 말은 떨리는 존경(trembling reverence)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신앙의 정자세가 바로 이 야훼 경외다. 신명기 10장 12절에서는 이 경외의 의미를 구체화시키고 있다. 즉, 야훼 경외는 야훼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여 섬기는 것으로 보완하고 있다. 경외는 곧 사랑과 순복의 행위로 하는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복하기에 악을 피한다.
의인의 특성
이미 지적한 대로 구약 성서에서 의인이 되는 조건은 인간의 자기 의가 아니다. 한 인격이 풍기는 도덕적 고결성이나 탁월성 때문도 아니다. 구약 성서가 말하는 의인은 먼저 인간의 원자태가 그러하였듯이, 그리고 여러 의인의 사례에서 보듯이 하나님과의 바른 의존 관계와 친근한 교제 관계에서 그를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영원하신 하나님께 완전히 매달리는 사람이다.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들어가고 성소안 야훼의 임재 앞에서 거행된 모형적 희생 재물을 통한 대속적 은총으로 제사장이 의롭다고 선언한 그 사람이 의로운 사람이다(출애굽기 25장 8절, 29장 46절; 레위기 4장 27~35절, 19장 5절; 시편 26편 6~12절, 51편 14~19절, 118편 19~21절 참조). 이들은 성소에서 제시된 하나님의 의지와 결정을 받아들인다. 의인의 개념은 결국 성소의 우산 아래서 형성되는 결정체라고 볼 수 있다(시편 84편 참조).
다음으로 구약 성서상의 의인은 죄에 대하여 깊게 참회하는 사람들이다. 성소 안에서 하나님의 은총에 의존하며 의롭다고 선언을 받은 인격 내부에는 지난날 과오들이나, 그릇된 삶의 방식,더 나아가서는 자기 인간성 안에 도사리고 있는 죄된 본성 그 자체에 대한 예민한 의식과 함께 그에 대한 참회로 차 있는 것이다. 구원의 순서(the ordo salutis)에서 참회는 그 첫번째 단계가 된다. 한 인간을 다른 인간과 수평적으로 비교하면 혹시 선하게 보일 수도 있고 다른 인간에 비하여 보다 더 의롭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수직적 차원에서 하나님 앞에(coram deo) 서 있는 자기의 모습은 늘 자괴할 수 밖에 없는 부끄러움 덩어리다.거룩하신 분 앞에 더 가까이 갈수록 자기의 죄된 본성이 여지없이 노출되어 버린다.
다니엘서의 구조에서 드러나듯 이 신앙의 연륜이 더하고 나이가 90에 육박하였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을 때 그의 아름다움이 변하여 썩은 듯하였다(다니엘서 10장 8절 참조).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인간은 늘 회개하는 자태일 수밖에 없다. 성서가 말하고 있는 신앙 생활이 깊어 간다는 것은 참회가 더 깊어 가고 짙어 간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따라서 참된 회개는 몇 가지 그릇된 행동을 슬퍼하며 그것을 포기하는 것 이상이다. 시편에 나오는 참회시들은 이러한 인간의 죄성, 의롭지 못한 인간 본성을 지닌 채 탄생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으며(예컨대 시편 51편 5절),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죄를 깊이 느끼며 그의 구원하시는 자비와 은혜를 갈급한다(시편 4편 1절, 6편 2절, 130편 3, 4절 참조).
죄가 인간을 주관하지 못할 때 그 인간은 정직(tam)하게 된다(시편 19편 13절 참조).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자기 중심, 죄로 향하는 마음이 부서진 자다(시편 25편 12-14편, 33편 1, 18절 참조). 이 참회의 결과는 죄사함을 받아 하나님과 조화되는 관계로 들어간다. 이 참회와 믿음은 상호 분리할 수 없는 관계로, 참회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라면 믿음은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다. 또한 이스라엘의 의인은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고 그에 순종하는 자다(신명기 27장 9, 10절 참조). 그는 하나님의 계시하신 뜻대로 믿고 있는 자다. 물론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는 것은 의롭게 되기 위하여서가 아니다. 구원받았고,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었기에 주(the Lord) 되시는 분께 감사하며 순종하게 된다(신명기 7장 6-11절, 12장 1절, 14장 2, 21절, 18장 9절, 26장 1, 17절, 30장 11절-20절 참조).
이러한 관점에서 율법시들(시편 1, 19, 119편 참조)을 읽어야 한다. 의인에게는 율법이 압박하는 멍에가 되지 않는다(시편 119편 35, 47, 70절 참조). 율법은 구원받을 자의 내면상을 여지없이 드러내는 거울이 되어서 죄인을 메시야에게 인도할 뿐만 아니라,구원받은 자에게 나침반같은 거룩한 생활의 지표, 행위의 규범이 된다. 이 법은 단순히 도덕적 법전이 아니다. 항상 “여호와의 법”이다. 본래 이 “여호와의 율법(torah)”은 하나님의 가르침 또는 계시의 총체로 법과 복음을 포괄하고 있다.
이 “여호와의 법”은 성소와 분리될 수 없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지성소 안 시은소 아래 법궤 안에 보이지 않게 보존되었다. 대속죄일에 피를 뿌리는 속죄소 아래에 보이지 않게 보존된 법이기에 법과 복음은 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음을 엿보이게 한다. 원래 언약 관계에 있어서 이 법은 인간의 심층 세계에 새겨져 있어, 시인이 말한 대로 완전한 야훼의 법이 영혼을 소성케 하게 되어 있다(시편 19편 7절 참조). 율법은 이런 점에서 “체현된 복음”이며 복음은 “펼쳐진 율법”이다. 율법은 뿌리고 복음은 그 율법이 맺는 향기 나는 꽃동산이며 열매가 된다(실물 교훈, 128 참조).
의인으로의 초청
인간은 의인들(saddiqin) 아니면 악인들(resaim)에 속한다. 이 악인들은 민족적 이스라엘 안에도 있다(시편 14, 41편 참조). 이들 악인들은 하나님을 사랑치도 않고 그의 교훈 토라도, 속죄하는 은총인 성소도, 또 자기 동족도 사랑치 않는다(시편 5편 4~6, 9, 10절 참조). 반면에 의인은 하나님이 열어 놓으신 인간 원자태 회복의 길을 걷는다. 그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고 참회하는 중에 야훼를 사랑하며 그의 언약의 약속을 신뢰하고 대속적 은총이 서린 성소에서 구원을 향유한다. 그러면서 야훼의 계시하신 뜻대로 순종하는 사람이다. 순종의 구체적 표현인 하나님의 법을 자기 마음 판에 새기고 하나님과 친근한 교제를 하며 그와 동행하고 그 동족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 의인의 길, 완전한 인간의 길에서 하나님 백성은 삶의 방향을 올바로 찾아 소망 중에 어제를 살았고 오늘을 살며 내일을 살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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