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0회 내방을 받고 ( ockam.kr ) 에 방문하신 분들에게 환영과 감사의 글을 올립니다. 클릭 수치가 5,000을 나타내는 것을 보면서 이것은 독자 제현(諸賢)의 메아리가 아닌가 하는 느낌도 받습니다. 부족한 글들에 부끄러움을 금치 못하면서도 그래도 글을 잇고 있는 이유는 심오(Depth)한 진리(Truth)의 빛(Light)을 추구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우린 모두 하늘을 향한 순례자들입니다. 우리는 홀로 외로이 걸어가는 나그네가 아니라, 주와 함께 걷는 나그네(낯선자)입니다 (39:12). 지나간 날 믿음의 선구자들은 이 세상에서 외국인과 나그네”(11:13)들이었습니다. 여기 저기 살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흩어진 나그네들이며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벧전 1:1-2)입니다. 순례자들은 이 땅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는 낯 선자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거룩한 소망을 품고 사랑을 나눈 믿음의 동지들입니다. 그들은 고독하게 방황하는 나그네가 아니라 죄악의 소용돌이 속에서 택하심을 받고 거룩한 삶을 지향합니다. 이것이 하늘 순례자들의 정체성입니다. 순례하는 낯선자들은 여기 저기 흩어져 살지만 생명의 씨앗을 파종하며 가꾸며 살아가는 생명의 역사를 창조하여 가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하나님 백성의 역사는 세상을 상징하는 이집트에서 나와 가나안으로 계속하여 행진하고 있는 존재들인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신약성경의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의 유목민들의 삶을 이어 받아 살아가는 존재, 곧 나그네들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단순히 한 초장에서 다른 초장으로 이동이나 하는 떠돌이들이 아닙니다. 하나님 백성들은 거룩한 순례자들입니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오라”(18:4)는 확대 증폭된 둘 째 천사의 기별은 유사 그리스도교에서 나와 늦은비 성령을 받는 하늘 순례자 대열에 합류하라는 마지막 최후적인 큰 외침의 음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오라 나와 함께 걷자. 그러면 내가 그곳으로 너를 데려 가겠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잠시 빌려 머물고 있는 세상은 우리에 대하여 적대적이거나 냉소적입니다. 사람들은 잠시 우리에게 호의를 베풀 수도 있지만, 우리는 그들과는 하나로 융화될 수 없는 벽이 높습니다. 그들은 다른 세계를 지향하는 사람들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묻습니다. 삶을 꼭 그토록 수도승의 고행처럼 살아야 하느냐고? 그렇습니다. 우리는 전혀 다른 세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사람이 고향에서 순사한다는 것은 복이라고 하겠지요. 고향을 벗어나 죽으면 객사라 하고 그것을 복이 없는 증거로 치부하여 왔습니다. 그런대 사도들은 모두 객사하였을 뿐만 아니라 집중적인 박해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이 땅에서 순례자의 운명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순례자 의식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인 사람을 통하여 일하시는 것입니다.

낯선 자의 원조는 예수 그리스도일 것입니다.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라고 하였을 때 예수께서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습니다(8:19-20). 머리 둘 곳도 없으신 예수께서는 나를 좆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역설적인 명령입니다. 그분은 이 땅의 문화와 문명에 대하여 이질적인 존재로 사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은 현세적 문화가 지배하고 있는 세상에서는 정착하기가 불가능합니다.

예수께서는 말구유에서 탄생하시고 고향을 등지고 이 곳 저 곳에 비천한 낯선 자로 방랑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유대 지역에도 정착할 수 없었고, 갈릴리에도 정착할 수 없었습니다. 고향 땅 나사렛 주민들조차도 그를 배척하였습니다. 그 분은 마침내 민중을 선동한 반역자로 또 하나님을 모독한 죄인으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시신은 남의 무덤에 안치되었습니다. 그분은 철저하게 당대 문명도 문화도 등지면서 살았습니다.

인간은 살고자 집을 짓고 문명을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고향도, 나라도, 문화도 향유하실 수 없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기 민족과 문화, 자기 가족과 직업을 모두 버리셔야 했습니다. 제자들도 고기잡이배와 세관을 다 버렸습니다. 이러한 낯선 자 의식과 순례자 의식이 투철하였을 때 초기 그리스도 교회는 선교의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회는 로마와 그리스 문화 그리고 형해화된 유대교와 거리를 두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단절관계로 까지 나갔습니다. 그래서 서슴없이 원형경기장에서 맹수들의 밥이 되는 길을 택하였습니다.

그리스도교가 자기 자신의 정체를 분명히 의식할 때에는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오는 시대의 죄악 문명과 문화로부터 분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가 자기 자신을 오해할 때는 당면한 문화와 쉽게 결합 내지 야합하여 살아 왔습니다. 이 야합이야 말로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바벨론의 특성을 지닌 그리스도교로 전락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스도교는 자기 시대 문화와 하나 되는 것이 불가능하여야 합니다.

순례자로 부름 받은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순종하였습니다. 믿음으로 낯선 땅에서 낯선 자로 살기로 택하였으며, 자기 존재를 현재 자기가 살고 있는 환경에 속한자로 보지 않고, 잠시 지나가는 순례자로 보았습니다. 이는 그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설계하시고 지으신 도성을 향하여 걷도록 운명 지어진 존재로 자신을 보았기 때문 입니다” (11:8-10). 곧 순례자들은 가고 있는 목표가 멀리 있어 보인다 할지라도 그 목표가 초점 시야에서 사라진 적이 없습니다. 이런 순례자 의식을 지닌 자들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계획하신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다. 나는 떠나온 그 지점으로 되돌아 갈 수 없다고 하는 결단을 내리면서 나갑니다. 순례자들은 하나님의 미래에 목숨을 걸고 있습니다. 이 순례자 의식에 투철한 사람은 삶의 여정에서 부딪치는 여러 가치들이나 생활 스타일들이 하늘을 지향하는 것에 배치될 때 그것들을 단호히 거부합니다. 이 세상은 다리에 불과합니다. 누가 다리 위에 집을 짓겠습니까? 다리는 건너라고 존재하는 것일 뿐입니다.

아브라함 순례자의 순례 비문에 나오는 두개의 단어가 특히 우리의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믿음(faith)이고 다른 하나는 순종(obedience)입니다. 믿음을 밖으로 나타내는 것이 순종입니다. 믿음과 순종을 이혼시키는 일은 비성서적일 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일어난 구원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곧 순종으로 자기들의 삶을 이어갑니다. 하나님 백성들은 계속하여 하나님께서 자기를 향하여 바라시는 뜻이 무엇인지 살피며 나아갑니다. 순례자는 미래에 향한 믿음을 결코 버리지 않습니다. 그 미래를 아주 멀리 있는 것으로 보지도 않습니다. 곧 올 그날을 바라면서 살고 있습니다. “내가 속히 오리라”--이는 사랑과 믿음의 말이며, 신뢰하는 자가 신뢰하는 자에게 한 말입니다. 순례자는 고독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고독하지 않습니다. 여행의 동행자 되신 하나님과 함께 걷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이 그 예가 될 것입니다.

화잇 여사의 최초의 계시는 천성을 향하여 "좁고 곧은길을 걸어가고 있는 백성들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 첫 계시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재림의 소망을 위하여 모든 것을 바치다가 큰 실망 중에 빠져 있는 백성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자 주신 계시입니다. 또한 첫 계시는 세속과 불신으로 빠지거나, 자유주의의적 덧칠을 한 너울을 뒤집어쓰거나, 광기 서린 극단적인 도그마에 집착하지 말고 正道를 가라고 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진리에의 정도 이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첫 계시에는 하늘 백성들은 걷는 순례자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순례 길을 걷는다는 것은 진리를 따라 행한다는 것입니다. 재림신도들은 믿는 진리대로 행하는 백성들입니다.

우리가 걸어가는 이 길에서 빛과 진리의 뿌리를 더 깊게 내려 선구자들의 순례 길을 따라 가고자 합니다. 주께서 심오(Depth)한 진리(Truth)의 빛(Light)을 우리 순례 길에 비추어 주시기를 갈망합니다. 그래야 더 확고하고도 활기차게 걸어 갈 수 있기 있기 때문입니다.

 

오 나는 약한 나그네요(wayfaring stranger) / 이 슬픈 세상을 가며

수고도 병도 위험도 없는 / 내가 가는 그 밝은 곳

나는 가네 내 아버지께 / 더 이상 방황 없는 곳

나는 가네 십자가 앞에 / 주님 품에 돌아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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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AHN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