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버전스(융합)은 확실히 오늘 우리 시대의 화두가 되었다. 이 화두는 서울대학교 융합과학기술원장과 '융합과학대학원장인 안철수씨의 단골 메뉴처럼 보인다. 그는 탁월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는 문과 이과 구분이 있을 수 없다고 하면서, 이종 학문 간의 경계선을 허물어 먹을거리를 찾아야 한다고 한다. 그는 말한다.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한 가지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기가 어려워졌다. 그래서 융합이 중요해졌다, 또한 스마트폰은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컨텐츠, 마켓플레이스, 비즈니스 모델 5가지가 합쳐진 융합의 대표적인 아이콘이다. 융합적 사고가 가져올 가치 창조가 높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융합이 모든 문제를 푸는 마스터키가 될 수는 없다. 융합적 사고 바탕에서 진행되는 기괴스러운 유전공학은 인간의 존엄성을 등지고 창조 질서를 교란한다. 융합의 결실인 GMO는 피조 세계의 종류의 경계선을 허물어 버려서 나온 위험 식품이다. 그 융합이 가져올 영향은 눈에 잘 보이지 않고 검증하는데 장기간이 요구되어 안전하다는 확신을 주고 있지 못하다.
도덕의 세계와 신앙의 세계에서 융합은 더 말할 나위가 없이 위험하다. 선과 악의 융합, 곧 혼화(confusion)는 역사의 중심 문제에 속한다. 이 세상에는 순수한 선이나 순수한 악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신비주의 시각이 있다. 현실 세계에서는 악이 섞이지 않은 선은 없으며 선이 섞이지 않는 악은 없다. 막가파 식으로 기승을 부리고 있는 테러리즘은 선인과 악인을 구별하지 않고 무고한 양민들을 희생제물로 삼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창세기 처음 창조 기사에서 혼돈과 공허를 가르면서 빛이 있으라고 한 하나님께서 어둠과 빛을 나누는 작업, 하늘과 땅, 육지와 바다, 동물과 식물 등 경계선을 긋는 작업을 하셨다. 죄가 이 경계선을 허물어버려 선과 악이 뒤섞인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다. 구속은 이 경계선을 복원하고 악을 선으로부터 분리하는 데 있다. 악의 속성은 선에 기생한다는 데 있다. 선과 악이 분리되고 악이 불에 소멸하는 때 구속이 완성된다.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고후 6:15)느냐는 메시지는 오늘도 유효하다.

  군자(君子)는 화이부동(和而不同)하고 소인은 동이불화(同而不和)한다는 말이 있다. 이는 사람을 사귐에 있어서 군자는 화목하되 뇌동(雷同)하지 않고, 소인은 뇌동하되 화목하지 못한다는 내용이다. 소인은 유리하다 싶으면 겉에 붙어 다니는 부화뇌동(附和雷同) 하고 불리하다 싶으면 버리고 떠나는 정세에 따라서 움직이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사람과 화목하는 것이 아니고 이득과 형세의 움직임을 살펴서 화()를 가장한다. 이에 반하여 군자는 진실에 입각하여 사랑으로서 화하기 때문에 도의적으로 부당하다고 여겨지는 경우에는 서슴지 않고 함께 행동하기를 거부한다. 계시적 진리에 토대를 둔 자기 주체성을 견지하면서 화이부동하는 것이야 말로 군자(성령의 지배를 받는 유덕한 신앙인)의 길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의 특징은 이성적 진리나 가치의 객관성과 보편성을 허구적인 것으로 보아 거부한다. 또한 전통적인 진리와 규범이라는 거대체계를 가지고 현실을 포괄적으로 설명하는 것도 거부한다. 더 나아가서는 현실이라는 텍스트로 모든 것을 평가한다. 이는 필연적으로 해체주의(deconstructionism)의 길을 선호케 한다. 해체주의는 하나님의 계시적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해체주의는 삼위일체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인간 존재의 존엄성을 고양하면서 의미의 재발견에 역점을 둔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고차원적인 인본주의요, 내재주의요, 상대주의요, 주관주의에 집착하여 그것을 자기 이론의 융합 거점으로 삼고 있다.

  오늘 융합의 시대는 다원주의가 득세하게 마련이다. 다원적(plural) 혹은 다원성(plurality)이라는 개념은 단지 사회적으로 다양한 가치가 존재하고 있음을 말하는 가치중립적 표현이다. 그러나 다원주의(pluralism)는 다원성 자체를 하나의 원리로 삼아야 한다는 가치 판단을 강변한다. 다원주의 원리에서는 모든 종교에 공통적인 신이 있고 구원이 있으므로 그것을 융합의 기점으로 삼아 배타성이나 유일성을 배제한다. 그것은 공통 기반에 중점을 두어 종교를 '하나의 산을 오르는 여러 갈래 길'이라고 본다. 그 공통분모가 각 종교에서 서로 다르게 드러났지만 결국 신을 중심으로 한다고 볼 때 신중심주의가 되고, 구원이나 해방 기능을 중심으로 보면 구원중심주의라고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여러 종교는 공통의 진리를 찾아 나선 동반자이고, 서로 배울 것이 있는 융합의 상대가 된다. 그러나 유일한 사건이 없으면 보편성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은 그 분의 보편성의 기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융합은 모든 것의 지평을 여는 만능 열쇠가 아니다. 그 목적과 수단이 정당하여야 한다. 치밀한 사려와 검증 과정 없이 물질적 이익과 당장 눈의 문제 해결 차원에서 학문과 학문의 장벽을 헐고 연대, 혼화시키는 불작난은 태초의 엄청난 혼돈으로 그리고 공허로 이어질 수 있다. 특히 도덕과 절대 진리의 세계에서 융합지상주의는 상대주의, 인본주의, 주관주의로 가는 가교가 될 뿐이다. 바벨론 종교의 진상을 알리며 거기서 탈출하여야 살길이 있다는 메시지는 진리와 거짓의 융합을 거절하고 분연히 나서서 그 분리를 외치는 사람들의 몫이다. 

'현대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Karl Barth의 교환설(The Exchange Theory)  (0) 2014.09.03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이슈  (0) 2012.05.03
Posted by KAHN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