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하다가 돌아선 사람

강도 중 한 사람은 십자가 위에 매달려 죽어가는 매우 짧은 시간에 예수를 만났고 낙원의 보증을 받았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23:39-43).

예수님의 십자가의 옆에 달린 두 강도중 하나가 소리 질러 말하기를 여보게, 자네는 이스라엘의 메시야가 아닌가? 자네도 살고 우리도 살려 보게.” 성경은 이 비아냥거림을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보고 믿게 할 지어다” (15:32).

그러나 그 옆에 있는 다른 강도는 같이 저주하던(27:44) 태도를 곧 뉘우쳤다. 그리고 같이 십자가에 달린 강도를 책망하여 말하기를 네가 같은 정죄를 받고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살아온 대로 거두어 들여 이렇게 처벌을 받아 마땅하다 이 사람이 살아오고 행하여 온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는 줄을 모르느냐?”

그리고 나서 예수에게 향하여 당신의 나라가 올 때 나를 생각하여 주시기 원하나이다”(23:44)고 하였다. 전설에는 아기예수가 애굽으로 피난 갈 때 강도 일당을 만났던 바 그 일당의 수령의 아들이 아기예수를 보고 감동을 받아 놓아주면서 때가되면 나를 잊지 말아 달라고 했다고 한다. 그 젊은 강도가 갈보리에서 예수를 다시 만났다는 것이다. 한 평생 강도 짓한 사람이지만 그에게도 소망이 있었다.

절망의 낭떠러지에서 기회를 잡은 사람

우리 하나님은 매우 물썽한 하나님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저주하던 자가 회개하고 돌아설 때 곧 받아 주셨기 때문이다. 그는 행악자로 예수를 조롱하고 욕하였던 사람이었다. 그는 욕하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유대인의 가정에서 자랐을 것으로 보인다. 어릴 때 회당 교육도 받았을 것이리라. 그러나 회당 예배와 교육에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다른 길을 걸었다. 그래서 다른 곳에서 빗나간 취미를 찾았다. 바늘 도둑질하다가 소도둑이 되었고 마침내는 강도가 되었다. 그러다 붙잡혀 빌라도 법정에서 처형되는 순간이었다. 바로 이 순간에 예수를 보았다. 십자가상에서 자기를 못 박은 원수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그는 십자가에 달린 매우 짧은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지만 난생 처음으로 자기가 범하여 온 죄를 해결하여 줄 수 있는 분을 만났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그는 용서의 길을 찾은 것이다. 그는 십자가에서 희망을 찾았다. 그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보았다. 이는 그의 안에서 속사기는 성령의 음성을 따른 결과였다.

 짧은 한 순간의 결단이 구원을 좌우한다. 그가 한 때 심취하였던 억압자를 폭력으로 내 모는 것으로 해방이 온다는 열심 당원 혁명 논리는 속임수에 불과하였으며 허무한 일들이었다. 그들과 한 통속이 되었던 그의 지나간 삶이 그리스도 앞에서 산산 조각났다. 이러한 그의 삶은 천 길 낭떠러지 벼랑 끝에 매달린 모습이라고나 할 수 있다. 자기가 거둔 죄책으로 십자가를 지고 다 끝나가는 듯 하는 마지막 절박한 순간에 그는 시선을 예수께 향하고 호소하였다. 이 호소에는 구원의 메아리가 오늘 너에게 이르노니...”란 말로 되돌아왔다. 그는 매우 짧은 아슬아슬한 순간에 영원한 구원의 약속을 받은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심성과 삶의 궤적에 쌓인 것들이 하늘에의 적합 성 여부는 별도의 문제이다.

속죄함을 입은 자들 중에 더러는 생애의 마지막 몇 시간 동안에 그리스도를 붙잡은 자들이 있을 것이다. 이들은 하늘에서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 이는 그들이 죽을 때에 구원의 계획을 완전히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Letter 23, 1905).

천국에는 이런 분들을 위한 특별 교육 및 실천 프로그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선택하고 결단하는 삶

삶은 선택이다. 행복도, 구원도 선택이다. 그리고 결단이다. 회개한 강도는 최후의 순간을 잘 포착하였다. 영원한 운명은 각자의 선택에 따라 좌우된다. 뒤를 되돌아 보면 실망이고 앞을 바라보면 절망이고 옆의 동료 강도를 보면 낙망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희망을 보고 그 희망을 선택한 것이다.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런 선택의 의지는 성령께서 회개한 강도의 마음에 굴복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최후의 순간을 잘 포착하였다. 지나가버린 생활이 아무리 희망 없는 것처럼 보일 그때야 말로 그 절망의 언덕 너머에 구원의 희망이 영롱하게 보이는 것이다. 자기가 뿌리고 거둔 죄책으로 파멸된 인간에게도 소망이 있음을 잊지 말라. 때가 이미 지나갔다고 포기하지 말라.

낙원의 정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23:43).

장로교에서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낙원(παράδεισος, paradeisos, paradise)”의 정체를 두고 주의 재림 때까지 경건한 영혼들이 사후 거하는 처소, 의인의 사후 그의 영혼이 천국으로 가기 전 동안 중간 징검다리 같은 대기 장소로 보고 있다.

페르시아시대에 그리고 헬라인들이 이 파라데이소스를 종교적 의미로 사용하였던 것을 신구약 중간기 문서들은(외경 및 위경 포함) 의로운 사람이 죽으면 가서 쉬는 장소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이는 당대 유대인들이 외래 이방 종교적 개념을 수용한 결과였다.

낙원과 관련하여 제기 되는 신학적 문제는 먼저 육체와 분리된 영혼이 가는 곳이란 점이다. 헬라 철학의 심대한 영향을 받은 영혼 개념이 의인 이른바 영혼의 사후 거처인 낙원의 개념과 결합되어 버린 것이다.

이런 시각은 성서가 말하는 인간 구성에 관한 일원론적 통전적 이해에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성서가 인간의 죽음을 두고 수면으로 이해하는 것과 불일치한다. 인간의 정체성이란 이분적으로 육체와 영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육체와 영혼의 통일체로 삶의 전 과정을 통하여 형성된 인격적 전존재를 가리킨다(참조 김균진, 기독교 조직신학, 제 5권 294-211). 육체 없는 영혼을 독립된 실체로 보는 시각은 지나간 플라톤 철학의 유물에 불과한 것이다. 죽은 의인들은 마지막 부활이 있을 때 까지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것이다(5:39; 11:11; 7:60; 고전 15:20; 살전 4:13).

파라데이소스는 울타리로 들러쌓인 곳,’ ‘수목이 우거진 공원이나 정원을 뜻한다. 이런 시각에서70인역은 에덴동산을 에덴낙원으로 번역하였다(2:8; 28:13; 31:8). 실제로 70인역27회씩이나 나오는 파라데이소스는 영어 “garden”(히브리어 간[gan])으로 번역된 단어이다 (3:1; 51:3; 2:3 ). 인간의 범죄로 잃어버린 이 에덴낙원은 장차 새 땅이 내려 올 때에 회복될 것이다.

신약에서 파라데이소스는 눅 23:43; 고후 12:4; 2:7에만 나온다.

1. 고후 12:2~4낙원” - 여기 낙원은 분명히 하늘과 동의어이다. 바울이 지상 낙원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그가 하늘이끌려 간것을, “낙원으로 이끌려간 것과 동일시한다는 사실에서 더욱 명백해진다.

2. 2:7의 낙원 여기 하나님의 낙원에는 생명나무가 있고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을 수 있는 곳이다. 육체 없는 영혼이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을 수 있늘 것인가?

3. 21:1~3, 10; 22:1~5에서는 생명나무가 새 땅, 새 예루살렘, 생명강 그리고 하나님의 보좌와 관련되어 있다.

요컨대, 신약성경에서 파라데이소스의 용례가 어떠하든지 간에 모두가 그 단어를 하늘과 동의어로 삼고 있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참조 H.A. Kent, Jr., “Paradise,” Evangelical Dictionary of Theology, 826). 따라서 의인의 영혼이 사후 대기하는 중간지대로서 낙원 개념 풀이는 성서적일 수 없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회개한 강도에게 낙원에서 자기와 함께 있을 장소를 보증하신 것은 그리스도께서 백성들을 자기에게로 영접할 때에 거하게 될 아버지 집많은 처소들을 가리킨 것이다(참조 요 14:1~3 주석). 봉사 기간 내내 예수는 자기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환희 가운데 재림할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고 분명히 말했다(참조 마 16:27 주석). 그때까지는 예수가 땅의 구원받은 자들을 위하여 창세로부터”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고 초청하지 않을 것이다(참조 마 25:31, 34 주석; 22:21). 바울은 예수 안에서 잠든 자들이 그리스도가 재림할 때 무덤에서 일어나(참조 고전 15:20~23) 불멸의 몸을 받게 될 것(참조 51~55)이라고 말했다. 부활한 의인들과 살아 있던 의인들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여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6, 17). 따라서 그 강도는 예수 재림 때 의인들의 부활을 따라 낙원에서 그와 함께있을 것이다.

낙원=의인의 사후 거처설은 오늘(semeron)”이라는 단어의 위치에 집착하여 강도가 죽은 당일 낙원에 갔다는 이해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오늘네게라는 단어 사이에 들어 있는 구두점은 후대에 번역자들이 넣은 것임을 주목해야 한다. “오늘이라는 단어 앞에 구두점을 찍음으로써, 번역자들은 죽은 자가 사망 시에 낙원에 직행한다는 비성경적인 해석의 단초를 제공하였을 뿐이다. 헬라어 원문에는 구두점이나 단어 구분도 없이 기록되어 있다. “오늘이라는 부사 세메론(semeron) 다음에 구두점을 찍어 동사 내가 말하다”(레고, lego) 와 연계시키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세메론 앞에 구두점을 찍어 동사 네가 있으리라(ese)”에 연계시키면 잘못 풀이하는 길을 터놓은 것이다. “오늘이라는 단어 앞에 구두점을 찍으므로 그리스도와 여러 신약 기록자들이 다른 곳에서 분명히 언급한 진술들과 모순되게 만들어 혼란을 조성하였다. 따라서 성경 자체의 사상에 의하면, 그 구두점을 오늘이라는 단어 앞이 아니라 뒤에 찍어야 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강도에게 실제로 한 말씀은 진실로 오늘 내가 네게 말하노니,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였다. 강도가 그 순간에 생각하고 있던 큰 의문점은 언제 자기가 낙원에 이를 것인가가 아니라, 자기가 결국 낙원에 갈 수 있을지 여부였다. 강도가 아무리 무가치하고, 사형 선고를 받아 죽어가고 있는 예수가 그런 약속을 하는 것이 가당치 않게 보일 수 있지만, 예수의 간단한 그 진술은 강도가 분명히 그곳에 있게 될 것이라는 보증을 주었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 달렸기 때문에 강도가 이런 소망을 가질 수 있었다. 요컨대 십자가상에서 강도에게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은 장차 재림의 날 있을 영광의 형체로(3:21) 변화될 구원의 보증이었다. 실낙원을 그리워하는 인간에게 복락원을 약속하신 것이다.

Posted by KAHN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