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위의 죄, 부작위의 죄
조선왕조가 500년을 이을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강직한 신하가 잇어 나라가 혼란스럽고, 임금의 정치가 도에 어긋날 때 감히 임금의 얼굴을 붉게 만들고, 목숨 걸고 임금의 과실을 지적하는 직신과 강직한 선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침묵하거나 못 본체하는 부작위를 반역이라던가 아니면 불충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들은 간을 한 다음 닥칠 해악은 돌아보지 않는다.
I. 작위범과 부작위범
일을 잘못하여 벌을 받는 경우도 있고, 마땅히 해야 될 일을 하지 않으므로 벌을 받는 경우도 있다. 형법 총론에서는 전자를 작위범과 후자를 부작위범으로 나누고 있다. 작위범과 부작위범을 상식적으로 풀어보자. 작위범은 법적으로 악한 행위를 하므로 죄인이 되는 것이고, 부작위범은 아무 행위도 하지 않으므로 인하여 죄인이 되는 것이다.
작위(作爲)란 일정한 행위를 한다는 것이다. 실정법에서 통상적으로 해서는 안 되는 특정 행위를 하면 그 행위가 형벌 대상이 된다. 대부분의 범죄가 작위범에 해당된다. 대부분의 범죄는 작위 형태로 실현된다. 이는 적극적인 신체동작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사람을 살해한 자에게는 사형, 무기징역 또는 5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이에 대하여 부작위(不作爲)라는 것은 작위와는 반대로 일정한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다. 부작위범에는 크게 2가지, 남의 집에 들어갔다가 주인으로부터 나가라는 말을 들었는데 안 나가고 버티고 있는 퇴거불응 행위(진정부작위범)가 있고, 보호자와 보증인이 되는 엄마가 아이에게 수유를 하지 않아 아이가 죽게 된 경우 같은 (부진정부작위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어린애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보증이나 보호의 의무가 없는 행인이 쉽게 아이를 구할 수도 있었는데 불구하고 그냥 지나가므로 그 아이가 죽은 경우는 도덕적으로는 비난 대상이 되겠지만 처벌할 수는 없다. 보증인지위란 일정한 결과가 발생하는 것을 막아야 할 법상 또는 계약상 의무가 있는 사람이다. 보증인지위는 가족 관계, 또는 계약상의 관계(수영강사 등), 법령에 의한 관계(경찰, 의사 등)로 형성된다. 법은 최소한도의 도덕이라는 법언(法諺)이 있다. 실정법에서 작위범과 부작위범을 처벌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은 최소한도에 그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작위범와 부작위범의 범주와 폭은 훨씬 넓다.
Ⅱ. 작위와 부작위를 포괄하는 죄에 관한 정의
1. 죄는 불법이다(요일 3:4). 외적 행위가 죄가 되는 불법적 작위를 죄로 보고 있지만, 외적 작위만 보고서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작위적 외적 행위가 그 뿌리이며 지반인 내적 심령의 상태까지 연계시키고 있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불법이라는 작위범에 관한 이해가 된다.
“우리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죄에 대한 유일한 정의(定義)는 “죄는 불법이라”(요일 3:4)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선을 행하는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2)라고 선언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저희 심령의 상태에 관하여 속고 있다. 저들은 육신에 속한 마음이 만물보다도 거짓되며 몹시 악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저들은 저희 자신의 의로 스스로 감싸고 있으며 저들 자신의 인간적인 품성의 표준에 도달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그러나 저들이 거룩한 표준에 이르지 못하고 저들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요구들을 감당하지 못하게 될 때에 저들의 절망이 얼마나 처절할 것인가!”(1SM 320).
“죄=불법”이라는 도식으로 죄의 정의를 내리고 있지만 불법을 외적인 행위에만 국한시키고 있지 않다. 위 인용문을 이끄는 대전제에 다음 말씀이 선행되어 있음에 유의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계명들은 그 내용이 포괄적(包括的)이며 그 뜻이 심원하다. 몇 자 안되는 간단한 표현으로 인간의 전체적인 의무를 밝혀주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 죄는 불신이다(롬 14:23; 요 16:9). 죄는 관계를 깨트리는 것이다. 인간의 믿지 않는 부작위가 죄가 된다는 것이다.
3. 죄는 불의이다(요일 5:17). “모든 불의가 죄”(요일 5:17)가 된다. 여기에는 불의라는 작위뿐만 아니라, 내적인 불의한 상태, 곧 내적으로 talfud 안에서의 작위인 비틀어진 상태가 죄가 되는 것이다. 불의 역시 작위와 부작위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4. 죄는 불선이다(약 4:17).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약 4:17). 적극적으로 선한 일을 하지 않는 결핍이 죄가 된다는 것이다. 즉, 선한 행위라는 작위의 결핍이 죄가 된다.
Ⅲ. 모세의 죄와 아론의 죄
출애굽의 영도자 모세와 대제사장 아론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위대한 일을 행하였지만, 두 지도자 모두 다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비극적 아이러니를 보여주고 있다.
A. 모세의 죄(민 20:1-12)
광야 방황 40년째 에돔 접경지역에서 미리암이 아론보다는 약 4개월 전에, 모세보다는 11개월 전에 약 132세로 죽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데스에 진을 쳤다. 여기서 지나간 39년 동안 공급되던 물이 끊겼다. 이 사건은 가나안에 들어 갈 새 세대의 믿음을 시험 치는 문제 같은 것이었다. 백성들은 누나를 잃고 상심해 하는 모세에게 대들었다. 그들은 지난 날 10 스파이들이 죽임을 당한 사건이나 고라 일당의 심판적 징벌 책임을 모세에게 뒤집어씌우고, 광야에서의 죽음보다 애굽에서의 종살이 생활이 차라리 좋았다고 하고, 각종 식료품 부족과 물 공급 단절 대한 비판을 매몰차게 하였다. 모세와 아론은 여호와 앞에 엎드렸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에게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게 하라고 하셨다. 모세는 명하는 대신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씩이나 쳐서 물이 솟아나왔다.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아론의 불신과 여호와의 거룩성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책망하셨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다루실 때 보인 인내심을 잊고 마치 그 불평들이 자신을 향한 것이라는 듯 말하면서 자제력을 상실하여 반석을 두 번씩이나 쳤던 것이다. 이 결과 그들은 총회를 약속의 땅으로 인도할 특권을 상실하였다.
반석은 하나님의 칭호가 된다(삼하 22:2; 시 42:4). 반석은 하나님의 요지부동한 신실성과 영원성, 자기 백성에 대한 보호와 돌보심을 나타낸다(시 71:3; 78:16; 사 32:2). 출애굽기 17:1-7에서 물을 낸 반석이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고전 10:4), 민수기 20:11의 반석도 그리스도를 투영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심각하게 여기신 이유는 그리스도의 단회적 죽으심이라는 출애굽기 17장에서의 예언적 투영이 민수기 20장에 와서는 반석을 두 번 침으로서 십자가상의 죽음을 반복적인 것으로 볼 수 있게 되어 대속사건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는데 있다. 어거스틴이 반석을 두 번 친 것을 십자가 나무 두 개를 예표한다고 보는 해석을 지지하는 주경가들이 더러 있어 미사가 십자가 죽음의 재현인 것처럼 보는 시각이 있지만, 이는 예언적 투영을 적확하게 풀이하고 있다고 볼 수 없다. 엘렌 화잇은 모세가 두 번씩이나 반석을 친 사건을 두고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모세는 그의 경솔한 행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가르치시고자 하신 교훈의 효력을 상실시켰다. 그리스도를 상징한 반석은 그분께서 한 번 희생이 되셔야 한 것처럼 한 번 침을 당하였다. 두번째는 마치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축복을 간구하기만 하면 되는 것처럼 반석에게 명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두번째도 반석을 침으로 이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표상의 의미가 상실되고 말았다”(PP 418).
B. 아론의 침묵죄
모세가 작위적 행위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대속적 희생을 예표하는 일을 혼란스럽게 한 결과 약속의 땅에 못 들어 간 것은 이해가 되지만,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여 아론에게까지 그 반석을 친 사건의 책임을 물어 가나안에 못 들어간다고 하였는가?
“아론은 그 열조에게로 돌아가고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준 땅에는 들어가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므리바 물에서 내 말을 거역한 연고니라”(민 20:24).
하나님은 아론을 모세와 공범으로 보셨다. 모세가 작위적인 불순종적인 행위를 하고 있을 때 아론은 이를 보고만 있었다. 아론은 말려야 하는 의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리지 않았다. 그는 침묵을 함으로 공동정범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 지도자 팀으로 두 사람을 세운 것은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쓰러지려고 하면 붙잡아 일으키도록, 또한 서로의 약점을 보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도록 함에 그 의도가 있었다. 아론은 모세의 대변자이면서 선지자 역할을 맡았다(출 4:16, 30; 7:1,2). 이런 의무가 있는 대제사장으로서의 의무가 있는 아론은 마땅히 해야 될 사역에 충실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만 반석에 명하여 물을 내라고 하지 않으시고 아론까지 포함시켜서 반석에게 물을 내라는 명을 내리셨다(민 20:8). “반석에게 명하여(Speak to the rock)”라는 구에서 “명하여”는 2인칭 복수 피엘 완료형으로 강조어법이다. 그 뜻은 “너희가 반복적으로 명하여”의 의미를 담고 있다. 따라서 아론의 침묵은 모세의 빗나간 작위를 방치, 옹호하는 결과를 초래케 한 것이다. 그래서 민수기 20:24에서 하나님은 아론에게 “내 말을 거역하였다”고 하신 것이다. 예컨대, 합회나 연합회 행정 팀에 속하여 합회장이나 연합회장이 하는 일을 방관만 하고 있다면 그 책임을 다른 동참 임원들에게까지 묻겠다는 것으로 유추 해석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은 아론의 침묵 죄에 동참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지치고 낙담한 모세와 아론은 일반 백성들의 감정의 흐름을 막으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만일 그들이 스스로 하나님께 대한 확고 부동한 신앙을 나타내었더라면 백성들이 이 시험을 견딜 수 있게 할 그 같은 빛으로 백성들 앞에 그 문제를 제시할 수 있었을 것이다. 행정 장관으로서 그들에게 부여된 권위를 신속하고도 과단성 있게 행사했더라면 그들은 그 불평을 진압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께 그들을 위하여 그 일을 해 주시도록 요청하기 전에 힘닿는 데까지 상황을 호전시키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는 것이 그들의 의무였다. 가데스에서의 불평을 신속히 저지했더라면 연달아 일어날 얼마나 많은 죄악이 예방되었을까! ”(PP 418).
C. 엘리의 부작위
엘리는 자기 자식이 탈선하여 원성이 자자한데 말 몇 마디로 책망하고 끝났다(삼상 2:22-23). 이는 빗나간 부작위 대응책에 불과하다. 탈선을 알고도 과감하게 수술하지 않고 지나치는 일은 책임의식이 결여된 것이다. 엘리는 하나님 보다 자식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였던가? 엘리는 자식을 차마 사형까지는 못시켰어도 최소한도 자식의 제사장 직을 박탈하였어야 했다. 엘리는 백성들의 빗나간 지도자들에 대한 드높은 원성을 묵살하였다. 이렇게 하여 봐주기식 지도력으로 이하여 하늘도 어둡게 보였고, 땅도 캄캄하게 보였다. 사람들은 성막 종교를 등지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신성한 회막은 풋주간과 유곽으로 변질되어버렸다. 자기들의 부도덕하고 불경건한 행동을 제지 받지 않은 엘리의 아들들은 계속 주어지는 하늘의 음성을 무시하였다. 심판의 경고조차도 무시하였다(삼상 3:13). 이것은 곧 이어서 하나님의 영광이 따나 버린 이가봇을 초래하는 원인이 된 것이다(삼상 4:17-21).
모세의 작위와 아론의 부작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과 대속적 진리를 크게 손상시키는 일로 그리고 자기들 스스로를 약속의 땅으로 가는 길을 막아버리고 자기들을 파멸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엘리의 부작위적 행태는 자기 가문의 멸망으로, 법궤가 탈취당하는 일로, 수많은 병사들의 죽음으로, 급기야는 민족이 무너지는 일로 이어져 이가봇을 초래하였다.
(참고 자료: Younis Masih, “Sin of Action and Sin of Silence,” Ministry, June 2012.)
'인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죽음과 그 이후 (0) | 2012.07.18 |
---|---|
인간이란 무엇인가? (0) | 2012.07.11 |
죄악의 기원 (0) | 2012.06.27 |
<나꼼수> 시대를 살면서 (0) | 2012.03.24 |
性 공동체의 길 (0) | 2012.01.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