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 : 2012. 7. 11. 05:32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오랜 역사를 통해 수없이 제기되어 왔다. 그리고 각 학문의 영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고자 탐구를 하여 왔다. 특히 동양철학보다 서양철학은 고대 그리스의 소크라테스로부터 오늘의 실존철학에 이르기까지 이 질문을 거듭거듭 던지고 그 답을 추구하여 왔다.

플라톤은 인간을 영혼(soul)이나 정신(mind)와 육체라는 이원론적 시각에서 보았다 그 중에도 영혼은 육체와는 별개로 존재라는 비물질적인 실체다. 그는 영혼의 비물질론과 불멸론이라는 형상의 세계와 인간이 지각할 수 있는 물질의 세계로 대비시켰다. 그는 인간에게 있어 육체가 아닌 영혼이 형상들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고, 도덕의 관심 근거가 된다고 주장했다.

독일의 역사철학, 영국의 정치경제학 및 프랑스에서의 사회주의에 토대를 둔 마르크스주의는 인간을 사회적 관계의 총체로 규정하고 그 중에서도 경제적 시각을 해심으로 인간을 보았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잠재의식 안에 있는 성적 동기와 자기보존 충동이 인간됨을 결정한다고 보아 자유의지를 부인하였다. 실존이 본질에 선행한다고 본 사르트르는 도덕률 같은 객관적 가치의 존재를 거부하고 오로지 자유만 주장할 뿐이다. 행동의 조건화를 역설한 스키너는 관찰 불가능한 영역을 거부하고 인간의 행동이란 과거와 현재의 외적 환경이 지닌 어떤 종류의 과학적 법칙에 따라 인간은 행동한다는 행동주의 심리를 제창하였다. 반면에 인간을 진화의 산물로 본 로렌츠는 동물들의 행도에서처럼 인간의 내적 공격성을 중심으로 인간을 규명하고 있다. 플라톤, 마르크스, 스키너는 사회 구조의 변혁을 통하여 인간을 변혁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프로이트와 로렌츠는 인간 안에 있는 어떤 것이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 서으로 보았다. 이렇게 다양한 이론들이 등장하여 왔지만 인간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무엇이다라고 확실히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선택의 자유를 지닌 인간

사회의 변혁을 주장하는 마르크스주의, 원시적 충동을 강조한 프로이트, 과거와 현재의 환경에 따라 인간 행동이 조건화된다는 스키너 등은 선택의 자유라는 개념을 거부하여 왔다.

선택의 자유는 인간 안에 창조주가 입력하여 둔 매우 위험한 능력이다. 인간은 그것을 마음대로 활용하여 심지어는 자기를 파멸 시킬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다른 사람들을 파멸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 비추어 인간 창조는 위험한 창조일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선택의 자유를 지닌 인간을 창조하셨다. 위대한 사랑 일수록 더 큰 도전을 요청한다. 창조주의 사랑의 도전을 두고 인간들은 이런 말, 저런 말들을 하고 있다.

인간은 육체라는 물질적 존재나 동물에 불과한 존재만으로 볼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인간은 비록 물질적 존재이며 동물이라는 범주에 들어가긴 하지만, 더 나아가 선택의 자유를 지닌 정신적 존재, 영적 존재의 통일체이다. 정신과 영은 한편 학문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면서 과학적 연구방법만으로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영역이다.

특히 인간은 양심의 소리에 따라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라는 시공을 초월하는 도덕률 아래에 있는 존재이다. 어떻게 이런 양심과 도덕률이 있는지 과학적으로 다 설명할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 수많은 학자들이 인간을 오늘날까지 여러 학문의 영역에서 각각 연구해 왔지만 아직도 인간이 무엇이냐에 대한 정답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피조된 인격체

인간은 피조된 인격체이다. 사랑의 하나님은 물질 세상의 시공을 초월하시는 초월적 존재이면서도 인간 안에 내재하시는 분이다(57:15). 그는 궁극적인 분으로 모든 존재의 지반이 되시는 창조주이시다. 성경에 나오는 창조 기사를 신화쯤으로 보아 진화론을 용인하거나 신봉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이는 비성경적일 뿐만 아니라 반성경적이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세계도 존재할 수 없다. 이 세계와 인간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에 따라 지음을 받았다. () 존재 논증인 원인-결과적 시각이라는 우주론적 논증이나 목적과 계획이라는 논증의 시각에 한계가 있는 것은 인간의 존재가 그만큼 한계가 있기 때문일 뿐이다.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을 다 알 수 없다. 인간은 계시된 범주 내에서 하나님을 깨달을 수 있다. 그 분은 관찰이나 추리의 대상이 아닌 경배와 신뢰의 대상이시다. 창조주 하나님은 재창조주로 이어진다. 하나님은 어떤 큰 죄인도 끝까지 단념하시지 않고 그를 회개시키고 당신의 자녀로 구하시기 위해 최선을 다하신다. 이 사랑에 접할 때 인간은 아무리 죄 많은 사람일지라도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모든 인간은 어떤 처지에 놓여있든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 하나님은 그를 어떤 처지에 있든지 버리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흉악범일지라도 쓸모 있는 인간으로 바구시는 분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처지와 상황 아래 있는 인간이라 할지라도 참된 삶의 의미를 부여하여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하실 수 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이 죄로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시는 은혜를 주시고 있다.

물질은 생명을 위해, 생명은 인간을 위해, 인간은 하나님을 위해 창조되었다. 이 명제 위에서 인간을 보아야 한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저 찬란한 태양과 아름다운 달, 총총히 빛나는 별들, 이 모든 것들을 우리 인간을 위해서 지으셨다. 인간은 그리스도의 은총에 힘입어 하나님 앞에 의로운 존재로 입양되어 그 분과 하나 되기 위해서 지음을 받았다. 물질적이고 정신적, 영적 존재인 인간은 단지 생물학적인 목적을 위해서나 또는 죽어서 썩음으로 흙으로 환원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 향해 가기 위해서, 영원하고 무한하시며 참 생명이요 진선미성(眞善美聖) 자체이신 하나님을 닮아가기 위해서 존재한다. 한 인간의 본질은 지금 존재하는 대로의 모습이 아니라, 그가 장차 마지막 때에 이룰 모습에 있다.

인간됨의 길 - 믿음

결국 사람이 누구냐의 문제는 사실상 형이상학적이면서 동시에 종교적 의미의 신앙, 즉 믿음으로만 해결할 수 있다. 플라톤이 인간의 목적을 이론적이고 도덕인 진리에 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것과 인간을 도덕성을 지닌 삶의 관점에서만 보았지만 이는 선후가 뒤바뀌어진 주장이다. 그러한 도덕적 삶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선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품격과 인격의 지반이 되며 이 지반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이루어 갈 수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주시는 선물인 믿음의 결단을 하는 존재이다. 인간의 인간됨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 하나님과의 신뢰 관계를 전제로 하여야 한다. 하나님을 배제하거나 그 분에 향한 신뢰를 배척하면 우리는 끝내 인간을 알 수 없다. 인간이 무엇인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원하시는 것은 인간이 당신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되어 영원히 사는 존재, 곧 당신의 영광을 함께 누리게 하는데 있다. 인간은 이렇게 영원한 생명에로의 부르심을 받고 있다. 인간의 존엄성의 가장 숭고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람은 畏敬(외경)不安, 하나님과 악마, 철저한 경탄(감동)과 철저한 절망 중에서 어느 한 쪽을 선택하여야 한다. 외경 없는 삶은 불안한 삶으로 전락하고,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삶은 악마의 힘에 포로가 되는 삶이 된다. 경탄 없는 삶은 절망의 늪지대 위에 똬리를 틀고 있는 삶으로 전락한다.

영원으로 향한 인간의 본성을 부인하면 인간은 현세만 살다가 죽고 썩고 마는 가련한 존재로 전락하기 마련이다. 그렇게 죄악의 현세에 파묻혀 살다가 결국은 어느 날 죽어 썩어지고 말 인간이라면 인간의 가치가 무엇이며 그 존엄성이 어디에 있겠는가? 또 인간의 삶이 현세뿐이라면 반드시 양심에 따라 도덕적으로 살아야 할 이유가 있겠는가? 인간의 영원한 생명이 부인되면 존엄성이 부인될 수밖에 없고, 동시에 헌법이 말하는 불가침의 기본인권도 함께 근거를 잃고 만다. 더나가서 신체의 자유, 사회적 경제적 자유, 신앙의 자유를 비롯한 정신적 자유, 정치적 자유 등 기본 인권도 그 근거를 잃게 된다. 이렇게 인간 존엄성은 인생의 의미를 비롯해 현실생활과 우리의 민주주의 정치제도에까지 필요불가결의 지반으로 결착되어 있다. 사실상 민주주의의 기초인 인간의 자유 평등 박애는 실로 하나님의 사랑에 의한 존엄성 부여에서부터 나온 것이다.

죄란 무(nothing)의 원리로 인간의 이 고매한 존재로 향하는 길을 부정하고 말살하는 힘이다. 죄란 파멸시키는 세력인데 먼저 자기를 파멸시킨다. 오늘 세상은 선과 악이 혼합되어 존재한다. 거룩한 것과 부정한 것이 얽혀 있다. 악은 선에 기생하는 속성을 지녔다. 기생하다 않고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죄와 악이다. 거룩함이란 선과 악의 분리 작업이다.

인간은 자기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절대적이요 무한하신 사랑을 간직하고 살아가야 한다. 이 사랑이야 말로 인간이 어떤 처지에 있든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존재로 있게 한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이웃에게로 확장되어 가야 사랑의 생명력이 유지될 뿐만 아니라 견고하게 되어 간다. 특히 가난하고 약한 이웃, 병든 이웃, 버림받은 이웃을 위한 사랑의 봉사는 하늘과 땅의 모든 사물들이 이루고 있는 생명의 대 법칙에 참여하는 것이 된다. 하나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거룩한 우주의 대 법칙인 도덕률을 구현하는 길이 된다. 인간이 무엇이냐는 이 사랑의 길에서 대답을 얻을 수 있다. 선과 악의 대 결전장에서 마침내 이 하나님의 사랑이 승리할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가장 작은 원자(原子)로부터 가장 큰 세계에 이르기까지, 만물은 생물계와 무생물계를 막론하고 조금도 흠이 없는 아름다움과 완전한 기쁨으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선포한다.”(GC 6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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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AHN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