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꼼수> 시대를 살면서
요즘은 꼼수의 시대로 비쳐진다. 꼼수란 쩨쩨한 수단이나 방법을 뜻하는 말이다. <나꼼수>가 판을 치고 있는 세상이다. 그런 것을 행하는 사람이 인기 상종가를 치고 국회의원 후보자로 공천을 받을 정도가 되었다. ‘목사 아들 돼지’라는 000 씨가 <나는 꼼수다> 로 유명세를 탔다. 은퇴하신 아버지 목사님께서 아들 000 씨에게 전화하여 방송 중 욕설 사용을 염려하며 조심하라는 당부의 말을 했다고 한다. 아들은 아버지와의 대화 내용을 공개하면서 글로 옮기기도 민망한 욕설을 무슨 재미있는 것처럼 우스갯소리로 만들어 버린다. “저희 아버님이 지난주 방송을 들으시고 걱정을 하셨습니다. ‘아니~ 장래에 니가 하나님을 위해서 일을 해야 되는데… 너무 욕이 지나치다. 씨발이 뭐냐?”고 한 말이 바로 그렇다. 연로하신 아버지께서 사랑으로 부탁한 당부는 여지없이 짓밟히고 말았다. 성경에 나오는 말이나 예수님 말씀도 곧 우스갯소리로 만들어 버린다. 예수께서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마 7:6)고 하였지만, 벌써 진주를 똥칠하여 버려 예수님도 어쩔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상대방을 적으로 보고 온갖 꼼수를 동원하여 그를 넘어뜨리고, 드디어 권력을 얻고자하는 오늘의 한국 정치판이 꼼수정치판으로 비쳐진다는 것은 비극이다.
꼼수 쟁이 야곱
평범한 인간 야곱은 태어날 때부터 형의 발꿈치를 붙잡는 꼼수를 부린다. 형에게 단 몇 분 차이로 장자권을 놓쳐 그것을 얻고자 거짓말과 꼼수로 쟁취한 극성인간 야곱은 복 받기 위하여 온갖 복 받지 못할 짓을 다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상대방의 허기진 틈을 노려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권을 매입하는 꼼수를 부리기도 하였다. 드디어는 어머니와 공모, 형으로 가장하여 아버지의 축복을 따내는 꼼수로 이어진다. 장자권이 종주권, 즉 권력으로 이어진 때의 이야기다.
야곱은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가나안으로 향하는 믿음의 출발은 야곱에 이르러 역전되는 양상으로 나타난다. 할아버지의 비전과 꿈의 길을 지워가듯이 거슬려 되돌아가는 유랑의 길을 걸으면서 벧엘에서 돌 베게로 잠을 자다가 꿈에 하늘과 땅이 연결된 사닥다리와 거기에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본다. 그는 여기서 신앙적 결심과 재 헌신을 하지만 야곱이 외삼촌 집에서 자기 재산 증식하는 방식을 보면 유전학적 지식을 활용하였는지 모르지만, 아직도 그의 생활철학에는 꼼수가 굼틀거리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외심촌의 꼼수에 몇 번씩이나 당한다.
그러한 그가 외삼촌을 떠나 가나안땅으로 돌아 올 때 하나님은 마하나임 두 군대로 그를 호위한다. 그러나 야곱은 “심히 두려워하였고 답답”한 상황에 직면한다(창32:7). 오래전의 잔꾀(꼼수) 부린 것이 아직도 해결안 되어 형의 보복 앞에서 그의 마음이 좁아졌다. 야곱의 마음을 짓누른 것은 뿌리 깊은 형에 대한 적대의식 때문이었다. 종주권을 얻고자 형을 경쟁자 내지 적대자로 보고 그와 더불어 살기다툼을 하면서 뿌린 씨를 이제는 거두어야 하는 단계에 직면한 것이다. 죄악이란 자기를 파멸시키는 힘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에게 다가온 절박한 상황은 가정이 없어서도 아니다. 재산 때문도 아니었다. 그는 형에게 550마리 이상의 가축선물을 드릴만큼 부자였다. 외로움 때문도 아니었다. 14년간 일한 대가인 사랑하는 라헬이 옆에 있어도 소용없었다. 이런 것들이 야곱의 근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야곱이 고민한 실제적 원인은 자기가 뿌린 꼼수였다.
그는 자기의 자유와 행복을 위하여 남의 자유와 행복을 희생시킨 사람이었다. 남의 자유를 희생하고 자기의 유익을 얻고자 한 결과는 아버지와 형, 그리고 외삼촌과의 불화를 초래한 것이다. 야곱은 꼼수를 통해서라도 행복을 얻고자 하였다. 그렇게 하여 얻은 것이 20여년씩이나 시간이 지나면 없어질 줄 알았다. 그러나 지나간 날의 죄악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잊혀가지 않는다. 수 천리 멀리 도망가면 해결될 줄 알았지만 그것도 소용이 없었다. 화목 없는 번영에는 영혼의 참된 자유가 없게 마련이다.
절박한 상황에서 그는 사자들을 형에게 보내며 푸짐한 선물을 보냈다. 선물도 한꺼번에 보내지 안고 떼를 나누어 시차를 두고 형에게 전달하게 하였고 우호적 메시지도 보내지만 이런 것들은 모두 인간적 방책 즉 꼼수로 비쳐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하는 느낌도 든다. 그러기에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 교활한 꼼수쟁이 동생이 아버지유산을 탐낼 것이라고 생각한 야곱은 4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동생을 공격하러 출발했다. 이것은 인간의 힘이나 방법이 얼마나 무력한 지를 잘 보여 준 하나의 사례가 된다.
야곱이 당면한 심각한 상황은 자기의 꼼수 죄 때문이었다. 죄인에게 물질적인 부요는 있을 수 있으나 행복과 평안은 없다. “우리의 길고도 깊은 범죄의 목록이 무한하신 하나님 앞에 놓여있다. 그 기록은 완전하여 우리의 죄는 하나도 빠진 것이 없다” “회개하지 않은 죄가 나타날 때에 저들은 압도당할 것이다. 절망으로 저희 신앙은 끊어질 것이다”(PP 203).
꼼수로 장자의 명분을 얻고자 한 것이 자기 생명을 옥죄는 동아줄이 되어 되돌아 온 부매랑이 된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하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정하신 시간과 방백으로 성취시키실 것을 자신의 노력으로 이루고자 한 어리석음이 야곱의 지나간 날을 지배하는 삶의 원리가 되었던 것이다.
위기 해결의 길
야곱은 얍복강 여울에서 홀로남아 철야기도를 하였다. 하나님께 매달리는 길 외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야수와 강도들이 나타나는 한적한 곳에서 자신의 죄를 깊이 뉘우치며 울며 간구하였다(호 12:4). 갑자기 거센 손이 야곱을 붙잡았다. 천사와 더불어 싸우면서 야곱은 자기의 죄책감에 압도당하였다. 울며 지나간 날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전에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하신 명과 “은혜 베풀리라”고 한 약속을 주장하였다. 창세기 32-33장에 은혜라는 말이 9번씩이나 나온다. 하나님께 4회, 에서 형에게 5회 사용하고 있다. 온 밤을 새우면서 얻은 문제해결의 관건을 하나님의 은혜에 걸었다. 자기생명과 존재를 하나님의 은혜의 손안에 있다고 여기는 사람에게는 고민이 해결 길이 열린다. 야곱은 온 밤의 기도를 통하여 이 은혜개념을 터득한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야 말로 문제 해결의 길이다. 어린 아이가 잘못하여도 부모의 사랑에는 변함없다. 야곱이 잘못하였다 하여도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사랑하고 은혜로 감싸고자 하였다. 이 절대적 은총의 개념을 깨닫고 손을 내밀 때 지나간 삶에서 뿌린 죄악에서 구출 받는다. 마지막 야곱의 호나란 같은 절박한 상황에서도 신자는 오직 속죄의 공로에 의지하는 길 이외에 다른 대책이 없다.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30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창 32:28-30)
은혜 받은 사람은 지나간 날 허물의 탈을 벗고 새 이름을 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Peniel)”을 보는 것이다.
자기를 종으로 비하, 형을 주로 격상 - 仁乃天
그는 “나를 축복하여 주지 않으면 놓지 않겠나이다.고 하나님께 자비를 간청하였다. 자신의 죄됨, 자신의 무가치성을 고백하고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과 회개하는 마음으로, 상한 심령으로 그 천사에게 매달렸다. 죄용서의 보증을 받는 것이 그의 전 목표가 되었다. 드디어 천사와 싸워 이겼다(호12:4). 인간이 천사를 아니 하나님을 이길수 있는가? 그는 울며 천사에게 간구하였다. 야곱이 하나님을 이긴 것은 겸비와 회개와 굴복의 자세였다. 지금까지 살아온 길은 자기 힘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고자 꼼수를 사용하였다. 그것이 시련과 고민, 고통의 원인이 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방법과 하나님의 시간을 무시하였다. 언약의 천사가 손가락 하나로 야곱의 넓적다리에 얹어 놓으니 야곱은 절뚝발이가 되었다. 죄 용서의 확증, 보증을 얻고자 하는 야곱에게 육체적 고통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자신을 낮추어 겸비해졌다. 이젠 자기를 종으로 형을 주로 말하리만큼 낮아졌다. 그리고 철저히 회개하고 하나님께 굴복하였다. 그는 맏아들이라는 종주권 욕심을 포기하였다. 형 에서를 주(主)라고 9번씩이나 사용한다. 자기를 종이라고 4회 이상 사용한다. 형이 분노하는 이유를 알았다. 형을 형답게 본 것이다. 그의 장점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형을 하나님처럼 여겼다. 형의 얼굴을 하나님 얼굴로 본 때가 자기 본연의 자세로 회복 되는 때가 되었다.
“야곱이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형님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청컨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창 33:10).
하나님의 브니엘은 인간의 브니엘로 나타난다. 은혜를 받았으면 자기를 낮추라. 상대방을 하나님처럼 높이라. 다른 사람의 얼굴을 하나님 얼굴로 보는 눈이 영안이다.
이것이 용서를 받고, 번민, 회한의 삶이 변하여 새 피조물이 되는 길이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뿌린 꼼수로 인한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고 사태를 역전시키셨다. 살기등등한 에서의 꿈에 하나님께서는 지나간 날의 야곱의 방황, 고민, 고생을 그린 비디오테이프를 가동시키시고 야곱에게 손 하나도 데지 말도록 엄히 경고하였다.
야곱은 신체적으로 장애인이 되었지만, 그 약함이 축복의 길이 되었다.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절뚝거리며 걸어오는 동생의 모습에 형이 칼을 던지고 얼싸 안는 장면은 참된 화해의 모습이다. 이것이야말로 은혜의 광장에 선 인간의 참 모습이다. 이스라엘은 이제 다른 사람을 경쟁자로 보는 대신에 하나님처럼 보는 영안을 갖게 되었다. 영안은 인내천(仁乃天), 곧 사람을 곧 하나님처럼 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