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실존의 단계들
덴마크의 유신론적 실존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 (1813~1855년)는 레기네 올센을 만나자 매력에 이끌렸다. 키르케고르는 레기네에게 정식으로 청혼했다. 그러나 키르케고르는 곧 결혼에 대해서 환멸을 느끼고 우울해 졌다. 그래서 청혼한 지 1년이 가기도 전에 파혼했다. 그것은 태생적으로 우울하고 사색적인 그가 순결하고 명랑한 레기네를 도저히 행복하게 해 줄 자신이 없어서라고 했다.
그의 젊은 날의 이런 삶의 자세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에 어느 정도 반영되어 있다. 그는 3단계의 실존의 형태를 상정한다. 미적 실존은 감성적 향락을 즐기는 쾌락주의를 추구하는 실존이다. 이는 대상을 찾아 나선 연애 단계의 실존이다. 쾌락에 몰두하여 1003명의 여성과 놀아난 스페인의 전설적인 탕아 돈 후안은 미적실존의 예가 된다. 미적 실존은 자기반성도, 목표도 없는 삶으로 인해 절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나비가 이곳에서 저곳으로 늘 새롱운 쾌락을 찾아 욕망의 노예가되어 날아다니듯이 결코 한 군데에 머물러 있지는 않는 결과 삶의 공허 속에서 절망에 빠진다.
실존의 두 번째 단계는 엄숙한 책임과 의무의 윤리의식으로 살아가는 윤리적 실존이다. 이 윤리적 실존은 마치 한 대상과 결혼하여 사는 실존으로 비유될 수 있다. 그러나 윤리적 실존을 추구하는 인간은 자기 혼자의 힘만으로는 진실로 자기 자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곧 깨닫는다. 어느 누구도 완벽하게 윤리적일 수도, 양심적일 수도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은 성실하면 할수록, 양심에 따라 살려고 하면 할수록 자기 양심이 자기에게 지운 과제의 엄청난 요구 앞에 스스로의 무력감을 통감하게 된다.
여기서 인간 실존은 종교적 실존 단계로 비약하여야 한다. 이 비약은 무력하고 유한한 인간이 믿음의 도약을 통하여 초월한 무한한 존재를 지향하는 하나님 앞에 서는 실존이 되는 것이다. 이는 헤겔의 양적 변증법을 배격하고 모순과 고뇌와 절망의 입장을 몸으로써 뚫고 나가려는 역설적인 질적 변증법 단계가 된다. 그에게 있어서 인간 실존의 주체성이야 말로 진리가 된다. 인간은 단독자, 즉 외톨이다. 키에르케고르가 외톨이 실존의 주체성을 통하여 절대자 앞에 나선다. 그러나 이 종교적 실존 사상에서 객관적, 보편적 가치체계나 합리주의를 백안시하므로 상대주의에 함몰되며 병적인 개인주의의 고립 속에 안주하는 문제점이 있다. 결국 키르케고르는 혼자 외롭게 살다가 죽어야 하는 獨居 철학적인 틀을 마련했다고나 할까. 독거는 자기 수련을 하는 사람들이 예부터 선호하는 일종의 避靜이긴 하지만...
성(sex), 결혼
키르케고르는 금욕주의적이다. 그의 만년 일기에는 결혼이 그리스도인 영성생활에 모순되는 것으로 단죄 받고 있다. 결혼이 인간 본성을 저하시킨다는 것이다. 그는 여자는 남자의 품위를 떨어뜨려 영혼을 파멸시킨다고 보았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은 독신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영성생활의 장애물이 되는 독신주의는 성욕의 노예생활을 극복하는 길이 된다는 것이다.
창세기 첫 장에는 성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명하신다. 이런 성의 창조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It was very good)”(창 1:31)는 범주에 들어간다. ‘좋았더라’는 선하다는 개념이 내포되어 있다. 즉, 성은 선한 것이다. 진실한 남 녀 사이의 순결한 사랑에 입각하여 언약적인 성 공동체 결성까지도 영성생활의 장애물이 되는 것으로 본다는 것은 병적인 시각일 뿐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수도원으로 들어간다면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누가 할 것인인가? 성의 상품화, 전시화는 죄악의 결실들이다. 타락 전 성의 본래의 좌표로 복귀하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과제가 된다.
아가페와 에로스
스웨덴 신학자 니그렌(Anders Nygren)이 저술한 Agape and Eros는 기독교윤리학 분야에서 고전으로 알려져 있다. 아가페를 천상적 정신적 사랑과 같은 고상한 사랑으로 이해하는 반면에, 에로스를 지상적 육체적 사랑이라는 다소 본능적이고 동물적인 사랑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 못 짚은 시각이다. 두 사랑 개념은 출발점이 다른 전혀 별개의 것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에로스는 그 잘못 짚은 개념이 고착되어 있는 형국이다.
에로스는 위를 향한 영혼의 동경, 아름다움, 덕, 선에 대한 동경과 그 소유를 지향한다. 즉, 에로스는 대등한 평행관계에 있으면서 동시에 사랑할만한 가치가 있어서 사랑하는 동기적 사랑, 헬라 철학적 인간중심적 사랑개념이다. 고차원적인 에로스는 가장 높은 가치를 통하여 자신을 완성시키고 이데아의 경지에 도달함에 있다.
이에 비하여 아가페는 자기를 희생하는 사랑, 아래를 향한 사랑,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즉, 아가페는 루터의 이신칭의와 십자가라는 관점을 통하여 잘 드러난다. 사랑할만한 가치가 없어도 베푸는 무동기적 사랑이다. 인간은 이 사랑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이웃에게 전하는 사랑이다.
결혼한 두 남녀의 性 공동체에서 에로스와 아가페는 어떤 관계를 지녔을까? 성 공동체는 부부는 이른바 에로스이지만 그것을 경건하게 향유하면서 아가페를 지향한다. 아가페적 사랑의 대상이 끝없이 넓지만, 성 공동체에서는 한 사람에게 국한 된다. 그리고 인간의 리비도가 섬기는 헌신과 자아 희생이라는 아가페적 인격의 제어 아래 있을 때, 즉, 끊임없이 아가페 사랑의 침례를 받을 때 성 공동체는 리비도의 노예에서 해방되고 영원한 완성을 지향한다. 여기에서 두 남녀 사이에 진정한 합일이 이루어진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엡 5:25). 여기 이 본문에 나오는 ‘사랑’은 에로스가 아닌 아가페의 동사형 아가파오이다. 성을 준다는 것은 자기를 준다는 것이고 상대방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한다는 아가페적 사랑의 구현이 되어야 한다.
얼마 전 좌초 伊유람선 탔던 老부부이야기는 이런 아가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겁먹은 아내에게 용기주려고 맨몸으로 먼저 뛰어 들면서 "걱정마, 난 괜찮을거야" 마지막 목소리를 남긴채 시신이 되어 돌아온 순애보 남편!!! 아내는 "남편은 내 목숨을 구하고 차가운 바닷속으로 사라졌어요."라고 울먹인다. 에로스를 넘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 놓으신 아가페 사랑에 동참하는 부부는 창세기 1장 맨 끝에 남겨진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It was very good)”는 메시지의 연속선상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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