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Simon Sebag Montefiore) 는 이 책에서 다윗부터 6일 전쟁까지 3000년 예루살렘 역사를 치밀하게 고증하면서 문학적 작품답게 이야기들을 전개시켜 가고 있다.

1. <Jerusalem: The Biography>

서명(書名) 자체가 이상하다. 사람의 전기는 있어도 도시 전기(傳記)가 있다는 것이 얼른 이해가 안 되기 때문이다. 차라리 <예루살렘 역사>라고 했다면 이런 의아심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읽어가면서 작가가 한 도시의 전기라고 하는 표현을 통하여 독자의 관심을 유발시키고자 하는 문학적 취향을 풍기고 있는 점을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예루살렘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친 사람의 이야기를 장()별로 넣어두는 필법이 도시 역사인데도 전기로 표기한 이유가 아닐까 집어 본다.

2. 전쟁의 소용돌이 중심에 있어 온 예루살렘

평화의 도시라는 예루살렘은 전쟁으로 얼룩져 있다. 이른바 평화의 도시는 수많은 나라들이 탐내 긴 세월 피로 얼룩진 땅이다. 예루살렘으로 향한 순례자들을 위한 시편에서는 그 예루살렘의 평화를 갈구하였다.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122:6).

저자는 지나간 역사의 궤적을 통하여 명멸하여 온 수많은 왕들과 통치자들, 침입자들과 그 살육의 역사를 파노라마처럼 그려 내 가고 있어서 시인이 갈구한 평화와는 거리가 먼, 아니 평화 그 자체가 불가능한 것처럼 독자들에게 어필하고 있다.

저자는 예루살렘을 사모하는 이스라엘의 마음을 제켜놓고 거기 역사에 엉켜있는 여러 민족들의 발자국들을 추적하고 있다. 포로된 땅 바벨론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자랑이요 영광인 시온을 잊어버리기보다는 자기들이 오른 손이 익힌 재주를 잊어버리는 것이 더 쉬울 것이라고 하면서 울적함을 토로하였다.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 재주를 잊을지로다”(137:5).

3. 예루살렘 성 안에 있었던 인구 수

저자는 <요세푸스 전쟁기>를 그대로 옮겨 AD 70년 전후의 예루살렘 패망의 역사를 다루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 로마황제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는 6만 명의 로마군에 공격 명령을 내렸다. 예루살렘 성벽 너머는 50만 명의 유대인이 굶주림과 죽음의 공포 속에 연명하는 생지옥이었다. 병사들은 금화를 삼키고 탈출하는 예루살렘인들의 배를 갈라 내장을 뒤졌다. 성벽을 무너뜨린 로마군은 성전(聖殿)에 불을 질렀고 유대인들의 목을 베었다. 성전 수장고에 숨어 있던 여자와 어린이 6000명은 산 채로 불태워졌다. 로마에 반기를 들었던 유대 군벌들은 자중지란 속에 무너졌다. 현장을 목격한 역사가 요세푸스는 "태초부터 그런 잔인함을 용납한 도시는 어디에도 없으며, 한 세대를 그처럼 사악하게 양육한 시대도 없었다"고 했다.

저자는 50만 명이 성 안에서 생지옥을 살았다고 한다. 저자가 <요세푸스 전쟁기>를 주된 자료로 인용하면서 타키투스의 60만 명 인구수도 다른 곳에서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타키투스의 주장이 맞는지 요세푸스의 100만 이상의 수가 말이 맞는지 판단을 유보하고 있다.

요세푸스는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포위하면서 시작되어 예루살렘이 파멸될 때까지의 모든 전투를 통해 포로로 잡힌 전체 인원은 97,000명에 이르렀으며, 사망자의 숫자는 1,100,000명에 이르렀다고 기술하였다. 예루살렘에 있던 인구가 50만 명이라면, 타키투스가 말한 대로 60만 명이라면 전 포위기간 중 죽은 자들의 수가 남아 있는 인구의 절반을 넘는 셈이다. 저자는 이런 배경에 관한 자세한 설명을 하고, 전체 사망자 수에 있어서 그 산출 근거가 무엇인지 설명을 하고 있지 않다.

요세푸스는 이를 다음과 같이 좀 더 부연설명하고 있다.

그들 가운데 대부분은 유대인이었지만, 예루살렘 시민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유대의 각 지역에서 무교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모인 자들로 갑자기 로마군과의 전쟁에 휘말린 유대인들이었다. 따라서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게 되어 처음에는 전염병이 생기게 되었고, 후에는 기근까지 겹쳐 더 급속도로 떼죽음을 당하였다. 예루살렘에 아주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다는 사실은 케스티우스(Cestius)의 주도 하에 이루어진 통계 자료에 의해 분명해진다.

SDABD 는 로마와 항쟁 기간 중 엄청난 인구가 예루살렘에 유입되었다고 말하고 있다(“Jerusalem” 항목 참고). 또한 AD 70 5-7월 사이에 예루살렘 도성에서 죽은 자들이 10만 명 이상이 된다고 기술하고 있다. 엘렌 화잇은 당시 예루살렘에 체류하고 있는 자들 수를 그 도성은 유월절에 포위를 당했는데 수백만의 유대인들이 성 안에 모여 있었다”(GC 31)고 한다. 그런데 저자는 아무도 당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모른다고 하고 있다.

4. 예루살렘 역사를 보는 눈

저자는 다윗 왕이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한 이유를 어느 지파에도 속하지 않고 약속의 땅 중앙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실상 예루살렘은 해발 800m 고지에 자리 잡고 있는 전략적 요새지이다.

저자는 예루살렘을 두고 중동의 조종석이며 이스라엘과 팔레스틴 사이와 서구적 세속주의와 이슬람 근본주의 사이의 전쟁터로 보고 있다. 또한 그는 예루살렘은 하나의 불꼿이며 어느 누구도 그 불꽃을 가를 수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저자는 다윗을 두고 단순히 용감한 소년이 아니라 고대의 '스나이퍼'였다. 이집트와 아시리아 벽화를 통해 확인된 바, 고대 제국 군대에서 돌팔매 부대는 궁수들 옆에 편제된 특수 저격 부대였다는 것이다. 이는 성경에 기록된 다윗 역사와는 맞지 않다.

저자는 철저하게 세속인의 눈으로 예루살렘 역사를 조명하고 있다. 저자는 그토록 많은 사료를 인용하면서도, 초자연적 하나님의 지도와 개입, 이스라엘의 기도와 참회, 그리고 패망을 불러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배도와 부도덕한 죄악상 등을 보는 눈을 갖지 못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예루살렘 전기는 반쪽짜리 전기일 수밖에 없다. 그 전기도 거룩한 전기가 아니다. 구속의 역사와는 거리가 먼 작품에 불과하다. 작가는 예언자들을 미래를 예언하는 자들이 아닌 신의 뜻을 해석하는 현재의 분석가들로 단정하고 있다. <예루살렘 전기>는 문학가 눈에 비친 예루살렘에 관련된 자료들의 집대성이라고 보는 것이 무방할 것이다.

저자가 <예루살렘 전기>에서 문학적 필치를 통하여 예루살렘이 축복과 저주가 동시에 존재하는 땅이라고 하면서 그 원인을 찾아내지 못한 것은 필시 역사철학의 빈곤이나 부재 때문이 아닌가 싶다.

저자는 생존이 첨예하게 대립된 각 종교의 시각을 두둔하여 예루살렘을 묘사하고 있다. 나라를 잃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파괴된 예루살렘을 애통해하며 경외하고, 그리스도인들은 성전의 파멸을 예수의 예언이 진실이라는 증거로 삼고 있다. 반명에 이슬람 예언자 무함마드는 신이 유대인들로부터 거둬들인 축복을 이슬람에 내린 증표로 여기고 있다. 마침내 예루살렘은 "하나의 신()이 사는 집이자, 두 민족의 수도이며, 세 종교의 사원이고, 하늘과 땅에서 두 번 존재하는 유일한 도시"가 된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도 AD 3343일 금요일로 보고 있다. 이는 성전 보수령, 성읍중건령, 자치권 회복 포함이 포함된 예루살렘 중건령을 3차 아닥사스다 제7458/457BC으로 보지 않는 결과이다.

사도 바울과 예루사렘 야고보를 대결구도도 보고 있다. 

5. “한 왕의 백성

70이레 다음에 오는 예루살렘 멸망에 관한 다니엘의 묘사는 이렇다.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9:26). 여기 나오는 한 왕의 백성의 정체가 무엇이냐가 주경가들의 쟁점이 되어 왔다. 어떤 역사주의와 미래주의 해석을 하는 사람들은 그 왕의 정체를 AD 70년의 로마로 보고 있다. 과거주의자들은 키루스 (Cyrus), Onias, Antiochus 4세 등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다니엘 9: 2526절에 나오는 세 칭호(메시아, (nagid)는 모두 같은 인격이다. 로마는 다니엘 9:27에 나오는 황폐케 하는 자로 나온다. 이것이 건실한 역사주의 해석의 얼개가 된다.

<바벨론 전기> 자가는 요세푸스의 말을 인용하여 예루살렘의 멸망의 주동세력을 들추어 내고 있다. “반란군은 도시를 파괴했고, 로마군은 반란군을 파괴했다.” (p. 47). 성읍과 성소를 훼파한 세력은 외부의 침략군이 아닌 내부의 유대 파당들이 마지막으로 죽기살기식 상호 유혈투쟁을 하여 국력을 크게 소진시켰고, 백성들이 그들로 인하여 대량 죽었으며, 그들이 성소를 최후의 거점으로 삼아 항전한 결과가 성읍과 성소의 훼파로 이어진 것이다. 저자는 이런 예언적 풀이의 시각을 확인시켜 주는 기여하고 있다. 구나 저자가 AD 70년 직전의 예루살렘 상황을 묘사하는 중 지성소는 매음굴이 되었다”(p. 231)고 하지 않는가?

 

 

Posted by KAHN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