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령(精靈, spirits, anima) 도시를 둘러 보다
정령(精靈, spirits, anima) 도시를 둘러 보다
-교토 紀行-
여행은 즐겁다. 그것은 새로운 풍경을 보러 가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을 얻어오기 위해 떠나는 것이다. 일상을 떠나는 여행은 우리의 귀를 열어주고 , 막힌 가슴을 틔워 준다. 엘렌 화잇이 초등학교도 채 마치지 못하였지만 인생을 달관한 통찰력과 예견력을 지닌 밑바탕에는 끊임없는 배움이 있었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영감을 통한 지혜와 지식 말고도 광범위한 독서, 당대의 지식인 엘리트층과의 교류, 그리고 북미 대륙, 유럽, 호주, 이 세 대륙의 여행을 통한 배움과 성찰이 있었다. 산다는 것 그 자체가 하나의 긴 여정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영원을 사모하면서 유한한 시공간 속에서 순례자로서 만남과 헤어짐을 거듭하다가 본향을 향하여 가는 여정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여행을 하지 않은 사람에게 이 세상은 겨우 한 쪽만 읽는 책과도 같다고 했다. 여행이란 길 위의 학교다.
지난 주 우리 가족 여섯 사람은 인천공항을 통하여 일본을 향하다. 앤드루즈대학교 졸업반이거나 곧 졸업반으로 들어가는 손주들이 짧은 1주일간의 방학을 이용하여 그 부모와 함께 일본 여행길에 나선다고 하여 우리 내외도 거기 끼여 들어간 것이다. 간사이(関西)공항에서 교토행 특급을 타다. 특급이라지만 준급행 정도로 보인다. 오사카를 지나면서 보니 도시 구조가 밀집형으로 비친다. 교토 전경은 古都 냄새가 물씬 풍긴다. 마치야로 불리는 전통적인 건물들이 즐비하다. 교토 시(京都市)는 일본 혼슈 중앙부에 있는 도시이다. 원래의 도시는 중국의 전통적인 풍수에 따라 고대 중국의 수도 장안(현재의 시안 시)을 모델로 해 배치되었다고 전해진다.
인구는 약 150만 명이고 예전에 일본의 수도였다. 현재는 교토 부(京都府) 중앙부에 있는 부청 소재지이고 게이한신 도시권의 일부이다. 교토는 계곡에 위치해 있고 야마시로(또는 교토) 분지의 일부이고 산지의 동부는 단바 고지로 알려져 있다. 야마시로 분지는 동쪽, 서쪽, 북쪽의 삼면이 1000m가 넘는 산들로 둘러싸여있다. 이러한 내륙적 위치 때문에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춥다. 분지에는 남쪽으로의 우지 강, 서쪽으로의 가쓰라가와 강, 동쪽으로의 가모가와 강의 세 개의 강이 흐른다. 교토 시의 면적은 827.9 km²로 교토 부 면적의 1.9%를 차지한다.
794년 간무 천황이 수도를 나라(奈良)에서 이곳 교토로 옮겨 일본의 역사에서 헤이안 시대가 시작된 점에 비추어 헤이안쿄(平安京)로도 알려져 왔다. 1869년 메이지 정부가 도쿄로 천도함에 따라 교토는 1000년 이상 이어오던 수도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문화 도시로 그 성격이 바뀐 것이다. 그러나 새 천황의 정식 즉위식은 계속 교토에서 거행되었다.
교토 도시 규모는 16세기 말에 오사카와 에도에 추월당했다. 1947년에 3위로 복귀하였으나 이후 다시 떨어져 1960년대에 5위로 다시 떨어졌고 1990년대에는 7위까지 떨어졌다. 미국은 2차 대전 말에 원자 폭탄 투하 대상 도시로 일본의 정신적 중심이었던 교토를 고려하였지만, 루즈벨트와 트루먼 정부의 국방 장관 헨리 스팀슨은 유서 깊은 고대 도시를 파괴하는 것에 반대하여 공격 목표를 교토에서 나가사키로 수정하였고 교토는 그 피해를 면하게 되었다고 한다.
일본은 1956년 9월 1일에 교토를 정령도시로 지정하였다. 정령도시로 지정하리만큼 종교도시적 특성을 물씬 풍기는 도시이다. 교토에는 사방에 사찰과 신사가 지천에 퍼져 있다. 2000개가 넘는 절, 신사가 우후죽순처럼 널려 있다. 이 곳 도시의 불교 사찰은 신사 같은 것을 품고 있기도 하여 불교와 신도의 융합 같은 특징을 보여 주고 있다. 인류학자 E.B. Taylor는 애니미즘(정령숭배)을 영적 존재에 대한 신앙이라고 정의를 내렸다. 그는 영혼이나 정령이나 신이나 저 세상(彼岸)에 관한 신앙과 거기에 따르는 의식절차 전부를 모두 포함시켜 애니미즘이라고 설명하였다. 현재는 헤이안 시대의 문화가 남아있는 절, 신사, 역사 유적지와 벚꽃, 단풍의 명소가 많은 관광 도시로서 세계적으로 알려지고 있다. 교토는 옛날 바울이 선교한 아테네 도시에 널려 있는 신들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정령/아니마 숭배 종교 도시라고 볼 수 있다.
교토에는 5~7세기 동안 한반도의 백제, 신라, 고구려에서 도래인들이 정착하였다. 미즈노(1969)와 그 외 여러 학자들에 의하면 일본은 4세기에서 6세기에 이르는 사이의 어느 시기에 국가로서의 형태를 갖춘 것 같은데, 주도 세력은 교토 시 남단에서 나라 현 중심부 오사카 동쪽에 이른 지역에 수많은 거대 분묘들과 그 소장품을 남겨 그것들을 근거로 국가 형태가 형성되지 않았나 하는 추측들을 하고 있다.
홍원탁 교수는 고대 한일관계사에 관한 박사논문 <백제와 大和 일본의 기원-백제와 야마토 일본의 기원>(1994)에 따르면 백제의 왕족은 고구려를 창건한 씨족 후예, 곧 부여 지배 씨족 후손으로 4세기 후반에 일본에 침공해서 야마토 지역을 점령하였다는 논리를 정연하게 전개하고 있다. 즉, 고사기와 일본서기가 말해주는 것은 한반도에서 새롭게 도래한 이들이 토착 원주민들과 원만하게 융합하여 야마토 왜를 창설했다는 것이다. 그는 대륙의 백제와의 특수관계가 없었다면 야마토 왜가 그처럼 발전한다는 것이 불가능했었을 것은 확실하다고 주장한다. 호무다(應神)의 정체는 백제 왕족으로서 건너온 군사적 지도자였으며, 백제 왕족의 조상의 자손들이 오오진(應神)과 5, 6, 7세기 황실 후손들이라는 것이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천주교 사제들과 십자가 깃발을 앞세워 임진왜란을 일으켜 조선국에 막대한 피해를 입힌 일의 본거지가 바로 교토인 것이다. 오늘날까지 일본은 한반도의 영향권 아래에서 문화와 문명이 이루어져 갔다는 사실을 애써 부인하거나 축소시키는, 역사 왜곡을 하고 있다. 이는 마치 자손이 부모의 은덕을 훼절하는 사건과 같다고 평하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다.
교토 박물관 근처 소재 이른바 코무덤(鼻塚)은 그 훼절에 대한 단적인 증거가 된다. 이 코 무덤은 '귀무덤(미미즈카)'으로 잘못 알려져 있었다. 에도시대 초기 유학자 하야시라산(林羅山)이 '코무덤'은 너무 야만스럽다며 '귀무덤'이라고 하자 하여 지금까지 귀무덤(耳塚 미미즈카)으로 바꾸어 칭한다고 한다. 일본 교토 시 히가시야마 구에 있는 무덤으로, 임진왜란의 원흉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받드는 도요쿠니 신사(豊國神社)에서 100여 미터 떨어진 건너편 공원에 방치돼 있다. 일본 사람의 “귀”를 묻은 무덤을 뜻하나, 그곳에 묻힌 것은 대부분 소금에 절여진 사람의 “코”로,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전리품을 확인하기 위해 목 대신 베어갔던 것이다. 코 무덤은 12만 6천명의 무고한 백성들과 장병들의 코가 묻힌 곳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일이 그 숫자를 센 뒤 장수들에게 감사장을 써 보냈다고 한다. 교토가 정령 도시이지만 그 정령에는 악령도 들어 있다.
흔히 일본 정신을 사무라이 정신이라고 한다. 이를 미화시켜 무사도의 아버지는 불교적 명상인 선(禪)이고 어머니는 祖先 숭배사상을 기초로 민족의 보전을 목적으로 하는 도덕적 규범인 유교라고 한다. 인간 투쟁 본능은 보편적인 것이고 또한 자연스러운 것이다. 일본은 이 잔혹한 투쟁 본능에 제동장치를 붙여 통제하려고 하였다. 이를 武士道라고 한다. 봉건제도가 무너져도 그것을 지탱하여 준 무사도는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를 체현하는 이를 사무라이라고 한다. 이런 사무라이 정신이 코무덤으로, 역사왜곡으로 나타났다면 이는 비극적이다. 심지어는 잘못 나가는 지도자에게라도 잘 따르는 일본의 무사들이 玉碎로 나갔지만 원자폭탄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 아닌가.
도착한 날 저녁에 야사카진자(八坂神社)를 찾았다. 기온진자(祇園神社)로도 알려진 야사카진자(八坂神社)는 일본에서 대표적인 하나의 신사로 교토(京都)에서 가장 인기있는 신사 중 하나이다. 신사를 한 번도 못 본 나로서는 이 야사카진자가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었다. 빨간 기둥의 도리이가 상징. 액막이・역병퇴치・사업번창의 효력이 있다고 믿고 차아 온 사람들이 많다. 여기에서 진행되는 가장 큰 축제인 기온 마츠리(祇園祭)로 유명하다. 시죠도오리(四条通)의 동쪽 끝에 위치하고 있으며, 신사의 무대를 장식하고 있는 많은 등들은 주로 교토의 사업가인 스폰서들 이름으로 걸려 있으며, 어두워진 후에 점등된다. 그래서 어둠의 장막이 펼쳐질 때에 아름다운 등불 신사로 변신한다. 그 등불은 기온 거리로 뻗혀 나가 있다. 신사의 경내 바로 옆에 위치한 마루야마(丸山) 공원은 봄에 벚꽃을 즐길 수 있는 장소로 교토에서 가장 인기가 높다.
“사이메이천황(재명왕,백제계여왕, 655~661 재위) 2년(656년)에 고구려로부터 왜나라 왕실에 건너온 사신 이리지는 신라국 우두산에 계신 스사노오미코토신을 야마시로국(교토의 옛이름)의 야사카향으로 모시고 와서 제사 드렸다. 이리지는 왕으로부터 야사카노미야스코라는 성을 받았다. (八坂神社, <由緖略期>). 신라의 우두천왕 곧 스사노미코토는 <일본서기> 신대 14조에 ‘소잔명존(素盞鳴尊)’으로 나온다. 스사노오미코토는 신라와 깊은 관계를 가진 신이다. 우두천왕(스사노오미코토)을 모시는 신사는 전국에 3053사로 이들의 총본사가 교토 히가야마구 기온쵸에 자리 잡은 유서 깊은 야사카진자이다. 그러나 일본은 역사를 왜곡 야사카신사의 제신을 신라의 우두천왕으로 보는 것을 배격하고 있다.
사랑을 간절하게 구하는 기원을 담은 쪽지에 나온 점괘 하나를 열어보았다. “상대에 마음이 있어도 아직 멀기만 합니다. 신에게 기도하십시오. 어떤 일도 마음을 쏟아 서로가 만든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시오. 행운의 열쇠는 독서에 있습니다.”
기온(祇園) 거리가 바로 인접하여 있어서 야사카진자를 기온진자라고도 한다. 기온 거리는 교토에서 가장 유명한 게이샤 지역으로, 시의 중심인 시조 에비뉴와 야사카 신사 사이에 있다. 특히 가모가와(강의 이름) 주변에는 오차야(게이샤가 손님을 접대하는 찻집), 극장, 식당과 가게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몇 골목을 둘러보면서 그 유명한 야사카진자 옆에 게이샤 지역이 번창하였다는 것은 무슨 뜻인지 헷갈린다. 예능에 능한 기생들이 상대방의 비밀을 철저하게 지켰다는 전설이 내려 온 만큼 그 내막을 다 알 수는 없지만 한 미국인이 게이샤에 관한 책에 비추어 보면 이른바 정령도시의 타락이라는 그늘 같은 것을 짐작케 한다. 일본의 엘리트층의 전유물 게이샤들이 아니었던가. 고대 바알 종교의 변신 같은 이교 종교의 어둠이 등불들로 밝히고 있다고 다 밝아질 수 있을까?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절 중 하나인 기요미즈데라 (清水寺)는 멀리 교토 시가 내려다보이는 그 경관이 환상적인 사찰이다. 산의 경사에 기둥을 세워 지지한 웅장한 목조 사찰이다. 기요미즈데라는 헤이안 시대 초기에 설립되었다. 절의 역사는 798년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현재의 건물은 1633년에 도쿠가와 이에에스의 명령으로 재건된 것이다. 절 전체에 걸쳐서 못이 하나도 쓰이지 않았다. 절의 이름은 주변의 언덕에서 단지 내로 흐르는 폭포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산책 코스로 일품이다. 사찰 건물들만 덩그렁 하게 세워진 곳에서 아무리 주문을 외어도 영감이 떠오를 수 있을까? 상당한 넒은 면적에 禪을 지향케 하고 신비감이 감도는 환경 조성이 필요하다. 심산유곡으로 들어가 있는 조선의 불교와는 차이가 있다.
긴카쿠지(銀閣寺)-긴카쿠지(ぎんかくじ)는 "지소지"(慈照寺, じしょうじ)의 별칭이다. 입구에는 철학자 니시다 기타로의 이름을 딴 철학자의 길 산책로가 수로를 따라 구마노냐쿠오진자까지 이어지는 2km 구간 이어진다. 양 옆에 벛꼿 나무들이 즐비하게 있어 곧 오는 4월 벚꽃 철에는 사람들이 운집할 것이다. 사원의 모래 정원과 후지산 모형의 모래산은 인상적이다. 이 모래 정원을 긴샤단[銀沙灘, 은사탄]이라 하며 정원 한쪽에 정성스럽게 쌓아올린 모래더미는 달빛이 반사되도록 만든 구조물이라 하여 고게츠다이[向月台, 향월대]라 한다. 마치 딴 세상에 온 듯한 신비로움을 느끼게 하는 참선의 길 양 옆을 가득 메우고 있는 푸른 잎들, 산뜻하고 화사한 기운을 돋구어 힘을 솟아오르게 한다. 교토 여행에서 아름다운 산비탈의 은각사 정원과 숲속을 걸을 수 있었다는 것은 행복 그 자체였다.
킨카쿠지(金閣寺, きんかくじ)는 "로쿠온지"(鹿苑寺, ろくおんじ)의 별칭이다. 명칭 그대로 황금 누각의 절이다. 이 금각의 누각은 원래 1397년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은퇴 후 별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그의 아들은 이 건물을 린자이 학파의 선불교 사원으로 변경시켰다. 이 사원은 오닌 전쟁 동안 여러 번 연소되었다. 요시미쓰의 손자는 이 로쿠온지를 그가 은박을 입히려고 하였던 불교 사원, 지쇼지를 위한 영감으로 사용하였다. 바닥을 제외하고 전체 정자는 순수한 금박으로 덮여 있다. 이 정자의 지붕은 금색의 봉황이 붙어 있다.
가쓰라가와 강의 도게쓰쿄 다리(渡越橋)를 건너다. 「달이 다리를 건너는 듯이 보였다」고 해서 지은 다리 이름이다. 다리 건너 法輪寺(호린지)를 잠간 들리다. 쇼토쿠 태자의 아들 야마시로노오에노(山背大兄王)가 부친의 병이 낫기를 기원하면서 622년에 세운 절이다.
가야계 신라에서 온 진씨(秦氏)(일본식 표기-하타씨) 일족들은 아라시야마(嵐山)일대의 가쓰라가와(桂川)에 제방을 쌓아서 물을 끌어들여 하타씨의 대종가의 본거지인 우즈마사(太秦) 일대의 수전을 개발하였다. 이들에게는 댐을 만드는 기술이라는 것은 고국에서 익히 해보았던 토목공사에 지나지 않았겠지만, 고대 교토에 살았던 일본들에게 있어서는 한 번도 경험하거나 본적도 없었던 경이적인 기술이었으리라. 하타씨는 이처럼 대규모 개간사업을 통하여 습지를 옥토로 만들었고 왕가의 신임을 받아 오다가 우즈마사에 정착해서 위에서 소개한 농업수리시설을 비롯하여 양잠, 직물, 양조 등 산업을 일구기 시작한 가문으로 일본에서 제일가는 부를 이룩하였다. 8세기 때 간무천황이 나가오카에서 교토로 천도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타가문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하타씨의 조상이 중국 시황제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교류지(廣隆寺) 거대한 사찰을 건립하였다. 창건 당시에는 상당히 큰 규모였지만, 화재와 태풍 등으로 소실되었고, 3층탑(산쥬노토)도 1944년 번개를 맞아 불타 없어져, 1975년 전통 공법을 이용해 아스카 시대의 양식으로 재건되었다. 강당에는 약사여래좌상, 고쿠조보살, 십일면관음상 등 중요 문화재가 있다.
신라진평왕이 스이코왕에게 보내준 불상 廣隆寺(코류지) 미륵보살반가사유상
일본이 세계에 자랑하는 아스카 시대의 불상이 3개가 있다. 그 중 하나가 일본 국보 1호인 교토 광륭사의 목조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다. 반가라는 말은 반가부좌라는 자세의 준말로 왼쪽다리를 내리고 바른쪽 발을 왼쪽 넓적다리에 올려놓은 자세를 말한다. 사유상은 생각하고 고뇌하는 불상이라는 뜻일 것이다. 이 불상의 유래가 스이코 천황 11년 11월의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불상을 접하는 순간에는 몰아의 경지에 이르는 부처의 세계를 느낀다고 한다.
백제의 아좌태자를 스승으로 받아들이고 많은 것을 배운 고대 일본의 정치체제를 확립자 쇼토쿠(성덕)태자(574~622)는 스이코 천황(推古天皇) 치세 시대 섭정을 맡았다. 그가 여러 대부에게 “나는 존귀한 불상을 가졌다. 누가 이 불상을 모시고 공경할 것인가?”라고 물었다. 그때, 재무장관격인 진하승(秦河勝 )이 나아가“ 신이 경배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 불상은 신라진평왕이 스이코왕에게 보내준 불상이었다. 진하승은 불상을 받아 지금의 교토 우즈마사(太秦) 땅에 봉강사(蜂岡寺 )를 지어 불상을 안치하였으나 화재로 이 불상을 현재 광륭사 영보전에 안치하여 둔 미륵 보살반가사유상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미술을 알든, 모르든간에 이 불상을 접하는 순간에는 몰아의 경지에 이르는 부처의 세계를 느낀다고 한다.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가 이 불상에 대해 남긴 글이 있다.
“나는 지금까지 수많은 신상들을 보아 왔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신상, 로마시대의 뛰어난 조각상과 기독교적 사랑을 표현한 조각상들을 보아 왔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감정과 인간의 자취가 남아있고 진실로 인간 실존의 깊은 곳까지 도달하는 절대자의 모습을 표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 미륵상에는 인간실존의 깊은 이념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인간 존재의 가장 정화되고 원만하며 가장 영원한 모습을 보여 준다고 생각합니다.”
1949년에 담징이 그린 법륭사 금당벽화가 화재로 소실되었고, 1950년에는 교토의 금각사도 불에 타자, 당황한 일본 문화재 위원회는 서둘러서 광륭사의 반가사유상을 국보 1호로 선정하고 보호하게 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초에 반가상에 매혹된 한 대학생이 불상에 너무 가까이 접근했다가 불상의 오른쪽 새끼손가락을 부러뜨리는 불상사가 발생하였다. 불상의 손가락이 부러진 것은 잘못 되었지만 덕분에 정밀검사가 이루어진 끝에 불상을 만든 재료가 한국 경상도 봉화지역에서만 자라는 적송(赤松)으로 밝혀지게 되었다. 일본의 목재불상은 거의 소나무가 아니고, 히노끼나무로 만들어졌다. 반가사유상의 실체는 석가모니가 성도( 成道)하기 전 태자시절에 인생의 무상을 느끼면서 중생구제라는 과업을 두고 고뇌했던 모습에서 유래한 것이다.
1949년에 담징이 그린 법륭사 금당벽화가 화재로 소실되었고, 1950년에는 교토의 킨카쿠지(金閣寺)도 불에 타자, 당황한 일본 문화재 위원회는 서둘러서 광륭사의 반가사유상을 국보 1호로 선정하고 보호하게 되었다.
텐류지(天龍寺) -덴류지는 교토 서부에있는 아라시야마에 있다. 남쪽에는 호즈가와 강에서 이어지는 가츠라가와 강이 있고, 아름다운 도게쓰쿄 다리가 걸려 있다. 덴류지는 일본 최초의 선종교의 대본산이며 세계 문화 유산에 등재된 절이다. 절 건물 자체의 화려함은 없지만, 봄에는 벚꽃, 가을엔 단풍이 아름다운 정원으로 유명하다. 원래는 꽤 넓은 부지의 절이였지만, 반복된 화재로 인해 지금 건물이 서 있는 것은 소량이 복구된 것이다.
아라시야마의 대나무 숲 지쿠린(竹林 ,치쿠린)은 교토의 관광명소 중 한 곳으로 세계 유산인 텐류지(天竜寺)에서, 노노미야(野宮)신사를 지나 토롯코 열차 역까지 약 600m의 대나무 숲이다. 나는 수천그루의 아름다운 대나무가 만들어내는 시원한 그늘과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영화 속의 한 장면 속을 걷는 느낌이 들었다.
저우언라이는 1917년 중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1919년 귀국했으며 귀국 직전 교토 교외에 위치한 아리사야마(嵐山)를 방문, 아직 어린 나이에 '빗속의 아라시야마(雨中嵐山)'라는 시를 지었다. 이 시비는 1970년대 말 중일 간 우호 친선을 기원하는 일본의 지식인들과 단체가 저우언라이를 추모하며 아라시야마의 공원 내에 건립한 것으로, 다듬지 않은 바위에 저우언라이의 시구를 새겨 넣고 하단에 별도의 받침대를 설치, 그의 시를 일본어로 번역해 놓았다.
교토라는 정령도시를 다녀왔지만 꼭 악한 영만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선하고 고상한 정신을 일깨우는 영이 지배하고 있기도 하다. 선불교의 신비감이 감도는 정원 조성, 교토 시가지에서 신호등을 기다리는 오토바이들, 질서 있게 줄을 서는 시민들, 휴지를 찾아 볼 수 없는 거리들, 불법주정차가 보이지 않는 차량들,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태도들은 확실히 일류 시민들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외모는 우리와 별 차이가 없는데 그들의 정신문화에는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것들이 많다. 일본 저널리스트 사쿠라이 요시코 씨는 <세상은 의외로 과학적이다>에서 말하고 있다. “혈연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가까운 민족은 한국인, 일본인, 몽골인이다. 한국인과 몽골인은 本家이고 일본인은 分家인 셈이다. 일본인은 본가에 감사해야 한다. 동시에 일본인은 한반도를 거쳐 일본 땅에까지 와서 좋은 나라를 만든 조상들의 진취성에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 본가인 한국인들도 분가의 이런 업적을 평가해 주었으면 한다.”
이런 점에서 여행은 떠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진정한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여행은 서서하는 독서이고, 독서는 않아서 하는 여행이다. 여행의 양이 곧 인생의 양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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