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왕국론의 허와 실

역사 : 2018. 2. 8. 16:57

두 왕국론의 허와 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 나라에도 속하고 동시에 하나님 나라에도 속하는 두 개의 나라의 시민이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두 개의 주권 아래에 있는 존재들이라는 뜻도 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주권과 세상 국가의 주권(통치권) 사이에 끼어 있다. 이 두 개의 주권이 조화되어 나간다면 더 할 수 없는 이상적인 두 왕국의 시민이 될 것이다. 카이로스적 두 왕국의 시민인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동시에 국가로부터 신체, 가정, 재산, 평화적 안전한 삶을 보호를 받는 것을 기대한다. 국가, 즉 정부와 통치자의 보호라는 날개 아래에서 루터의 종교개혁도 가능했다.

 

그러나 세상 나라 통치권은 자주 하나님 나라 주권을 일탈하거나 거역하며 통치권을 행사해 왔다는 것이 지나간 역사의 발자국들에 역연하게 나타나 있다. 루터의 두 왕국론이란 그리스도교국가라는 큰 우산아래에서 가능한 두 나라 사이의 관계의 얼개이어서 비 그리스도국가이거나 무신론 국가 체제 아래에서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세상 나라가 그리스도인들을 얼마나 많이 박해하여 왔던가. 따라서 세속의 권력을 항상 훌륭하고 유용한 것으로 보면서 두 왕국론을 옹호하는 것은 성경을 잘 못 풀거나 왜곡시킨 것에 불과하다. 오늘날 중국이 교회를 국가가 관장하는 하나의 통치기구에 불과한 것으로 관장하려고 하는 정책을 펼쳐 나가고 있는 체제 아래에서는 두 왕국론이란 허구의 그림에 불과하다.

 

루터는 하나님께서 세속적 통치자들에게 권력을 부여하셨다는 성경의 본문(13)을 근거로 해서 두 왕국론의 기치를 올렸다. 그러나 독재자들이 군림하는 국가에서 조차 이 논리를 적용하는 것은 독재자 정권에 아부하거나 미화시키는 일에 불과하다.

 

그리스도인은 영적 나라를 믿음과 하나님 말씀으로 마음에 체험하면서 살아간다. 그 목표는 궁극적 실체가 되는 영원한 왕국이 말세에 그리스도의 파루시아를 통하여 구현되는데 있다. 그리스도인은 이미아직도 아니라는 사이에서 은혜의 나라 시민으로 살고 있다.

 

세속 국가는 한계성을 지녔다. 루터가 말한 대로 세속 나라는 은폐된 하나님의 나라이다(Deus absconditus).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 세상 나라에 거의 겉으로 드러내시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를 혼돈으로부터 질서를 확립하여 지키면서 외적으로부터 국가와 국민을 보호하며 악을 저지하고 범죄자를 응보하는 요새(要塞)와 같은 나라가 소망스럽다. 그러나 이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세속 나라에 계시하지 않는다. 느부갓네살 왕이나 바로왕은 꿈에 본 것이 있지만, 그들은 그 것들을 풀 수도 없었다. 세속 학자들도 마찬가지로 못 풀었다. 세속 나라 통치자는 모든 것의 여 황제라는 이성과 법, 관행, 여론 등 일반 계시의 범주에 내에서 하나님의 주권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도록 정의와 질서의 규범들을 주셨지만, 모든 통치권자들이 이성의 빛으로 밝혀낸 자연법의 원리를 따르는 것이 아니다. 선한 왕이 선정을 베풀었다 하더라도 므낫새나 또 다른 왕들처럼 그 선정을 이어가지 못하고 나라를 위기에 빠뜨린다. 그래서 디트리히 본회퍼가 말한 것처럼 신의 부재, 저항과 복종 Widerstand und Ergebung (1985, 178)에서 말했듯이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통치하거나 행동한다. 더구나 세속나라 통치자가 히틀러처럼 무질서와 혼돈을 야기시킬 수도 있다.

 

심지어는 아돌프 히틀러의 길을 예비한 사람이 마르틴 루터라는 시각도 있다. 독일과 유럽을 민족 사회주의 아래에서 이루어진 재앙의 책임이 있다고 비난을 하는 사람이 있다. 이 비난을 극복하기 위하여 루터 옹호론자들은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그리스도 사상을 두 왕국론의 기본 바침대로 삼아야 한다고 하고 있다.

 

두 왕국론 신봉자들은 두 나라가 분리되어 있지만 서로 상호 보완하며 존재한다는 기본 신념에 서 있다. 이 분리의 원칙을 어기고 독일 그리스도인들이 민족사회주의 이념의 종이 되어 통치자를 옹호하며 신학적 잔꾀를 부리는 일들을 하여 칼 바르트 같은 신학자는 단호히 아니다고 한 것이다. 독일에서 제3제국이 망한 후 교회에서 문화인류학 사상, 즉 페미니즘, 동성연애의 미화, 마르크스주의적 특성을 지닌 해방신학, 오도된 평화주의를 내걸었다. 이는 히틀러 같은 독재자들에게 융단을 깔아주는 일이 된다.

 

루터가 말한 것처럼 영적 통치와 세속적 통치는 멀수록 좋다. 사탄은 늘 이 두 나라를 융합, 내지 혼합시킨 섞어찌개를 만들도록 획책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권력에 기웃거리는 프로테스탄트 지도자들이나 정의구현사제단, 그리고 방북하기를 밥 먹듯이 하며 탄핵을 쏘삭거린 사제들이 판치는 나라에서는 아예 이런 두 나라 경계선을 지워 버리거나 유린하고 있는 것이다. 영이 권력을 지배하거나 권력이 영을 지배하는 일은 하나님의 영역을 침해하는 것이 된다. 정치적인 행위로 종교적인 합법을 재건코자 한 토마스 뮌쳐는 이 경계선을 허물었다. 루터는 복음을 검으로 확장시키려 하는 것을 중세시대로의 회귀로 보았다. 바벨론의 특징은 권력과 복음의 야합을 추구라고 하는 점에 있다. 탈 바벨론 - 이것이야 말로 두 왕국의 분리를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다. 루터의 두 왕국론에 따라서 후기 파시즘이나 공산주의 기류가 치고 들어 올 때 그것은 절대 아니다로 답하는 것이 루터의 시각이라고 강하게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리스도인은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는 의무를 지녔기 때문이다(WA 19, p. 659, 25-32; 우베 시몬-네토, 루터와 정치, 126).

 

루터는 선동과 봉기를 죽음의 형벌로 다스려야 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선동과 봉기를 살인보다 더 심각한 범죄로 보았다. “선동자는 검으로 검을 휘둘러 권력을 잡고자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무정부상태를 극복해야 한다는 시각에서 농민 봉기를 진압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래서 루터는 제후들에게 이성의 법에 따라 농군들을 찌르고, 때리고, 교살하라고 했다. 또 그는 용감하게 죄를 지으라. 그러나 더 용감하게 믿어라고도 했다. 루터는 농군들이 권력을 나누어 갖기를 원하여 피의 학살에 굶주린 격분하고 제멋대로며 허탄한 독재들이 창조의 질서를 무너뜨리며 마침내 수도원장 자리까지 꿰찰 것이라고 비평하였다. 이런 사상적 조류가 본회퍼의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의 열매를 낳은 것이다. 오늘날 루터가 한국의 민노총의 봉기를 보았다면 어떻게 말했을까?

 

이런 점에서 루터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항하여 검을 겨눈 자들에게 벙어리 같이 굴욕적이며 무조건적인 순종을 주장하지 않았다. 무모하다 할 정도의 붋법을 저지르는 모든 권력의 반대편을 고수했다. 불의를 보고도 침묵하는 자는 공범이다. 제후들과 영주들의 악덕을 눈감고 있는 설교자는 무익한 설교자에 불과하다. 본회퍼는 진실과 신념을 위하여 용감하게 행동할 것을 요구한다. 이로 인하여 죄인이 되더라도 용서와 위로를 약속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한다(Widerstand und Ergebung, 12). 두 왕국론의 사상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대항하는 자 (Protestant)가 되게 한다.

 

재림신도들은 국가, 정부, 정치에 관한 사상은 이른바 종교개혁의 제3세력인 애너뱁티스트(Anabaptists)들로부터 받았다. 16세기의 애너뱁티스트들은 국가는 물론이이며 가톨릭교도들과 프로테스탄트들로부터 공격받았고 박해를 받았다. 이 역사적 유산 때문에 루터의 두 왕국론이라는 도식에 희망적 기대를 걸 수도 없다. 더 나아가서 권력과 교권의 야합에 의하여 야수처럼 남은 백성을 희생양으로 삼고자 한다는 묵시문학적, 종말론적 구도는 그 고귀한 평화교회 이상이란 꿈도 활짝 펼칠 수 있는 여지도 없게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루터가 그토록 싫어한 靜寂교회의 모습이 된다. 그러나 루터도 폭군들 치하에서는 나라의 합법적 저항을 허용하는 범주 안에서 통치자들이나 관리들에게 저항할 것이지만, 그렇지 못한 상황에서는 시민들이 원하는 변화를 위하여 기도를 하는 것에 매달려야 한다(Luther‘s Works, 46:168). 또한 그리고 하나님 말씀을 전파하는 것을 제1의 사명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재림신도 역시 영원한 복음을 전하는 일을 첫 번째 관심사로 여겨야 한다. 한국에서는 카이로스적인 루터의 두 왕국론이 거의 설자리가 없다. 세속 정부나 정치를 하는 자들의 비열한 술수와 거짓 정보의 프로파간다를 통한 여론의 호도, 그리고 그들의 하수인이 되어가고 있는 언론 매체들에 대하여 회의적 시선을 보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마침내 무신론 권력자들이 마르크스적 사회를 지향, 구축해 나갈 때 다가오는 지난 겨울보다 더 추운 혹한기를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Posted by KAHN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