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해가 저물어 갑니다.
제야의 종소리를 기다리며 2012년호 막차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364번째 전역을 출발한 막차는 마지막 역을 향하여 이제 곧 도착할 것입니다.
추운 날씨에 막차는 쉽게 오지 않았지만 곧 오게 마련입니다.
통과해 온 364개역을 되돌아 보면서 아쉬움과 회한 속에서
‘이것이 진정 내가 원하는 삶이었을까?’
마지막 역에서 서성이며 자문하고 있습니다.
저만큼에서 들려오는 기적소리가
남아 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일깨우는 호각소리처럼 들립니다..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에서'가 내 마음을 두둘깁니다.
사평역(沙平驛)에서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히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 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 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사평역에서, 문학과지성사, 1983>
급행열차가 서지 않는 옛 간이역인 변방의 남평역 눈 내리는 겨울밤 풍경이 이 시의 배경이라고 합니다. 나는 대학 다닐 때 이 간이역을 몇 번 이용하였던 일이 있습니다.
시의 주인공은 어두운 세상에서 외로히 여행을 하고 있는 사람으로 비쳐집니다. 등장인물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세상을 읽습니다. 간이역사(簡易驛舍)의 바깥에 푹푹 내려 쌓여만 가는 눈. 막차를 기다리는 삶에 지쳐 부려둔 보따리나 꾸러미에 기대 그믐처럼 졸고 있는 자들, 연기를 자욱하게 피우는 자들, 웅크린 채 쿨럭이는 병을 안고 사는 이들 – 이렇게 시대적 아픔을 서정적으로 그린 시는 우리가 사는 세상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과 오버랩 되어 다가오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대합실에서 오지 않는 막차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은 메시야의 더디오심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비쳐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 한 젊은 이가 깨어 있습니다. 그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줍니다. 그리하여 불꽃이 그 열정을 이어가도록 합니다. 그만큼 시대를 꿰뚫어 보는 눈과 역사를 이끄는 손을 지녔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는 안에서 붉게 타오르는 불씨를 역사의 핵심적 동력으로 보고 그 위에 톱밥을 던져 그 불꽃이 이어지게 하고 있습니다. 그는 훈훈하게 하는 불꽃으로 연소하는 톱밥을 시간 위에 꽃 피는 삶의 의미있는 순간들로 그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추운 날씨 속에서 구차하거나 삶에 지친 얼굴들에 배인 절망스런 현실과 역사 밖의 눈 송이들과 난로 안의 불꽃 배인 희망이 교차되어 다가오기도 합니다.
여기 간이역사에서 막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말이 없습니다. `산다는 것은 때론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는 구절이 이 침묵을 풍기고 있습니다. 조용한 침묵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삶의 진정한 실체를 느끼게 되지요. 눈 내리는 조용한 역사를 감싸고 있는 침묵은 쓸쓸한 기다림 속에서 자기를 되살펴보게 하는 거울이 되기도 합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으스러져 가는 삶은 쓸쓸합니다. 그러나 삶에는 홈커밍의 기다림이 있습니다. 막차가 곧 도착하면 희망의 2013년 호를 타고 순례의 여행을 떠날 것입니다.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 차거운 날씨 속에 살고 있지만, 톱밥난로에서 나오는 작은 불빛이 있습니다. 그리고 톱밥을 넣어 금새 따뜻해지게 하는 꿈을 지닌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는 간이역 같은 곳에서 세상살이를 하지만 막차를 기다리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재림교회라는 간판 자체가 하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백성들이라는 뜻을 품고 있습니다. Advent라는 단어는 라틴어 adventus(헬라어 parousia 의 번역어)에서 온 말로 그 뜻은 "coming" of God입니다. 이 단어는 초림도 재림도 다 포괄하는 용어입니다. 애드벤트 신앙의 핵심은 하나님의 오심에 있습니다. 재림 백성들은 이 하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백성들입니다. 하나님도 기다리고 사람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타이밍을 기다리는 백성들입니다.
“잠시 잠깐(mikron<little> hoson<a very> hoson)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 10:37-39).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의재(四宜齋)와 여유당(與猶堂) (0) | 2016.05.16 |
---|---|
지나간 50년을 돌아보면서 (0) | 2013.03.07 |
아픔을 지닌채 세모를 맞는 000에게 (0) | 2012.12.30 |
육체적인 힘과 아름다움에서 영적인 힘과 아름다움으로! (0) | 2012.07.23 |
세계를 축소시켜 볼 때 (0) | 2012.07.03 |